포도주 틀에서 시작된 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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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사사기 6:11-24
제목: 포도주 틀에서 시작된 소명
[서론]
제가 대학교에 다니던 시절,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제 인생에는 별다른 질문이 없었습니다.
그냥 남들이 살아가는대로 살아가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업을 얻고,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며 사는 게 인생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게 되니 이전에는 없었던 질문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왜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일까?”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삶은 무엇일까?”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들은 쉽게 답을 찾을수 없었습니다.
그 답을 얻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이런 질문들이 있었기에 저는 제 길을 찾아갈수 있었습니다.
그럼 우리는 우리의 삶에 대해 어떤 질문들을 던지며 살아가나요?
우리는 매일 많은 일을 하며 살아갑니다.
맡겨진 일을 하고, 하루의 일정을 부지런히 해냅니다.
그러나 마냥 바쁘게 살아가는 것과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방향을 묻지 않으면 열심히 달리고도 엉뚱한 곳에 도착할수 있습니다.
산에 열심히 올랐더니 “이 산이 아닌가벼”하며 후회할수 있습니다.
신앙에도 삶에도 질문이 필요합니다.
질문하지 않으면 세상이 정해놓은 길을 별다른 생각없이 따라가게 됩니다.
남들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을 붙들게 됩니다.
남들이 원하는 인생 길이 옳은 길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기도온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부르신 그 타이밍입니다.
기드온이 인생에서 가장 잘났을때 그를 부르신게 아닙니다.
오히려 두려워 숨어있던 가장 찌질할때 그를 찾아와 부르십니다.
오늘 기드온의 부르심을 통해 우리의 삶도 생각해보길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왜 부르셨으며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할까요?
[본론1]
오늘 말씀은 사사인 기드온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미디안의 압제 하에 있었습니다.
6장 4절을 보면 그 당시 얼마나 이스라엘이 핍박받았는지 알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추수만 했다하면 미디안이 다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심지어 양, 소, 나귀까지 모두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그러니 먹을 것이 남아있지 않을 지경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미디안을 피해 산으로 도망쳐 숨어 살아야 했습니다.
물론 이런 미디안의 압제를 받게 된 것은 이스라엘이 자초한 일입니다.
우상숭배에 빠져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징계가 바로 미디안의 압제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한 긍휼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 속에 부르짖자 그 부르심에 응답하십니다.
기드온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하십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이 기드온을 처음으로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11절입니다.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몰래 포도주 틀에서 밀타작을 하고 있습니다.
원래 밀을 타작하려면 넓고 바람이 잘 부는 곳에서 해야 합니다.
그래야 쭉정이와 겨를 잘 날려 보낼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아주 비좁은 곳에서 몰래 밀타작을 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주눅들어 있고 무기력한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드온 역시 두려움 속에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기드온 앞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납니다.
12절입니다.
주님의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서 “힘센 장사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하고 말하였다.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다짜고짜 기드온을 힘센 장사라고 부릅니다.
겁쟁이 기드온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호칭입니다.
왜 이렇게 불렀을까요?
기드온이 진짜 힘센 장사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지금 기드온의 모습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앞으로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물으시는게 아닙니다.
“네가 얼마나 용기가 있고, 강하냐?”
“네가 얼마나 준비되어 있느냐?”
지금 기드온이 무엇을 할수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누가 그와 함께 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부르심의 출발점은 내가 어떤 스펙을 가졌느냐가 아닙니다.
부르심의 출발점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느냐 입니다.
우리는 흔히 부르심이라고 하면 목사나 선교사처럼 특별한 직분을 가진 이들의 전유물로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직업은 다를수 있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 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와 어둠 가운데서 불러내어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소명은 반드시 목사나 선교사처럼 특정 직업을 가져야 하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부르심, 소명의 출발점입니다.
[본론2]
그럼 이런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기드온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놀랍게도 그는 먼저 불평, 불만을 털어놓습니다.
13절입니다.
"감히 여쭙습니다만,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어째서 우리가 이 모든 어려움을 겪습니까? 우리 조상이 우리에게, 주님께서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시어 우리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셨다고 말하였는데, 그 모든 기적들이 다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지금은 주님께서 우리를 버리시기까지 하셔서, 우리가 미디안 사람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주님이 함께하시는데 우리가 이런 꼴로 지낼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조상들에게 놀라운 기적을 베푸시던 하나님이 지금은 뭐하시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미디안에게 고통당하는데 왜 돕지 않으시고 자신들을 버리셨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말 이스라엘을 버리셨다면 그를 찾아오실 이유도 없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압제를 당한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죄는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 탓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얼마나 많이 이런 원망을 합니까?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서 어떻게 내게 이런 일이 생깁니까?”
“주님이 함께하시는데 왜 내 형편은 맨날 이렇습니까?”라고 따집니다.
물론 주님께 이렇게 따질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넘어진 곳은 어디인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은 무엇인지 물어봐야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런 잘못된 원망을 하는 기드온을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그에게 놀라운 사명을 주십니다.
14절입니다.
"너에게 있는 그 힘을 가지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하여라. 내가 친히 너를 보낸다."
하나님은 기드온을 통해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드온의 부르심, 소명의 내용입니다.
기드온에게 특별한 힘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게 그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 모두가 기드온처럼 민족을 구하는 특별한 사명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가정과 학교, 일터, 그리고 이웃 가운데 보내십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럼 이런 소명앞에 기드온의 반응은 어떨까요?
15절입니다.
그는 자신의 가문이 가장 약하고, 자신은 집안에서 가장 어리다고 말합니다.
기드온은 철저히 세상 잣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계산하고 있습니다.
가문, 배경, 서열, 실력이 부족하니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모세도 예레미야도 부르심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핑계 삼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같은 말씀을 반복하십니다.
16절입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네가 할수 있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너와 반드시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차이가 중요합니다.
소명이란 내가 위대한 사람이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약한 나를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나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나를 비워드리는 것입니다.
그 놀라운 지도자 모세도 주님의 부르심 앞에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했습니다.
위대한 예언자 예레미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원래 자질이 뛰어나고 능력이 출중해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게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 “저는 뛰어난 능력이 없습니다.”
“저는 원래 성격이 안 좋습니다.”
“저보다 잘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핑계를 대며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대답도 같습니다.
“내가 너와 반드시 함께 하겠다.”
내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심이 많은 기드온은 말씀하시는 분이 정말 하나님인지 증거를 요구합니다.
그는 주님께 드릴 예물을 준비합니다.
그러자 주님의 천사가 지팡이로 고기와 빵을 불태워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의 부르심을 확증해주신 것입니다.
그제야 기드온은 자신이 하나님의 천사, 즉 하나님과 대면했음을 알고 두려워합니다.
원래 하나님을 보면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죽지 않을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하십니다.
이런 특별한 경험을 한 기드온은 제단을 쌓고 그 제단을 ‘여호와 샬롬’이라고 부릅니다.
기드온은 미디안과 싸우기 전에 먼저 주님의 평화를 경험한 것입니다.
포도주 틀에서 바들바들 떨던 두려움의 자리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예배의 자리로 바뀐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 문제만 해결되면 평안해질텐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환경이 완벽해져야 생기는 평안이 아닙니다.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어도 주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때문에 누리는 평안입니다.
그러한 평안, 평화를 누리는 사람만이 세상 속에서 제대로 싸울수 있습니다.
부르심을 감당할 힘은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소명, 부르심은 무엇입니까?
내 삶과 신앙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계십니까?
사람들은 소명이라고 말하면 직업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래서 직업을 찾는데 모든 에너지를 소진합니다.
그러나 소명은 직업보다 훨씬 더 큰 개념입니다.
목사일지라도 소명의식이 없을수 있습니다.
정말 평범한 직장인일지라도 소명의식을 가지고 살아갈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은 직업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속한 사람인가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부르심의 출발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 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하셔서 이제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십니다.
주님은 이미 우리를 주님의 백성을 부르셨습니다.
우리의 부르심은 예수님을 믿은 순간 시작된 것입니다.
또한 기드온처럼 우리에게는 엄청난 증거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그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믿는 우리가 누리는 게 바로 샬롬, 평안입니다.
포도주 틀에 숨어있던 기드온을 찾아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도 포도주 틀같은 현실 속에 두려워하는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깨어진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우리 안에 ‘여호와 샬롬’이 임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숨어있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미디안의 군대가 두려워 웅크리고 있던 그 비좁은 포도주 틀에 있지는 않습니까?
풀리지 않는 삶의 문제와 초라한 내 모습에 갇혀 무기력하게 숨어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바로 그 자리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나의 연약함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우리를 이렇게 부르십니다.
“힘센 용사여,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겠다.”
우리를 짓누르는 환경보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임재가 훨씬 더 큽니다.
나의 부족함을 핑계로 숨어 있지 맙시다.
내 힘을 의지하지 말고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주님을 바라봅시다.
그 주님이 주시는 “여호와 샬롬”의 평안을 마음에 품어야 합니다.
그 힘으로 우리에게 맡겨진 가정과 일터, 학교와 이웃을 향해 담대히 걸어가야 합니다.
이 부르심에 합당하게 응답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