욘4:1-11

요나서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3 views

하나님께서는 내가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까지도 돌이켜 살기를 원하십니다.

Notes
Transcript
제목: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본문: 요나서 4장 1~11절 핵심 말씀: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하지 아니하냐” 핵심 메시지: 하나님께서는 내가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까지도 돌이켜 살기를 원하십니다.

서론 – 모든 사람이 회개했는데 화가 난 설교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가지 장면을 상상해 보겠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큰 도시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했습니다. 시장 상인도 회개하고, 군인도 회개하고, 공무원도 회개했습니다. 마침내 그 도시의 왕까지 높은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아마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설교자는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하나님, 부족한 사람을 사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감사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달랐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심판을 거두시자 기뻐하기는커녕 크게 화를 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 자기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말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회개했는데 설교자가 화를 냅니다. 도시가 멸망하지 않고 살아났는데 선지자가 죽고 싶다고 말합니다.
왜 요나는 이렇게 화를 냈을까요?
오늘 요나서 4장을 잘 이해하려면 세 가지 흐름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첫째는 앞뒤 말씀의 흐름인 ‘문맥’입니다. 둘째는 당시 역사와 사건의 배경인 ‘사맥’입니다. 셋째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뜻인 ‘영맥’입니다.
쉽게 말하면 앞뒤 이야기를 살펴보고, 요나가 살았던 시대의 상황을 이해한 다음,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첫 번째 장면 – 은혜받은 요나가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께 화를 냅니다

먼저 요나서 전체의 문맥을 살펴보겠습니다.
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니느웨와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도망쳤습니다.
바다에 큰 폭풍이 일어났고 요나는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큰 물고기를 보내 요나를 삼키게 하셨습니다.
2장에서 요나는 물고기 배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요나를 살려주셨습니다.
3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셨습니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라.”
이번에는 요나가 니느웨로 갔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놀랍게도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백성들은 금식하고 굵은 베옷을 입었습니다. 왕도 보좌에서 내려와 왕복을 벗고 재 위에 앉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힘써 부르짖으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이킨 것을 보시고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거두셨습니다.
여기에서 이야기가 끝났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결말이었겠습니까?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니느웨 사람들은 회개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런데 4장 1절은 우리의 예상을 완전히 깨뜨립니다.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니느웨의 구원은 하나님께는 기쁨이었지만 요나에게는 몹시 싫은 일이었습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그 일이 요나에게 큰 악으로 보였다”는 뜻입니다.
니느웨의 강포는 하나님 앞에 큰 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악한 니느웨를 용서하시자 이번에는 하나님의 용서가 요나의 눈에 큰 악처럼 보였습니다.
요나는 이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어떻게 저런 사람들을 용서하실 수 있습니까?”
“저들은 심판받아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저들이 살아남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요나의 모순이 나타납니다.
자신이 바다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 것은 감사했습니다. 자신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신 것도 은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니느웨 사람들이 두 번째 기회를 받는 것은 싫었습니다.
요나는 자신에게는 긍휼을 원했지만 원수에게는 심판을 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요나서 4장의 문맥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첫 번째 모습입니다.
우리도 요나처럼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내 실수는 이해받기를 원하면서 다른 사람의 실수는 용서하지 않습니다. 내가 잘못했을 때는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수 있지”라고 말하면서, 다른 사람이 잘못하면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어?”라고 말합니다.
내게 주어진 두 번째 기회는 은혜라고 말하면서, 나를 힘들게 한 사람에게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지면 불공평하다고 생각합니다.
요나서 4장은 요나만을 비추는 거울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도 비추는 거울입니다.

두 번째 장면 – 요나에게 니느웨는 어떤 도시였는가

그러면 요나는 왜 니느웨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을 그렇게 싫어했을까요? 이것을 이해하려면 당시의 사맥, 곧 역사적인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요나는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 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열왕기하 14장 25절을 보면 요나는 이스라엘의 영토가 회복될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러니까 요나는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적인 선지자였습니다. 이스라엘이 강해지고 영토를 회복하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가라고 하신 니느웨는 앗수르의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니느웨는 훗날 앗수르 제국의 수도로 크게 확장되지만, 요나 시대에도 오래되고 중요한 성읍이었습니다.
앗수르는 강력한 군사력을 키우며 주변 나라들을 위협했습니다. 앗수르의 왕들은 다른 도시를 정복하고, 포로와 전리품을 끌고 오는 모습을 궁전 벽에 새겨 자랑했습니다.
요나에게 니느웨는 단순한 외국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민족을 위협하는 원수의 도시였습니다.
오늘날의 상황으로 생각해 보면, 나와 아무 관계가 없는 낯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내 가족을 괴롭히고, 내 나라를 위협하며,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원수에게 찾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과 같습니다.
요나의 마음에는 이런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실 텐데.”
“나는 그들이 용서받는 것을 원하지 않아.”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셨으면 좋겠어.”
실제로 요나는 4장 2절에서 자신이 다시스로 도망간 이유를 고백합니다.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요나는 하나님을 몰라서 도망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너무 잘 알아서 도망갔습니다.
요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전하면 저들이 회개할 수도 있다. 저들이 회개하면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용서하실 것이다.”
바로 그것이 싫었던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성품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사랑이 크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머리로는 하나님의 성품을 알았지만, 마음으로는 그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성경을 많이 아는 것과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교회에 오래 다니고 성경 구절을 잘 외워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을 미워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라고 고백하면서 내가 싫어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요나의 문제는 지식이 부족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원수에게 적용하지 못하는 좁은 마음이 문제였습니다.

세 번째 장면 –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는 하나님께 말합니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살아나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자신이 죽는 것이 낫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화를 내는 요나를 즉시 벌하지 않으셨습니다. 짧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가 그것도 모르느냐?”라고 몰아세우지 않으셨습니다. 질문을 통하여 요나가 자기 마음을 살펴보게 하셨습니다.
“요나야, 네가 지금 화를 내는 이유가 정말 옳으냐?”
“네 분노는 나의 공의를 위한 것이냐, 아니면 네 미움과 자존심 때문이냐?”
우리도 화가 날 때가 있습니다. 화가 나는 것 자체가 언제나 죄는 아닙니다. 불의를 보고 화가 날 수 있고, 약한 사람이 피해를 입는 것을 보며 분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분노에는 이기심과 상처받은 자존심이 섞여 있을 때가 많습니다.
누군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분노인지, 그 사람이 잘못에서 돌이키기를 바라는 분노인지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물으십니다.
“네가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이 정말 옳으냐?”
“너는 정의를 원하는 것이냐, 복수를 원하는 것이냐?”
“그 사람이 죄를 버리기를 원하는 것이냐, 그 사람이 망하기를 원하는 것이냐?”
하나님의 질문은 요나를 정죄하여 버리기 위한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요나의 잘못된 마음을 바르게 고치기 위한 사랑의 질문이었습니다.

네 번째 장면 – 성 밖에서 심판을 기다리는 요나

요나는 하나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성 밖으로 나가 니느웨 동쪽에 초막을 짓고 앉았습니다.
그는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았습니다. 마치 아직도 하나님의 심판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마 요나는 이런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조금만 기다려 보자.”
“저들의 회개가 진짜인지 어떻게 알아?”
“혹시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셔서 다시 심판하실 수도 있지 않을까?”
요나는 뜨거운 햇빛 아래 앉아 니느웨가 무너지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니느웨가 아니라 요나에게 작은 사건을 일으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박넝쿨을 준비하셨습니다. 박넝쿨이 빠르게 자라 요나의 머리 위에 그늘을 만들어주었습니다.
뜨거운 햇빛 아래 있던 요나에게 시원한 그늘이 생긴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니느웨 사람들이 살아났을 때는 크게 화를 냈던 요나가 박넝쿨 하나가 생기자 크게 기뻐했습니다.
요나가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가 드러났습니다.
수많은 생명이 구원받는 것보다 자신에게 그늘이 생기는 것이 더 기뻤습니다. 다른 사람의 구원보다 자신의 편안함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새벽 하나님께서 벌레 한 마리를 준비하셨습니다. 벌레가 박넝쿨을 갉아먹자 박넝쿨이 시들었습니다.
해가 떠오르자 하나님께서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습니다. 뜨거운 햇빛이 요나의 머리를 내리쬐었습니다. 요나는 기운을 잃고 또 말했습니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다시 물으셨습니다.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요나는 대답했습니다.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요나는 박넝쿨 하나가 사라진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으며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없어진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다섯 번째 장면 – 박넝쿨보다 사람을 아끼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은 요나의 잘못된 가치관을 정확하게 드러냈습니다.
요나는 자신이 만들지도 않았고 기르지도 않은 박넝쿨을 아꼈습니다. 그 이유는 박넝쿨이 자신에게 그늘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요나의 사랑은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나에게 유익을 주면 소중하다.”
“나를 편안하게 해주면 아깝다.”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거나 나를 힘들게 하면 없어져도 괜찮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사람들을 지으셨습니다. 그들의 생명을 주셨고 지금까지 돌보셨습니다. 비록 그들이 죄와 무지 가운데 살아가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죄에서 돌이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11절의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 십이만여 명”을 어린아이로 보는 해석도 있고, 영적으로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니느웨 주민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어느 해석을 따르든 핵심은 같습니다.
니느웨에는 하나님께서 아끼시는 수많은 생명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람뿐 아니라 “가축도 많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지으신 생명과 창조세계를 돌보시는 분입니다.
요나는 박넝쿨 하나를 바라보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성 전체를 바라보셨습니다.
요나는 자기 머리 위의 그늘을 보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죄와 무지 가운데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셨습니다.
요나는 “저들이 심판받아야 합니다”라고 말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는 박넝쿨

이제 이 말씀의 영맥, 곧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에게도 박넝쿨이 있습니다. 실제 식물이 아니라 우리에게 편안함과 유익을 주는 것들입니다.
돈과 재산이 우리의 박넝쿨이 될 수 있습니다. 직장과 사업, 체면과 자존심, 내가 세운 계획과 생활의 편안함도 박넝쿨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잘되면 크게 기뻐합니다. 조금만 손해를 보거나 불편해지면 크게 화를 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고 있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을 수 있습니다. 가족이 믿음을 잃어가도 무심할 수 있고, 이웃이 복음을 알지 못해도 안타까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내 자리, 내 시간, 내 편안함이 방해받으면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처음 교회에 나온 한 사람이 불편해하는 것은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물으십니다.
“너는 박넝쿨을 더 아끼느냐, 사람을 더 아끼느냐?”
재산과 직업과 건강은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한 영혼보다 더 소중해져서는 안 됩니다.
박넝쿨은 하루 만에 생겼다가 사라질 수 있지만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존재입니다.

나에게 니느웨 같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요나서 4장은 또 다른 질문을 합니다.
“너에게 니느웨 같은 사람은 누구냐?”
생각만 해도 화가 나는 사람이 있습니까? 나에게 큰 상처를 준 사람이 있습니까? 잘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는 그 사람을 위해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저 사람을 혼내주십시오.”
“저 사람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그가 악한 길에서 돌이켜 사는 것을 너도 원하느냐?”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죄를 괜찮다고 인정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범죄나 폭력을 묵인하거나 위험한 관계로 다시 들어가라는 뜻도 아닙니다. 필요한 경계와 정의는 세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망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고, 죄에서 돌이켜 새사람이 되기를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의 강포를 모른 척하지 않으셨습니다. 분명히 심판을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강포에서 떠났을 때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를 죄가 아니라고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죄인에게 죄에서 돌아올 기회를 주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요나서 4장을 읽으며 놓치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만 불쌍히 여기신 것이 아닙니다. 화를 내고 고집을 부리는 요나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즉시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박넝쿨과 벌레와 뜨거운 바람을 통하여 그의 마음을 가르치셨습니다. 계속 질문하시며 스스로 잘못을 발견하도록 기다려주셨습니다.
요나서 4장에서도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받는 사람은 요나입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고 모든 생각이 즉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옛 습관과 미움과 자존심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말씀과 환경, 때로는 불편한 사건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가르치십니다.
박넝쿨이 시드는 일이 생길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이것을 빼앗아 가셨습니까?”라고 화를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통하여 물으실 수 있습니다.
“네가 정말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이 무엇이냐?”
“너는 내 선물만 좋아하느냐, 아니면 나의 마음도 알고 싶으냐?”
하나님께서 우리의 박넝쿨을 흔드실 때, 그것이 우리를 버리시는 표시가 아니라 잘못된 가치관을 고치시는 교육일 수 있습니다.

요나보다 더 크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요나보다 더 큰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성 밖에 앉아 성이 무너지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우셨습니다.
요나는 원수가 살아나는 것을 보며 죽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원수였던 우리를 살리기 위해 실제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요나는 자신의 그늘을 잃었다고 분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를 견디셨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원래 하나님과 원수 된 사람들이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고 자기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아끼셨습니다.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 가운데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은혜가 임하기를 바라야 합니다.

대답 없이 끝나는 이야기

요나서의 마지막에는 요나의 대답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니느웨를 아끼는 것이 어찌 옳지 않으냐?”라고 물으신 후 이야기가 끝납니다.
왜 요나의 대답을 기록하지 않았을까요?
이제 우리가 대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내가 네가 미워하는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네가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도 베풀 수 있겠느냐?”
“박넝쿨보다 사람을 더 소중하게 여기겠느냐?”
“원수가 망하는 것보다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겠느냐?”
요나서 4장은 니느웨가 얼마나 악한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요나와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좁은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성만 돌이키려 하신 것이 아닙니다. 니느웨를 미워하는 요나의 마음도 돌이키려 하셨습니다.

결론 – 누구를 아끼며 살아가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세 가지로 정리하겠습니다.
문맥으로 보면 요나서 4장은 은혜받은 요나가 원수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화를 낸 이야기입니다.
사맥으로 보면 이스라엘의 선지자 요나는 자기 민족을 위협하는 앗수르의 도시가 구원받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습니다.
영맥으로 보면 하나님께서는 요나와 우리에게 원수까지 아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에게 니느웨 같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내가 사람보다 더 아끼는 박넝쿨은 무엇입니까? 나는 하나님의 선물만 좋아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도 품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께서 나를 아끼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아끼신 그 사랑으로 내가 미워하는 사람도 바라보고 계십니다.
이제 요나의 좁은 마음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읍시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죄에서 돌이키도록 기도합시다. 아직 복음을 알지 못하는 이웃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합시다. 나의 편안함보다 한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깁시다.
나에게만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임하는 은혜도 함께 기뻐하는 성도가 됩시다.
박넝쿨보다 사람을 아끼고, 내 감정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먼저 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자신에게는 긍휼을 구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심판을 원했던 요나와 같은 사람임을 고백합니다. 우리 안의 미움과 교만과 좁은 마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에게 편안함을 주는 박넝쿨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한 영혼을 더 귀하게 여기게 하옵소서.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의 죄를 묵인하지 않으면서도, 그가 돌이켜 새사람이 되기를 기도하게 하옵소서.
원수 되었던 우리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하시고, 아직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게 하옵소서.
니느웨를 변화시키신 하나님, 요나의 마음도 가르치셨던 하나님, 오늘 우리의 마음도 넓혀주시고 변화시켜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