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도할뿐이라
Notes
Transcript
서론
시편과 함께 걷는 인생길이라는 시리즈 설교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오늘 시편 109편 긴 본문을 읽었는데, 읽고 나서 기분이 어떠신가요?
이게 맞나? 그런 생각이 드시지 않으셨나요?
어떤 분이 이런 시편은 자녀들에게 읽히게 해서는 안된다고 말하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너무 잔인하고 부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저주가 가득한 시를 지은 것일까요?
먼저 다윗이 처한 상황과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배신감을 느낀 것이지요.
어떤 사람들을 사랑하였고, 그들에게 선을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과 선한 일을 받은 사람들이 오히려 다윗을 까닭 없이 공격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쉬운 표현이 무엇일까요?
“뒤통수 맞았다”입니다.
앞에서 때리면 맞을 준비를 하든, 막을 준비를 하든, 어느 정도 준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일, 그럴 줄 몰랐던 사람에게 갑자기 공격을 받았을 때 우리가 “뒤통수 맞았다”고 합니다.
그 충격은 상당히 큽니다.
나를 공격할 만한 사람의 공격은 이미 마음에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저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나를 공격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에게 공격을 받으면 그 충격은 두 배, 세 배가 됩니다.
맞아서 아프고, 마음은 더 아픕니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이성적으로 판단하거나 생각하기가 어렵습니다. 처음에는 멍하게 있다가 정신이 돌아올 때쯤이면 분노에 휩싸이게 됩니다. 부모로 부터 받은 상처가 그렇게 온 인생을 통해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에 다윗의 위대함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그분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위대한 일입니다.
우리가 대단한 위인들의 전기를 읽으면서 “이 사람은 정말 다르구나”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실망과 분노로 가득 찬 순간에, 자신의 감정이 격앙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박수 쳐줄 만합니다.
“다윗 멋지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역시 다윗이야.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 기도하다니.
자, 이제 다윗의 기도를 한번 들어보자.
가만히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옆에서 그 기도를 듣고 있던 사람들마저 깜짝 놀랄 만한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새벽예배에 나와서 이승혁 목사가 기도를 드리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들이 보시기에 얼마나 은혜스러워 보이겠습니까?
“목사님이 참 기도에 열심이구나. 역시 목사님답구나.”
조금 존경스러워 보이실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목사님은 어떤 기도를 하나 귀를 기울여 들어보았더니, 무슨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완전히 저주의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제가 누군가를 저주하는 기도를 들으신다면 아마 시험에 드실 것입니다.
“목사가 좀 기분이 나쁘다고, 또 뒤통수를 맞았다고, 사랑으로 품지 못하고 그걸 기도하면서 저주까지 하다니. 저 목사는 참 사랑이 없어. 저렇게 사랑이 없는 목사를 어떻게 믿고 따라가겠어.”
아주 당혹스러운 순간이지요.
오늘 시편 109편이 바로 그와 같은 당혹스러움을 주는 것이 당연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그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는 어떤 내용이 있습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라고 말씀하셨지 죄 지은 자를 저주하라고 가르쳐주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른쪽 뺨을 치면 왼쪽 뺨을 돌려대라고 하셨습니다.
속옷을 달라고 하면 겉옷도 주라고 하셨습니다.
억지로 오 리를 같이 가게 하면 십 리를 같이 가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똑같이 갚아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을 사랑하셨지만 그들로부터 배신을 당하시고, 버림을 당하시고, 결국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들을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을 읽으면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에게는 인간적으로는 통쾌하고 개운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는 불편하고 찜찜한 마음이 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시편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과 오늘 시편에서 원수에 대한 심판을 구하는 기도는 서로 완전히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 우리가 풀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악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와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은혜는 어떻게 함께 갈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는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면서도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가?
어떻게 불의에 대하여 분노하면서도 복수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이 두 가지를 함께 이해하는 것이 오늘 말씀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감정을 속일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의분이 일어남)
첫 번째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감정을 속일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의분이 일어남)
우리는 우리에게 죄를 지은 사람 때문에 아플 수 있습니다.
분노할 수도 있습니다.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정말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을 만큼 마음이 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잘못된 일을 당하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할 필요는 없습니다.
용서는 악을 악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한 일이 있었는데 “괜찮습니다. 아무 일도 아니었습니다”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아픈 것은 아픈 것입니다.
분노할 만한 일을 당했으면 분노가 생기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정의롭고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분노를 가지고 어디로 가느냐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 분노를 들고 하나님께 갔습니다.
믿음은 분노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 분노를 가지고 하나님께 가는 것입니다.
요즘 드라마나 영화들을 보면 우리에게 통쾌함을 주는 이야기들이 참 많습니다.
악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힘없는 사람들을 이유 없이 괴롭힙니다.
그런데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빌런에게 맞서 싸울 힘도 없고 용기도 없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누군가가 등장해서 악한 사람에게 벌을 주고, 똑같이 되갚아 줍니다.
그러면 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습니까?
통쾌합니다.
“그래, 바로 저거야!”
왜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에 열광할까요?
우리 안에 악이 심판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이 계속 짓밟히고, 악한 사람이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잘 사는 모습을 보면 우리는 견디기 어렵습니다.
우리 안에는 정의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의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내가 심판자가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의 마음에 힘든 일이 있다면 하나님께 정직하게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불의와 억울함을 마음 깊은 곳에 그냥 묻어두지만 마십시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면서 꾹꾹 눌러 담지 마십시오.
그것이 쌓이고 또 쌓이면 마음의 깊은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제가 아는 의사분이 있으신데, 환자로 오시는 분들 중에 목사 아내분들이 많이 있으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분들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쌓인 화와 상처가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속으로 꾹꾹 눌러참으면서 마음의 병이 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목사의 아내를 괴롭게 하는 일은 옳지 않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건 목사 아내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성도 서로 서로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좀 서로 괴롭히지 좀 말아야지요.
“나 좀 괴롭히지 마!”
“네, 안 괴롭힐게요.”
다행히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제 아내에게 너무 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좋은 교회에 저희를 불러주셨는지 참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어쨌든 성경은 우리가 불의로 인한 상처와 감정을 하나님 앞에서 감출 필요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아무 문제 없는 척할 필요가 없습니다.
때로는 그런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 저는 정말 화가 납니다.”
“하나님, 저는 너무 억울합니다.”
“하나님, 저 사람 때문에 너무 아픕니다.”
“하나님, 솔직히 저 사람이 잘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내가 말한 대로 그대로 행동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판단은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고상한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쏟아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되갚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들과 같이 배신하지 않고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되갚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들과 같이 배신하지 않고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손을 들고 자기 능력으로 복수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다윗에게는 복수할 힘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울 왕이 그를 죽이기 위해 쫓아다닐 때에도 다윗에게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손으로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신약성경에서도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성경은 악을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악은 악입니다.
심판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누가 심판자인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심판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자이십니다.
원수를 용서한다는 것은 정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자의 자리를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저 사람을 벌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판단해 주십시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시편 109편의 저주의 기도는 단순히 다윗이 자기 손으로 복수하겠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손으로 갚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에 맡기는 기도입니다.
만약 오늘날 우리들도 모든 것을 자기 손으로 되갚으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길 수 있다면 갈등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일은 훨씬 줄어들 것입니다.
누가 나에게 한마디 하면 나도 한마디 합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두 마디 합니다.
나는 세 마디 합니다.
그렇게 끝이 없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으면 악은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사람이 멈추어 서서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겠습니다.”
그때 악의 사슬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나 역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나 역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구원을 무엇을 근거로 구하고 있습니까?
21절입니다.
“그러나 주 여호와여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를 선대하시며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나를 건지소서.”
다윗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저는 저 사람들과 다릅니다.”
“저 사람들은 악하지만 저는 의롭습니다.”
“그러니 제가 의로운 만큼 저를 구해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자신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인자를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다윗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나에게 잘못했다고 해서 내가 갑자기 의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피해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나를 죄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죄를 지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 역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 적이 있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의 인자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됩니다.
오늘 말씀의 처음에 우리는 질문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은혜는 어떻게 함께 갈 수 있는가?
십자가를 보십시오.
하나님은 죄를 그냥 괜찮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죄를 심판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런데 그 죄의 심판을 죄인인 우리에게 그대로 쏟아부으신 것이 아니라,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담당시키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십자가에서는 공의와 은혜가 충돌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공의와 은혜가 함께 완성됩니다.
죄는 반드시 심판받습니다.
그러나 죄인은 은혜로 용서받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뒤통수를 친 존재의 뒤통수를 치셨습니다. 그것은 악을 선으로 갚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뒤통수를 친 존재의 뒤통수를 치셨습니다. 그것은 악을 선으로 갚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도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죄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잘못하지 않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심판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 역시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마음에 억울함이 있습니까?
상처가 있습니까?
누군가 때문에 화가 나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숨기지 마십시오.
정직하게 가지고 나오십시오.
그러나 내가 심판자가 되지는 마십시오.
내 손으로 갚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그리고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나 역시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가 필요한 사람이었음을 기억하십시오.
원수를 용서하는 것은 그 사람의 죄가 작기 때문이 아닙니다.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십자가에서 받은 은혜로 살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아픔을 하나님께 정직하게 고백하고,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 자신도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가 필요한 죄인임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받은 그 용서와 자비를 다른 사람에게도 보여주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