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쉽볼렛’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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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의 ‘쉽볼렛’은 무엇입니까?
[서론]
추석 잘 보내셨나요?
명절에 가족들이 함께 모였을때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정치 이야기입니다.
가족끼리도 대판 싸울수 있는게 정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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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신앙이 있어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다닐때 함께 어울리던 목사님들이 있었습니다.
​
우리나라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온 조국사태가 일어났을때의 일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데 서로 생각이 달랐습니다.
그런데 의견충돌이 있은후 관계가 좀 어색해졌습니다.
​
이런 일은 오늘날에만 일어나는게 아닙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올때의 일입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엄격한 신분제도가 존재했습니다.
​
그런데 서울 곤당골 교회에 백정출신인 박성춘이라는 사람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일부 양반들이 불편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우리 양반들이 백정들과 같이 예배를 드릴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
그래서 무어 선교사님에게 박성춘을 교회에서 내보내거나 적어도 뒤쪽에 따로 앉게 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님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한 형제가 되었는데 신분때문에 그렇게 할수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결국 일부 양반들은 교회를 떠나고야 말았습니다.
​
세상에서도 차이를 인정하고 포용하는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이 다르고, 환경이 다르고, 신앙 색깔과 방식도 다릅니다.
정치적인 입장도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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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교회의 한 몸이 될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그 실마리를 찾아보면 좋겠습니다.
​
[본론1]
사사기 12장은 사사인 입다가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직후 벌어진 일입니다.
암몬과의 전쟁이 끝나자 에브라임 사람들은 입다에게 몰려와 항의를 합니다.
​
1절입니다.
"너는 왜 암몬 자손을 치러 건너갈 때에 우리를 불러 같이 가지 않았느냐? 우리가 너와 네 집을 같이 불태워 버리겠다."
​
왜 전쟁에 나설때 자신들을 부르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입다가 큰 공을 세운 것에 대해 견제의 심리가 담겨있는 말입니다.
주도권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
사실 이런 에브라임 지파의 항의는 처음 있는 일이 아닙니다.
사사기 8장 1절 에 보면 사사 기드온때에도 그들은 전쟁이 끝나자 항의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보다 훨씬 더 심각해졌다는 데 있습니다.
​
이번에는 입다의 집을 불태우겠다고 위협합니다.
기드온 이후 지파들끼리의 갈등이 더 깊어진 것입니다.
단순한 항의를 넘어 위협까지 하는 사이로 치달은 것입니다.
​
4절을 보면 이 갈등의 골이 평소 얼마나 깊었는지 짐작할수 있습니다.
에브라임은 평소에도 길르앗을 모욕해 왔습니다.
쉽게 말해 길르앗 사람들은 같은 요셉 지파에서 나온 떨거지들이라는 의미입니다.
평상시에도 에브라임은 길르앗에 대해 혐오와 배제를 일삼고 있었던 것입니다.
​
이에 화가난 입다는 에브라임 사람들의 주장을 반박합니다.
자신이 요청했지만 당신들이 오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 어떤 식으로 그들을 불렀는지는 알수 없습니다.
​
그렇지만 입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에브라임의 행동은 큰 문제입니다.
전쟁이 시작할때는 돕지 않고 있다가 승리한 후에야 항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쟁을 돕지는 못할망정 승리를 시기, 질투하다 심지어 협박까지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또한 입다의 태도 또한 문제가 있습니다.
앞의 글을 읽어보면 입다는 암몬과 전쟁을 벌일때에는 먼저 협상을 시도했습니다.
여러 근거를 들어 그들의 부당함을 지적할 정도로 협상의 달인입니다.
​
그런데 에브라임에게는 협상을 시도하지 않고 곧바로 전쟁을 선포합니다.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한후 자신감이 올라온 것입니다.
문제는 그 전쟁 상대가 이스라엘 동족이라는 것입니다.
​
우리 사회를 보십시오.
정치적 좌우의 갈등이 심각합니다.
그것뿐입니까?
세대간의 갈등, 지역간의 갈등, 남여간의 갈등, 노사간의 갈등이 첨예합니다.
그런데 화해시키고 중재해야할 정치인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더욱 갈등을 조장합니다.
​
진짜 문제는 한국 교회 역시 사회 통합에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교회가 정치적 색깔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분열과 갈등을 더욱 부추기고 있습니다.
혐오와 배제의 언어만이 가득합니다.
​
이러한 갈등이 결국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요?
5-6절입니다.
​
길르앗 사람들은 에브라임 지파를 공격해 물리친 뒤 요단강 나루터를 장악합니다.
그들은 도망치는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의 퇴로를 막아 모두 죽이려는 것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그 방식입니다.
​
에브라임 사람들이 요단강 나루터에 도착하면 길르앗 군사들이 묻습니다.
그들은 에브라임 사람을 구분하기 위해 ‘쉽볼렛’이라는 단어를 발음해보라고 요청합니다.
그 발음을 제대로 못하면 죽이는 것입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사투리때문에 ‘쉽볼렛’을 발음하지 못하고 ‘십볼렛’이라고 발음하기 때문입니다.
​
생각해보십시오.
처음에는 “왜 우리를 전쟁에 부르지 않았느냐”는 다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단어 하나를 어떻게 발음하느냐가 살리느냐 죽이느냐의 기준이 되어 버렸습니다.
​
과연 전쟁에 져서 후퇴하고 도망치는 사람들까지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요?
적도 아니고 심지어 같은 민족인데 말입니다.
그 발음이 뭐라고 말입니다.
​
이 사건 하나로 죽은 에브라임 사람 숫자가 4만 2천명입니다.
엄청난 숫자입니다.
마치 이방 민족과 전쟁하듯 같은 민족인 한 지파를 작살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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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적인 사실은 사사기 초반에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민족들과 싸웠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스라엘 사람들끼리 서로 싸우고 죽이고 있습니다.
심지어 같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단순히 발음 차이 하나로 죽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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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비극입니다.
그만큼 사사 시대가 흘러가면서 공동체의 붕괴가 얼마나 심각해져가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장면입니다.
모두가 자기 생각과 뜻대로 판단한 결과입니다.
​
그리고 7절은 짧게 입다의 죽음을 소개합니다.
입다는 겨우 6년동안 사사로 다스리다가 죽습니다.
다른 사사들에 비해 그 기간이 매우 짧습니다.
겨우 이 짧은 시간동안 주도권을 잡으려고 같은 동족을 작살냈다는게 어이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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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특징은 사사 이야기에 단골로 등장하던 ‘그 땅이 평온하였더라’는 말도 없다는 점입니다.
옷니엘 이후 40년, 에훗 이후 80년, 기드온 이후 40년이 평온했습니다.
그런데 입다에게는 이런 평온한 기간이 없습니다.
​
왜 일까요?
외부의 압제로부터는 벗어났지만 공동체 내부에 분열과 다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샬롬이 있을리가 없는 것입니다.
전쟁은 승리했지만 평화는 얻지 못한 꼴이 된 것입니다.
​
그럼 우리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얼마나 차이를 인정하고 있습니까?
작은 차이 하나를 인정하지 못해 갈등을 빚을 때가 있습니다.
혐오와 배제가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
찬양을 어떻게 해야할지,
예배를 어떻게 드릴지,
식사를 어떻게 할지,
재정을 어떻게 사용할지 등의 의견 차이가 날수 있습니다.
​
살아온 배경이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격도, 신앙경험도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
문제는 이런 차이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닙니다.
그 차이를 다름이 아니라 틀림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가 아니라 “저 사람은 문제가 있다”로 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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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공동체 안에 ‘쉽볼렛’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찬양의 취향이 ‘쉽볼렛’이 될수 있습니다.
신앙의 표현방식이 ‘쉽볼렛’이 될수 있습니다.
​
[본론2]
그럼 우리는 어떻게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포용할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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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2장은 이 문제에 대해 매우 중요한 비유 하나를 보여줍니다.
바로 몸의 비유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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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2장 12절 이하 입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그들이 모두 한 몸이듯이, 그리스도도 그러하십니다. 우리는 유대 사람이든지 그리스 사람이든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모두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서 한 몸이 되었고, 또 모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몸은 하나의 지체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
바울은 교회를 하나의 몸으로 설명합니다.
몸은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 몸을 이루는 지체들은 모두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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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귀가 다릅니다.
손과 발이 다릅니다.
각각 생김새도 다르고 하는 일도 모두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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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온 몸이 눈이면 어떻게 듣겠습니까?
온 몸이 손이면 어떻게 걷겠습니까?
모두 똑같다면 오히려 몸이 될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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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교회 공동체 안에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잘못된게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한 몸을 이루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도이자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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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는 자꾸 이렇게 묻곤 합니다.
“왜 저 사람은 나와 생각이 다르지?”
“왜 저 사람은 나같이 행동하지 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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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질문을 바꿔야 합니다.
“하나님은 왜 나와 다른 사람을 같은 공동체에 두셨을까?”가 되어야 합니다.
어쩌면 나에게 없는 것을 그 사람이 가지고 있을수 있습니다.
내가 보지 못하는 것, 할수 없는 것을 그 사람은 가능할지 모릅니다.
​
성숙한 공동체는 다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본 사사기 12장에서는 차이가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2장에서는 차이가 한 몸을 이루는 이유가 됩니다.
이것이 건강한 공동체와 무너진 공동체의 차이입니다.
​
물론 모든 차이를 무조건 인정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차이가 성경이 분명히 말하는 옳고 그름이라는 진리의 문제라면 반드시 다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때조차도 사람을 적으로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진리를 포기해서도 안되지만, 진리를 지킨다는 이유로 사랑을 잃어서도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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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는 서로 잘 맞아서가 아닙니다.
그것이 주님을 본받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
로마서 15장 7절 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려고 여러분을 받아들이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받아들이십시오.”
​
우리가 서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입니까?
우리가 얼마나 자주 넘어지고, 얼마나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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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를 밀어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서로를 받아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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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생각이 달라도,
나와 성격이 달라도,
나와 신앙의 표현방식이 달라도,
본질의 문제가 아니라면 받아줘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받아주신 형제라면 나도 받아줄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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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12장에서 차이는 죽음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에서 차이는 사랑의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섬기는 기회, 배우는 기회, 세워주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족끼리도 정치 이야기 하나때문에 관계가 깨질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
생각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신앙의 방식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차이가 아닙니다.
그 차이를 틀림으로 판단하고 혐오와 배제가 작동할때입니다.
​
사사기 12장을 보십시오.
겨우 ‘쉽볼렛’과 ‘십볼렛’의 작은 발음차이 하나가 사람을 죽이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교회가 그런 곳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
교회는 태생자체가 같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룰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더 건강하고 성숙한 교회가 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서로를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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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12장에서 차이는 죽음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공동체에서 차이는 사랑하고, 배우고, 섬기는 기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점심으로 다양한 재료가 섞인 비빔밥을 같이 먹는 이유가 아닐까요?
서로를 받아주며 한 몸을 이루어가는 건강하고 성숙한 우리 교회가 되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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