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930 수요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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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hronicles 11:15–19 NKRV
15 삼십 우두머리 중 세 사람이 바위로 내려가서 아둘람 굴 다윗에게 이를 때에 블레셋 군대가 르바임 골짜기에 진 쳤더라 16 그 때에 다윗은 산성에 있고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은 베들레헴에 있는지라 17 다윗이 갈망하여 이르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꼬 하매 18 이 세 사람이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길어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드리고 19 이르되 내 하나님이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이 사람들의 피를 어찌 마시리이까 하고 그들이 자기 생명도 돌보지 아니하고 이것을 가져왔으므로 그것을 마시기를 원하지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
살다 보면 열심히 살아왔는데도 마음이 잘 풀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분명히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했습니다. 시간도 들이고, 마음도 쏟고, 내가 가진 것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돌아보면 내가 기대했던 것만큼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이만큼 했으면 뭔가 달라지겠지.' 생각했는데, 여전히 그대로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자녀를 위해 오랫동안 기도했는데 아직도 달라진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고, 교회를 섬기고 봉사했는데 기쁘기보다 마음이 지칠 때도 있습니다. 일터에서도 맡은 일을 성실하게 했는데 인정받기는커녕 오히려 내 자리가 흔들릴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나님이 정말 나와 함께하고 계시는 것인지, 하나님이 나를 떠나신 것은 아닌지” 의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사실 이런 생각은 믿음이 약한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래 믿은 사람도 이런 시간을 지나갑니다.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도 어느 순간 이런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기록된 역대기의 원독자들도 이와 비슷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2. 원독자의 상황]
역대기는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와 성전이 다시 세워진 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이스라엘 공동체를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그들의 조상은 오랜 포로 생활 끝에 하나님의 은혜로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자기 시간과 재물을 들였고, 여러 방해를 받으면서도 눈물로 버티며 성전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세운 성전은 솔로몬이 지은 옛 성전과 비교하면 초라했습니다. 에스라 3장을 보면,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 한쪽에서는 기뻐서 큰 소리로 외쳤고, 다른 쪽에서는 옛 성전을 기억하는 나이 든 사람들이 크게 울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성전이 다시 세워지면 이스라엘의 모습도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안정된 삶을 떠나 황폐해져 아무것도 없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건축한 것입니다. 성전만 건축이 되면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나타나고, 나라가 다시 일어서고, 다윗 시대 같은 번영이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기대와 달랐습니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이방민족의 다스림을 받는 작은 공동체였습니다. 다윗 같은 왕도 없었고, 그들의 삶은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성전은 다시 세워졌지만, 다윗 시대의 영광이 돌아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이 느끼기에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약속은 이제 끝난 것처럼 보였고,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시키실 날이 올 것 같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차츰차츰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앞날에 대한 소망도 흔들렸습니다.
이런 상황에 있던 사람들에게 오늘 본문은 위로의 말을 하거나 무엇인가를 훈계하지 않습니다. 그저 다윗의 이야기를 다시 들려줍니다.
역대기 기자가 이들에게 왜 다윗의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었는지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보고, 이 말씀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3. 본문 해석: 15-19절]
오늘 본문인 역대상 11장 15절부터 19절까지의 이야기는 다윗이 블레셋과 맞서고 있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그리고 당시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은 블레셋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다윗이 한마디를 합니다. 17절을 보면,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마실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왜 갑자기 베들레헴의 물을 마시고 싶다고 했을까요?
본문이 그 이유를 직접 설명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정확한 이유를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다윗에게 베들레헴은 단순한 지명이 아니었습니다. 어린 시절을 보내고 양을 치며 지냈던 자신의 고향이었습니다. 그런 다윗에게 베들레헴의 우물물이 생각났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17절의 표현을 원어로 보면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사모하여"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여기서 '사모하다'는 말은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거나 갈망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단순히 물이 마시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베들레헴의 그 물을 정말 마시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도 "누가 나에게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의 물을 마시게 할까"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누군가에게 물을 가져오라고 명령한 말이라기보다, 자신이 그 물을 얼마나 마시고 싶은지를 표현한 말로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다윗은 사울을 피해 다니고 있었고, 자신의 고향 베들레헴은 블레셋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쉽게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고향의 우물물이 생각났고, 그 물을 마시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일어나 그것을 말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곁에 있던 세 용사가 그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18절을 보면 이들은 블레셋 군대의 진영을 뚫고 들어가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 다윗에게 가져옵니다.
다윗은 누군가에게 물을 가져오라고 명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세 용사는 다윗의 그 말을 듣고 목숨을 걸고 베들레헴까지 갔던 것입니다.
누가 시켜서 한 일이라면 시킨 사람의 책임이고, 시킨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진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세 용사가 스스로 움직였습니다.
그 말은 다윗의 곁에, 그의 말을 귀담아듣고 필요한 일을 찾아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돈을 준다고 생기는 것도 아니고, 힘으로 만들어 낼 수도 없습니다. 서로를 아끼고 신뢰하는 가운데 마음이 움직여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런 관계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다윗의 바램대로 세용사가 베들레헴에 가서 물을 가져옵니다. 그런데 세 용사가 목숨을 걸고 가져온 그 물을 다윗은 마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립니다.
18절의 "부어 드렸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나사크'라는 동사의 형태입니다. '나사크'는 기본적으로 '붓다'라는 뜻인데, 성경에서는 하나님께 드리는 전제, 곧 제사에서 포도주와 같은 것을 하나님께 부어 드리는 것을 가리킬 때도 사용됩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그 물을 그냥 버린 것이 아닙니다. 본문은 그 물을 "여호와께" 부었다고 말합니다. 세 용사가 가져온 물을 자신의 갈증을 채우는 데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19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1 Chronicles 11:19 NKRV
19 이르되 내 하나님이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이 사람들의 피를 어찌 마시리이까 하고 그들이 자기 생명도 돌보지 아니하고 이것을 가져왔으므로 그것을 마시기를 원하지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
다윗이 그 물을 마시지 않은 이유는 세 사람이 그 물을 가져오기 위해 자기 생명까지 걸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윗이 그 물을 ‘피’라고 표현한 것은 그 물에 실제로 피가 섞여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물을 가져오기 위해 세 사람이 목숨을 걸었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윗에게 있어서 그 물은 단순히 목을 축일 수 있는 물이 아니었습니다. 그 물을 가져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세 사람의 헌신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세 사람의 헌신을 당연하게 받아 누리지 않았습니다. 그 물은 분명히 마시고 싶었던 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고 해서 모두 자기 것으로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그 물이 어떻게 자신에게 오게 되었는지를 생각했고, 목숨과 같은 그 헌신을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돌려 드렸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받은 것이 당연히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내가 원하는 대로 사용하게 됩니다. 하지만 내가 받은 것이 누군가의 수고와 사랑을 통해 온 것이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것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받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때도 있고, 누군가의 수고 덕분에 내가 편해질 때도 있습니다. 가족의 사랑을 받고, 교회에서 누군가의 섬김을 받고,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누군가가 기도하고 수고한 덕분에 지금의 자리에 서 있을 때도 있습니다. 부모님의 기도가 있었고, 앞서 믿은 분들의 헌신이 있었고, 교회 공동체의 섬김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생명 같은 시간이 우리에게 쓰였는지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너무 쉽게 내 것으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당연히 누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내가 받을 만해서 받은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받은 것을 조금만 돌아보면, 그 어느 것도 나 혼자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누군가의 수고가 있었고, 누군가의 사랑이 있었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에 지금 내가 그것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받은 것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그것이 어떻게 내게 왔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것을 대하는 마음도 달라집니다. 감사하게 되고, 소중하게 여기게 되고, 나만을 위해 사용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에 해당합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이 있습니다. 내가 가진 시간도 그렇고, 물질도 그렇고, 재능과 자리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진 것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왜 이것을 내게 주셨는지를 먼제 생각해야 합니다. 받은 시간과 재능을 나의 만족만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곳에 사용하고, 내게 주어진 사람들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사랑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다윗이 물을 마시지 않고 하나님께 부어 드렸던 것도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자신이 원했던 것이었지만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물이 어떻게 자신에게 왔는지를 알았고, 결국 그것을 하나님께 돌려 드렸습니다.
오늘 우리도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보다 그것이 어떻게 내게 왔는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받은 사랑과 수고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4. 핵심 말씀: 11:9]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이 장면만 놓고 보면 다윗은 자기 마음을 다스릴 줄 아는 훌륭한 지도자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다윗을 위해 목숨까지 걸 수 있는 사람들이 곁에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나라가 강해진 이유도 다윗의 능력에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좋은 지도자였고, 곁에 좋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내가 좋은 사람이 되고 내 주위에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 나의 삶이 잘 풀릴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앞인 역대상 11장 9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1 Chronicles 11:9 NKRV
9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성경은 다윗이 강해진 이유를 사람에게서 찾지 않습니다. 물론 다윗 곁에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윗을 강하게 만든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자기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던 것도,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건 사람들의 헌신을 귀하게 여길 수 있었던 것도 다윗이 처음부터 흠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은 아닙니다. 성경 전체를 보면 다윗에게도 분명한 잘못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다윗만이 아닙니다. 다윗에게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윗과 함께하신 하나님입니다.
다윗의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셨기 때문에 다윗의 곁에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셨기 때문에 길이 열렸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고, 좋은 환경을 만드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어떻게 세워져 가는지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 곁에 어떤 사람이 있는지에만 달려 있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면, 하나님께서는 지금의 삶도 하나씩 세워 가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군의 여호와'라는 것은 하늘의 모든 군대와 온 세상의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이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하셨습니다. 다윗의 강함은 다윗 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다윗과 함께하신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다윗의 강성함도 한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9절에서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고 말씀합니다. '점점'이라는 말은 어느 날 갑자기 강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강해져 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하시면서 그를 한 걸음씩 세워 가셨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다윗은 점점 강성해져 갔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한순간에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내가 지금 무엇이 달라지고 있는지 알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우리의 삶을 조금씩 세워 가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이 우리의 상황이나 환경이 좋아진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요셉의 이야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팔려 애굽으로 가 종으로 살았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모든 상황에서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요셉의 상황과 환경은 어려웠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도 함께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 상황이 어렵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눈앞의 상황과 환경이 어떠하든 하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십니다.
이것은 당시 역대기의 원독자들에게도 꼭 필요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역대기 기자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다윗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다윗 시대를 생각하면 우리는 먼저 큰 나라와 강한 군대, 많은 재산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다윗의 곁에는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있었고, 다윗 자신도 뛰어난 지도자였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다윗 시대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다윗의 삶이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도 아니고, 다윗이 언제나 완벽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함께하셨고, 그의 삶을 이끌어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이스라엘을 세워 가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자신들이 처한 현실이 초라하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떠나셨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성전이 작고 나라의 형편이 어렵다고 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끝난 것도 아닙니다. 다윗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일하셨다면, 지금 자신들이 살아가는 이 작은 공동체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일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에게 역대기가 들려주고 싶었던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지금 자신들의 모습이 작고 초라해 보여도, 그것만 보고 하나님께서 떠나셨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앞선 세대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성전을 짓던 백성이 초라한 모습에 낙심했을 때, 하나님은 학개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Haggai 2:3 NKRV
3 너희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 중에서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
학개 2장 3절에서 하나님은 이 성전이 너희 눈에 보잘것없지 않느냐고 물으십니다. 초라하다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4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Haggai 2:4 NKRV
4 그러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그들에게 낙심하지 말고 굳세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건물의 크기가 능력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이 능력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세월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윗과 함께하신 하나님께서 초라한 예루살렘에서 살아가는 백성과도 여전히 함께하신다는 말씀입니다.
[6. 오늘 우리의 삶]
우리도 이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주님을 위해 애쓰고, 교회를 섬기고, 가정을 믿음으로 세우려고 힘씁니다. 그러면서 마음 한편에는 기대가 있습니다. 이만큼 주님을 위해 살았으니 내 삶에도 좋은 사람들이 함께하고, 하는 일도 잘 풀리고, 자녀들의 길도 잘 열리기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이 언제나 그런 기대와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귀환한 사람들이 마주했던 초라한 성전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고, 건강은 점점 약해지고, 직장과 가정의 문제도 쉽게 풀리지 않습니다. 주변을 둘러봐도 나를 도와주는 세 용사는커녕 차갑게 느껴지는 세상만 보일 때가 있습니다. 잘나가는 사람들과 비교하다 보면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내 모습이 작고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면 마음이 허무해집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온 것이 맞는지 흔들리고, 내 삶이 왜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눈앞의 상황만 바라보다 보면, 결국 ‘내가 열심히 살아왔는데도 이 정도라면 내 삶은 실패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눈에 보이는 상황만 보고 우리 삶을 판단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성전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통장에 얼마가 있는지, 내 주변에 영향력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가 내 삶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내 형편이 광야처럼 초라해 보여도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와 비슷한 장면이 열왕기하 6장에도 나옵니다.
아람 왕이 이스라엘과 싸우고 있을 때였습니다.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아람 군대가 진을 칠 곳을 미리 알려 주었고, 이스라엘은 여러 번 위기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화가 난 아람 왕은 엘리사를 잡으려고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밤에 엘리사가 있는 도단 성읍을 에워쌌습니다.
아침이 되어 엘리사의 사환이 일찍 일어나 밖으로 나가 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을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사환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눈에 보이는 것만 보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은 포위되어 있었고, 밖에는 적군이 가득했습니다. 어디로 빠져나가야 할지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엘리사가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그리고 하나님께 사환의 눈을 열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자 17절은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다고 기록합니다.
같은 성읍이고 같은 아침이었습니다. 아람 군대가 사라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상황은 그대로였습니다. 달라진 것은 사환이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보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는 다윗의 곁에 있었던 세 용사 같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엘리사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사가 바라본 것은 곁에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상황이 가벼워서 두려워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 상황보다 크신 하나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눈에 보이는 상황만 크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병원 결과지 한 장이 마음을 가득 채울 때도 있고, 통장 잔액이나 끊어진 관계, 풀리지 않는 문제가 눈앞을 가득 채울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문제보다 먼저, 그 자리에도 함께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말은 모든 일이 쉽게 풀리고 내가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윗도 하나님이 함께하셨지만 오랜 시간 힘든 길을 걸었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공동체도 하나님을 믿었지만 무너진 것을 다시 세우는 길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흘린 눈물과 아픔도 실제였습니다. 성경은 그 아픔을 없는 것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엘리사와 사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에도 아람 군대는 여전히 그들 앞에 있었습니다. 군대가 사라진 뒤에 안심한 것이 아니라, 군대가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은 어떤 상황을 지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이끌어 가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모든 일이 잘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 가장 큰 소망이고 은혜입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라는 뜻도 아닙니다. 다윗의 용사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했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움직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교회에서 내가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하면 됩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붙들며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면 됩니다. 다만 내가 할 일을 다한 뒤에 그 결과까지 내 손으로 만들어 내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의 삶을 이끄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해야 할 일은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하되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길 수 있다면, 결과가 내가 생각한 만큼 빨리 나타나지 않아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걸어갈 수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모든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하면서도, 내 삶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내가 아무리 애써도 생각처럼 되지 않는 일들이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했는데도 결과가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결과만이 아닙니다.
다윗의 삶이 하루아침에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가운데 다윗의 삶이 조금씩 세워져 갔습니다.
우리의 삶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끌어 가십니다.
그러니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성실하게 하면서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당장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오늘도 허락하신 삶의 터전에서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기도
함께하시는 하나님, 눈에 보이는 상황 때문에 흔들렸던 마음을 주님께 내려놓습니다. 다윗과 함께하셨던 주님이 오늘 저희와도 함께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사람과 환경보다 먼저 주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초라해 보이는 자리에서도 낙심하지 않게 하옵소서. 엘리사의 사환의 눈을 여신 것처럼 저희의 눈도 열어 주셔서,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함께하시는 주님을 보게 하옵소서. 받은 은혜와 누군가의 수고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예배와 섬김으로 주님께 돌려 드리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저희를 위해 생명을 내어 주시고 지금도 함께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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