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눈부시게 빚는 거룩한 이름, 여호와 카도쉬_수요

하나님의 이름은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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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6년 9월 30일(수)
제목 및 본문 : 나를 눈부시게 빚는 거룩한 이름, 여호와 카도쉬(레20:7-8)
결단 : 나는 주님께 속한 자, 보소서 주님
우리는 성경을 통해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 알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내가 무엇인가를 잘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남들보다 착한 일을 많이해서 하나님께 인정 받는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 하나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이지요.
그런데 성경을 읽다보면 왜인지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구절들이 등장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분명한데 성경은 서로 사랑하라 말하고,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 말하고, 용서하라 말하며 정직해야 한다 말합니다. 오늘 본문 역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
물론 우리는 그런 구절들을 보며 ‘맞아, 서로 사랑해야지. 맞아 그렇게 살아내야지.’라며 다짐하기도 하고 결단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함께 본 ‘거룩’은 왠지 무게감이 조금 다르게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거룩하려면 죄도 덜 지어야 할 것 같고, 세상과 쉽게 타협해선 안될 것 같고, 기도와 말씀과 같은 경건 생활에 있어 모범이 되어야 할 것만 같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다보니 거룩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부담이 되어버렸고 어느새 자유를 억압하는 단어가 되었으며 엄격한 규율처럼 느껴지는 불편한 단어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저는 종종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분명 자유하다고 찬양하는데 막상 보면 통제가 왜이리 많은걸까?’ 라는 생각 말입니다. 혹시 이런 생각, 성도님들은 해보신 적이 없으실까요? 그런데 이 질문 속에는 이미 하나의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거룩함이란 곧 하고 싶은 일을 못하게 막는 금지와 제한’이라는 인식입니다.
교회 봉사나 섬김 등을 권면할 때 종종 이런 말씀을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저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교사를 합니까. 조금 더 신앙생활이 성숙해지고서 하겠습니다.” 물론 저는 이러한 대답에 충분히 동의가 됩니다. 정말 준비가 필요하기도 하고 맡겨질 교회 봉사나 섬김에는 이에 합당한 책임과 기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때론 그러한 말 속엔 이런 생각이 숨어 있지는 않은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 시간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없게 되면 어떻게 하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모든 경우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다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기보다 먼저 ‘내가 무엇을 잃게 될까?’에 대한 불편함 때문에 거룩을 제약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은 여호와 카도쉬, 거룩을 말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시간을 통해 지금껏 우리가 생각한 거룩은 성경이 말하는 거룩과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또 우리를 가두는 제약이 아니라 지금껏 누리지 못한 더 아름다운 삶으로의 초대였음을 발견해 나아가는 그러한 시간이 되길 간절히 소망해봅니다.
먼저 우리는 거룩에 대한 재정립이 필요해 보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본 본문 말씀은 묘한 긴장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긴장감일까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하라”는 명령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다”라는 선언이 동시에 공존하며 생긴 긴장감 입니다.
왜 이것이 우리에게 긴장으로 다가오는 걸까요? 이 두 구절이 우리에게 긴장감을 주는 이유는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스스로 거룩하라고 명령하시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이런 질문이 생길 겁니다. 거룩은 우리가 스스로 얻어야 하는 노력의 결과물인 겁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인 겁니까?
거룩은 원어로 카도쉬라 말합니다. 그리고 카도쉬는 ‘분리하다. 분별하다.’의 뜻을 가지지요. 다시 말해, 거룩은 곧 하나님이 자신의 소유로 삼으신 자들을 세상의 가치관에서 분리해 내어 오직 하나님의 질서 안에 두셨음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제임스 패커 역시 자신의 저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거룩을 이렇게 말합니다. “거룩함은 우리를 세상과 같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다르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다르게 살도록 하는 것이다.”
거룩이란 단순 어떤 행동을 피하거나, 혹은 ‘내가 이런 규칙들을 잘 지켜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겠지?’와 같은 율법주의적 태도가 아닙니다. 거룩은 규칙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인 겁니다. ‘무엇을 잘했으니 복을 주는’ 그런 교환의 구조가 아니라 변함없는 그리고 조건없는 사랑의 관계다 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라고 강조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겁니다. 우리가 거룩해야 할 이유는 규칙 속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 또한 거룩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아까 생긴 질문을 다시 들고와 볼까요? 거룩은 우리가 스스로 얻어야 하는 노력의 결과물인 겁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인 겁니까? 오늘 본문은 어느 하나만을 선택하라 유도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그렇게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우리가 거룩을 살아내는 것. 즉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순종이 관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볼까요. 이들이 출애굽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들의 거룩 때문이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구원하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자기 백성 삼으셨고 그리고 나서야 명령하신 겁니다. “너희는 거룩하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거룩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삶의 열매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데 왜이렇게 명령이 많을까?’ 우리가 구원받기 위한 명령이 아닌겁니다. 이미 자기 백성 삼으셨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인 겁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거룩함을 살아낸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요? 거룩한 삶이란 무엇인가 해야만 할 것 같지만 동시에 추상적인 개념처럼 비춰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반드시 행동으로 증명되어야 하는 삶의 태도라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렇게 기록합니다.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고 말입니다. 결국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정체성은 우리의 삶을 통해 명확하게 드러나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지 않는 삶’을 먼저 떠올린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거룩한 삶을 살아내기위해서 술을 마시지 않는 것, 욕하지 않는 것, 세상의 것을 멀리하는 것과 같은 모습들을 말입니다.
물론 거룩한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 죄를 멀리하는 것은 분명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죄라 말씀하신 것들을 가볍게 여기며 거룩함을 살아낸다는 것은 결단코 불가능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거룩은 단순히 죄를 멀리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거룩은 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무엇을 하며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뇌와 실천이 필요하다 라는 겁니다.
결국 거룩함을 살아낸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사실 거룩하게 살아낸다는 것은 마냥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거룩함을 살아낸다는 것은 아주 사소한 일상의 공간에서도 얼마든지 이루어질 수 있는 모습이다 라는 겁니다.
레위기를 읽다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에만 관심을 가지지 않았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히려 삶의 더 깊숙한 곳까지 하나님은 들어와 계셨죠. 무엇을 먹을 것인지, 이웃을 어떻게 섬기고 대해야 하는지, 부모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성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가난한 사람을 어떻게 품을 것인지, 재산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등 삶의 여러 영역에 있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말씀해 주십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깊숙한 삶까지 관여하고자 하셨던 걸까요?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하셨던 이유는 바로 거룩함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선 단순히 종교생활만을 원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이들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속하길 원하셨던 겁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여기까지는 하나님의 영역이고 여기서부터는 내 영역입니다.’라며 구분짓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속했다면 내 시간도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내가 사용하는 언어도, 사람을 대하는 나의 태도도, 가정에서 우리의 모습도, 뿐만 아니라 직장에서의 모습 또한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여긴다는 겁니다. 거룩은 내 삶 가운데 종교적인 부분 하나를 하나님께 떼어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 삶 전체가 이미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럼 우리의 거룩은 이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는 걸까요? 어쩌면 우리에게 허락된 거룩은 훨씬 더 평범한 곳에서부터 드러날지도 모릅니다. 혼자 있을지라도 정직함을 유지하는 것, 내가 손해를 본다 할지라도 거짓을 선택하지 않는 것, 나를 힘들게 하는 이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되갚아 주려 하지 않는 것, 나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 할지라도 그 사람을 돌아보는 것 등 매우 평범한 곳으로부터 거룩이 시작 될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째서 우리는 이런 모습을 보며 거룩하다 말할 수 있는 걸까요? 단순히 착한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속한 하나님이 그러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께서 진실하시기에 그 분께 속한 우리는 정직을 선택해야만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자비로우시기에 우리도 자비를 베푸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기에 우리도 용서를 선택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도 사랑하는 겁니다. 결국 거룩은 단순히 좋은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 아니라, 거룩은 내가 속한 하나님을 닮아가는 과정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거룩엔 두 가지 방향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는 버리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닮아가는 것입니다. 죄를 버리고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 세상의 가치관으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룩한 삶인 겁니다.
레위기 19장을 보면 구체적으로 거룩한 삶이란 무엇인지 매우 선명하게 이야기합니다. 레위기 19장 2절은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라고 말씀하신 후 3절부터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3절) / 헛된 것들에게로 향하지 말며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라(4절) /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10절) / 도둑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하지 말며(11절) / 네 이웃을 억압하지 말며 착취하지 말며(13절) / 재판할 때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15절)” 등 여러 구체적인 거룩의 모습을 하나님은 설명하십니다.
거룩은 주일에 한정되어 이루어 지는 것도 아니고 예배당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모습이 아닌겁니다. 주일이 아닌 날에도, 예배당을 벗어난 장소에서도 우리의 거룩은 여전히 이어져야만 한다는 겁니다. 교회에서 경건하게 예배드리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집에 돌아가 우리의 자녀들에게 어떤 말을 하는가 역시 중요합니다. 성경을 날마다 묵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시선을 가지고 이웃을 바라볼 것인가 역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자, 즉 사각지대가 없는 거룩함을 입은 자 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실 이 설교를 하면서도 조심스러운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저 거룩을 술 마시지 않고 언행을 지키며 나쁜 일을 행하지 않는 것 정도로 알고 지냈는데, 오히려 설교 이후로 거룩에 대한 무게감이 더해질까봐 염려가 되기도 합니다.
그저 술 마시지 않고 행실을 선하게 지키면 거룩이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내 말도, 내 시간도, 돈과 가족, 직장 까지도 하나님께 속했기에 그 안에서 정말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고 있는가 점검해보며 오히려 더 어려운 질문인, “나는 정말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마주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저는 그 누구도 이 질문에 자유하지 못할지도 모른단 생각이 듭니다. 물론 저 역시 제 삶을 되돌아 보면 하나님을 닮지 못한 모습이 너무나 많이 보이기 때문에 결코 자유롭진 않습니다.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몰라서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몰라서 용서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정직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섬겨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으며, 나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내가 손해 봐야 한다 생각하니 정직하기란 쉽지 않고, 나에게 상처 준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너무나 어렵습니다. 심지어 내 시간이 아까워 섬기러 가는 것 조차 아깝단 생각이 들기도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무엇이 거룩인지 몰라서 실패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경은 어떻게 말하는지, 또 무엇이 옳은지 너무나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아내지 못하는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는 실패하는 사람들이란 겁니다.
결국 우리의 진짜 문제는 ‘무엇이 거룩한 삶인지’ 몰라서가 아니라 ‘그 거룩을 내 힘으로 살아낼 수 있는가?’에 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 묘한 긴장감을 허락하신 겁니다. 어떤 긴장감 이었습니까? 서두에서 언급했던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하라”는 명령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다”라는 선언이 동시에 공존하며 생긴 긴장감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을 명령하시면서 ‘이제부터 너희 힘으로 한번 해보아라’라며 광야에 내버려 두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그 거룩을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백성 가운데 이루어 가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거룩하라”는 명령과 “내가 너희를 거룩하게 한다”는 선언은 서로 충돌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함께 있어야만 합니다. 왜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룩을 요구하셨지만 동시에 그 거룩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여, 명령하시는 것을 주시고, 주시는 것을 명령하소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룩을 명령하셨다면, 그 거룩을 살아낼 힘 역시 하나님께서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남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라면, 죄인인 우리를 하나님은 어떻게 거룩하게 하신다는 걸까요?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 또한 거룩하고 위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품은 우리는 죄가 가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심하고 때론 우상을 만들기도 하고 내 욕망에 따라 선택하기도 합니다.
사실 레위기엔 읽기 어렵고 낯선 수많은 제사와 정결에 관한 규례들이 등장하지만, 그 중심에는 하나의 질문이 관통하고 있었습니다. “죄인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가?” 레위기는 죄와 부정함 가운데 있는 백성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어떻게 그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수많은 제사와 정결의 규례들을 기록합니다.
결국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하여 결국 누구를 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0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우리는 거룩하게 살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수도 없이 고민했고 치열하게 살아왔지만 성경은 우리가 거룩함을 얻은 결정적인 이유를 우리의 행실에서 찾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다 말합니다.
명심하십시오. 예수님은 우리에게 거룩하게 사는 방법만 가르쳐 주신 분이 아닙니다. 거룩하지 못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내어주신 구주가 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처음에 던졌던 질문에 답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데, 그렇다면 왜 성경에는 이렇게 많은 명령이 있는 것인가? 그 명령을 지켜서 구원받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이제 그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권면인 겁니다. 거룩하게 살아서 하나님의 사랑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받았기 때문에 거룩을 살아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룩을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의 자유를 빼앗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죄에 붙들려 살아가던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고 그 자유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룩은 우리의 삶에 제한을 두는 감옥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시어 이제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새로운 삶으로의 초대가 된다는 겁니다.
바라옵기로는 거룩하게 살아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려고 아등바등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기에 그 은혜에 힘입어 기쁨으로 거룩을 살아낼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Bridge Message]
우리 이 시간 함께 찬양하길 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은 어쩌면 아주 분명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너는 누구에게 속한 사람이냐?”
우리는 거룩하게 살아서 주님의 것이 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고 그 은혜로 말미암아 이미 우리는 주님께 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시간 우리 함께 찬양하실 때, 나는 주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나의 삶도, 나의 시간도, 나의 모든 것도 주님의 것입니다. 믿음으로 고백하며 찬양하며 나아갑시다.
[결단찬양 및 기도]
1. 나는 주님께 속한 자
- 우리는 입술로 ‘주님께 속한 자’라 고백하지만, 여전히 내 삶의 주인은 나 자신인 것처럼 살아갈 때가 참 많습니다. 내 시간도, 물질도, 내 계획과 내가 가진 모든 것에 내가 주인될 때가 참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간 기도하실 때, 주님. 먼저는 내가 주님께 속한 자임을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 삶의 일부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이 이미 주님의 것임을 날마다 인정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2. 나는 주님께 속한자(후렴) + 보소서 주님(후렴으로 이어서)
- 거룩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드러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언어. 우리의 태도. 우리의 가정과 일터, 우리의 관계에서도 얼마든지 우리의 거룩함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기도하실 때, 주님. 이제 우리를 주님께 속한 자 답게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죄를 끊어내게 하시고, 용서하게 하시고, 사랑하게 하시고 정직을 선택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하나님께 속한 자임을 흘려 보내는 우리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 이제 우리는 가을 특별새벽부흥회를 앞에 두고 있습니다. 새벽을 깨워 우리의 무엇인가를 하나님께 보여 드리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의 굳어진 마음을 새롭게 하시며 다시 주님께로 돌이키시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소망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시간 기도하실 때,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무뎌진 우리의 심령이 특새를 통해 뜨거워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무엇보다 행사 하나 잘 마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다시 하나님께로 향하고 우리 교회가 더욱 거룩한 공동체로 세워지는 그러한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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