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정너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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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답정너 신앙
본문: 사사기 20:8-28
[서론]
제가 예전 교회에서 청년부를 맡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청년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역시 연애였습니다.
그 교회는 서로 마음이 있어도 바로 사귀지 않았습니다.
먼저 일정 기간 함께 기도해 보도록 권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 저희 같이 기도해 보려고요” 하며 찾아오는 청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퀴즈 나갑니다.
그럼 지금까지 저한테 그렇게 말한 친구들 중에
“목사님, 기도해 보니 우리는 만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결론 낸 청년들이 있었을까요?
제 기억에는 없습니다.
왜일까요?
그렇습니다.
이미 서로에게 마음이 많이 기울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찾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기보다, 내가 원하는 답에 도장을 받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연애에만 있을까요?
우리의 진로, 사업, 인간관계에서도 똑같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런데 정말 무엇이든 순종할 준비가 되어서 묻는 것일까요?
아니면 이미 정해 둔 답에 “아멘” 해 주시기를 바라며 묻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께 세 번이나 묻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의 질문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따라가 보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어떤 사람인지 함께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본론1]
오늘 말씀은 사사기 에필로그의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은 에브라임 산지에 사는 한 레위인입니다.
17, 18장의 첫 번째 이야기에도 레위인이 나왔는데 또 레위인이 등장합니다.
왜일까요?
레위인은 원래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예배를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에필로그의 레위인들은 더 좋은 자리를 찾아 옮겨 다니고, 첩을 두고 삽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이 얼마나 무너졌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19장의 레위인에게는 첩이 있었는데, 그 첩이 집을 나가 버립니다.
개역개정은 첩이 행음해서 나갔다고 하고, 새번역은 남편에게 화가 나서 나갔다고 합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가르쳐야 할 레위인이 첩을 두고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신앙이 무뎌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넉 달이 지나서야 첩을 데리러 베들레헴으로 갑니다.
그후 첩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해가 저물어 베냐민 지파의 성읍 기브아에서 하룻밤을 묵게 됩니다.
그런데 아무도 이들을 환대하지 않습니다.
겨우 한 노인이 맞아 주었는데, 그날 밤 끔찍한 일이 벌어집니다.
창세기 19장 소돔의 밤과 똑같습니다.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집을 에워싸고 레위인을 내놓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레위인은 자기가 살려고 첩을 문 밖으로 내보냅니다.
그 여인은 밤새도록 짓밟히다가 새벽에 집 문턱에 쓰러집니다.
아침에 일어나 문을 나선 레위인이 한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일어나라, 가자.”(19:28)
대답이 없었습니다.
여인은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이 본문은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은 한 여인의 고통 위에 쓰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이야기를 가볍게 읽을 수 없습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다음입니다.
레위인은 고향에 돌아오자마자 첩의 시신을 열두 조각 내어 이스라엘 전역에 보냅니다.
온 이스라엘을 충격과 분노로 몰아넣으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지파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배경입니다.
8-17절을 보겠습니다.
지파들은 단호하게 결의합니다.
아무도 집으로 돌아가지 말고, 제비를 뽑아 지파마다 군사를 차출하자고 말합니다.
이렇게 지파들이 한마음으로 모인 적이 지금까지 있었습니까?
가나안을 몰아내려고 이만큼 연합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같은 이스라엘 지파와 싸우려고 모였습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의 분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기브아에서 벌어진 일은 분명한 악입니다.
이런 악을 그냥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베냐민에게 기브아의 범죄자들을 넘기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베냐민은 거절합니다.
오히려 자기 사람들을 감싸고 전쟁을 준비합니다.
베냐민도 분명히 잘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에게도 문제가 보입니다.
한 지파 전체와 전쟁을 벌이는 중대한 결정을 하면서, 이스라엘은 제대로 따져 보지 않았습니다.
사건의 증인은 사실상 레위인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정의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20장에서 사건을 설명할 때 그는 “저들이 나를 죽이려 했다”고만 하고, 자기가 첩을 내놓았다는 말은 쏙 뺍니다.
자기에게 불리한 부분은 빼고, 남의 악만 말한 것입니다.
그 말에 분노한 이스라엘은 서둘러 결론을 내립니다.
분노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분노가 판단보다 앞서 버린 것이 문제입니다.
사사기 17-21장에 반복되는 말이 있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히브리어로 보면 “자기 눈에 옳은 대로”입니다.
내 눈에 옳으면 옳은 것이 됩니다.
분노가 클수록 내 눈은 더욱 확신합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내 감정으로 한 판단이 최종 기준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 시대도 다르지 않습니다.
유튜브와 SNS를 보십시오.
더 충격적인 것, 더 화나는 것, 더 자극적인 것을 계속 보여줍니다.
뉴스 헤드라인만 보고도 화가 치밉니다.
짧은 영상 하나로 그 사람 전체를 판단하기도 합니다.
왜 이런 콘텐츠가 계속 나올까요?
분노와 두려움을 자극할수록 사람들이 더 오래 보고 더 많이 누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이렇게 화가 났으니, 저 사람이 틀린 것이다.”
이스라엘의 분노에도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노가 자기 판단을 절대화했습니다.
감정이 세질수록 자기 확신도 세지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 확신은 이제 기도의 자리에까지 들어옵니다.
[본론2]
이스라엘은 전쟁에 앞서 하나님께 묻습니다.
겉으로 보면 매우 신앙적입니다.
그런데 질문을 잘 살펴 보십시오.
18절, 첫 번째 질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어느 지파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워야 합니까?”
무엇이 문제입니까?
싸울지 말지는 이미 정해 놓고, 누가 선봉에 설지만 묻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이 질문은 사사기 1장 1-2절에서 가나안과 싸울 때 했던 질문과 똑같습니다.
“우리 가운데 어느 지파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워야 합니까?”
그때는 원수였지만, 지금은 형제입니다.
사사기 시대가 얼마나 어두워졌는지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유다가 먼저 갈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 편이시구나. 이번 전쟁은 이겼다.”
더구나 병력은 40만 대 2만 6천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습니까?
첫 전투에서 2만 2천 명이 죽습니다.
대참패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신 것일까요?
본문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기리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누가 먼저 올라갈지 물으니 유다라고 답하셨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물은 것에만 답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들은 것입니다.
그들은 저녁까지 울며 다시 묻습니다.
22-23절입니다.
“우리가 다시 가서 우리의 동기 베냐민 자손과 싸워도 되겠습니까?”
질문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이제야 “싸워도 되겠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이제야 베냐민을 “우리의 형제”라고 부릅니다.
첫 패배가 이스라엘의 확신에 금을 낸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하나님은 “올라가라”고만 하십니다.
이번에는 1만 8천 명이 죽습니다.
두 번의 전투로 4만 명이 죽었습니다.
한 사람에게 벌어진 악을 심판하려던 일이 수만 명이 죽는 내전이 되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의 자기 확신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이길 줄 알았는데 지고 나니, 보이지 않던 것이 보입니다.
베냐민이 틀렸다고 해서 나머지 지파가 자동으로 옳은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의 죄가 나의 의로움을 증명해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군가를 정죄할 때 쉽게 착각합니다.
“나는 하나님 편에 서 있다.”
아닐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이 전쟁으로 양쪽 모두를 심판하십니다.
이스라엘이 4만명 죽었지만 베냐민은 나중에 600명만 남고 거의 전멸합니다.
이긴 이스라엘은 어떻습니까?
21장에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에서 한 지파가 끊어졌다”며 통곡합니다.
이기고도 옳은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습니다.
두 번 패한 이스라엘은 세 번째로 하나님께 묻습니다.
이번에는 마음가짐이 다릅니다.
26절입니다.
온 백성이 나아가 울며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립니다.
아론의 손자 제사장 비느하스도 등장합니다.
질문도 달라졌습니다.
28절입니다.
“우리가 다시 올라가서 우리의 동기 베냐민 자손과 싸워야 합니까, 아니면 그만두어야 합니까?”
처음으로 “그만두는 것”이 선택지에 들어옵니다.
이제야 자기가 정해 둔 답을 내려놓기 시작한 것입니다.
원래 첫 번째 질문이 이것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 실패하고서야 제대로 묻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처음으로 승리를 약속하십니다.
“올라가거라. 내일은 틀림없이 내가 그들을 너희 손에 넘겨 주겠다.”
내 답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답이 들립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는 비극적인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이것은 원래 가나안 족속과 싸울 때 주시던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같은 민족과 싸우는 일에 이 말씀이 주어집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민족처럼 되어 버렸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으면서도,
마음에는 이미 답을 정해 놓고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청년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응답받았다”고 말할 때, 그 기도가 가짜였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미 기울어진 마음은 하나님의 음성보다 내 소원의 메아리를 듣기 쉽습니다.
답정너 신앙은 하나님께 묻지 않는 신앙이 아닙니다.
오히려 계속 묻고 기도합니다.
문제는 내 답을 손에 쥔 채 묻는다는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는 것은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내 뜻을 내려놓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하나님을 내 편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내 편으로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이것이 오히려 가장 안전한 길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은 수만 명의 피를 흘리고 나서야 자기 확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뜻을 정해 놓고 하나님께 도장을 받으려는 “답정너 신앙”을 고집하면, 우리의 가정과 공동체에 남는 것은 분열과 상처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원하는 것을 말하면 안 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하고 솔직하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내 원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원하는 바를 숨김없이 쏟아 놓고, 그 손을 펴서 내려놓는 것.
이것이 진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기브아의 그 밤을 다시 떠올려 보십시오.
레위인은 자기가 살려고 한 여인을 문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려고 자기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사사기는 “왕이 없어 각자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행했다”고 탄식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왕이 계십니다.
자기 뜻을 꺾고 십자가를 지신 참된 왕이십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 내려놓아야 할 “정해 둔 답”은 무엇입니까?
주님이 우리의 참된 왕이 되실 때, 비로소 우리 가정과 공동체에서 분노와 자기 확신이 무너집니다.
그 자리에 하나님의 진짜 평안과 생명의 열매가 맺힐 것을 믿습니다.
이 은혜를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