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작된 정의,편집된 진실
Notes
Transcript
1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2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3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4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
5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6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7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찬송가: 322장 세상의 헛된 신을 버리고
1 이에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와 길르앗 땅에서 나와서 그 회중이 일제히 미스바에서 여호와 앞에 모였으니
2 온 백성의 어른 곧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어른들은 하나님 백성의 총회에 섰고 칼을 빼는 보병은 사십만 명이었으며
3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올라간 것을 베냐민 자손이 들었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이르되 이 악한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우리에게 말하라 하니
4 레위 사람 곧 죽임을 당한 여인의 남편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내 첩과 더불어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유숙하러 갔더니
5 기브아 사람들이 나를 치러 일어나서 밤에 내가 묵고 있던 집을 에워싸고 나를 죽이려 하고 내 첩을 욕보여 그를 죽게 한지라
6 내가 내 첩의 시체를 거두어 쪼개서 이스라엘 기업의 온 땅에 보냈나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음행과 망령된 일을 행하였기 때문이라
7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가 다 여기 있은즉 너희의 의견과 방책을 낼지니라 하니라
전형상화
사사기 부록의 두번째 에피소드입니다. 역시 레위인이 등장 합니다. 종교인 (레위지파)의 타락을 이야기 합니다. 첩을 들이고, 자신의 안위를 위해 약한자를 수단화 하고, 자신의 분노를 정의의 이름으로 포장하여 민족 상잔의 도화선을 만듭니다. 이스라엘과 베냐민은 자신들의 잘못을 돌아보지 않고 지파의 이기주의에 빠져 기브아 주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전쟁도 불사합니다.
본문의 특이한 점은 등장인물의 이름이 없습니다. 익명성입니다. 이 당시의 레위인(종교인), 아버지, 그리고 첩이 이렇게 대접받았습니다.
1절: 모든 이스라엘이(단에서 브엘세바,동편의 2지파반까지,길르앗) 베냐민 지파를 제외하고 모입니다. 두세 증인이 필요하고 당사자가 그 자리에 있어서 변호를 해야 합니다.(아마도 에브라임 지파의 노인도 증언 했을 것이다) 3절에 보면 가해자인 기브아 주민 ,베냐민 자잪는 이 총회에 참석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변호 하지도 않고 잘못된 사실을 알고도 자신의 지파를 변호하기 위해서 동참을 거부합니다.
(편집된 진실)
그러나 보고를 받은 이스라엘은 진실을 보지 못합니다.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 나와서 그 회중이 일제히 … 모였으니”(20:1). 400,000명의 군대가 모인다(2절). 사사 옷니엘 이후 처음으로 이스라엘이 연합한다. 그러나 이 연합은 적들에게 대항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영토 내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저지른 일에 대한 혐오 때문이었다. 그 일의 시작이 어디에서 비롯됩니까? 그들은 하나님께 귀 기울이지 않고, 어떤 사사에게 귀 기울이는 것도 아니고, 도덕적으로 세상과 깊이 타협한 레위인에게 귀 기울인다(3절).
일어난 일에 대한 레위인의 진술은 뚜렷이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잘못을 숨기려고 편집되었습니다. 그는 어디서 참상이 일어났는지를 강조하면서(4절)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그랬다는 사실을 외면하고(19:22), “기브아 사람들이 … 나를 죽이려 했다고”(20:5) 주장하지만, 사실 그들은 그를 강간하기 원했던 것이다(19:22). 그는 첩을 냉담하게 희생 시켰고, 첩을 보호하려 싸우지 않았다는 사실을 누락하고, 그들이 그녀를 “욕보였다”고만 말한다(20:5). 이 이야기를 듣고 아무도 레위인 자신이 여자의 죽음에 일조 했다고 의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이지만 모든 사실을 정황을 정확하게 보고하지 않고 자신에게 유리한 사실만 말하여 복수하고자 하는 자신의 목적을 감추었습니다.
요점은 기브아 사람들이 분명히 악당이고 노골적으로 가증하게 죄악 되었지만, 레위인의 도덕성도 더 미묘하긴 하지만 결코 낫지 않았다는 것이다. 역사 속의 이 일화는 로마서 처음 두 장 반의 실물 증거다. 거기서 바울은 말한다. 명백히 방탕하고 불경건한 이교 세계도 죄에 빠져 있지만, 로마서 2장에서 그가 지적한다. 도덕적이고, 종교적이고, 겉으로 ‘좋은’ 사람도 죄에 빠져 있다. 그들은 속마음으로 하나님도, 다른 사람도 상관하지 않는다. 바울은 그것을 절대적 명제로 요약한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롬 3:10, 12).
오늘 이 이야기에서 아무도 의롭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도 의롭지 않습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이렇습니다. 타락한 종교 성회의 모습은 여전히 이렇습니다. 목회자의 타락 (정치적 타락, 도덕적 타락,교리적 타락)을 권징 하는 노회와 총회의 모임에서 누구도 목사들을 권징 하는데 앞장서지 않습니다. 특히나 그 목사가 권세가 있고, 큰 교회를 하고 있으면 더욱 그렇습니다. 교회가 타락한 증거입니다.
레위인의 말은 정의 같지만 조작된 정의입니다. 교묘하게 자신을 변호하고 기브아 주님들의 죄를 부각하는 언어 입니다. 대중들을 흔드는 언어 입니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교묘하게 조작된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것입니다.
형상화
조작된 정의와 편집된 진실도 오늘날 많습니다. 교회안에서도 그렇습니다. 사실이지만 그 사실에 자신의 의도를 감추어서 슬쩍 자극합니다.
오늘날 세상은 성자유와 성평등을 넘어서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위배하는 죄를 (동성애)죄라고 말할 수 없는 시대가 되고 있습니다. 나의 성 취향을 반대하면 그 자체가 공격행위 이기 때문에 폭력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차별이고 폭력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포괄적 차별금지법으로 만들어서 신앙의 자유를 압박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분별하고 반대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고 죄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도덕적이고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성도들에게 동성애를 죄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법적으로 막는 것은 더 큰 악이기에 우리는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집단 가운데 하나님 말씀을 기초로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정치적 목적과 이데올로기적인 요소를 품고 함께 동참하는 비 도덕적이고 비 성경적인 세력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또한 분별해야 합니다.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그들을 옹호하고 받아 들이고 변호한다면 오늘 본문의 베냐민 지파와 별반 다른 것이 없습니다.
인간은 우리의 의도를 가지고 얼마나 선한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하면서도 악한 의도를 가질 수 있는 부패한 존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로마서 7:21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마태복음 6:1 “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23:25 “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이사야 64:6 “6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교회 안에서도 우리가 말을 전하는 일을 삼가야 하는 이유는 우리는 사실만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해석하는 바를 더하여서 전합니다. 그런데 그 해석하는 바, 여과하는 필터가 오염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전적으로 부패하였습니다.
로마서 3:10–18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재형상화(적용)
마태복음 5:37 “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자신의 이익과 상황에 따라 말을 보태거나 뺴지 말라는 것이다. 모든 일에 그리스도인은 정직과 투명성을 가져야 합니다. 저작된 정의, 편집된 진실은 그것이 사실적 정의이고 진실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가증한 일입니다. 우리는 항상 ‘코람데오’ 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쉬운것 같지만 어려운 것은 손실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이 더 중요한 가치인지 깊게 생각하고 스스로를 돌아봐야 합니다.
로마서 12:2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분별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가운데 있으나 뱀처럼 지혜로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바보가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손해보는 자리에 스스로 낮은 자리에 처하는 것은 그들이 바보이고 힘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에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알고 스스로 그 자리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을 태워 어둠을 비추이는 빛이 되기를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삶입니다. 고린도전서 6:2 “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우리는 분별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말씀이 기준이 됩니다. 성경 말씀이 우리의 판단의 기준입니다. 말씀에 비추어서 세상을 판단하고 우리의 상황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 그리스도인 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