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016 금요심야 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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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종은 주인에게 자신이 종으로서 존재해야 하는 것을 계속 증명해야 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반면에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신이 자녀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서론: 마음이 무거웠던 여행
성도 여러분, 이번 선교에서 제가 경험한 이야기로 시작하겠습니다.
그동안 저는 선교를 가면 일주일 동안 사역을 하고, 마지막에 여행을 다녔습니다. 그리고 그 여행을 아주 자연스럽게 사역에 대한 보상으로 여겼습니다. "일주일 동안 열심히 했으니까, 이 정도는 누려도 되지." 이렇게 생각하면 여행이 훨씬 편했습니다. 일한 만큼 쉬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이번 선교는 달랐습니다. 사역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한 일이 없는 채로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내가 한 것도 없는데 이런 것을 누려도 되나?" 맛있는 것을 먹어도, 좋은 풍경을 봐도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제 안에 있던 생각을 보여 주셨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일하면 받고, 못 하면 못 받는 관계로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누리면서도, 마음 한쪽에서는 계속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얼마나 했는가. 그러니 얼마나 누릴 자격이 있는가."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 여행뿐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누리는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가족, 건강, 오늘 아침 눈을 뜬 것, 이 예배의 자리, 심지어 목회자로 서 있는 이 자리까지, 제가 일해서 번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전부 선물이었습니다. 저는 선물을 받으면서 월급을 받는 줄 알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기도를 많이 한 주간에는 하나님이 나를 좋아하실 것 같고, 예배에 빠지거나 말씀을 놓친 주간에는 하나님이 실망하셨을 것 같지 않습니까? 봉사를 열심히 할 때는 당당하다가, 아무것도 못 하는 시기에는 하나님 앞에 서기가 불편하지 않습니까? 예배와 기도와 봉사가 기쁨입니까, 숙제입니까?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행복하십니까?
오늘 저는 이 질문을 안고 예수님이 들려주신 가장 유명한 비유 속으로 여러분과 함께 들어가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사실 우리가 흔히 아는 탕자만이 아닙니다. 또 한 사람,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큰아들입니다.
본문 배경: 이 비유는 누가, 누구에게, 왜 하신 말씀입니까
비유가 나온 상황은 15장 1-2절에 있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당시 사회에서 함께 식탁에 앉는다는 것은 그 사람을 받아들인다는 뜻이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죄인과 같은 식탁에 앉는 예수님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 가지 비유를 연달아 들려주십니다.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그리고 잃은 아들입니다. 세 비유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잃은 것을 찾으면 잔치를 합니다. 양을 찾은 목자는 "나와 함께 즐기자"고 이웃을 부르고(6절),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도 같은 말을 합니다(9절). 하나님의 마음은 잃은 자가 돌아올 때 기뻐서 잔치를 열고 싶은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비유에서만 그 잔치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큰아들입니다. 이 사람은 누구를 가리키겠습니까? 바로 지금 예수님 앞에서 수군거리고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러니 이 비유의 무게는 둘째 아들이 돌아오는 장면 못지않게 큰아들이 잔치에 들어가느냐 아니냐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비유를 끝맺지 않으십니다. 큰아들이 들어갔는지 알려 주지 않으십니다. 질문을 청중에게 남겨 두신 것입니다.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오늘 우리는 이 질문 앞에 섭니다. 우리는 아버지 곁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큰아들의 자리에 서 있지는 않은지, 오늘 말씀 안에서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대지 1. 은혜는 자격과 상관없이 먼저 달려옵니다 (눅 15:11-24)
먼저 둘째 아들 이야기부터 보겠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라고 합니다(12절). 아버지가 살아 계신데 유산을 달라는 것은 당시 문화에서 "아버지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과 다름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요구를 받아 줍니다.
아들은 며칠 만에 재산을 다 모아 먼 나라로 가서 방탕하게 살며 모두 낭비합니다(13절). 그러다 흉년이 들고 아들은 궁핍해집니다. 유대인에게 부정한 짐승인 돼지를 치는 일까지 하게 되고,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려 해도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15-16절).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간 것입니다.
그때 17절은 말합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그는 아버지 집을 떠올립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그리고 돌아갈 결심을 하며 말을 준비합니다. 18-19절입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여기서 이 아들의 계산을 눈여겨보십시오. "나는 아들 될 자격을 잃었다. 그러니 품꾼이라도 되어 일해서 먹고살겠다. 일해서라도 아버지 집에 있을 자리를 얻어 내겠다." 그의 머릿속에서 아버지와의 관계는 일해서 얻는 관계입니다. 돌아가는 길에도 그는 계산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0절을 보십시오. 이 한 구절에 복음이 있습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직도 거리가 먼데"입니다. 아들이 아직 준비한 말을 꺼내지도 않았고, 자기 죄를 고백하지도 않았고, 어떤 자격도 증명하지 못했는데, 아버지는 이미 아들을 보고 있었습니다. 매일 먼 길을 바라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달려갑니다. 당시 중동에서 나이 든 가장이 긴 옷자락을 걷어 올리고 달려가는 것은 체면을 완전히 내려놓는 모습이었다고 많은 주석가들이 지적합니다. 아버지는 체면보다 아들을 택하셨습니다.
21절에서 아들이 준비한 말을 시작합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런데 여기까지입니다. 그가 준비했던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는 마지막 말은 본문에 나오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말을 끊고 종들에게 명령하기 때문입니다.
22절입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이 세 가지는 모두 아들의 신분을 회복시키는 표입니다. 종은 맨발로 일했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품꾼이 되려고 왔는데, 아버지는 그에게 아들의 옷을 입히십니다.
그리고 23-24절입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여러분, 이 장면을 놓치지 마십시오. 아버지는 "네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지켜보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품꾼으로 몇 달 일하며 진심을 증명해 보라"고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일하러 온 아들에게 잔치를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이 내 아들"이라고 부르십니다. 먼 나라에서 모든 것을 허비하고 돼지 틈에 있을 때도, 아버지에게 그는 여전히 내 아들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에베소서 2장 4-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허물로 죽어 있던 때, 아직 거리가 멀 때,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에 하나님은 먼저 달려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자격을 갖춘 뒤에 시작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직 멀리 있을 때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우리는 이 은혜로 구원을 받아 놓고, 그다음부터는 이상하게도 일해서 받는 방식으로 살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은혜로 들어왔는데, 신앙생활은 점수로 이어 갑니다. 그 모습이 둘째 아들이 아니라 큰아들에게 가장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대지 2. 곁에 있어도 누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눅 15:25-32)
25절입니다.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큰아들은 밭에 있었습니다. 일하고 있었습니다. 동생처럼 집을 떠난 적도, 재산을 낭비한 적도 없습니다. 겉으로 보면 흠잡을 데 없는 아들입니다.
그런데 집에 가까이 와서 잔치 소리를 듣고 종에게 묻습니다. 동생이 돌아왔고 아버지가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다는 말을 듣자 28절은 말합니다.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당시 문화에서 아버지가 잔치를 여는데 맏아들이 들어가지 않는 것은 아버지에게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는 일이었습니다. 맏아들은 오히려 잔치에서 손님을 맞이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장면이 이어집니다.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가 나옵니다. 20절에서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향해 달려갔고, 이번에는 첫째 아들을 위해 잔치 자리를 비우고 문밖으로 나오십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 모두에게 찾아가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큰아들의 항변이 터져 나옵니다. 29-30절입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이 짧은 말에 큰아들의 신앙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세 가지만 보겠습니다.
첫째, "섬겨"라는 단어입니다. 큰아들이 쓴 이 동사는 종이 주인에게 종 노릇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아들이었는데도 종처럼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집은 그에게 쉼과 잔치가 있는 곳이 아니라 일하는 곳, 계산하는 곳이었습니다.
둘째, "염소 새끼라도"입니다. 여러 해 일했는데 염소 새끼 한 마리 받지 못했다는 불만입니다. 그는 자기가 한 만큼 받아야 한다는 계산 속에서 살았습니다. 자기 수고와 받은 것의 장부를 머릿속에 늘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셋째, "이 아들"이라는 호칭입니다. 그는 동생을 "내 동생"이라 부르지 못하고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자기 공로를 계산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날카롭게 봅니다. 그리고 형제를 형제로 부르지 못합니다.
종과 아들의 차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종과 아들의 차이는 일을 하느냐 안 하느냐가 아닙니다. 아들도 아버지의 집에서 일합니다. 차이는 이것입니다. 종은 주인에게 자기가 이 집에 있어야 할 이유를 계속 증명해야 합니다. 오늘 일을 못 하면 내일 내 자리가 위태롭기 때문입니다. 종은 주인의 마음에 들어야 하고, 쫓겨나지 않으려면 쓸모를 입증해야 합니다. 그래서 종은 늘 불안합니다. 불안한 사람은 남과 비교합니다. 인정받지 못하면 억울해합니다. 큰아들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기가 자녀라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됩니다. 일을 잘해서 아들이 된 것이 아니라 아들이기 때문에 아들입니다.
이런 아이를 상상해 보십시오. 엄마에게 "나 오늘 숙제 다 했으니까, 청소도 했으니까 나 사랑해 줘"라고 말하는 아이입니다. 마음이 아프지 않습니까? 부모는 아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심지어 숙제를 못 했어도 사랑합니다. 사랑은 성과에서 나오지 않고 관계에서 나옵니다.
아버지의 대답이 바로 그것을 말해 줍니다. 31절입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얘"는 자녀를 부르는 말입니다. 큰아들이 "나는 종처럼 일했다"고 말할 때, 아버지는 "얘"라고 부르십니다. 아버지는 한 번도 그를 종으로 보신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다." 큰아들은 염소 새끼 한 마리를 얻으려고 평생 밭에서 일했지만, 아버지는 처음부터 전부를 주고 계셨습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얻어 내야 하는 줄 알았던 것이 이미 그의 것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7절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아들은 상속자입니다. 큰아들은 상속자인데 품꾼처럼 살았던 것입니다. 그는 누릴 수 있었는데 누리지 못한 사람입니다. 아버지 곁에 있었지만 아버지의 잔치는 누리지 못했습니다. 일해야 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미 가진 것을 누릴 줄 몰랐습니다. 몸은 아버지 집 안에 있었는데 마음은 아버지와 먼 곳에 있었습니다.
저는 선교지에서 이 큰아들이 바로 저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만이 아닙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 우리가 이 큰아들을 많이 닮았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이만큼 했다는 마음, 더 해야 인정받을 것 같다는 마음, 못 했을 때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입니다. 그러면 예배도 봉사도 점점 짐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칩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보았던 둘째 아들도 사실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며 돌아왔습니다. 방탕으로 아버지를 떠났든, 성실로 아버지 곁에 남았든, 두 아들은 같은 질문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나는 이 집에 있을 자격을 어떻게 증명하지?" 한 사람은 증명할 수 없다고 절망했고, 한 사람은 증명했다고 자부했을 뿐입니다. 이 질문은 우리 모두의 질문입니다.
대지 3. 예수님은 일하러 오라고 하지 않으시고 쉬러 오라고 하십니다 (마 11:28-30)
이제 이 두 아들을 향한 예수님의 초대를 들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어떤 짐을 지우고 있었는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 4절에서 그들을 이렇게 꾸짖으십니다.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율법에 수많은 규정을 덧붙여 놓고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나님께 인정받는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 짐을 지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늘 모자라다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큰아들이 바로 그 짐을 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28절의 "다"를 보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방탕으로 지친 둘째 아들도 있고, 성실로 지친 큰아들도 있습니다. 죄책감이라는 짐을 진 사람도 있고, 의무감이라는 짐을 진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둘 다 부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시는 약속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일을 더 시키리라"가 아닙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인정받기 위해 한 걸음 더 내딛으라는 초대가 아닙니다. 지금 너를 받아 주었으니 쉬러 오라는 초대입니다. 조건이 없습니다. 이만큼 해 오면 쉬게 해 주겠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바로 그 모습 그대로 오라고 하십니다.
이어지는 29-30절은 이렇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여기서 오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멍에를 아예 없애 주겠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메는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하십니다. 멍에는 두 마리 소가 함께 메는 도구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메시니 혼자 지는 짐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짐을 지는 분이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분입니다. 인정받으려고 압박하는 주인이 아니라, 지친 나를 이해하고 받아 주는 분입니다.
이제 큰아들의 짐이 보이십니까? 종이 주인의 인정을 받으려고 지는 짐과,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하는 수고는 겉으로는 같은 일이어도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는 무겁고 하나는 가볍습니다. 하나는 나를 지치게 하고 하나는 나를 기쁘게 합니다. 일의 양이 아니라 마음이 짐을 결정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다 내게로 오라"고 부르시는 이유입니다. 증명하며 사는 삶이 가장 무거운 짐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15절은 말합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종의 영은 무서워하는 영입니다. 증명해야 하는 관계는 두려움을 낳습니다. 그러나 아들의 영은 "아빠"라고 부르는 영입니다. 증명이 필요 없는 관계는 친밀함을 낳습니다. 우리가 받은 것은 종의 영이 아니라 아들의 영입니다.
종의 자리에서 일어나십시오. 증명하러 가는 길이 아니라, 아들로서 쉬러 가는 길입니다.
대지 4. 연약해도 괜찮습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들으면서 마음 한쪽에서 이런 생각이 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맞는 말인데, 저는 너무 연약합니다. 해야 할 것을 제대로 못 하고, 실패하고, 부족한 모습이 너무 많습니다. 이런 저를 아버지가 정말 받아 주실까요?"
여러분, 세상은 연약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강해져라. 약하면 도태된다." 그리고 노력해도 여전히 약하면 어떻게 합니까? 능력이 없다고 여기고, 쓸모없다고 하찮게 대합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렇게 대하실 것이라고 은근히 생각합니다. "내가 이렇게 약한데, 하나님이 실망하시겠지." 큰아들이 자기 공로를 내세운 것도, 둘째 아들이 품꾼으로라도 받아 달라고 한 것도 결국 이런 두려움에서 나왔습니다. 연약한 모습으로는 사랑받을 수 없다는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르는 찬송 "예수 사랑하심은"의 3절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연약할수록 예수님이 더욱 귀히 여기시고, 높은 보좌 위에서 낮은 나를 보신다는 고백입니다. 어린아이도 부르는 이 찬송에 놀라운 신학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찬송가 작사자의 감상이 아니라 성경이 보여 주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시편 138편 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는 높이 계셔도 낮은 자를 굽어살피시며." 높은 곳에 계시지만 눈을 낮은 자에게 두십니다. 이사야 42장 3절은 메시아를 이렇게 그립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세상은 상한 갈대를 버리고 꺼져 가는 등불을 던져 버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꺾지 않으시고 끄지 않으십니다. 시편 103편 14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하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으십니다. 처음부터 아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유가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강해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잘해서 사랑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내가 약하다고 사랑이 줄어들 이유가 없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가 약해질수록 더 커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처음부터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연약한 자리에 설 때 그 사랑이 가장 선명하게 느껴지고,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강할 때는 내 힘으로 한 줄 알지만, 약할 때는 은혜인 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약함 속에서 들은 말씀이 그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입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저도 이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저는 한동안 제가 목회자로서 자격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능력도, 준비도, 믿음도 부족한 것 같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목사 만들었다." 처음에는 이 말씀이 "너는 특별하다"는 뜻으로 들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이 말씀은 ”네 힘으로 된 것이 아니다"라는 뜻이었습니다. 네 능력, 네 노력으로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니라 내가 은혜로 세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제 연약함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능력으로 세우신 것이 아니니 능력이 없다고 무너질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은 연약해 보여도 세우신 분이 끝까지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듣고 제 마음이 회복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알았습니다. 이 일은 제가 하나님께 증명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주신 은혜로 하는 일이라는 것을요.
바울도 같은 고백을 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그는 많이 수고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덧붙입니다.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하겠습니다. 연약함과 죄는 다릅니다. 능력의 부족, 한계, 실패는 은혜가 머무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죄를 계속 선택하면서 "어차피 사랑하시니까" 하는 것은 은혜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는 아버지의 품에 안겼지만 아버지 앞에서 자기 죄를 고백했습니다. 은혜는 죄를 가볍게 여기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를 내려놓고 돌아올 용기를 줍니다. 아버지가 달려와 안아 주실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부끄러운 모습 그대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누려야 할 은혜입니다. 강해져서 인정받는 은혜가 아니라, 연약한 그대로 사랑받는 은혜입니다.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은혜, 자격이 없어도 달려오시는 은혜, 약할수록 더 선명해지는 은혜입니다.
적용: 은혜를 누리며 나아가는 신앙생활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다섯 가지로 정리하겠습니다.
첫째, 인정받으려는 마음을 내려놓으십시오. 오늘 내가 얼마나 했느냐로 하나님의 사랑을 계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종으로 서지 말고 아들로 서십시오. 오늘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나 드립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종으로 서 있는가, 아들로 서 있는가?" 못 해낸 날에도 아버지는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인정받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받아들여진 사람입니다.
둘째, 이미 주신 것을 누리십시오. 오늘 눈을 뜬 것, 가족, 일터, 건강, 이 예배의 자리까지, 우리가 벌어서 얻은 것이 있습니까? 보상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에베소서 2장 6-7절은 하나님이 우리를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 중 하나가 그분의 은혜의 풍성함을 우리가 누리는 것입니다. 누리는 것을 미안해하지 마십시오. 아버지는 우리가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셋째, 연약한 그대로 나아가십시오. 강해진 뒤에, 준비된 뒤에, 자격을 갖춘 뒤에 오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지금 모습 그대로 오라고 하십니다. 기도할 힘이 없으면 힘이 없는 그대로, 믿음이 흔들리면 흔들리는 그대로, 부족함을 숨기려 애쓰지 말고 아버지 앞에 내놓으십시오. 아버지는 "아직도 거리가 먼데" 이미 달려오시는 분입니다.
넷째, 감사로 나아가십시오. 예배는 점수를 따러 가는 자리가 아니라 이미 주신 은혜에 감사하러 가는 자리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돌리려는 협상이 아니라 아버지와 누리는 대화입니다. 말씀 읽기는 숙제가 아니라 아버지의 음성을 듣는 시간입니다. 봉사는 인정받는 수단이 아니라 받은 은혜가 흘러가는 길입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이 말하듯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순서가 있습니다. 먼저 사랑받고, 그 사랑에서 섬깁니다. 같은 행동이어도 마음이 달라지면 짐이 사라지고 기쁨이 시작됩니다. 증명하기 위한 순종과 사랑에서 나오는 순종은 겉모양은 같아도 전혀 다릅니다.
다섯째, 신앙생활이 행복해야 합니다. 시편 16편 11절은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15장 11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신앙은 이를 악물고 버티는 신앙이 아니라 아버지의 잔치에 앉은 신앙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짐이 아니라 행복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행복이 늘 기분이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힘든 날도, 눈물 나는 날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날에도 흔들리지 않는 행복의 뿌리는 환경이 아니라 ”나는 아버지의 사랑받는 자녀다"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결론: 아버지가 문 앞에서 기다리십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큰아들이 잔치에 들어갔는지, 아니면 끝내 문밖에 서 있었는지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아버지는 문밖에서 손 내밀고 계십니다. 이 질문이 오늘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너는 들어올 것이냐?"
혹시 오늘 이 자리에, 오래 교회를 다니고 열심히 섬겼지만 마음 한구석이 계속 지쳐 있는 분이 계십니까? 내가 충분히 하고 있는지 늘 불안하신 분이 계십니까? 내가 너무 연약해서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이 없다고 느끼시는 분이 계십니까? 혹은 큰아들처럼 곁에 있으면서도 잔치가 남의 일처럼 느껴지는 분이 계십니까?
아버지는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렇게 부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한 일이 없어도, 해내지 못한 것이 있어도, 연약해 보여도, 아버지는 이미 우리를 사랑하시고 이미 다 주셨습니다. 이제 증명하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종의 자리에서 일어나 아들의 자리에 앉으십시오. 그 사랑을 믿고, 그 은혜를 누리며, 감사함으로 나아가십시오.
우리의 신앙생활이 짐이 아니라 행복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사랑을 믿는 마음으로 "예수 사랑하심은"을 함께 고백하며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