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당에 그어진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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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배당에 그어진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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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 미국 선교사 사무엘 무어는 지금의 조선호텔 자리에 곤당골교회를 세우고, 예수학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그중에는 당시 사람대접조차 받지 못하던 백정의 자녀들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학당에 다니던 어린 박봉출이 무어 선교사를 찾아와 울며 부탁했습니다. “우리 아버지 좀 살려주세요.”
아버지 박성춘이 장티푸스에 걸려 죽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어 선교사는 의사 에비슨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당시 왕의 주치의였던 에비슨은 직접 백정의 집을 찾아가 그를 치료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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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춘은 병이 나은 후 왕을 치료하는 의사가 자신처럼 천대받는 사람을 찾아왔다는 사실에 감격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그와 여러 백정들이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교회에 다니던 양반들이 반발했습니다. “백정들과는 함께 예배드릴 수 없습니다. 저들을 내보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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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는 거절했습니다.
모두 같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양반들은 교회를 떠났습니다.
얼마 뒤에는 자신들은 앞에 앉고 백정들은 뒤에 앉도록 자리를 나누면 돌아오겠다고 제안했습니다.
무어가 그것도 거절하자, 그들은 따로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2년도 지나지 않아 그들은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왔습니다.
훗날 백정 박성춘은 그 교회의 장로가 되었습니다.
이 역사를 이어온 교회가 종로에 있는 승동교회입니다.
같은 하나님을 믿고 같은 예배당에 앉아 있어도, 사람 사이에 선을 그을 수 있습니다.
오늘 야고보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사람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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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
앞서 1장에서는 믿음과 행함에 대한 강조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그것을 행하는 게 진정한 믿음이자 참된 경건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행하지 않는 것은 거울을 보고도 금새 잊어버리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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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야고보서는 그 불일치가 일어나는 구체적인 장소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예배당 입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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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사회적 경제적 차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교회 성도들 대부분이 가난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리스도인들은 잘먹고 잘사는 부자들을 보면서 마음이 흔들리는 유혹이 있었습니다.
‘신앙만 좀 타협하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텐데’ 이런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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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유혹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교회에 두 사람이 들어옵니다.
한 사람은 금반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었습니다.
누가봐도 지위있는 부자입니다.
반면, 다른 한 사람은 허름한 옷차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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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보십시오.
부자한테는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라고 안내합니다.
반면 가난한 자에게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 밑에 앉든지 알아서 하시오”합니다.
부자는 우대해주고, 가난한 자는 무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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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야고보는 이 장면에 분노합니다.
1절입니다.
“영광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 사람을 차별하지 마십시오.”
어떻게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럴 수 있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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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야고보는 4절에서 이것을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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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악하다는 것일까요?
그들은 신앙적 기준이 아니라 재물이라는 세상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한 것입니다.
마치 옷가게 점원이 손님을 훑어보듯, 교회에서 사람을 그렇게 판단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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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의 ‘차별하다’는 말이 1장 6절의 ‘의심하지 말고 구하라’고 할때 ‘의심하다’와 같은 뿌리를 가진 단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차별하는 사람은 의심하는 사람, 곧 두 마음을 품은 사람입니다.
입으로는 믿음을 말하지만 마음 속에는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품고 있는 것입니다.
그 두마음이 자리를 안내하는 손짓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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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이런 일이 없을 거 같지만 너무나 자주 일어납니다.
목회자들부터 그렇습니다.
TV에 나온 어떤 교회를 보니 성도들중에 VIP가 있어 특별관리하고 있었습니다.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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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교회는 장로가 되려면 많은 돈을 헌금내야 합니다.
돈이 없으면 직분을 맡기도 힘들다는 말도 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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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부자가 교회에서 떠나려고 하면 담임목사가 어떻게든 잡으려고 하죠.
그런데 가난한 사람은 조용히 사라지면 오랫동안 모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단지 한국교회에만 있는게 아닙니다.
우리 마음 안에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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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도대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이길래 우리는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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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합니다.
눈으로 드러내놓고 판단하기도 하고, 겉으로는 아닌 척하면서 마음 속으로는 판단하기도 합니다.
돈없고, 빽없는 사람을 속으로 낮춰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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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5절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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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부요한 자’란 어떤 의미일까요?
가난한 사람은 배고프고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만 바라볼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니 그들의 믿음은 점점 더 자라나는 것입니다.
반면, 부자들은 재물만 바라보기 때문에 믿음은 더 궁핍해지기 쉽습니다.
우리도 힘들고 어려울때 주님 찾지, 편안해지면 잘 안 찾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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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모든 가난한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재물에 더 집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부자이면서도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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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여기서는 가난한 사람이 하나님을 더욱 의지할 가능성이 높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가난한 자’란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뿐만 아니라 마음이 가난한 자를 포함하고 있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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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이들을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물려받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땅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을 다스리시는 모든 자리입니다.
그 안에 구원이 있고, 영생이 있고, 사랑과 자유와 기쁨과 평화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오늘 이미 맛보고 있고, 완성될 날을 기다립니다.
그들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들인 우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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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교회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그들을 차별하며 무시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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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야고보는 부자들을 우대하고 가난한 자들을 무시하는 게 얼마나 모순되고 어리석은 짓인지 지적합니다.
6-7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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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부자들은 그리스도인을 억누르고 법정으로 끌고 가 재산을 빼앗았습니다. 부패한 법정에서는 돈 있는 사람이 이겼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오늘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들은 성도들에게 불린 "아름다운 이름", 곧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욕했습니다.
세상 법정에서 그렇게 짓밟히던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까지 똑같이 짓밟힌다면, 이보다 모순된 일이 어디 있습니까?
8절입니다.
야고보는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를 ‘으뜸가는 법’, 원어로는 ‘왕의 법’이라고 부릅니다.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법이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전체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뭘까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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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웃’이 누구일까요?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그 사람입니다.
9절은 말합니다.
사람의 외모를 보고 차별하는 순간 우리는 죄를 짓고 이 법의 범법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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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차별을 큰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살인하고 간음하는 것은 큰 죄라고 생각하면서, 은밀한 차별은 가볍게 여깁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10-1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율법 전체를 지키다가도 한가지를 어기면 모두 어긴 것이라고 말합니다.
율법은 한장의 유리창과 같습니다.
그래서 한쪽 귀퉁이만 금이 가도 유리창은 깨진 유리창이 됩니다.
율법을 주신 분이 한분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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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말씀중 어떤 것은 무겁게, 어떤 것은 가볍게 여깁니다.
야고보는 그 저울을 치우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얼굴을 보고 위아래를 나누는 작은 눈짓 하나도 왕의 법 앞에서는 작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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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야고보는 결론을 내립니다.
12절입니다.
여러분은, 자유를 주는 율법을 따라 앞으로 심판을 받을 각오로, 말도 그렇게 하고 행동도 그렇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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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절은 말합니다.
긍휼을 베풀지 않은 사람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습니다. 내가 남을 보는 눈으로 하나님도 나를 보십니다.
내가 남을 재는 잣대로 하나님도 나를 재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모두 흔들립니다. 누가 이 잣대 앞에 설 수 있습니까?
13절 끝에 소망이 있습니다.
"긍휼은 심판을 이깁니다."
우리는 예배당 입구에서 좋은 자리를 받을 자격이 있어서 들어온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설 자리 없던 가난한 영혼이었습니다. 영광의 주님은 그런 우리를 위해 부요하시나 가난하게 되셨습니다(고후 8:9).
불의한 법정에 서셨고,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낮은 자로 죽으셨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의 심판을 이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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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오늘 야고보는 우리의 믿음이 어떻게 우리의 행동과 어긋날 수 있는지 보여 주었습니다. 그것은 나조차 모르게 아주 은밀하게 일어납니다.
여러분은 어떤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십니까? 내 위는 누구이고, 내 아래는 누구입니까?
요즘 아이들은 서로 "너희 집 임대주택이야?" 하고 묻는다고 합니다.
임대주택에 사는 아이는 친구들 사이에서 차별을 받는다고 합니다.
몇 해 전에는 아이들이 교복처럼 같은 브랜드의 패딩을 입었습니다.
부모들은 우리 아이가 차별받지 않도록 무리해서 사 입혔고, 지금은 더 비싼 옷이 유행할까 봐 걱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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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서 차별이 없어질까요?
차별은 입히는 옷이 아니라 바라보는 눈에서 시작됩니다.
눈이 바뀌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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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눈으로 보면, 다 가진 것 같은데 속은 빈 깡통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속이 꽉 찬 부자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믿음에 부요한 사람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이 긍휼을 받았기에, 이제 우리도 사람을 세상의 눈이 아니라 긍휼의 눈으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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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회는 사람이 더 많아져도 이렇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밀려난 사람이 가장 귀한 손님으로 앉는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영광의 주님은 우리를 긍휼로 맞아 주셨습니다.
그 긍휼을 입은 함께걷는교회 식구들이 사람을 다르게 보고, 다르게 맞이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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