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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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읽은 요나서는 언뜻 보기에 단순히 요나에게 있었던 이야기만을 기록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요나서는 구약에서 역사서가 아니라 선지자의 글, 즉 선지서로 분류가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말씀이 이사야서나 예레미야서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지자적인 어떤 메시지를 주고자 한다는 사실을 염두해두고 읽어야 할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종종 선지자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기도 하십니다. 대표적으로 선지자 호세아의 경우에는 간음한 음녀와 결혼하도록 하심으로, 이스라엘이 이방신과 결혼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선지자 아히야의 경우에는 그 자신의 옷을 열 두 조각으로 찢었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선지자가 때로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본문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선지자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지금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여, 다른 길로 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주의 도를 따라 주의 길로 행하지 않으면, 그곳에는 하나님의 진노만 있을 뿐, 평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결국 요나는 하나님의 진노의 폭풍우를 만나게 되고, 결국 자신의 몸을 심판의 바다 속에 던지우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은 이처럼 요나가 바다에 빠진 이후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7절에 하나님께서는 큰 물고기 한 마리를 예비하시고, 요나를 삼키게 하십니다. 계속해서 2장 1절부터 9절까지는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 기록된 요나의 기도에서 두 가지 독특한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2절에 요나는 지금 자신이 물고기 뱃속에 있는 것을 스올의 뱃속에 있다고 표현합니다. 스올은 일반적으로 죽음 혹은 무덤을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에스겔이나 호세아 같은 선지자들은 종종 이 스올이라는 단어를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그분의 존전에서 쫓겨난 자를 지칭할 때 사용하였습니다. 이 말은 즉, 성경이 말하는 죽음이 단순히 육체적 죽음, 그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그분의 얼굴로부터 완전히 외면당하는 것, 바로 그것이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에서 요나 또한 선지자임을 고려할 때에, 그는 지금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심판을 받아, 그분으로부터 쫓겨난 자신의 상황을 스올, 즉 죽음에 상태에 있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찾아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독특한 표현은 4절입니다.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구약에서 성전은 솔로몬 이후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며, 또한 예수님의 말씀처럼, 구약의 성도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쫓겨났고, 지금은 스올, 즉 물고기 뱃속에 갇혀있습니다. 요나는 이제 성전에 가고 싶어도 성전에 갈 수 없고, 성전에서 예배하고 싶어도, 또한 성전에서 기도하는 집에서 기도하고 싶어도 그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쳐했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성전에 갈 수는 없지만, 성전을 바라보겠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요나가 하나님의 성전을 바라보겠다는 말이 단순히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열왕기상 8장 46절에 솔로몬은 성전을 지은 후에 하나님께 기도하며, 만일 백성들이 죄를 범하여 원수의 땅에 끌려갔을 때에, 그들이 성전을 바라보며 기도하면,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 줄 것을 간구합니다. 그리고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요나의 기도를 10절에 하나님께서는 바로 응답해주십니다. 물고기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육지에 요나를 토해냅니다. 이것은 마치 요나의 표현처럼 물고기, 즉 스올의 권세, 죽음의 권세가 하나님의 명을 따라 요나를 토해냄으로 죽음에서 부활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요나의 물고기 뱃속의 사건은 요나가 상징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후에 심판을 받아 앗수르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갈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포로기에 백성들은 이방 나라로 끌려가 더 이상 제사할 수 있는 장소, 예배의 장소, 기도의 장소 모두 잃게 됩니다. 물고기 뱃속에 가친 것처럼 성전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포로기에 이처럼 하나님의 목전으로부터 완전히 쫓겨났다 할지라도, 이스라엘에 소수의 의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바로 하나님의 성전, 예루살렘을 보며, 매일 같이 기도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다니엘 6장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의인들의 기도로 하나님께서는 70년 포로생활 이후에 이 백성들을 그 물고기 뱃속과 같은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주시고, 다시 약속의 땅으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또한 거룩한 주일에 부활하신 주님을 기념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하나님께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심판을 친히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심판의 결과로 주님께서는 무덤, 즉 죽음의 권세 안으로 끌려가셨습니다. 마치 요나가 물고기 뱃 속으로 끌려가듯 말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죽음의 권세에 우리 주님을 더 이상 결박하지 못합니다. 결국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고, 죽음의 권세는 견디지 못하고, 우리 주님을 무덤에서 토해냈습니다. 마치 물고기가 하나님의 명을 따라 견디지 못하고, 요나를 토해내듯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는 그 이름을 믿는 모든 자에게 주님과 같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특권을 허락하셨습니다. 따라서 이제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마지막 날에 우리 모두는 부활에 동참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요나보다 더 크신 이, 우리의 구원자되신 우리 예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기쁨의 주일 한날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나서는 언뜻 보기에 단순히 요나에게 있었던 이야기만을 기록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요나서는 구약에서 역사서가 아니라 선지자의 글, 즉 선지서로 분류가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말씀이 이사야서나 예레미야서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지자적인 어떤 메시지를 주고자 한다는 사실을 염두해두고 읽어야 할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종종 선지자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기도 하십니다. 대표적으로 선지자 호세아의 경우에는 간음한 음녀와 결혼하도록 하심으로, 이스라엘이 이방신과 결혼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선지자 아히야의 경우에는 그 자신의 옷을 열 두 조각으로 찢었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선지자가 때로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본문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선지자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지금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여, 다른 길로 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주의 도를 따라 주의 길로 행하지 않으면, 그곳에는 하나님의 진노만 있을 뿐, 평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결국 요나는 하나님의 진노의 폭풍우를 만나게 되고, 결국 자신의 몸을 심판의 바다 속에 던지우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은 이처럼 요나가 바다에 빠진 이후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7절에 하나님께서는 큰 물고기 한 마리를 예비하시고, 요나를 삼키게 하십니다. 계속해서 2장 1절부터 9절까지는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 기록된 요나의 기도에서 두 가지 독특한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2절에 요나는 지금 자신이 물고기 뱃속에 있는 것을 스올의 뱃속에 있다고 표현합니다. 스올은 일반적으로 죽음 혹은 무덤을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에스겔이나 호세아 같은 선지자들은 종종 이 스올이라는 단어를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그분의 존전에서 쫓겨난 자를 지칭할 때 사용하였습니다. 이 말은 즉, 성경이 말하는 죽음이 단순히 육체적 죽음, 그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그분의 얼굴로부터 완전히 외면당하는 것, 바로 그것이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에서 요나 또한 선지자임을 고려할 때에, 그는 지금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심판을 받아, 그분으로부터 쫓겨난 자신의 상황을 스올, 즉 죽음에 상태에 있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찾아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독특한 표현은 4절입니다.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구약에서 성전은 솔로몬 이후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며, 또한 예수님의 말씀처럼, 구약의 성도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쫓겨났고, 지금은 스올, 즉 물고기 뱃속에 갇혀있습니다. 요나는 이제 성전에 가고 싶어도 성전에 갈 수 없고, 성전에서 예배하고 싶어도, 또한 성전에서 기도하는 집에서 기도하고 싶어도 그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쳐했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성전에 갈 수는 없지만, 성전을 바라보겠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요나가 하나님의 성전을 바라보겠다는 말이 단순히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열왕기상 8장 46절에 솔로몬은 성전을 지은 후에 하나님께 기도하며, 만일 백성들이 죄를 범하여 원수의 땅에 끌려갔을 때에, 그들이 성전을 바라보며 기도하면,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 줄 것을 간구합니다. 그리고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요나의 기도를 10절에 하나님께서는 바로 응답해주십니다. 물고기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육지에 요나를 토해냅니다. 이것은 마치 요나의 표현처럼 물고기, 즉 스올의 권세, 죽음의 권세가 하나님의 명을 따라 요나를 토해냄으로 죽음에서 부활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요나의 물고기 뱃속의 사건은 요나가 상징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후에 심판을 받아 앗수르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갈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포로기에 백성들은 이방 나라로 끌려가 더 이상 제사할 수 있는 장소, 예배의 장소, 기도의 장소 모두 잃게 됩니다. 물고기 뱃속에 가친 것처럼 성전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포로기에 이처럼 하나님의 목전으로부터 완전히 쫓겨났다 할지라도, 이스라엘에 소수의 의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바로 하나님의 성전, 예루살렘을 보며, 매일 같이 기도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다니엘 6장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의인들의 기도로 하나님께서는 70년 포로생활 이후에 이 백성들을 그 물고기 뱃속과 같은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주시고, 다시 약속의 땅으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또한 거룩한 주일에 부활하신 주님을 기념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하나님께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심판을 친히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심판의 결과로 주님께서는 무덤, 즉 죽음의 권세 안으로 끌려가셨습니다. 마치 요나가 물고기 뱃 속으로 끌려가듯 말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죽음의 권세에 우리 주님을 더 이상 결박하지 못합니다. 결국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고, 죽음의 권세는 견디지 못하고, 우리 주님을 무덤에서 토해냈습니다. 마치 물고기가 하나님의 명을 따라 견디지 못하고, 요나를 토해내듯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는 그 이름을 믿는 모든 자에게 주님과 같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특권을 허락하셨습니다. 따라서 이제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마지막 날에 우리 모두는 부활에 동참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요나보다 더 크신 이, 우리의 구원자되신 우리 예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기쁨의 주일 한날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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