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2)

은혜의 보좌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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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은 사도행전 1장 4절, 5절, 8절입니다. 다같이 한 목소리로 합독하시겠습니다.
“성령충만”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많이 고백되어지는 단어 중에 하나입니다.
여기 모이신 우리 성도님들도 성령의 충만한 증인이 되길 간절히 바라고 계시는 분들일 줄 믿습니다. 성령충만함은 제 평생의 기도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우리는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간절히 바라고 있지만, “성령충만한 권능이 있는 증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할 때에 우리는 “그렇다고” 쉽게 동의를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권능”이란 단어에서 우리는 멈춰 설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권능있는 삶인가라고 생각해 볼 때에 우리의 삶은 너무나도 평범하고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는 성령충만함을 구할 뿐 성령을 받아 권능의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일까요? 오늘 사도행전 말씀은 우리도 성령의 권능을 받은 증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씀해 주시고 그 방법까지 우리에게 가르켜 주고 계십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누가입니다. 누가는 의사였구요, 신, 구약 성경의 저자들 중에 유일하게 이방인이였습니다. 또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썼는데요 이 말씀은 신약성경의 1/4의 분량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방이였던 누가를 통해서 신약의 말씀 중의 1/4을 차지하는 양을 할해하면서까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바로 새 시대가 도래 했다는 사실입니다.
새로운 시대의 도래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이루신 모든 사역을 마치시고 천상의 사역을 하시기 위해 올라가신 후에 성령님께서 내려 오셔서 성령님의 능력으로 교회를 세워나가는 시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첫 시작의 말씀이 바로 오늘 사도행전 1장의 말씀입니다. 새 시대의 도래가 임박한 그 전환점, 아주 중요한 시점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땅에서의 마지막 당부를 해 주십니다.
오늘의 본문 1장 8절의 말씀을 다시 살펴 보겠습니다.
<방송실자막>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지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 증인이 되어줄래?”, ’내 증인이 되줘라’라고 부탁을 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증인이 되어라”라고 강하게 명령을 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선택으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예수님의 명령으로 세워진 자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의 제자라면 증인으로 예수님의 명령받아 세워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명령으로 증인으로 세워졌는데 “과연 증인은 어떤 자들입니까?”
<방송실자막> 증인이란 법적인 용어로“자신의 본 것, 경험한 것을 사실에 의거해서 진술하도록 명령받은 제3자”라는 뜻
을 가지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증인은 자신의 본 것을 사실대로 진술하는 자들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법정에서는 증인 10명이 같은 죄를 한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한다면 그 사람은 바로 구속이 될 만큼 증인의 힘은 아주 대단합니다.
그렇다면 증인으로 세워진 예수님의 제자들은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진술하는 자들일까요?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시는 것을 보았고. 배고픈 자를 먹이시는 것을 보았고, 죽은 자를 살리셨으며 폭풍을 잠잠케 시키셨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예수님께서 직접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3일 만에 살아나신 것을 본 자들입니다.
즉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보여 주시는 많은 일들과,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죽은자들 가운데서 삼일만에 살아셔서 그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본 것을 진술하는 증인들이였습니다.
그런데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냥 본 것을 진술하는 증인이 되리라라고 하지 않으시고 앞에 무엇인가 전제를 다셨습니다.
1장 8절을 다시한번 보시겠습니다.
<방송자막>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단어들을 남겨 두면요~!
<방송자막>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은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냥 증인이 아니라 성령이 임한, 권능을 받은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왜 제자들에게 성령의 권능을 받은 증인이 되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제자들이 새로운 성령의 시대를 이끌어가는 증인으로 살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권능을 받은 증인이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떤한 모습이였는지 사도행전 이전의 모습을 살펴 보겠습니다.
제자들 중에 가장 대표적인 인물인 베드로, 베드로가 어떠한 사람이였습니까? 베드로는 즉흥적이고, 다혈질의 단순 왕이였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말뿐인 겁쟁이였습니다. 예수님이 고문을 받으 실 때에 그 곁에 있다가 사람들이 예수당이라고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 중의 한 명이라고 이야기하자, 그토록 예수님 곁에서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였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하고 예수님을 저주하며 그곳을 떠나게 됩니다. 사실 그 때에 부인을 하지 않았다면, 베드로도 위험에 처했을 수도 있었을 만한 긴박한 상황이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예수님께서 성령의 권능을 받은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시는 이 순간의 베드로의 모습이였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베드로와 달랐을까요?
누가복음 9장 46절에 보면 제자들은 귀신들린 어린아이를 못 고친 것으로 인해 예수님께 믿음이 없다며 크게 혼이 나고, 바로 언제까지 인자가 너희와 함께 하겠느냐며 예수님의 임박한 죽음에 대해 말씀을 듣고 난 뒤에 제자들은 자기들끼리 돌아가서 바로 “천국에서 누가 큰 자냐?”라며 서로 다투었던 자들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26장에서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상에 돌아가시기 전에 “너희들은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부탁을 하시며 간절히 기도하고 계실 때에 제자들은 깨어 있지 못하고 모두 잠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은 마치 성경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모든 사역을 듣고 보고, 믿고 있지만, 여전히 부족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증인으로 부르셨지만, 제자들은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부족합니다.
증인 된 우리는 너무 쉽게 상처를 받습니다. 증인 된 우리는 삶에서 쫓겨 더 큰 하나님의 일을 생각할 시간도 없는 바쁜 자들입니다. 증인 된 우리는 먼저 낮아지며 섬기는 것에 대해 자존심 상해합니다. 증인 된 우리는 베풀기 보다는 받기를 좋아하며 세워주기 보다는 깍아내리기를 좋아합니다. 편안함을 더 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이 참 답답했겠지만, 제자들도 예수님과 함께 있기 참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분명히 자신들은 보았지만,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것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말씀을 들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에서 말씀을 해석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집중했던 것 경험한 것을 벗어나지 못하고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들을 바라보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집중하고 몰입하는 것만을 바라보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버드 대학 심리학 교수 중의 다니얼 사이먼스와 크리스토퍼 차브리스 두 교수는 하버드생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6명 학생에게는 검은색 셔츠를 입히고 다른 팀에 흰색 셔츠를 입힌 후에 두 팀을 섞어놓고 같은색 셔츠를 입은 사람에게만 농구공을 뒤 섞여 패스하게 했습니다. 그것을 동영상으로 찍었고 그 동영상을 학생들에게 보여 주며 검은색 팀은 무시하고 흰색 팀이 몇번을 패스를 했는지 물어보겠다고 했습니다. 그 영상을 다 보고 교수는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몇번을 패스했습니까?라고 한 것이 아니라 “혹시 고릴라를 보았나요?”
클래스는 술렁였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였습니다.
학생들의 반 이상은 고릴라를 못 보았다고 답을 했고, 나머지는 보았다고 답을 했습니다.
학생들은 서로 자신이 본 것에 확신이 있었습니다.
다시 영상을 보여 주었습니다. 영상은 충격적이였습니다. 검은 고릴라 의상을 입은 학생이 무대 중앙에서 킹콩 흉내를 내는 장면이 찍혀 있었습니다.
이 실험이 그 유명한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입니다. 우리 뇌는 우리가 집중하고 몰입한 것 이외에는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무주의 맹시라고 합니다.
모두 같은 것을 바라 보았지만, 자신이 선택적하는 몰입 때문에 중요한 사실들과 사건들을 보지 못하고 놓칠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았다고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아픔에, 외로움에, 힘듦에, 아니면 풍요로움에 안정에 몰입한 나머지 우리는 봐야할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가장 중요한 것들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펼쳐질 새 시대에 교회를 세워나감에 있어서 증인의 역할이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에 모두다 담대함을 가지고 본 것에 대해 모두 동일한 것을 말하는 자들로 세우셔야 했기 때문에 성령의 권능을 받으라고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보혜사라 부릅니다. 보혜사는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인데 그 뜻은 “도움을 베풀기 위해 곁으로 부름을 받은 자”입니다. 당시에 파라클레토스라는 단어는 증인이란 마르튀스라는 단어처럼 법정 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대게 변호사나 법률 자문가를 지칭합니다.
우리를 증인으로 채택한 이가 자신의 증인을 돕기 위해 변호사이신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가 증인으로 본 것이 명확해지지 않을 때, 우리의 약함으로 낙담이 되었을 때에 예수님의 증인된 우리에게 변호사로서 도우시는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셔서 증인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방송자막)로마서 8장26절에 보면 “이와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라고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증인으로 살아가기 우리는 너무 부족합니다. 하지만, 성령님께서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에게 권능을 주셔서 감당할 수 있게 도와 주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의 권능을 받은 제자들은 어떻게 변하였습니까? 겁쟁이였던 베드로는 천국의 열쇠를 지닌 자로 교회의 반석이라 칭함을 얻는 교회의 어른으로 세워졌으며, 죽음 앞에서도 담대하여 순교를 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이전의 베드로와 사도행전 이후의 베드로는 완전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스스로 높아지길 원하여 다투었던 제자들도 모두 곳곳에 흩어져 증인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파했으며 그들의 증언은 모두 같은 것을 말하는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혹시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였으니까? 아니면 그 성령의 권능은 초대교회 시대 때에만 존재하는 특별한 힘이라고 생각하셔서 우리와는 상관 없는 말씀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신가요?
우리의 시대에도 성령의 권능을 받아 증인으로 사셨던, 우리의 신앙의 좋은 선조이신 주기철 목사님이 계십니다.
주기철 목사님께서도 처음에는 우리와 너무나도 같은 평범한 분이셨습니다. 어느날 일본 경찰이 아침밥을 먹고 있을 때에 주기철 목사님을 체포하기 위해서 사택으로 들이닥치자 고문을 받는 것이 무서워서 부엌문으로 도망쳐서 그 문을 부여잡고 엉엉 울으셨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분명 이 일화는 우리와 별만 다르지 않는 모습이였지만, 성령의 권능을 입으니 모진 고문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내 뜻대로가 아닌 아버지의 뜻대로 해달라고 기도하며 모든 고문을 이겨내시고 결국은 순교를 하시며 지금의 한국교회가 온전히 진리를 붙잡고 나갈 수 있도록 큰 힘을 주셨습니다.
사실 순교자라는 마터 (martyr)의 단어의 어원이 마르뒤스라는 헬라어 단어를 가진 증인에서 나온 말입니다.
즉 증인은 순교자적인 자세를 가진 자입니다. 이러한 순교자적인 자세를 가지고 말씀을 전한 증인들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마터 (martyr) 라는 단어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를 통하여서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와 다름이 없으셨던 주기철 목사님의 삶을 통하여서 ‘우리도 성령을 받으면 평범한 인생이 비범한 인생, 권능의 삶’을 살 수 있으리라는 용기가 생기게 됐을 줄 믿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절대 살 수 없는 삶입니다.
말씀은 분명히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님께서 고난에 몰입하였던 나를, 힘듦에 있었던 나를, 억눌렸던 나를, 미움이 가득했던 나를, 슬픔에 빠졌던 나를, 겁쟁이였던 나를, 두려워하는 나를 예수님의 십자가의 부활의 능력으로, 권능의 증인으로 전환시켜 주신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럴만한 능령이 성령님께는 있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령의 권능은 어떻게 받을 수가 있을까요?
오늘의 말씀 4절을 보겠습니다.
<방송자막>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아멘
우리가 증인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4절의 말씀은 2가지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첫번째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예루살렘은 제자들에게 안전하지 않았던 장소였습니다. 예루살렘은 구약의 시대부터 하나님의 나라를 무너뜨리려는 자들과의 치열한 영적 전투가 있었던 곳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항상 승리하셨고 예수님께서도 죽음의 땅을 박차고 부활하시며 큰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러한 영적인 싸움이 치열한 예루살렘에서 새로운 시대를 여는 교회를 세우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그 순간까지 영원한 승리를 보여 주시고자 이곳에 남아 있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연약한 자들의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은 그들을 해하려는 자들의 두려움이 가장 먼저 보이겠지만, 실상은 성령의 권능을 예비시켜 놓으신 하나님의 임재가 임한 승리의 장소, 은혜의 장소인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제자들의 마음 속에는 이미 이 곳 예루살렘을 떠날려고 하는 마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제자들이 믿음의 눈으로 예루살렘을 바라보지 못하고 그곳을 떠났다면, 사도행전 이후의 펼쳐나가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승리의 역사를 누리는 기회는 없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들도 여지까지 우리의 예루살렘이 어디인지를 몰라 하나님의 임재의 순간들을 놓치며, 성령의 권능을 받아 누릴 수 있는 수많은 기회들을 박차고 우리의 평안함을 위해 안락함이 있어 보이는 곳으로 우리의 발걸음을 향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예루살렘은 어디입니까?
우리의 예루살렘은 희망이 없어 보이는 우리의 가정입니다.
우리의 예루살렘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오히려 이방신들이 가득해 보이는 우리의 직장입니다.
우리의 예루살렘은 우리의 기업으로 주시어 큰 행복을 우리에게 주었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멀게 느껴지는 우리의 자녀입니다.
우리의 예루살렘은 매일 죄로 물들어 같은 죄로 쓰러지는 연약한 나 자신입니다.
그 밖에 우리를 위협하고 안전해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회복을 원하시고 우리를 세우셔서 일하고 자 하시는 그 밖의 모든 곳들이 바로 우리의 예루살렘입니다.
담임목사님께서 이번 창목회 시간에 “죠지뮬러가 5만번의 기도의 응답을 이루었다는 것은 5만번의 문제가 죠지뮬러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말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의 믿음이 문제입니다.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문제인 것입니다”라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예루살렘에도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실상 그곳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어 성령의 권능의 열매가 맺혀질 수 있는 귀한 기회라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떠나지 마시고 우리가 바라봐야 할 것을 보시길 바랍니다. 그곳에 힘을 주시는 성령님이 계신 것입니다.
둘째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은 언약의 말씀입니다. 그냥 부모가 자녀에게, 또는 신용 좋은 친구가 나에게 하는 약속이 아니고 변함이 없으시고 반드시 이루시는 언약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 언약을 이루신 아버지께서 성령님의 오심을 약속하고 그것을 기다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기 전까지 생업으로 돌아가 물고기를 잡으러 갔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다시금 예수님을 만난 후에 아버지의 약속을 믿고 그들의 모든 관심과 집중을 하나님께 몰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 주시겠다는 언약의 약속을 이루심을 눈으로 확인하였기 때문은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시겠다고 하시는 약속은 이미 이루심과 같은 확신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약속하신 것을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다리게 됩니다. 그들은 성령님을 기다리면서 기도에 전혀 힘쓰며 이미 주신 것이라 확신하는 성령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랬을 때에 마가의 다락방은 기도의 다락방으로 바뀌었고,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이곳에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예루살렘에 거하기를 다짐한 성도여러분, 우리는 그 약속을 기다리고 있는 자들입니다. 성도님들은 그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면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이미 주신 약속이라 우리는 알지만 우리의 영적 무주의 맹시로 인해 다른 곳에 몰입한 나머지 증인으로 성령을 받기를 기다리는 일을 하지 않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아니면 아직도 무엇을 하며 기다려야 할지 몰라서 그냥 우왕좌왕 내 힘으로 내 행할 일을 하면서 계신건 않으신가요?
이제 하나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을 이미 우리에게 주셨다 함을 믿고 기다리면서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는 예루살렘에 마가의 다락방, 기도의 다락방을 회복하는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을 기다리며 기도에 전혀 힘쓴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우리도 영적인 예루살렘에서 우리의 마가의 다락방을 회복시켜 기도에 전념을 해야 할 때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놀라운 오순절의 성령의 역사가 우리의 자리에서 체험 되어 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보낸 받은 예수님의 증인들 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도 연약하기에 성령의 권능을 받은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영적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그곳에서 마가의 기도의 다락방을 회복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능력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간증이 있을 때를 기억해 보면 내가 어떻게 이런 일을 견뎌 낼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때가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 때를 바라보면 우리는 그곳에서 너무나도 큰 은혜를 누렸습니다. 그곳이 예루살렘이였음을 우리는 이미 체험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그 시간을 견디셨나요?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로 나가며 그 시간을 견뎠을 때에 비로서 아름다운 간증이 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조도 그러했던 것입니다. 지금 힘든 일이 있으신가요? 모든 것이 버거우신가요? 그곳이 예수님이 우리를 성령의 권능을 받은 증인으로 세우신 우리의 예루살렘인 것입니다.
그곳에서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기도의 처소로 나와 기도를 하며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행하실 하나님을 기다리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우리를 성령의 권능을 받은 증인으로 세우신 하나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에게 약속하신 성령을 주시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 복음의 물메돌을 우리가 웅켜 쥐고
하나님의 임재가 임한 예루살렘에서 마가의 다락방을 회복시키는, 기도의 지팡이를 높이 올리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서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통한 성령의 전신갑주를 받아 우리의 평범한 인생이 비범한 인생으로 바꾸시어 놀라운 역사에 동참시켜 주시는 권능의 증인으로 우리의 예루살렘에서 잘 감당할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돕는 성령님을 주시는 사랑많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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