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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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목자
시편 23편
양은 이렇다 할 무기가 없습니다. 날카로운 이빨이나 뿔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날랜 발이나 날개도 없습니다. 몸집도 생각보다 커서 민첩하게 움직여 숨을 수도 없고,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어서 잡혀먹기 쉽습니다. 위기의 순간에도 큰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죽음을 맞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러한 양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은 순하다고 말하지만 정확하게 표현다한면 순한것이 아니라 약한 것입니다.
이렇듯 한없이 약한 양들에게 있어서 유일한 생존전략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인해전술일 것입니다. 많은 숫자로 싸운다는 말이 아니라 일부를 먹이로 내어주거나, 한쪽이 공격을 당할 때 다른 쪽은 달아나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 외에는 양의 무리가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양에게는 다른 동물들과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무기가 딱 하나 있습니다. 양의 무기는 자기 안에 있지 않고 밖에 있습니다. 바로 목자가 그들의 강력한 무기입니다. 목자가 지키면 늑대가 두렵지 않습니다. 폭풍우나 험한 산길도 두렵지 않습니다. 먹을 것 또한 걱정하지 않습니다. 목자가 한없이 약한 그들을 푸른 풀밭으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이 마치 양과 같습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얼마나 약한지 모릅니다. 불과 몇 분 몇 초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모르고요! 바이러스나 세균 앞에 무기력하게 쓰러지는 존재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작은 시험 때문에 힘들어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요! 영락없는 양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다 양 같습니다.
2008년도에 선교차 러시아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요! 모두 아시다 시피 비행기는 이착륙을 할 때가 가장 위험합니다. 그래서 이착륙 시에는 약간의 긴장감이 감돌죠! 비행기를 타고 러시아공항에 내릴 때였습니다. 그날따라 비가 오고 구름이 잔뜩 끼었는데 착륙을 시도하는데 창밖에는 구름인지 안개인지 시야를 가려서 앞이 전혀 보이질 않았습니다. 기류도 사나워서 온 몸이 사납게 흔들릴 정도였습니다. 사람들도 약간은 긴장한 눈치였습니다. 비행기가 약간 무거운 듯이 내려앉더니, 쿵 소리를 내고는 안전하게 활주로 위에 착륙하였습니다. 그 순간 몇몇 어른들은 안도의 한숨을! 아이들은 ‘와’ 소리를 내며 박수를 쳤습니다. 승무원은 그 모습이 의아하다는 듯이 그 사람들을 쳐다보았었습니다.
사실 그 위기의 순간에 승객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비행기 기장과 비행기를 믿는 수밖에 없는 것이죠! 비행기가 추락한다면 안전벨트로 내 몸을 더 동여매어도, 아무리 소리 질러도, 비행기 안에 좀 더 안전한 곳으로 이동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믿고 맡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요! 우리들과는 달리 승무원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자리에 앉아있었습니다. 승무원들이 평안했던 이유는 오랜 세월 비행기를 타면서 기장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데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과 동행한지 오래 되었습니다. 상당히 긴 시간 함께해왔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의 동행에 익숙해져서 세상을 향한 두려움이 없어지셨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처음 비행기를 탔을 때처럼 쓸데없는 염려와 불안으로 가득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도 끊임없이 불안해하며 살아왔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살아갑니다. 이런 것이죠! 하나님과의 동행에 익숙하지 못해서 한없는 염려와 근심, 걱정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진짜 문제는 우리가 남아있는 삶 역시 지금까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갈 것이라는데 있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주님과 동행해 왔음에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살아가는 삶에 익숙해지지 않은 모습으로 여전히 두려움에 떨면서 걱정과 염려로 살아갑니다.
오늘 우리가 읽었던 말씀인 시편 23편에는 두려움이나 불안이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필요이상의 걱정도 근심도 없습니다. 그저 풍족함과 평안함만이 느껴질 뿐입니다. 지금 다윗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이겠죠! 그렇다면 다윗이 아무런 근심걱정 없는 삶을 살아서 이런 것입니까?
다윗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어떻게 이런 고백이 나올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의 삶은 어쩌면 단 한 번도 평안할 날이 없었을 만큼 쫓기고 공격당하고 배신당하는 어려움과 고통의 연속인 삶을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 시편 23편에서는 전혀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없습니다. 걱정도 근심도 없어 보입니다. 왜이겠습니까?
우리들은 언제 안정을 취하고 언제 걱정근심 없이 살아갑니까? 내게 근심할 것이 없도록 부족함 없이 가득가득 채워져야지만 우리들은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금전적으로 풍족히 채워져야 근심이 없고, 직장과 사업이 만족스러울 만큼 잘 풀려야 걱정이 없고, 삶에 불편함이 없을 만큼 건강이 채워져야 염려 없이 살아갑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고백은 틀립니다.
내게 부족함이 없도록 해주셨기 때문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저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어주셨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무엇도 부족하지 않다고 고백합니다.
끊임없이 결핍의 삶을 살아갔던 다윗이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부족함 없는 삶의 기준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나! 둘만의 관계가 부족함이 없다는 고백을 만들어냅니다. 이것이 다윗의 모습이고요 또한 우리들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마음이었던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만으로도 다른 것 하나도 생각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삶이요!
예전에 전 세계의 내로라하는 신학자들과 저명한 목사님들이 함께 모여서 회의를 가졌던 적이 있습니다. 그 회의의 주제는 이러했습니다.
우리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무엇인가를 놓고서 열띤 논쟁을 벌였던 것이죠! 사람들은 여러 가지 대답을 내놓았었습니다. ‘우리는 유일신을 믿는다.’이러한 대답에 유대교도 이슬람교도 다 유일신 사상이라 안 된다고 말합니다. ‘사랑이 있다!’ 이것도 역시 답이 될 수 없었습니다. 수많은 종교들이 자비와 사랑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동정녀 탄생과 십자가와 부활이 있다’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이는 기독교를 카피해서 만든 많은 종교들에도 분명히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거기다 고대근동이나 그리스 로마 신화나 설화에서도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의 내용들이 나오니 안 된다고 말합니다. 도저히 타종교와 다른 점을 찾아내질 못하고 있었는데 뒤늦게 온 한 목사님이 헐레벌떡 들어오시더니 무슨 일로 이렇게 시끄럽냐며 물어봤습니다. 그래서 다른 한 목사님이 “지금 다른 종교와 우리 기독교와 다른 점이 무엇인지를 놓고서 논쟁을 하고 있다”며 대답해 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지각한 그 목사님이 사람들에게 큰소리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 기독교가 다른 종교들과 다른 점은 은혜 아닙니까?” 그렇게 말하자 다른 사람들이 반박을 합니다. “아니 다른 종교에도 은혜는 있지 않습니까?” 이 대답에 그 목사님은 “우리 기독교의 은혜는 다른 종교들이 말하는 은혜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다른 종교들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그 신에게 행해야지만 우리에게 은혜라 불릴만한 무엇인가를 줍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교는 모든 것을 다 주신 후에 은혜 받은 자답게 살아가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다른 종교나 토속신앙과 미신들은 다 그들이 믿는 신들에게 무엇인가를 해야지만 원하는 것을 주는 방식의 종교입니다. 물 한 그릇이라도 떠 놓고 기도해야 무언가를 이루어주는 종교입니다. 인간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신들이 반응을 합니다. 이슬람교도 불교도 유대교도 다른 기타 종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기독교만큼은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 다 받은 자답게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세상을 창조하셔서 주셨습니다. 모든 인간들 각자 각자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우리 인간들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그분 자신, 하나님의 아들까지 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더 이상 주실 것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 만큼 다 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원하신 것은 단 한가지였습니다.
모든 것을 내어주신 하나님을,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은혜! 모든 것을 먼저 다 주시고 은혜 받은 자답게 살아가라 외치는 종교는 오직 기독교밖에 없습니다.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는 그와 같은 고백을 우리도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아들까지도!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다 주셨기 때문에! 더 이상 주실 것이 없을 정도로 다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더 이상 나는 바랄 것도 부족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고백은 다윗과 다릅니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지만 우리들은 여호와는 나의목자신데 왜 내게 부족함이 이렇게 많냐고 하소연만 합니다. 만족함이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얼마 전에 이태원을 갔다 왔습니다. 오랜만에 들려서인지 너무 많이 변했더라고요! 예전에 공허한 마음을 달래고자 친구들이랑 함께 놀았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습니다. 친구들이랑 무언가 마음을 채워보려고 끊임없이 구경하고 먹고 마시고 쇼핑하고 그랬었는데요! 추억 가득했던 곳들은 사라지고 문 닫고 이제 하얀 먼지만 가득하더라고요!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무언가로 그들의 삶을 채우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더라고요! 그것들로는 너희들의 마음을 채울 수 없다고요!
굉장히 특이한 티라미슈케익을 한입 베어 물었는데 생긴건 달달하게 생겼는데 엄청 쓰더라고요! 케익 안을 에스프레소로 흠뻑 적셔놔서인지 달콤한 듯 씁쓸한 맛이었죠!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옛날에 달콤할 것 같았던 모든 것들이 오늘날에 생각해 보니까 씁쓸한 기억들이라는 것을요! 내 마음을 영혼을 채울 수 없는 것들로 한없이 채우려고 했던 그 시간들이 너무나도 아깝더라고요! 차라리 꿈이었으면 했습니다. 그래도 이제는 주님으로 참 만족을 누리면서 살아가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그래서 그 케익먹으면서 이런 노래를 하나 만들어봤습니다. [오랫동안 잊어왔던]
어찌 보면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할 우리들에게 그 이상의 것들을 끊임없이 공급해 주십니다.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늘 인도해 주십니다.
오늘 말씀에서 다윗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에서 한 가지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양들은 아무 환경에서나 눕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양들이 편안하게 누워 되새김질을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환경이 갖춰졌을 때만 가능하다고 합니다.
첫째는 늑대나 자기를 노리는 세력으로 벗어나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양은 어찌나 겁이 많은지 토끼 한 마리가 뛰어들어도 수백 마리가 우르르 달아나고 맙니다. 둘째는 파리나 진드기나 기생충으로 괴로움을 받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 것들로 신경이 날카로워지면 편히 쉴 수가 없기 때문이죠! 마지막으로는 배부르게 꼴을 먹지 않으면 또한 드러눕지 않습니다.
그런데요 목자가 푸른 풀밭에서 먹이는 그 풀, 꼴을 보면 그냥 보통의 풀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읽는 한글성경에는 푸른 풀밭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그 부분의 원어를 보면 사실 푸른 이라는 단어는 들어있지 않습니다. 단지 새로 돋은 풀! 또는 어리고 연한 풀! 이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목자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요 우리들에게 아무 풀밭으로 데려가서 아무 풀이나 먹이시지 않으십니다. 항상 새롭고 우리들이 먹기에 알맞은 연하고 싱싱한 것으로 우리들을 먹이십니다.
쉴만한 물가는 어떻습니까? 양들에게 있어서 쉴만한 물가란 물살이 세지 않은 안식을 취할만한 물가라는 의미입니다. 본래 원어의 뜻도 ‘안식 또는 쉼! 멈춤’이라는 의미의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양들은 물에 들어가면 양털이 물을 흡수하기 때문에 몸이 무거워지고 물살이 조금만 강해도 순식간에 휩쓸려가기 때문에 물을 극도로 무서워합니다. 아무리 목이 말라도! 물이 눈앞에 있더라도 급한 물살에서는 물을 마시지 않습니다.
그들이 안식할 만한 물가로 만들어 줘야 겨우 물을 마십니다. 주변에 안식할만한 물살이 없다면 목자는 바위를 굴려서라도 물의 흐름을 완만하게 만든 후 양들이 안심하고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해줍니다. 주변에 물살을 멈출만한 바위나 돌들이 없다면 목자가 직접 물속으로 들어가 온몸으로 그 물살을 막으면서 양들 하나하나의 목을 축이게 합니다.
이처럼 불안에 떨 수밖에 없는 세상의 급한 물살 속에 우리들이 서있습니다. 만약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급한 물살을 완만하게 해주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들은 지금까지 살아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도록 세상의 물결을 잔잔케 해주셨기에 목을 축이며 버틸 수 있었습니다. 내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던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어주시지 않으셨다면 오늘도 우리들은 두려움과 한없는 갈증가운데 헤매다 쓰러질 수밖에 없는 양의 모습일 것입니다.
이센스의 독이라는 랩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가사라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는 곡이기도 합니다. 날 반 쯤 죽여 놓는 세상! 그 세상을 쫒다가 결국 놓치는 것은 진짜 나!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게 만드는!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이나 양들에게 있어서 위기는 양 자신의! 우리 자신의 무능력과 연약함에 있지 않습니다. 결정적인 위기와 실패는 목자를 놓치는 것입니다. 목자를 잃어버리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다시 찾아야 할 분은 목자입니다. 아무리 못나고 실수해도 목자와 함께하면 양은 안전합니다. 나를 지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부족하고 연약하고 도저히 해쳐나갈 수 없는 환경 속에 거할지라도 우리들에게 목자가 계실 때는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진짜 문제는, 진짜 위기는 목자를 놓치는데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목자와 양과의 관계가 잘 묘사되어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5절입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말씀에서 ‘음성을 아는 고로’라고 할 때 사용한 ‘안다’라는 단어는 본래 ‘보다’라는 뜻을 지닌 단어입니다. 즉, 목자의 음성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것처럼 분명하게 알기 때문에 목자를 따라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음성을 본다”라고 표현하면 어색하니까 ‘안다’라고 번역한 것이죠!
여기서 궁금한 점이 하나있습니다. 이 양 때들은 목자의 음성을 어떻게 그렇게 확실히 알고 따라가는 것입니까? 타인의 음성을 듣고서는 왜 따라가지 않는 것입니까? 분명 목자의 음성은 알고 타인의 음성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한 가지 더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양 때들은 목자의 음성을 어떻게 아는 것입니까?
간단합니다. 들어봤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그 음성을 들어 본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부르는 목자의 음성을 듣고 다시 듣고 또 들어왔기 때문에 그 음성이 목자의 음성인줄 아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의지할 것이라고는 끊임없이 들어야 하는 내 목자의 음성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우리들이 목자의 음성을 들으려하지 않는 것이죠!
말씀으로든 기도로든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데 목자의 음성이 아닌 내 의지로 나아가려고 하니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목자의 음성을 따라가야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에서 쉴 수 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음성을 듣고 따라가다 보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입니다. 분명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신다고 했는데 암만 둘러봐도 삭막한 골짜기뿐입니다. 혹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놓여 있으신 분들이 계십니까? 그래서 도대체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 내가 안식할 수 있는 곳은 있기는 한지 의심이 드십니까?
그런데요 여러분! 여러분들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다 할지라도 그곳은 죽음의 그늘이 가득한 골짜기가 아닙니다. 내가 목자와 함께 있다면요! 그곳도 푸른 풀밭이요 쉴만한 물가입니다. 목자의 발자취를 따르고 목자의 가르침을 배우며 나아가는 그 길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곳도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정말 험난한 골짜기를 지나다 쓰러진다 할지라도 그곳이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가 될 수 있는 것은 목자가 쓰러진 양에게 풀을 뜯어다 먹여주고 물을 떠다가 먹여주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그곳이 어느 곳이든 목자가 있는 곳이 곧 푸른 풀밭이고 쉴만한 물가인 것입니다.
사방이 골짜기여도 사방이 광야여도 상관없습니다. 목자만 있으면 그곳은 푸른 풀밭이요 쉴만한 물가입니다. 내가 도저히 안식할 수 없는 절망 속에 거한다 할지라도 친히 우리 목자 되시는 주님이 나를! 우리를 먹이시기 때문입니다.
양이 언제 자신의 목자가 뜯어다 주는 풀을 먹어보겠습니까? 양이 어떻게 누워서 자신의 목자가 떠다주는 물을 마셔볼 수 있겠습니까? 양에게 있어서 이보다 큰 은혜가! 영광이 없습니다.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죠!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삶의 시간을 지내다 두려움에 한없이 떨고 두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졌다 할지라도 이런 때가 아니면 하나님이 직접 먹이시고 돌보시는 이만한 영광과 은혜를 누릴만한 기회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새롭고 놀라운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선하고 인자한 목자의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다윗은 다른 많은 직업들 중에서도 특별히 목자로 비유하여 시편 23편을 썼습니다. 왕도 있고 장군도 있고 다른 좋은 직업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목자를 선택하였습니다. 무언가 특별한 이유가 있었겠죠!
이스라엘 사람들은 양을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습니다. 아들이 열이 있어도 열 명에게 다 맡기지 않습니다. 그중에 가장 성실하고 자비롭고 인자한 사람에게 양들을 맡깁니다. 그러한 성품이 아니면 양들을 돌볼 수 없기 때문이죠!
느리고 아둔하고 말도 잘 안 듣는 양들을! 험한 광야지형과 가냘픈 다리 때문에 툭하면 다치는 양들을 정성껏 돌보려면 선한 마음과 인자한 성품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자들에게만 양들을 맡겼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누군가가 저 사람이 목자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선하고 인자한 사람이라는 말과 동의어가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성품이 선하시고 인자하심을 드러내고 싶어서 굳이 목자로 비유하며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부족함이 없음을 말하고 싶어서 시편 23편을 쓴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성품이 이러하심을 말하고 싶어서 알리고 싶어서 시편 23편을 썼습니다.
남은 삶은 시편 23편을 묵상하면서 나에게 어떠한 일이 닥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새로운 연한 풀을 먹이시는 선하신 목자가 우리 곁에 늘 있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온몸으로 물살을 막아 우리의 갈급함을 채워 주시는 인자하신 목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설령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난다 하더라도 두려워할 것이 없는 것은 선한 목자 되시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그 상황에서 예기치 못한 은혜로 우리들을 먹이시고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다는 현실 때문에 염려만 하시지 마시고 오히려 그 가운데서도 우리를 먹이시고 돌보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맛보십시오! 그곳 역시 더없이 좋은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가 될 것입니다.
항상 양과 같이 제 갈 길로 가는 고집스러운 우리들을
여호와 하나님의 양으로 삼아 주셔서
오늘도 주린 영들을 먹이시고 갈급한 심령들을 채우시니
주님께 너무나도 감사드립니다.
수많은 시간을 주님과 함께 하였지만
두려워하고 염려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목자 되시는 주님을 멀리 떠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아버지 하나님의 음성에 항상 귀를 기울이며
그 음성을 두 눈으로 보듯이 선명히 알아 따라갈 수 있는
우리 모든 주의 자녀들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지금 나의 삶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머물러 있을 지라도
우리의 목자 되시는 주님만 계시다면
그 곳 역시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임을 항상 깨닫게 하옵소서.
남은 한 해는 온전히 선한 목자 되시는 주님만 따르려 합니다.
다윗과 같이 고백하는 우리의 삶이 될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도와주시옵소서.
이제는 죄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우리들을 건져 주신
우리의 선한 목자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우리에게 이 세상도 주시고 독생자까지 내어주신!
모든 것을 내어 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하심과
언제나 우리들이 안식할 수 있도록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이끌어 주시는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주님의 어린 양들 위에
이들의 가정과 직장과 삶의 자리위에
그리고 선한 목자의 품안에서 안식하며 나아가는
우리 청년부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히 함께 하시길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