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3.11.저녁예배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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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4 views백성들의 반역과 하나님의 신속한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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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주해
본문주해
וַיִּסְע֞וּ מֵהֹ֤ר הָהָר֙ דֶּ֣רֶךְ יַם־ס֔וּף1/4
לִסְבֹ֖ב1/8
אֶת־אֶ֣רֶץ אֱד֑וֹם1/2
וַתִּקְצַ֥ר נֶֽפֶשׁ־הָעָ֖ם1/4
בַּדָּֽרֶךְ׃1/2
( WTT)
그리고 그들이 호르산으로부터 홍해길로 출발했다(칼 바익톨)1/4
돌아서[둘러서,우회해](칼 부정사)1/8
에돔땅을1/2
그리고 그 백성의 마음이[영혼이] 짧아졌다[급해졌다](칼 바익톨)1/4
그 길에서1/2
l 이당시 이스라엘백성의 정확한 위치는 알수 없다. 호르산이라고는 하지만 알려진 호르산과는 일치점이 없다.
n 마찬가지로 정확한 출애굽 경로도 알수 없다. 알려진 것은 추측일 뿐이다. 이것은 이때, 왜 이스라엘사람들의 마음이 그렇게 되었는지 우리가 확실히 알수 없음을 알려준다.
l 하지만 본문은 두 단어를 통해 재미있는 아이러니를 만들고 있다.
n 첫 황제에서 에돔땅을 ‘돌아’갔다. 이것은 실질적으로 길이 길어짐을 뜻한다.
n 둘째 황제에서 그 길 때문에 백성들의 마음이 ‘짧아졌다’
l 당시 환경이 어쨌든 그 환경은 분명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불만이었을 것이다.
l 길이 험했을수도 있고, 길을 아는 사람이 있을수도 있었을 것이다.
l 이유가 무엇이든지,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마음에 안들었다.
וַיְדַבֵּ֣ר הָעָ֗ם בֵּֽאלֹהִים֘ וּבְמֹשֶׁה֒1/4
לָמָ֤ה הֶֽעֱלִיתֻ֙נוּ֙ מִמִּצְרַ֔יִם1/8
לָמ֖וּת1/16
בַּמִּדְבָּ֑ר1/2
כִּ֣י אֵ֥ין לֶ֙חֶם֙ וְאֵ֣ין מַ֔יִם1/4
וְנַפְשֵׁ֣נוּ קָ֔צָה1/8
בַּלֶּ֖חֶם1/16
הַקְּלֹקֵֽל׃1/2
( WTT)
그리고 그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에 대항하여 말했다(칼 바익톨)1/4
왜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왔냐1/8
죽이려고(칼 부정사)1/6
그 광야에서1/2
왜냐면 음식(도) 없고 물도 없기 때문이다1/4
우리는 혐오한다(칼 완)1/8
그 음식을1/16
쓸모없는[하찮은, 가치없는, ->음식같지도 않은]
l 이스라엘백성은 정면으로 하나님께 도전한다.
l 만나가 있음에도 그것은 음식이 아니라고 말한다.
l 그리고 음식을 달라고 한다. 마치 만나를 짐승도 안먹을 것으로 매도한다.
l 혐오한다라고 쓰인 동사에서 정말 지긋지긋하고 싫어하는 감정이 느껴진다.
l 전반절에서는 정말 북받힌듯한 짜증이 느껴진다.
l 왜 일로 델고왔냐? 여기서 뒈져버리라고? 이런 욕설 같은 느낌이다.
וַיְשַׁלַּ֙ח יְהוָ֜ה בָּעָ֗ם אֵ֚ת הַנְּחָשִׁ֣ים הַשְּׂרָפִ֔ים1/4
וַֽיְנַשְּׁכ֖וּ1/8
אֶת־הָעָ֑ם1/2
וַיָּ֥מָת עַם־רָ֖ב1/4
מִיִּשְׂרָאֵֽל׃1/2
( WTT)
여호와께서 그 백성 중에[을 대항해] 그 뱀들 (곧) 그 불뱀들을 보내셨다(칼 바익톨)1/4
그리고 그것들이 물었다(피엘 바익톨)1/8
그 백성을1/2
그리고 많은 백성이 죽었다(칼 바익톨)1/4
이스라엘중에서1/2
l 베를 ‘중에’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기는 하다.
l 하지만 앞에 해석을 따라 ‘대항해’라고 해석하는 것도 괜찮을거같다.
l 불뱀은 특히 독성이 강한 종류로 보인다. 날개가 달린 것처럼 보이기에 코브라의 한 종류로 보인다.
l 하나님이 주신 양식, 만나를 쓸모없고 하찮게 여긴 이스라엘백성들은 자신들이 쓸모없고 하찮게 되었다.
וַיָּבֹא֩ הָעָ֙ם אֶל־מֹשֶׁ֜ה וַיֹּאמְר֣וּ חָטָ֗אנוּ כִּֽי־דִבַּ֤רְנוּ בַֽיהוָה֙ וָבָ֔ךְ1/4
הִתְפַּלֵּל֙ אֶל־יְהוָ֔ה1/8
וְיָסֵ֥ר מֵעָלֵ֖ינוּ1/16
אֶת־הַנָּחָ֑שׁ1/2
וַיִּתְפַּלֵּ֥ל מֹשֶׁ֖ה1/4
בְּעַ֥ד הָעָֽם׃1/2
( WTT)
그 백성이 모세에게 와서(칼 바익톨) 말했다(칼 바익톨) 왜냐면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에게 대항해 말했기 때문입니다(칼 완)1/4
여호와께 기도해주소서[중재해주소서, 잘 말해주소서](히트파엘 명령)1/8
그러면 우리에게서 제거하실 겁니다(칼 익톨)1/16
그 뱀을1/2
그리고 모세가 기도했다[중재했다](히트파엘 바익톨)1/4
그 백성을 위해1/2
l 방법이 없어진 백성은 그제야 모세를 찾는다
l 벌써 많은 사람이 죽은 후다.
l 아마 별의 별 수단을 다 동원했을 것이다. 성경에는 적히지 않았지만 파라오처럼 별 수단을 다 동원해본 다음에야 나온 것같다.
l 첫번째 황제, 즉 백성의 제안은 매우 길고 구차하다.
l 하지만 모세는 대답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기도하러 간다. 기다렸다는 듯이 간다.
l 분명 모세역시 많은 곤욕을 치렀을 것인데 전혀 말이 없다.
וַיֹּ֙אמֶר יְהוָ֜ה אֶל־מֹשֶׁ֗ה עֲשֵׂ֤ה לְךָ֙ שָׂרָ֔ף1/4
וְשִׂ֥ים אֹת֖וֹ1/8
עַל־נֵ֑ס1/2
וְהָיָה֙ כָּל־הַנָּשׁ֔וּךְ1/4
וְרָאָ֥ה אֹת֖וֹ1/8
וָחָֽי׃1/2
( WTT)
그리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하셨다(칼 바익톨) 너는 너를 위해 뱀을 만들어라(칼 명령)1/4
그리고 그것을 세워라(칼 명령)1/8
장대 위에1/2
그리고 존재하는(칼 완) 모든 물린 자들(칼 분사)이1/4
그것을 보고(칼 완)1/8
살았다(칼 완)1/2
l 이스라엘 백성은 나하쉬라고 말하고 하나님은 사라프라고 말한다. 어감의 차이일수도 있고, 처음에 뱀이 나올 때, 나하쉬 곧 사라프라고 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단어를 쓰신거같다. 여하튼 큰 의미를 가진 것 같지는 않다.
n 물론 해석을 하려면 여러해석이 나올 수 있겠지만, 그 해석이 가능한가는 고민해보고 연구해봐야할 문제다.
l 여기서 하나님은 여호와란 이름으로 계속해서 나온다. 4절에서 백성들이 불평할 때, 하나님이라고 나온 것으로 보아, 그들은 현실적으로는 자신들의 앞에 있는 모세를 향해 비방하고 대적했지만, 실제론 그 뒤에 계신 신, 하나님을 대적했다.
l 그리고 이제야, 백성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7절에서 시인한다. 여호와를 대적했다고 고백한다.
l 그리고 하나님의 대답과 행동은 즉각적이다. 모세의 행동도 즉각적이고 하나님의 응답도 즉각적이다.
n 둘다 물흐르듯이 진행된다. 사전에 계획하고 준비한 것같다.
l 마지막에 살다가 완료로 나온 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준비를 따르는 자는 벌써 살았음을 뜻하는 선포적인 완료이다.
l 그렇다면 왜 이렇게 잔혹하게 보일정도로 심판하셨을까.
n 그것은 죄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가진 죄의 속성을 일부라도 제거하고 싶었던 하나님의 뜻은 아니었을까.
n 이 사건이 노아의 홍수와도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과도 다른 점은
n 죽은 자들도 하나님의 백성이란 점이다.
n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를 살리기 위한 것이다.
וַיַּ֤עַשׂ מֹשֶׁה֙ נְחַ֣שׁ נְחֹ֔שֶׁת1/4
וַיְשִׂמֵ֖הוּ1/8
עַל־הַנֵּ֑ס1/2
וְהָיָ֗ה אִם־נָשַׁ֤ךְ הַנָּחָשׁ֙ אֶת־אִ֔ישׁ1/4
וְהִבִּ֛יט אֶל־נְחַ֥שׁ הַנְּחֹ֖שֶׁת1/8
וָחָֽי׃1/2
( WTT)
그리고 모세가 놋뱀을 만들었다(칼 바익톨)1/4
그리고 그것을 세웠다(칼 바익톨)1/8
장대 위에1/2
그리고 있었다(칼 완) 만약 그 뱀이 사람을 물었다면(칼 완)1/4
그 놋뱀을 바라보고(히필 완)1/8
살았다(칼 완)1/2
->그리고 뱀에 물린 자는 그 놋뱀을 바라보고 살아나는 일이 있었다.
l 모세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행했고, 그를 따른 자는 모두다 살아났다.
l 결말은 정말 허무할 정도다.
l 그 일로 인한 후일담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l 그저 일상적인 일이었다는듯, 마치 어제 소풍을 갔다왔어라고 말하듯이 그냥 넘어간다.
이 사건 이전에 호르마의 승리가 나온다. 호르마의 위치와 아랏의 왕이 네겝에서 거주한다는 것으로 볼때,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눈앞을 둔 상태였을 것으로 보인다. 하루 이틀, 길어도 5일안에 가나안에 입성할 수 있는 거리다.
그리고 가나안 입성의 전초전이라 할 수 있는 전투에서 승리했다.
아마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가나안입성을 기대했을 것이다.
거리상, 약 120km만 더가면 예루살렘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네게브 사막이긴 하지만, 이스라엘은 가나안땅에 들어온 것으로 볼수도 있다. 물론 광야에서 사람이 살지 못하기에 그렇게 보긴 힘들다.
만약 호르마의 위치가 페트라라고 하더라도, 이스라엘은 남쪽으로 향했고, 이것은 그나마 가까워진 가나안에서 더욱 멀어지는 방향이다.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인들의 마음을 엿볼수 있는 도구다.
놋뱀을 만드는데 시간이 어느정도 걸렸을거같은데, 그런 상세한 부분은 생략됐다.
왜 뱀이었을까. 이것은 나무에 달린 자를 연상케 한 것같다.
장대는 나무였고, 장대위에 뱀이 있다는 것은 뱀이 나무에 달렸다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뱀, 죄악은 이미 패배했다는 것을 뜻하기 위해서라 보인다.
그리고 이 놋뱀은 그리스도의 이미지와 완전히 상반된다.
죄의 근원인 뱀과 무죄한 그리스도
하지만 똑같이 나무에 달렸다.
여기서 은혜가 얼마나 큰지 나온다.
놋뱀이라 해석되지만 순수한 구리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붉은 기를 띄게된다.
즉, 제물로서 대신 죽은 것이다.
죄의 근원인 뱀이 죽어서 달려 있는 것을 봄으로써, 이스라엘은 자신의 죄에서 구원받을수있었다.
원래 제물로 바쳐지는 짐승은 죄의 대상이 되는 사람과 물리적 접촉을 해야한다. 접촉으로 인해 죄가 전가되고, 제물이 사람을 대신해 죽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실제적 접촉이 아닌 장대에 달아 보게 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것을 본 자는 모두다 죄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특히 죄의 원인을 제공한 뱀을 매닮으로 진정한 구원을 선포한다.
하지만 이 놋뱀은 히스기야시대까지 우상으로 섬겨졌다.
특히 병의 치유를 위한 우상이었다.
그리고 이런 병치료와 관계된 우상이나 신은 항상 널리 섬겨졌고, 대중화되었다. 그리스로마신화의 아스클레스피오스만 봐도 그렇다.
아스클레피오스의 상징은 지팡이에 뱀이 있는 것이다.
이집트에서도 뱀은 풍요를 상징한다.
이런 그 당시의 사상은 아마 이스라엘에도 영향을 미쳐, 놋뱀을 섬기는데 일조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죄에서 구원으로 인한 회복은 더 큰 죄를 낳았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의 값없는 구원은 정말로 귀중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가 드러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드러나길 바란다.
정말 우리가 우리자신을 내세우지 않는가.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아닌 우리식으로 섬기고 해석한다.
크게는 수많은 이단들, 작게는 우리 생활속에서 우리 편의대로 생각하는 수많은 말씀들,
그것들은 무럭무럭 자라서 놋뱀과 같은 우상이 될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에 젖어있지 않다면 확실히 그렇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내려준 하늘의 양식, 만나를 경멸하고 쓸데없는 것으로 여겼다.
만나는 사막을 지나는 그들에게 생명줄이었다.
즉, 양식없는 그들에게 만나는 구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구원을 멸시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멸시, 그 죄악을 방관하신 것이다.
그들의 죄를 그대로 당하게 하셨다.
그것이 불뱀을 보낸 이유다.
뱀은 창세기에서 죄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회개하자 즉시 죄를 매달아 죽임으로, 구원을 선포하신다.
그러나 뱀은 주변의 나라들이 공통적으로 풍요나 치유의 상징으로 섬기는 대상이었고, 이스라엘도 놋뱀을 섬기게 된다.
모세가 만든 놋뱀을 히스기야때까지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1-3절은 하나님의 은혜로, 호르마에서 복수를 성공하는 내용이다.
이스라엘은 정탐꾼의 보고를 듣고 불순종하고 점령시도하다 대패당한 곳이 바로 호르마다.
그리고 아랏의 왕은 그 정복자중 하나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는 오히려 그들을 기고만장하게 한것같다.
은혜로 순종에 이르는 것이 아닌, 더욱 악해진 모습이다.
설교
설교
서론
우리는 어떤 일이든지, 시작을 하거나, 하는중간에서도 우리가 그에 대해 가지는 기대라는 것이 있습니다. 일이 이런 식으로 되길 바라는 마음, 아니면 결과가 이렇게 나오길 바라는 마음들이 다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대로 되면 참 좋지만 그렇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흘러갈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반응은 여러가지로 나뉘게 됩니다. 오늘 본문속의 이스라엘의 모습을 살펴보며, 우리의 반응이 아닌, 우리가 끝까지 견지할 것이 무엇인지 살펴볼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본론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오늘 본문의 배경이라 할 수 있는 1-3절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3절은 이스라엘의 승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승리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매우 의미가 깊은 승리였습니다. 왜냐면 사실 이 호르마라는 장소는 14장에서 정탐꾼의 보고를 받은 후 실망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린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때, 이스라엘이 회개하는 척하고 가나안을 점령하러 갔다가 대패를 당하고 도망친 자리가 바로 호르마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패배했던 그곳에서 대승을 거두고, 자신들을 뼈아프게 패배시켰던, 왕들중 하나를 진멸하는 쾌거를 올렸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어떤 마음일까요.
원칙적으로 말해, 이 승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같습니다. 그것은 4절에서 나옵니다. 분명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30km정도만 더 가면 브엘세바입니다. 즉, 가나안입니다. 호르마에서 120km를 가면 예루살렘입니다. 한마디로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있는 시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불기둥과 구름기둥, 즉 하나님의 인도는 반대방향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이대로 북쪽으로 조금만 더가면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인데, 이대로 발길을 돌려야 합니다. 당연히 마음이 상할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히브리어로 마음이 상하다는 말의 문자적 의미, 원래 뜻은 짧아졌다는 말입니다. 길은 길어졌고, 마음은 짧아지고, 조급해졌습니다. 그리고 백성은 당연히 원망을 합니다. 그리고 그 원망의 정도는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5절에서 나오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직접 공격합니다. 앱굽을 그리워하는 원망은 이전에도 나오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주신 만나를 대놓고 공격합니다. 분명 그들에게 만나를 주셨음에도, 그들은 먹을ㅇ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만나를 ‘하찮다’, 무가치하다. 쓸모없다고 평합니다. 싫어한다는 말도 그냥 싫은게 아니라 혐오한다의 수준입니다.
이들은 지금 1-3절의 승리가 자신의 힘으로 일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대적에게 원수를 갚은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가나안 입성이라는 자신의 길을 막는 하나님과 모세를 적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5절 첫머리에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라고 번역하지만, 많은 번역은 하나님과 모세를 적대하여라고 번역합니다. 실제 그 뉘앙스가 강합니다.
1-3절의 승리는 오히려 이들에게 독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이들의 죄악대로 행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의문을 가질수 있습니다. 왜 하필 불뱀일까요. 보통 뱀은 좋은 의미가 아닙니다. 모세오경에서는 특히, 뱀은 죄악의 상징이자, 죄의 근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죄악의 상징인 뱀을 사용하여 반역한 백성들을 심판하십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백성의 죄를 그대로 당하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래 민14장에서 죽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해 반역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때와 마찬가지로 유예시키시고, 막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죄를 방관하십니다. 즉, 죄의 상징인 뱀을 보냄으로써, 그들의 죄를 그대로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호되게 당하고서야 이들은 다시 하나님께 잘못했다고 돌아옵니다. 그리고 이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조치가 바로 놋뱀입니다. 왜 굳이 놋뱀을 만들게 했을까요. 그리고 왜 장대에 매달게 했을까요.
구약에서 나무에 매달린 자는 저주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을 심판했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구원하셨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것을 실제로 느끼기를 원했습니다. 그렇기에 이런 퍼포먼스를 행했습니다. 그냥 말한마디로 살릴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뱀에 물려 죽어가는 자는 장대에 달려 심판받은 뱀을 보면 삽니다. 이것은 일정기간동안 계속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뱀에 물려 오는 사람이 장대에 달린 놋뱀을 보고 치유되는 기적을 계속해서 경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자신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가슴으로 느끼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은 그들과 그들의 후손이기에, 이 이후, 하나님께 원망하는 이야기는 더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정말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끝나면 참 좋았을 테지만, 사실 이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이 뱀은 이스라엘에게 우상이 되었습니다. 모세가 만든 놋뱀은 계속 성전에 함께 있으면서, 병에 걸리거나 다친 사람이 와서 제사하는 우상이 되었습니다. 히스기야 왕때, 이 놋뱀, 느후야단을 부수기 전에까지 수백년동안 놋뱀은 치유의 능력을 가진 신으로써 섬김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성전안에서 말입니다. 특별히 병에 걸린 사람은 그 놋뱀을 향해 기도하며, 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제사를 드렸습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그것은 그 시대의 문화와 연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나왔던 이집트에서 뱀은 풍요의 상징이었습니다. 가나안에서도 뱀은 치유와 기적적인 힘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리스에서도 뱀은 치유의 상징입니다. 지금도 병원에가면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지팡이모양의 상징을 그려놓은 곳이 종종 있습니다. 그리스로마의 치료, 의료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화적인 배경을 기반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총을 우상숭배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바라는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자신들의 방식으로 하나님이 아닌, 그 은혜를 섬겼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보다 하나님이 했던 치유의 힘이 더 중요했습니다. 수백년간 그것은 계속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마, 그 느후야단이 부서지고 나서도 음성적으로 행해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아시고도 그 놋뱀을 만들어 매다는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말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통해 자신이 어떻게 될지를 알려주셨습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여러 친구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너는 친구들의 이름을 들어 문안하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여러 친구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너는 친구들의 이름을 들어 문안하라
하나님아버지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그 당시 이스라엘백성에게 구원의 방도가 바로 자신 뿐임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구원의 방도는 오직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뿐임을 알려주십니다.
뱀은 이스라엘이 지은 죄의 상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뱀, 죄를 심판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더 나아가 무죄한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해 심판하셨습니다. 놋뱀은 이스라엘백성의 죄악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감당하셨습니다. 왜냐면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죄를 감당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우리가 우리의 의도와 계획, 뜻대로 일이 될 것을 기대하고 바라보아야 합니까.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에만 시선을 두어야 합니까. 우리가 할 것과 얻을 것에 시선을 두어야 합니까. 그것이 명예이든, 돈이든, 건강이든, 그 무엇이든간에, 우리가 그것에 우리의 시선을 둔다면, 우리는 이스라엘백성과 같은 위치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1-3절의 승리를 바탕으로 하나님을 자신의 길을 막는 방해물로 여기고 적대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하나님을 상관치 않거나, 말씀과 적대하며, 우리의 길을 가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럴 것을 알고 계셨기에, 하나님아버지께서는 죄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셨습니다. 우리가 반역할 것을 알기에 우리의 그 죄까지고 십자가에서 못박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원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오직 하나의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사랑하라입니다. 그속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혹시 가슴에 와닿지 않으십니까. 한가지 비유를 들겠습니다. 만약 우리가 심장병에 걸려서 이식을 받아야 한다고 합시다. 그런데 멀쩡한 어떤 사람이 심장을 기증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안된다고 하니 유언을 남기고 사고를 일부러 당하면서까지 결국 자신의 심장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냐고 그 사람에게 물어보니, 대답은 단 하나였습니다. ‘너를 사랑해서’입니다. 그리고 너도 사랑하라고 하는 것이 유언이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누구를 쫓고 있습니까. 우리가 우리를 위해 생명을 버리신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보기 원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형제 자매를 사랑하기 원합니다. 그래서 언제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안에 거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