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3.16.금요기도회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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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분석
본문분석
5 Οὕτως καὶ ὁ Χριστὸς οὐχ ἑαυτὸν ἐδόξασεν γενηθῆναι ἀρχιερέα ἀλλʼ* ὁ λαλήσας πρὸς αὐτόν·*
υἱός μου εἶ σύ,* ἐγὼ σήμερον γεγέννηκά σε·
6 καθὼς καὶ ἐν ἑτέρῳ λέγει·
σὺ ⸆ ἱερεὺς εἰς τὸν αἰῶνα κατὰ τὴν τάξιν Μελχισέδεκ,*
7 ὃς ἐν ταῖς ἡμέραις τῆς σαρκὸς αὐτοῦ δεήσεις τε καὶ ἱκετηρίας πρὸς τὸν δυνάμενον σῴζειν αὐτὸν ἐκ θανάτου μετὰ κραυγῆς ἰσχυρᾶς καὶ δακρύων προσενέγκας καὶ εἰσακουσθεὶς ἀπὸ τῆς εὐλαβείας,* 8 καίπερ ὢν υἱός, ἔμαθεν ἀφʼ* ὧν ἔπαθεν τὴν ὑπακοήν,* 9 καὶ τελειωθεὶς ἐγένετο πᾶσιν τοῖς ὑπακούουσιν αὐτῷ αἴτιος σωτηρίας αἰωνίου,* 10 προσαγορευθεὶς ὑπὸ τοῦ θεοῦ ἀρχιερεὺς κατὰ τὴν τάξιν Μελχισέδεκ.*
5 Οὕτως καὶ ὁ Χριστὸς οὐχ ἑαυτὸν ἐδόξασεν γενηθῆναι ἀρχιερέα ἀλλʼ* ὁ λαλήσας πρὸς αὐτόν·*
υἱός μου εἶ σύ,* ἐγὼ σήμερον γεγέννηκά σε·
이와같이 그 그리스도는 스스로 대제사장 되는(에오 수 부정)영광을 취하지 않으시고 반대로 그에게 말씀하신 분이(에오 능 분 단 주 남) (영광스럽게 하신 것이다).
너는 내 아들이다(현 능 직 2단),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완 능 직 1단).
l 이 절의 전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얻는 구원, 안식에 대해 말하고 있다.
l 우리는 그 안식에 들어가려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l 동시에 우리가 그 안식에 들어갈 수 있음은 결국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를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l 그가 대제사장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결코 안식에 이르지 못한다.
l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우리는 안식, 구원에 이르게 되었다.
l 이것을 안식이라고 한 것은, 우리의 구원이란 그저 천국을 바라보는 것만이 아닌, 주 예수 안에서 누리는 평화이기 때문이다.
l 그러나 동시에 5절을 통해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은 자신이 원해서 받은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l 오직 아버지로부터 임명된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겸손해지시고, 낮아지시고 추해지셨다.
l 그러나 아버지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높이시고 영광스럽게 하셨다.
6 καθὼς καὶ ἐν ἑτέρῳ λέγει·
σὺ ἱερεὺς εἰς τὸν αἰῶνα κατὰ τὴν τάξιν Μελχισέδεκ,*
그가 다른 곳에서 또한 말씀하신 것(현 능 직 3단)과 같다.
너는 영원히 멜기세덱의 그 순서를 따르는 제사장이다,
l 멜기세덱을 뒤따르는 제사장.
l 아론과 그 후 나오는 사독계열 정도가 아닌, 성경의 최초의 제사장이었던 멜기세덱
l 그럼으로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다른 어떤 것보다 뛰어나다.
l 이 시대에는 사독계열 제사장은 사라지고 각자 이방이 세운 제사장들 뿐이었다.
l 그러나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의 순서상에 있는 제사장으로, 가장 높고 존귀하다.
l 그리스도께서는 전혀 자신을 높일 생각이 없으셨다.
l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토록 그리스도를 높여주셨다.
7 ὃς ἐν ταῖς ἡμέραις τῆς σαρκὸς αὐτοῦ δεήσεις τε καὶ ἱκετηρίας πρὸς τὸν δυνάμενον σῴζειν αὐτὸν ἐκ θανάτου μετὰ κραυγῆς ἰσχυρᾶς καὶ δακρύων προσενέγκας καὶ εἰσακουσθεὶς ἀπὸ τῆς εὐλαβείας,*
그의 육신의 날에 그는 죽음으로부터 그를 구원할(현 능 부) 그 능력 있는(현 능 중 분 목 단 주) 분께 기도와 또한 탄원을 울부짖음과 눈물과 함께 드리고(에오 능 분 단 주 남) 그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인해 들으셨다[복종하셨다](에오 수 분 단 주 남),
l 앞절은 그리스도께서 받은 영광이 나왔다.
l 하지만 7절은 그분의 비천이 나온다. 아무리 애쓰고 통곡하고 눈물흘려도 응답치 않으시는 하나님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의 응답하지 않으심에 순종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l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순종함은 하나님을 경외함, 두려함으로 인해서다 라고 말하고 있다.
l 같은 하나님이지만, 성부께 두려워함으로 순종하는 그리스도의 모습, 그 모습이 마음에 사무친다.
8 καίπερ ὢν υἱός, ἔμαθεν ἀφʼ* ὧν ἔπαθεν τὴν ὑπακοήν,*
그가 아들이시지만(현능분단주남), 고난당하심을(에오능직3단) 통해 그 순종을 배우셨다[아셨다[(에오능직3단),
l 여기서 배우다는 실질적인 경험으로 인해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l 아들이시지만, 고난을 받고, 그 고난을 통해 순종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셨다.
l 그리스도의 3년간의 공생애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l 주께서는 기도하시면서 그 고난을 견뎌내셨고, 그 과정을 통해 순종이 무엇인지 가슴으로 배우셨다.
l 아들이시면서 그러셨다.
9 καὶ τελειωθεὶς ἐγένετο πᾶσιν τοῖς ὑπακούουσιν αὐτῷ αἴτιος σωτηρίας αἰωνίου,*
완전하게(에오수분단주남) 되시고(에오중직3단) 그에게 순종하는(현능분복여남) 그 모든 자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l 완전하게 되다는 부활승천을 가리킨다.
l 고난으로 배운 순종을 한 그리스도에게 해야할 것은 역시 순종이다.
l 고난속에서의 순종, 마음이 상한 상태에서의 순종, 그 모든 고난속의 순종을 통해 우리역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길과 하나님의 엄위로우심을 배우게 될 것이다.
10 προσαγορευθεὶς ὑπὸ τοῦ θεοῦ ἀρχιερεὺς κατὰ τὴν τάξιν Μελχισέδεκ.
그 하나님께로부터 멜기세덱의 그 순서를 따르는 대제사장으로 불리셨다[임명되셨다](에오수분단주남).
l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은 바로 그 순종에서 나왔다. 그리고 순종으로 말미암아 성취하신 영원한 구원은 자연스럽게 그의 대제사장직의 임명으로 이어졌다.
l 영광이 목적이 아니라, 그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순종하고, 모든 고난을 겪으심, 그 모든 과정들이 모여서 영원한 구원이란 결과로 이어졌다.
설교
설교
우리가 살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이 질문의 답을 생각해본다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당연히 돈일것입니다. 저역시도 당장 돈이 먼저 생각납니다. 그런데 사람이란 단순한거 같으면서도 복잡합니다. 정말 돈만 있으면 잘 살수있습니까. 이 질문에 바로 네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또 드물것입니다. 왜냐면 믿든지 믿지 않든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돈만으로는 살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 우리가 구하는 것중 하나가 인정입니다. 어떤 책에서는 사람은 항상 자신이 인정받고 존중받고자 한다고 합니다. 이 말은 공감하실 것입니다. 내가 좀더 귀중히 여김받고, 인정받는 것, 이게 참 좋지 않습니까.
그러다보니, 우리의 삶속에서는 항상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문제가 됩니다. 서로서로 좀더 존중받고 싶어하고 좀더 인정받고 싶어하고, 좀더 내 생각을 주장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어째서 그럴수 있었을까요. 그저 하나님이라서 그랬을까요. 이시간 함께 본문을 묵상하며, 그리스도를 묵상하고 닮아갈수 있는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본론
본문은 그리스도의 대제사장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란 사실은 솔직히 말해서 그리 와닿는 말은 아닙니다. 그것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재자이자 구원자란 말이 더욱 마음에 와닿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란 말은 그 당시 성도들에게 매우 큰 위로가 되는 말입니다.
그당시 예수님을 믿은 그리스도인들, 특히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참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왜냐면 그들이 지켰던 전통과 예수님의 말씀이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중 가장 큰 것은 바로 제사와 제사장의 역할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제사장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제사, 예배드릴수 있었고,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계속해서 드려야 했습니다. 예루살렘이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는 것도 결국 그곳에 성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하나님께 제사가 이루어지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은 것은 너무나 기쁜데, 그들의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제사도 없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고 그것을 믿지만, 그런 그그들의 모습은 그들의 이웃, 유대교를 믿는 자들에게 공격받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대제사장이란 사실과, 그것도 멜기세덱의 반열에 있는 제사장이란 사실은 그들에게 위로와 자부심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들이 겪는 정체성의 혼란과 이웃의 공격을 모두다 물리쳐주는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이것은 우리에게도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제사장이란 개념이 낯설지만, 예수께서 대제사장으로 임준받으신 과정때문입니다. 그당시 대제사장이란 종교의 지도자입니다. 가장 높은 자리입니다. 특히, 가장 정통한 계열이었던 사독의 대가 끊어지면서, 대제사장 자리는 정치로 얼룩진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왕, 당시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로마의 총독과 결합하여야 얻을 수 있는 자리가 대제사장이란 자리였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그런 사람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대제사장의 위치에 예수님이 서있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 올라간 것은 스스로 오르고 싶어서 오른 것이 아닌, 그의 겸손때문임을 히브리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하셨습니다. 이 겸손은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한 사양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겸손과 순종을 위해 가장 낮고 추한 자자리로 가셨습니다.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들이십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우리를 위해 육체로 오셨습니다. 그 오심은 자체가 고난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되심을 내려놓고 아버지께 간구했습니다. 7절에서 나오는 간구와 소원이란 단어중 두번째에 나오는 소원이란 단어는 성경에서 이곳에서만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 뜻은 어쩔수 없는 극심한 재앙을 맞이해서 정말 목숨을 걸고 간구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분은 아들이십니다. 이렇게할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이렇게까지 기도하셨습니다. 울부짖으며 기도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기도하셨습니까. 그저 십자가를 피하고 육신을 보전하고 싶어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을 보면 그것이 아님을 알수 있습니다. 분명 예수께서는 힘들어하고 면하고 싶어하셨지만, 그럼에도 결국,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아들이시면서도 아들로서 받아야 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죄인처럼 간구하셨습니다.
그래서 8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그리스도께서는 정말 하나님이시면서도,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극심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순종이 무엇인지 배우셨습니다. 여기서 배우다는 말은 말로 설명을 듣거나 책으로 배운느 것이 아닌, 삶으로 배우고 깨닫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토록 낮아지셨습니다. 그리고 그 낮아지심에는 높아짐, 영광 받고 명예와 존귀를 얻을 것에 대한 고려는 전혀 들어가있지 않았습니다.
만약 스스로 명예롭고 높아지고자 하셨다면, 처음부터 성육신하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분은 이렇게 낮아질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아버지를 알고 있습니다. 안다는 것은 그저 쉽게 말하는 안다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가슴으로 느끼고 경험한 살아있는 지식입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 순종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는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선함과 변하지 않음과 인자하심을 믿기에 예수께서는 그 뜻을 믿고 이 땅에 내려왔습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이 세상의 인정이 아닌, 오직 하나님이 하실 일만을 바랄수 있었습니다. 분명 이땅에서 명예를 얻고 높임을 받을 기회가 여러번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물리치실수 있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아버지를 알고 있습니다. 안다는 것은 그저 쉽게 말하는 안다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가슴으로 느끼고 경험한 살아있는 지식입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 순종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는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선함과 변하지 않음과 인자하심을 믿기에 예수께서는 그 뜻을 믿고 이 땅에 내려왔습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이 세상의 인정이 아닌, 오직 하나님이 하실 일만을 바랄수 있었습니다. 분명 이땅에서 명예를 얻고 높임을 받을 기회가 여러번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물리치실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 믿음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될지를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영광을 얻고, 자신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왜냐면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일만을 바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아버지만을 믿으며 그토록 낮아지신 독생자 그리스도 예수를 멜기세덱의 반열을 따르는 대제사장이라 칭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믿는 자를 구원한 근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다 예수님을 믿노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이 밤에, 늦은시간에 예배하고 기도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진정 우리는 믿는자입니까. 우리가 믿음의 본이 되신 그리스도의 믿음을 가지기 원합니다.
나를 인정해주고 존중해주는 사람을 찾고, 그런 자리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기 원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 길을 갔던 예수 그리스도를 닮기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 인정이 필요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니요. 그것보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기에 인정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신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누군지 아무도 모릅니다. 학자들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아실 것이고, 그와 동시대에 살았던 신앙인들은 알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서는 성경중 가장 수려한 문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동시에 매우 해박한 유대교의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분명 존경받는 지식인이며, 신앙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어떤 사람임을 히브리서에 아무런 단서도 남가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인정이 아닌, 이 서신을 읽는 자들이 그리스도를 알고 믿기를 원했습니다.
우리역시 하나님을 알아가기 원합니다. 예배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속에 하나님을 알기 위한 시도가 있기 원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