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4.6.금요기도회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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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선택되어 순종하고 이방이 순종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반대로 되었음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결국 순종하지 않는 자에게 베푸시는 긍휼이 얼마나 큰지 이야기하며 이스라엘과 모든 자들이 그 긍휼속에 있을것이라 말한다. 이후 하나님의 측량할수 없음을 말하며, 그 관점에서 우리가 어떻게 예배드리고 살아야하는지를 말한다.

Notes
Transcript

본문주해

33 Ὦ βάθος πλούτου

καὶ σοφίας καὶ γνώσεως θεοῦ·*

ὡς ἀνεξεραύνητα τὰ κρίματα αὐτοῦ

καὶ ἀνεξιχνίαστοι αἱ ὁδοὶ αὐτοῦ*.

34 τίς γὰρ ἔγνω νοῦν κυρίου*;

ἢ τίς σύμβουλος αὐτοῦ ἐγένετο;

35 ἢ τίς προέδωκεν αὐτῷ,

καὶ ἀνταποδοθήσεται αὐτῷ*.

36 ὅτι ἐξ αὐτοῦ καὶ διʼ αὐτοῦ καὶ εἰς αὐτὸν τὰ πάντα·*

αὐτῷ ἡ δόξα εἰς τοὺς αἰῶνας, ἀμήν*.

*12 Παρακαλῶ οὖν ὑμᾶς, ἀδελφοί, διὰ τῶν οἰκτιρμῶν τοῦ θεοῦ παραστῆσαι τὰ σώματα ὑμῶν θυσίαν ζῶσαν ἁγίαν ⸂εὐάρεστον τῷ θεῷ⸃, τὴν λογικὴν λατρείαν ὑμῶν·* 2 καὶ μὴ ⸀συσχηματίζεσθε τῷ αἰῶνι τούτῳ, ἀλλὰ ⸁μεταμορφοῦσθε τῇ ἀνακαινώσει τοῦ νοὸς ⸆ εἰς τὸ δοκιμάζειν ὑμᾶς τί τὸ θέλημα τοῦ θεοῦ, τὸ ἀγαθὸν καὶ εὐάρεστον καὶ τέλειον*.

33 Ὦ βάθος πλούτου
καὶ σοφίας καὶ γνώσεως θεοῦ·
ὡς ἀνεξεραύνητα τὰ κρίματα αὐτοῦ
καὶ ἀνεξιχνίαστοι αἱ ὁδοὶ αὐτοῦ.
아 부요함의 깊이여
그리고 지혜의 그리고 지식의
하나님의. (하나님의 부요함과 지혜와 지식과 부요함의 깊이여!)
어찌나 그의 그 심판은 헤아릴수 없고
그의 길들은 얼마나 이해될 수 없는지(탐지될수 없는지)
34 τίς γὰρ ἔγνω νοῦν κυρίου;
τίς σύμβουλος αὐτοῦ ἐγένετο;
왜냐면 누가 주의 마음을 알겠습니까(에오능직3단)?
아니면 누가 그의 조언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에오중직3단)?
35 τίς προέδωκεν αὐτῷ,
καὶ ἀνταποδοθήσεται αὐτῷ.
아니면 누가 그에게 먼저 줘(베풀어)(에오능직3단)?
그에게 갚게할 수 있겠습니까(미수직3단).
36 ὅτι ἐξ αὐτοῦ καὶ διʼ αὐτοῦ καὶ εἰς αὐτὸν τὰ πάντα·
αὐτῷ ἡ δόξα εἰς τοὺς αἰῶνας, ἀμήν.
왜냐면 그로부터 그를 통하여 그를 향하여 모든 것이.
그에게 그 영광이 그 영원까지 아멘.
*12 Παρακαλῶ οὖν ὑμᾶς, ἀδελφοί, διὰ τῶν οἰκτιρμῶν τοῦ θεοῦ παραστῆσαι τὰ σώματα ὑμῶν θυσίαν ζῶσαν ἁγίαν εὐάρεστον τῷ θεῷ, τὴν λογικὴν λατρείαν ὑμῶν· 2 καὶ μὴ συσχηματίζεσθε τῷ αἰῶνι τούτῳ, ἀλλὰ μεταμορφοῦσθε τῇ ἀνακαινώσει τοῦ νοὸς εἰς τὸ δοκιμάζειν ὑμᾶς τί τὸ θέλημα τοῦ θεοῦ, τὸ ἀγαθὸν καὶ εὐάρεστον καὶ τέλειον*.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호소)하노니(현능직1단), 형제들아, 그 하나님의 그 자비를 통해 너희의 그 몸을 기뻐하시는(받아들일) 거룩하고 살아있는(현능분단목여) 제물로 그 하나님께서 바치라(증정하라, 드리라)(에오능부) 이것(앞의 ‘우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하고 살아있는 제물로 드리는 것)이 너희의 영적인[합리적인, 타당한] 예배이다. 2 그리고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순응하지 말고](현중명2복), 반대로 그 마음의 새롭게함(갱신)으로 변화되어(현수명2복) 너희를 시험함으로(현능부) 그 하나님의 그 선하고 기뻐하시고(받아들이시고) 완전한 그 뜻이 무엇인지 (알아차리라, 인정하라, 구별하라).
바울은 앞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없음을 말한다.
즉, 지금은 이방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구약때는 유대인이 선택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에서 결국 구원이 모든 사람에게 이를 것임을 확언한다.
\4\
그것을 바울은 긍휼이라고 표현한다.
구원의 본질은 하나님의 긍휼이다.
그리고 나오는 하나님의 어떠함에 대한 찬양이 33-36절까지 나온다.
이렇게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은 누구보다 높으시고 비할수 없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온전히 알수 없으며, 주님께 무엇을 바칠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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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하나님의 긍휼에 의지해 사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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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바울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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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런 하나님께 우리가 할수 있는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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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하나님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고백하고 찬양하는 것이다. 그것이 36절이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몸을 거룩하게 구별하고 살아있는 제물로 드리는 것이다.
특별히 살아있는 제물이라고 표현한 것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가 되어야 함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의 영적 예배에서 영적은 합리적이라는 뜻이다. 합당한 이치에 맞는 정도의 뜻이다.
동시에 ‘기뻐하시는’는 ‘받을만한’ 이란 뜻도 가지고 있다.
즉, 우리가 우리전체를 살아있는 거룩한 제물로 드릴 때, 그것이 하나님께서 받을만한 예배이며, 우리가 드리기에 합당한 예배라는 뜻이다.
바울은 주님이 이해하지 못할 분이고, 우리가 주님의 긍휼로 구원받았으니 편안하게 살아야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
반대로 그 이해하지 못할 주님께서 이렇게 까지 긍휼을 베푸셨으니, 그 하나님아버지를 위해 우리 전체를 드릴수 있도록 겸비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특히 에서 이세상을 본받지말고(순응하지 말고) 오히려 그 마음을 갱신(새롭게함)해서 변화되어라고 주문한다. 갱신이라 함은, 쉽게 말해 개혁을 말한다. 마음을 개혁하는 것, 이것은 현재형으로 되어있고, 이는 항상 우리를 살피고, 마음이 하나님의 뜻대로 변화될수 있도록 유지하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음의 갱신의 목표는 바로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리기 위함이다. 알아차리다, 구별하다, 인정하다, 찬성하다라는 뜻으로도 쓰일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과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을 넘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무조건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을 말한다.
그렇기에 바울은 하나님의 뜻에 수식어로, 선하고, 기뻐하시고(받을만하고), 완전한 그 뜻이라고 표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대인이다. 그의 나, 이스라엘은 멸망한지 오래이다.
그의 동족, 유대인들은 이제 그리스도를 버림으로, 구원조차 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을 찬미한다. ]
부요와 지혜와 지식을 찬미한다.
왜냐면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이다.

설교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바울사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입니다. 그것이 33-36절입니다. 그리고 그후에 바울사도는 우리에게 우리의 삶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잘 가르쳐 줍니다. 오늘 이 본문을 살펴봄으로써, 함께 은혜를 나누는 시간이 되길 소원합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 알수 있는 가장 첫번째는, 바울은 상황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1장은 이스라엘에 대해 말을 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 선택받아 하나님의 긍휼속에서 구원받았고, 이방인 선택받지 못했지만, 지금은 반대로,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인들은 그리스도를 버렸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버림으로 통해 얻는 넘어짐과 실패를 통해, 오히려 이방인들은 복음을 접할 기회를 얻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사도들이 처음에도 그렇고 사도들의 생존 당시에도 꾸준히 유대인들을 전도하려고 했음을 생각해보면, 알수 있습니다. 결국 유대인들의 대부분은 회개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과정에서 이방인들이 회개했습니다. 그로말미암아, 이방인선교가 더욱 힘을 받은 것역시 사실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상기시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결국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뜻을 알수 없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나온 것이 33-36절의 바울의 찬양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 바울의 상황을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이 말했던 것처럼, 복음은 유대인보다 이방인들에게 퍼지고 있습니다. 애초에 사도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 민족은 이미 오래전에 나라가 멸망했습니다. 메시아에 대한 소망 하나로 지탱하고 있는데, 그 메시아를 자기 민족 스스로 버린 상황입니다. 정말 꿈도 희망도 없습니다. 로마서를 보내는 로마교회의 상황도 비슷합니다. 처음 로마교회를 세웠던 유대인디아스포라들은 쫓겨나고 그 자리를 이방인그리스도인들이 차지한 상황입니다. 물론 이방그리스도인들이 일부러 쫓아낸 것은 아니지만, 그로인해 로마교회내에 갈등과 분열이 생겼습니다.
분명 복음의 시작은 유대인이지만, 유대인은 어느새 제외되었고, 반대로 복음의 반대자로 남았습니다. 우리가 바울이라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분명 민족을 전도하고 바로 세우기 위해 시작했는데, 결과는 자기 민족은 죽고, 이방인들이 살아나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 상황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왜냐면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찬양했습니다. 즉, 나로서는 이해할수도 헤아릴수도 없는 하나님의 뜻이 있으며, 그럼에도 그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큰지 알았기에 하나님아버지를 찬양할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33절에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과 풍성함을 찬양합니다. 나는 이해할수 없지만 이렇게 지혜와 지식과 풍성함이 넘치시는 하나님아버지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분명 하나님의 뜻을 알수 없지만, 우리에게는 말씀하지 않으신 그 신비속에서 아버지의 거룩한 뜻이 이루어질 것을 분명히 믿었기에 바울은 찬양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34절에서 아무도 하나님의 마음을 알만큼 지혜롭지 못하며, 하나님의 조언자가 될만큼 지식이 많지 못하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기에 찬양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파악할 만큼 하나님이 작지 않으시기에 그 하나님을 기뻐하며 찬양합니다.
우리와는 너무 다른 모습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알수 없었기에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의 그 깊음이 끝이 없어, 파악할수가 없기에, 찬양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수 없을 때 어떻게 합니까. 기도하고 알려달라고 합니다. 바울처럼 답답하고 슬픈일이 일어날때 어떻게 합니까. 시험에 들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헤아릴수 없는 분이시며, 그의 뜻을 자신이 이해할수 없어서 찬양합니다.
그것은 나보다 높으신 하나님이기에 그 선하신 뜻대로 이루실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가지가 더이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분명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구주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우편에서 항상 우리를 위해 중보하십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기에, 하나님을 뜻을 이해할수 없었지만, 믿고 오히려 이해할수 없는 하나님을 기쁨으로 찬양할수 있었습니다.
이해할수 없고, 파악할수 없는 하나님, 전능하신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에게 한없는 긍휼을 베푸실줄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가장 먼저 우리에게 이런 믿음이 있기를 원합니다. 오히려 이해할수 없기에 감사할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파악할 수 없는 하나님아버지이시기에, 찬양할수 있기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뜻을 이해할수 있었다면, 정말 행복하고 편안한 삶이라 할수 있겠습니까. 이시간 우리가 하나님의 하나님됨으로 인해 찬양하고 기도할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 알수 있는 두번째는, 우리의 생활과 예배의 목적중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분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 삶의 목적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아버지께서 우리의 삶을 통해 온전히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는 커녕, 반대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방금전의 바울의 찬양의 내용과 약간의 모순이 있습니다. 바울은 분명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알수 없기에 찬양했습니다. 우리로서는 결코 이해할수 없는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으로 말미암아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모순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특별히 2절에서 하나님의 뜻앞에 여러가지 말을 붙이고 있습니다.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라고 표현합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해할수 없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뜻은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함으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함을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분별하다’라는 단어에는 한가지 뜻이 더있습니다. 그것은 ‘찬성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이단어는 ‘분별하여 찬성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떠하든지, 그 뜻을 분별하며 하나님의 뜻에 찬성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예배입니다. 1절에서 말한대로,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 말은 구약의 제사의 제물처럼, 우리의 삶이 흠이없고 구별되야함을 말합니다. 그렇기에 특별히 산, 살아있는 이란 말을 붙이고 있습니다. 즉, 우리의 육신으로 사는 삶 전체가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제물이 되는 것이 우리에게 합당한 예배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뻐하시는 이란 단어의 다른 뜻은 ‘받을만한’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영적 예배라고 할 때, 영적이란 단어역시 ‘합당한, 합리적인’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로서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예배란, 언제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 우리의 마음을 개혁함으로 변화받을 때 가능하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본문을 통해 2가지를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바울의 찬양의 이유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해할수 없는 분이셨기에 찬양했습니다. 비록, 자신의 민족, 이스라엘의 상황은 비참하기 그지 없었지만, 또한 자신의 앞길 역시 캄캄하지만, 하나님의 이해할수 없음에 찬양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뜻은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해할수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또한 상상하지 못할 방법으로 자신의 뜻을 이루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께서 언제나 우리를 도우실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이 이해할수 없는 하나님의 뜻을 조금이라도 분별하기 위해, 우리는 항상 깨어있으며, 마음을 새롭게 해야함을 보았습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을 분별하여,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앞에서 온전한 예배가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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