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분의 시간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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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한복음
부활에 대한 도마의 의심
부활에 대한 도마의 의심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우리는 지난 주, 부활주일을 지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은 자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사과 나무에서 계속 사과가 열리는 것 처럼, 우리에게도 계속 부활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입니다. 예수 생명 나의 생명, 예수 승리 나의 승리 입니다.
예수님 부활 후 제자들을 만나셨습니다. 그 때, 도마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도마에게 말헀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그러자 도마는…
“내가 그의 손에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노라"고 말했습니다. 도마는 제자들의 말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8일 후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시는데, 그 때는 도마가 있었습니다. 8일 동안 도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정말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일까? 제자들의 말이 정말로 맞는 것일까? 아니다! 난 믿을 수 없다. 어떻게 사람이 죽었다가 3일이 지나서 살아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부정적인 마음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도마에게 8일 만에 다시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도마는 제자들의 말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내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여기서 예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을 발견합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 있는 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심과, 부활하심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사실, 교회의 전통은 도마의 의심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의심’이라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심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습니다. 저마다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데카르트 라는 철학자가 있는데, 그는 젊은 시절에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리고 세상 이라는 책을 통해 더 공부해보고자 이곳 저 곳을 방랑하며 다녔습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의심하면 의심할수록 자신의 존재감이 더욱 커지는 것을 깨닫고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의심해 본다. 그래서 나는 존재한다.” 이걸 다르게 표현하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근대 철학의 기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는 믿음의 기초 위에 세워진 사회가 아니라, 서로 의심하는 철학 위에 세워진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영향을 받은 현대 교육은 믿음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의심하고, 증거를 찾고, 실험을 통해서 증명된 것만을 받아들이는 세상입니다. 우리의 지적인 부분도 그렇지만, 영적인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부분도 계속 확인하려 합니다.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이렇게 확인하려는 세대를 가리켜, 주님은 악하다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대는 끊임없이 의심을 권유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마음의 한 편에서는 의심의 싹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라고 있음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도마가 그랬습니다. 동료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말하는데도, 도마는 못자국을 보고, 만져보고, 허리에 창 자국을 만져봐야 믿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8일 후에 예수님께서는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손의 못자국과 허리에 창 자국을 만져보라 하십니다. 그리고는 “믿음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의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심을 통해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는 반면, 어떤 사람은 더욱 확고한 믿음을 갖는 경우가 있습니다.
의심의 원인
의심의 원인
그렇다면, 왜 사람들에게는 의심이 일어날까요? 자신의 생각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눈으로 확인해야 하고, 손으로 만져봐야 하고, 그래서 내 머리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만을 받아들이려는 자세에서 의심은 나옵니다.
저 자신도 신학을 공부하면서, 의심스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한계를 깨닫습니다. 우주의 광대함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작은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의심하고 이해할 수 있을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의심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의심 때문에 주님과의 교제가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의심을 통해 더욱 주님과 가까워져야 합니다. 주님은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만져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손과 발을 만져보는 경험을 통해 믿을 수 있습니다.
의심에서 확신으로
의심에서 확신으로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신앙생활의 진리를 찾습니다. 경험을 통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확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험입니까? 주님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서, 그 분을 만나고, 그분을 만져보고, 그분과 대화하는 경험을 통해 그 모든 의심들을 사라지게 할 수 있습니다.
“주님, 주님을 더욱 만나고 싶습니다. 더욱 알고 싶습니다.” 하나님께 구하셔야 합니다.
저는 목회를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구했던 것이 있습니다. 이 교회가 든든히 서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가지 방법을 찾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교회가 든든히 설수 있을까? 그런데 지금 깨닫는 것은, 교회가 든든히 서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경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경험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건 알겠는데 그 다음은 어떻게 하는거야? 그 다음이 왜 나옵니까? 예수님을 경험하면 그 다음부터는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일을 이루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의심 없이 문을 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주님이 오셔서 나와 더불어 사시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에 보이는 표적으로 확인하려 합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 하셨습니다. 언제까지 의심하는 자리에서 힘들어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의심에서 확신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 열쇠가 바로 요나의 표적에 있다. 요나의 표적이 무엇인가?! 삼일만에 부활하신 사건이다. 즉,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의심을 제하여 버리고 확신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주께서는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 하셨습니다. 언제까지 의심하는 자리에서 힘들어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의심에서 확신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 열쇠가 바로 요나의 표적에 있다. 요나의 표적이 무엇인가?! 삼일만에 부활하신 사건이다. 즉,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의심을 제하여 버리고 확신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부활을 경험하는 것은 바로 그 분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우리의 시간 속에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없다. 그 분은 이제 다른 차원의 분이시다. 우리가 만질 수 있지만, 동시에 문을 열지 않고 다니시며, 동시에 다발적으로 여러 곳에 계실 수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차원의 예수님이시다. 그래서 그 분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요나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져보고 말합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