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5.2.수요예배 설교
0 ratings
· 30 views여로보암의 멸망에는 3명의 선지자와 3명의 죽음이 교차한다. 그 관계를 잘 살펴보자.
Notes
Transcript
주해
주해
6 וַיְהִי֩ כִשְׁמֹ֙עַ אֲחִיָּ֜הוּ אֶת־ק֤וֹל רַגְלֶ֙יהָ֙ בָּאָ֣ה בַפֶּ֔תַח1/4
וַיֹּ֕אמֶר1/8
בֹּ֖אִי1/16
אֵ֣שֶׁת יָרָבְעָ֑ם1/2
לָ֣מָּה זֶּ֗ה אַ֚תְּ מִתְנַכֵּרָ֔ה1/4
וְאָ֣נֹכִ֔י שָׁל֥וּחַ אֵלַ֖יִךְ1/8
קָשָֽׁה׃1/2
( WTT)
아히야가 문안으로 들어오는(칼분사) 그녀의 발소리를 듣는(칼 부정사) 일이 있었다(칼 바익톨)1/4
그리고 그가 말했다(칼 바익톨)1/8
들어오라(칼 명령)1/16
여로보암의 아내여1/2
왜 너는 다른 사람인 것처럼 하느냐(히트파엘 분사)1/4
그리고 내가 네게 보냄받았다(칼 수동분사)1/8
어려움을1/2
- 여로보암의 아내가 그렇게 가장한 이유는 이 이전에 하나님의 사람의 메시지를 무시한 것 때문으로 보인다.
- 자기 역시 찔리는 것이 있으니 가장했다.
- 그럼에도 아히야를 찾아온 것으로 보아 아비야의 상태가 매우 심각했음을 보여준다.
- 아히야는 그런 사정을 알았고, 눈이 어두웠지만, 바로 알아챘다.
- 보냄받았다가 수동태임을 보아 이것이 자신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뜻임을 명확히 한다.
-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힘들고 어려운 것이었다.
7 לְכִ֞י אִמְרִ֣י לְיָרָבְעָ֗ם כֹּֽה־אָמַ֤ר יְהוָה֙ אֱלֹהֵ֣י יִשְׂרָאֵ֔ל1/4
יַ֛עַן אֲשֶׁ֥ר הֲרִימֹתִ֖יךָ1/8
מִתּ֣וֹךְ הָעָ֑ם1/2
וָאֶתֶּנְךָ֣ נָגִ֔יד1/4
עַ֖ל1/8
עַמִּ֥י יִשְׂרָאֵֽל׃1/2
( WTT)
가서(칼 명령) 여로보암에게 말하라(칼 명령)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했다(칼 완)1/4
왜냐면 내가 너를 높이 들었다(히필 완)1/8
그 백성 중에서1/2
그리고 내가 네게 주권자[왕](의 자리)를 주었다(칼 바익톨)1/4
위에1/8
내 백성 이스라엘1/2
- 여로보암의 왕좌가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한 것을 분명히 밝힌다.
- 상반절과 하반절이 같은 의미를 지닌 의미론적 평형법이다.
8 וָאֶקְרַ֤ע אֶת־הַמַּמְלָכָה֙ מִבֵּ֣ית דָּוִ֔ד1/4
וָאֶתְּנֶ֖הָ1/8
לָ֑ךְ1/2
וְלֹֽא־הָיִ֜יתָ כְּעַבְדִּ֣י דָוִ֗ד אֲשֶׁר֩ שָׁמַ֙ר מִצְוֹתַ֜י וַאֲשֶׁר־הָלַ֤ךְ אַחֲרַי֙ בְּכָל־לְבָב֔וֹ1/4
לַעֲשׂ֕וֹת1/8
רַ֖ק1/16
הַיָּשָׁ֥ר בְּעֵינָֽי׃1/2
( WTT)
그리고 내가 그 왕국을 다윗의 집으로부터 찢어냈다(칼 바익톨)1/4
그리고 그것을 주었다(칼 바익톨)1/8
네게1/2
그러나 내 명령을 지킨(칼 완) 그리고 그의 모든 마음 안에[으로] 내 뒤를 걸어갔던[따라갔던](칼 완) 나의 종 다윗처럼 너는 되지 않았다(칼 완)1/4
그는 행했다(칼 부정사)1/8
오직1/16
내 눈에 옳은 것을1/2
- 다윗과 여로보암을 비교한다.
- 그리고 그 차이가 매우 큼을 말한다.
9 וַתָּ֣רַע לַעֲשׂ֔וֹת1/4
מִכֹּ֖ל1/8
אֲשֶׁר־הָי֣וּ לְפָנֶ֑יךָ1/2
וַתֵּ֡לֶךְ וַתַּעֲשֶׂה־לְּךָ֩ אֱלֹהִ֙ים אֲחֵרִ֤ים וּמַסֵּכוֹת֙ לְהַכְעִיסֵ֔נִי1/4
וְאֹתִ֥י הִשְׁלַ֖כְתָּ1/8
אַחֲרֵ֥י גַוֶּֽךָ׃ ס1/2
( WTT)
그러나 너가 행한 것은(칼 부정사) 악이었다(히필 바익톨)1/4
모든 이들보다 /8
내 앞에서 있었던(칼 완)1/2
그리고 너는 가서(칼 바익톨) 너를 위해 다른 신들과 금속으로 된 우상들을 만들고(칼 바익톨) 나를 격노하게 했다(히필 부정사)1/4
그리고 나를 던져버렸다(히필 완)1/8
너의 등뒤로1/2
- 다윗보다 못한 정도가 아니라 모든 이보다 더욱 악하게 행했다.
- 물론 여기서 모든 이는 그 시대를 말하는 것이 1차적으로 옳다
- 하지만 이것은 그 이후 있을 왕들을 통칭하는 것이기도 하다.
- 여로보암을 하나님을 버렸다.
- 이것은 앞서 있었던 하나님의 사람의 죽음에서 드러난다.
10 לָכֵ֗ן הִנְנִ֙י מֵבִ֤יא רָעָה֙ אֶל־בֵּ֣ית יָרָבְעָ֔ם1/4
וְהִכְרַתִּ֤י לְיָֽרָבְעָם֙ מַשְׁתִּ֣ין בְּקִ֔יר1/8
עָצ֥וּר וְעָז֖וּב1/16
בְּיִשְׂרָאֵ֑ל1/2
וּבִֽעַרְתִּי֙ אַחֲרֵ֣י בֵית־יָרָבְעָ֔ם1/4
כַּאֲשֶׁ֛ר יְבַעֵ֥ר הַגָּלָ֖ל1/8
עַד־תֻּמּֽוֹ׃1/2
( WTT)
그러므로 보라 내가 여로보암의 집을 향해 재앙[악]을 가져오고 있다[가져올 것이다](칼 분사)1/4
그리고 내가 여로보암의 벽에 오줌누는 자를 몰살시킬 것이다(히필 완)1/8
억제당한 자[종](칼 수동분사)(나) 자유로운 자(칼 수동분사)(도)1/16
이스라엘 중에서1/2
그리고 여로보암의 집 뒤에 (있는 자도) 쓸어버릴 것이다(피엘 완)1/4
사람이 그 똥을 없애버리는 것처럼(피엘 미완)1/8
완전히1/2
- 상반절 하반절 1/8 왕에 재미있게도 ‘오줌’과 ‘똥’이 쓰였다.
- 하나님께 여로보암의 남자들은 벽에 오줌누는 자에 불과했다.
- 그리고 사람이 똥을 완전히 치우는 것처럼 오줌싸는 자들을 없애버리겠다고 말하신다.
- 하나님께서 얼마나 여로보암에게 분노하셨는지 잘알려준다.
11 הַמֵּ֙ת לְיָֽרָבְעָ֤ם בָּעִיר֙ יֹאכְל֣וּ הַכְּלָבִ֔ים1/4
וְהַמֵּת֙ בַּשָּׂדֶ֔ה1/8
יֹאכְל֖וּ1/16
ע֣וֹף הַשָּׁמָ֑יִם1/2
כִּ֥י יְהוָ֖ה1/4
דִּבֵּֽר׃1/2
( WTT)
그 도시에서 여로보암에게 속한 죽은 자는(칼 분사) 그 개들이 먹을 것이다(칼 미완)1/4
또한 그 들판에서 죽은 먹을 것이다(칼 미완)1/8
하늘을 나는 모든 것들이1/2
이는 여호와께서1/4
말하셨기 때문이다(피엘 완료)1/2
- 도시에 있는 짐승은 개이다. 그래서 도시에서 죽은 자는 개가 먹는다.
- 들판에서 죽은 자는 날아다니는 것들의 먹이가 된다. 새도 되고 파리도 되고 곤충도 된다.
- 비참하고 처참한 죽음이다. 이것은 아무도 그들의 시체를 수습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 즉 모든 이에게 버림당할 것이란 소리다.
- 하나님에게 똥같이 되었으므로, 모든 이에게 똥같이 되어버린다.
- 마지막에 짧게 황제가 나오고 피엘로 나옴으로 이 일이 무조건 이루어질 것을 강조한다.
12 וְאַ֥תְּ ק֖וּמִי1/4
לְכִ֣י לְבֵיתֵ֑ךְ1/2
בְּבֹאָ֥ה רַגְלַ֛יִךְ הָעִ֖ירָה1/4
וּמֵ֥ת הַיָּֽלֶד׃1/2
( WTT)
그리고 너는 일어나라(칼 명령)1/4
네 집으로 가라(칼 명령)1/2
네 발이 그 도시로 들어갈 때(칼 부정사)1/4
그 소년이 죽을 것이다(칼 완)1/2
- 선지자는 단호하게 선포한다.
- 원래 목적, 아들을 살리려고 온 것이 허사임을 말한다.
13 וְסָֽפְדוּ־ל֤וֹ כָל־יִשְׂרָאֵל֙ וְקָבְר֣וּ אֹת֔וֹ1/4
כִּֽי־זֶ֣ה לְבַדּ֔וֹ1/8
יָבֹ֥א לְיָרָבְעָ֖ם1/16
אֶל־קָ֑בֶר1/2
יַ֣עַן נִמְצָא־ב֞וֹ דָּבָ֣ר ט֗וֹב אֶל־יְהוָ֛ה אֱלֹהֵ֥י יִשְׂרָאֵ֖ל1/4
בְּבֵ֥ית יָרָבְעָֽם׃1/2
( WTT)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이 그를 애도하고(칼 완) 그들이 그를 묻을 것이다(칼 완)1/4
이는 그 홀로1/8
여로보암에 속한 자중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칼 미완)1/16
무덤으로1/2
왜냐하면 그에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한 선한 것이 찾아졌기 때문이다(니팔 완료)1/4
여로보암의 집중에1/2
- 이 소년의 죽음은 그에게는 축복이란 것을 말한다.
- 12절에 여로보암의 집에 속한 남자들의 처참한 죽음은 모두가 버려질 것을 의미했다.
- 하지만 이 소년은 버려지지 않고 모든 이스라엘의 애통함을 받고 무덤으로 들어간다.
- 그리고 하나님께도 버려지지 않는다.
- 오직 그만이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어떤 것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문은 3명의 선지자와 3명의 죽음이 교차하고 있다.
첫번째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첫번째 선지자이자, 첫번째 죽음이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전했다.
전심으로 충성했다.
하지만 늙은 선지자에게 속았다.
그리고 사자에 의해 죽었다.
하나님의 사람은 늙은 선지자에게 속기전까지 정말 최선을 다해 온전히 하나님을 섬겼다.
죽음을 각오하고 이름이 없음에도 왕앞에 섰다.
아히야였다면 좀 나았을 것이다. 그는 여로보암을 기름부은 선지자였기 때문이다.
요즘으로 따지자면 이제 막 안수받은 목사와 같다.
그러나 몇날 며칠인지 모르는 오랜 기간동안 물도 마시지 않은채, 모래를 씹는 것같고 불타는 것같은 몸을 붙잡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러나 늙은 선지자에게 속았다.
하지만 그는 사자에 의해 죽었다.
보통 유다의 사자라고 하면 그리스도를 예표하며, 다윗을 가리킨다. 그는 너무나 억울하게 죽었다.
그가 억울하게 죽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만큼 베델 제단의 죄가 심각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전심으로 따른 종을 죽일 정도로 그 말씀을 진실이고 무조건 성취될 것이란 것을 알리시기 원하셨다.
이렇게 첫번째 선지자는 열정과 순수로 가득차 있었다.
그렇기에 죄악된 세상에서 어처구니 없이 죽었다.
그의 무죄한 피는 이런 자조차 죽을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은 거룩하고, 확실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사자가 그를 먹지 않았고, 나귀를 해치지 않았다는 것은 이것을 더욱 강하게 한다.
그가 가서 본즉 그의 시체가 길에 버린 바 되었고 나귀와 사자는 그 시체 곁에 서 있는데 사자가 시체를 먹지도 아니하였고 나귀를 찢지도 아니하였더라
순결한 선지자와 선한자의 죽음.
두번째는 늙은 선지자와 선한자의 죽음이다.
늙은 선지자는 그 자체로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았음을 뜻한다.
당시 베델제단은 하나님과 완전히 반대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선지자가 늙을때 까지 잘 살고 있다는 것은 그가 이 일에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선지자가 아니다.
물론 그가 하나님의 사람을 대접한 것은 자신은 하지 못한 일을 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보고 찔림이나 부러움이 있었던 것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결국 하나님의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그 의도가 어떠했는지, 그는 처음부터 선지자의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거짓된 늙은 선지자, 자기 보신에 치우친 선지자가 두번째 선지자다.
두번째 죽음은 오늘 본문이다.
말그대로 다시 무죄한 죽음이다.
아비야는 여로보암의 후계자로 보인다.
아니면, 분명 왕자중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자가 틀림없다.
그가 후계자가 아니었더라면, 그렇게 죽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 혼자만이 오직 하나님을 향한 어떤 선한 것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그는 이스라엘의 희망이었다.
그는 어쩌면 베델의 제단을 허물고 이스라엘을 개혁할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기에 죽었다.
두번째 죽음은 역시 선한자의 죽음이다.
그가 죽은 이유는 간단하다.
첫번째, 선한 죽음 이후에도 여로보암이 돌아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게 남은 것은 개혁하려다가 죽거나, 타락하여 죽는 길 뿐이었다.
이미 이스라엘 전체가 돌아선 상황이었다.
아비야가 선한 뜻을 펼치려 했다면, 그는 편안한 최후를 맞이하지 못했을 것이다.
벧엘제단이란 그만큼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슈였다.
마치 현재 북한의 핵과 같은 위치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그를 죽이셨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곁으로 부르셨다.
그리고 그가 버림받지 않게 하신다.
개가 먹고 새가 먹는다는 것은 저주받고 버림받았다는 것리다.
그러나 그는 모든 사람의 애곡, 즉, 사랑속에서 묘지로 들어간다.
그는 아무에게도 버림받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선한자의 죽음은 그 죽음조차 축복이다.
악한 선지자의 삶과 선한 자의 죽음이 교차된다.
마지막 3번째는 아히야, 선한 선지자의 삶과 여로보암 악한 자의 죽음이다.
늙었음에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아히야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악을 고집하는 여로보암.
결국 아히야 선지자의 죽음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여로보암은 죽고, 그의 죽음은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와 이어진다.
모든 선한 자의 죽음이 다 보상받았다.
선한 자의 죽음은 축복이었다.
그러나 악한 자의 죽음은 심판이다.
하나님의 뜻은 바로 선한 자에게 있다.
하나님을 따르는 자에게는 죽음조차 축복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죽었지만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비록 그가 속았지만 그것은 변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람이란 명칭은 모세에게 쓰인다.
삼손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에게 쓰인다.
존경받아, 그 이름이 아닌, 오로지 하나님께 속한 자에게 쓰인다.
그것은 선지자란 호칭보다 영광스런 이름이다.
선지자가 많지만 하나님의 사람이라 쓰인 선지자는 별로 없다.
모세와 스마야, 엘리사정도다.
설교
설교
13장과 14장을 통해 3명의 선지자와 3명의 죽음이 교차됩니다. 우선 3명의 선지자는, 13장의 하나님의 사람, 늙은 선지자, 아히야입니다. 그리고 죽은 3명은 하나님의 사람,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 여로보암입니다. 그런데 이 3명의 선지자와 3명의 죽음이 절묘하게 교차되며, 그 속성도 바뀌면서 결국, 여로보암의 집이 어떻게 되는가를 열왕기는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를 살펴봄으로 하나님의 선한 뜻을 알고 하나님을 따라가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본론
첫번째 선지자이자 죽음의 대상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사실 이 하나님의 사람이란 명칭자체가 평범하지 않습니다. 구약 전체에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린 이름이 밝혀진 사람은 단 3명뿐입니다. 모세, 스마야, 엘리사입니다. 그중 스마야는 르호보암의 북이스라엘 침공을 막을 때 한번 등장하고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엘리사는 수넴여인과 관련되어서만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립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사람이라기보다는 수넴여인이 엘리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여기고 대접했기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으로서 온전히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린 자는 모세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직접 대면했고, 하나님과 이야기했던 첫번째 선지자이자, 가장 위대한 선지자라 불리는 모세만이 온전히 하나님의 사람이라 불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이란 명칭은 선지자에게만 불리지 않았습니다. 삼손의 부모에게 임한 하나님의 사자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이란 명칭은 매우 중대한 명칭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람은 사무엘이 엘리에게 엘리집에 일어날 일을 계시받기 전에 나타나 대제사장인 엘리에게 아들을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하나님의 사람이 다시 북이스라엘에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벧엘제단때문입니다. 벧엘제단의 일이 그만큼 심각했기 때문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죄악의 근원입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에 선한 왕이 하나도 나오지 않았던 원인이 바로 벧엘의 제단입니다.
그만큼 중요한 문제이기에 하나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습니다. 아마 사마리아까지 가는 시간을 생각하면 약 3일-7일정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보통 사람이 사막에서는 3일,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4-5일정도 물을 마시지 않으면 죽는다고 하니 그가 살아있는 것자체가 하나님의 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벧엘의 늙은 선지자의 속임수에 속아 물과 음식을 먹게됩니다. 그리고 그 댓가로 사자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13:28에 보면 그 사자가 나귀도 죽이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만 죽이고 그 시체도 먹지 않았다고 나옵니다. 그것은 이 일이 온전히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름도 없습니다. 죽음을각오하고 왕앞에 섰습니다. 여로보암이 죽이해서 실제 죽음의 위기를 맞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늙은 선지자에게 속아서 사자에게 물려죽는 비참한 죽음을 당합니다. 이것이 첫번째 선지자와 첫번째 죽음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전심으로 섬기고 행했지만, 속아서 비참하게 죽습니다. 선한자의 비참한 죽음입니다.
그러나 두번째 선지자인 늙은 선지자에게는 아무런 피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 늙은 선지자는 벧엘의 선지자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벧엘에 제단이 세워질 때, 가장 먼저 나서서 반대하고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했을 선지란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의 사람이 유다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이 늙은 벧엘의 선지자가 그 역할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사람은 그 역할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선지자의 역할을 하러 온 사람을 속임수로 죽였습니다. 물론 그가 처음부터 죽이려고 그렇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끔찍한 악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늙은 선지자는 어떤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후에 이 늙은 선지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성경은 전혀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습게도 두번째 죽음도 선한자의 죽음입니다. 그것도 여로보암의 집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마지막 희망의 죽음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보다시피, 이 아비야라는 아들은 그냥 아들이 아니라 후계자의 위치에 있었을 거라 예상됩니다. 왜냐면 히브리어 성경에서 나오지 않지만, 예수님이 오시기 직전에 만들어진 히브리어성경의 헬라어버전인 70인역에 보면 아비야는 이집트에서 나은 여로보암의 아들이고, 그의 어머니는 이집트의 파라오의 누이인 것으로 나옵니다. 그의신분과 여로보암이 이집트에서 낳은 아들이란 사실을 보면 아비야가 여로보암의 장자였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한마디로 왕세자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당연히 아비야가 죽을 병에 걸린 것은 엄청난 일이었고, 서로 데면대면 해진 선지자 아히야에게까지 찾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아비야는 죽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은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향해 어떤 선한 것을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3명의 선지자와 3명의 죽음중 2번째까지가 이해가 되지 않는 죽음입니다.
선한자는 죽고 악한 자는 살아남았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향해 열심을 품고, 거룩하게 산 자는 죽습니다. 반대로 자기 보신을 위해 세상과 타협하고 선한 자를 속인 자는 살아남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속에 하나님께서 살아계십니다. 왜냐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아래서 가장 선하게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3번째, 마지막 선지자와 마지막 죽음에서 드러납니다. 마지막 선지자는 오늘 본문에 나온 아히야입니다. 그는 이미 늙어 눈도 잘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과 함께합니다. 벧엘의 늙은 선지자와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함께 늙었지만, 끝까지 하나님과 함께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의 시작을 열었던 그를 통해 여로보암의 끝을 가져오게 합니다.
왜냐면 아히야가 바로 여로보암에게 기름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는 심판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아비야, 하나님을 향한 선함을 품었던 왕세자의 죽음이 오히려 죽복이라고 말합니다. 왜냐면 오직 그만이 온전히 모든 이스라엘의 애곡을 받으며, 묘실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비야가 살아서 왕이 되었다면 어땠을까요. 그가 정말 그 선한 열심을 펼칠수 있었을까요. 북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벧엘제단이란 지금 북한에게 핵무기와 똑같은 것입니다. 북한이 결코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처럼, 북이스라엘도 벧엘제단을 포기할수 없습니다. 그것은 종교적 이유뿐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가 매우 복잡하게 얽혀있습니다. 즉, 그것을 건드리면, 쿠데타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란 겁니다. 결국 아비야는 왕이 되지 않고 죽는 것이 가장 명예롭고 가장 좋게 되는 것이란 결론이 나옵니다.
동시에 결국 3번째 죽음인 여로보암의 죽음후 하나님의 심판이 임합니다.
벧엘제단을 만든 이스라엘은 악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속에서 선한 자들이 어떻게 죽어가는지 잘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 선한자들의 죽음은 이중적입니다. 첫번째로 선한자의 죽음은 그들에게 있어 영광이 되었습니다. 처번째 하나님의 사람은 덧없이 죽은 것같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뜻과 심판을 확실하게 나타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란 호칭 그대로 그는 죽음조차 사용되어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었습니다.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이 말씀처럼 그는 자신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나타냈습니다. 죽음조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였습니다.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는 결국 그 가족중, 그만이 버림받지 않고 모든 이스라엘의 애곡속에 묘실로 들어갔습니다.
오늘 본문 10장에 보면 여로보암에 속한 사내라는 표현과 거름더미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원어에 보면 사내라고 하지 않고 벽에 오줌누는 자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거름더미가 아니라 똥이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이둘이 구조상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 여로보암의 집의 사내는 똥과같고 오줌과 같은 더러운 배설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비야는 그중에 구별되었습니다. 똥과 오줌은 어떻게 합니까. 당연히 흔적도 남지 않게 치웁니다. 모든 사람이 외면하고 버립니다. 그것이 개와 새라는 예언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아비야는 그 모든 것에서 자유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묘지에 들어가고 하나님과 모든 사람앞에서 섭니다.
결론
우리의 삶은 어렵고 힘들때가 많습니다. 기도해도 변하는 것도 없어보입니다. 믿어도 안믿는 사람만 못하게 살 때가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모습을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붙잡혀 있으면 우리의 죽음조차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높이실 것입니다. 아비야가 이스라엘의 모든 자의 애곡을 받은 것처럼 높이실 것입니다. 죽었던 하나님의 사람의 묘실은 계속 남아서 보존됩니다. 에서 요시야가 모든 묘실의 뼈를 사를때, 하나님의 사람의 묘실과 뼈는 옮기지 않고 보존합니다.
그들의 죽음은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죽음조차 하나님께서 쓰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냥 두지 않고 높이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빛이 되기 원합니다. 우리가 빛이 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실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죽는 다면, 그 죽음조차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심판대에서 잘했다 칭찬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죽음은 세상의 가장 큰 고통이 될 것입니다. 이 선한 자 2명의 죽음이후, 여로보암의 집이 멸망한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안에서 산다면, 우리의 실패와 죽음은 곧 세상의 심판이 될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
너는 복이 될지라가 우리에게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우리모두가 되길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