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5.23.수요예배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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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조물의 구원의 갈망 본문의 일부분, 만물의 신음소리와 우리의 신음소리 성령의 신음소리로 이어진다.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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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주해

22 οἴδαμεν γὰρ ὅτι πᾶσα ἡ κτίσις συστενάζει καὶ συνωδίνει ἄχρι τοῦ νῦν·
이는 우리가 그 모든 창조물이 지금까지 함께 신음소리내며(현능직3단) 함께 출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현능직3단)는 것을 알고 있다.
- 신음소리와 고통
- 그런데 그 고통은 해산의 고통이다.
- 이 해산의 고통을 겪는 것은 모든 만물이다. 그리고 인간이다.
- 그 고통은 해산의 고통, 구원을 위한 고통이다.
- 그 다음 구절로 이어진다. 중간점이 나옴으로 이 절 하나로 끝이 아님을 말한다.
23 οὐ μόνον δέ, ἀλλὰ καὶ αὐτοὶ τὴν ἀπαρχὴν τοῦ πνεύματος ἔχοντες, ἡμεῖς καὶ αὐτοὶ ἐν ἑαυτοῖς στενάζομεν υἱοθεσίαν ἀπεκδεχόμενοι, τὴν ἀπολύτρωσιν τοῦ σώματος ἡμῶν.
그것뿐만 아니라, 성령의 첫번째 열매를 가진(현능부복주남) 우리(강조), 우리와 그것들이 함께 우리 안에서 함께 신음하며(현능직1복) 양자됨, 우리의 그 몸의 그 구속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현중분복주남).
- 22절과 23절은 하나의 의미를 가진다.
- 22절에서는 만물이 신음소리를 내며 해산의 고통을 당하고 있음을 알린다.
- 그리고 그 만물과 함께 믿는 우리 역시 해산의 고통으로 아파하고 있다.
- 23절에서는 만물만 아니라 우리도 그렇다고 다시 강조한다.
- 그리고 기다림은 바로 양자됨, 몸의 구속이다.
- 분사로 나옴으로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는 상을 강조한다.
- 그러나 이 모든 기다림은 해산의 고통과 같다.
- 바울은 18절에 말한대로, 임산부와 가족이 기다리는 것이 해산의 고통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탄생을 간절히 기다림을 나타낸다.
- 그를 위해 의도적으로 해산의 고통을 나타내는 단어를 쓰고 있다.
24 τῇ γὰρ ἐλπίδι ἐσώθημεν· ἐλπὶς δὲ βλεπομένη οὐκ ἔστιν ἐλπίς· ὃ γὰρ βλέπει τίς ἐλπίζει;
이는 그 소망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에오수직1복). 그러나 보이는(현수분단주여) 소망은 소망이 아니다(현능직3단). 이는 보는 것을(현능직3단) 누가 소망하겠습니까?(현능직3단)
- 해산의 고통, 그 이후에 있을 것에 대한 소망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 고통중에도 바라고 소망하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 동시에 바울은 말한다.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다. 즉, 벌써 이루어진 소망, 우리 손에 들려진 것은 소망이 아니다. 누가 벌써 가지고 있는 것을 소망하겠는가.
- 이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확신으로 구원을 받았고,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회복시킬 것을 것을 간절히 바라는 그 소망을 말하는 것이다.
- 동시에 그것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소망이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다.
25 εἰ δὲ ὃ οὐ βλέπομεν ἐλπίζομεν, διʼ ὑπομονῆς ἀπεκδεχόμεθα.
그러나 만약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현능직1복) 소망한다면(현능직1복), 인내를 통해 우리는 간절히 기다린다(현중직1복).
- 진정한 소망은, 간절한 기다림이다.
- 그 기다림은 인내가 필요하다. 인내와 함께 하는 기다림이다.
- 기다린다는 현재형으로 쓴다.
- 여기에 주어가 우리다.
- 이것은 바울의 권면이자, 삶의 태도이다. 이전부터 기다려왔으니 함께 끝까지 인내하고 기다리자는 권면이다.
26 Ὡσαύτως δὲ καὶ τὸ πνεῦμα συναντιλαμβάνεται τῇ ἀσθενείᾳ ἡμῶν· τὸ γὰρ τί προσευξώμεθα καθὸ δεῖ οὐκ οἴδαμεν, ἀλλʼ αὐτὸ τὸ πνεῦμα ὑπερεντυγχάνει στεναγμοῖς ἀλαλήτοις·
(대조의 데) 마찬가지로 성령께서도 우리의 그 약함을 도우신다(현중직3단). 이는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에오중가1복) (알지 못한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을 알지 못했던(완능직1복) 것처럼, 그러나 그 성령께서(강조) 형언할 수 없는 신음으로 탄원하신다[간청하신다](현능직3단).
- 우리가 소망을 가지고 있고, 기다린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랐던 것처럼, 또한 무엇을 기도해야하는지도 모른다.
- 무엇을 해야하는지란 의무를 뜻한다. 우리가 당연히 해야할 의무를 우리는 몰랐다. 그와 똑같이 우리는 소망하고 기다리는 지금도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다.
- 알라가 쓰여 모르는 우리와 아는 성령님을 대조하고 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시는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해서 간청하고 있다.
- 그 간청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신음소리로 하는 간청이다.
-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보다 더욱 깊은 해산의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말이다
- 우리가 당하는 고통, 해산의 고통이 너무나 크고 힘든 것같지만
- 그 고통은 성령께서 한번 걸러주시는 고통이다.
- 즉, 성령께서는 우리가 그 고통을 견딜수 있을 정도로만 우리에게 주신다.
- 그리고 실제 당해야 하는 고통의 대부분은 성령 자신께서 감당하고 계신다.
- 마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당했듯이,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고 계신다.
- 여기서 탄원은 법적인 용어다.
27 ὁ δὲ ἐραυνῶν τὰς καρδίας οἶδεν τί τὸ φρόνημα τοῦ πνεύματος, ὅτι κατὰ θεὸν ἐντυγχάνει ὑπὲρ ἁγίων.
그리고 그 마음들을 조사하시는(현능분단주남) 분이 그 성령의 (고정된) 사고방식[마음]을 아셨다(완능직3단),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그가(성령) 성도들을 위해 탄원[간청]하기 때문이다(현능직3단).
- 살피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샅샅이 보고, 조사해서 안다라는 뜻, 연구하다 조사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 하나님아버지의 속성이다.
- 성령의 생각중, 생각이란 단어는 어떤 것에 대한 고정된 사고방식을 말한다. 즉, 성령께서 우리를 향한 마음과 생각은 결코 바뀔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 성령께서는 아버지하나님이 어떻게 하든지, 결코 우리를 향한 그 탄원을 멈출수 없다. 이미 뜻과 마음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 그리고 그 고정된 마음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나타난 것이다.
-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역시 성령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 이것이 진정한 삼위의 마음이다.
-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 우리를 향해 형언할수 없음 신음으로 탄식하는 성령, 그 모든 것을 알고, 또한 우리의 마음의 가장 깊은 악조차 아시지만, 그럼에도 성령과 그리스도의 마음이 그렇게 되도록,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도록 하시는, 그리하여 성령과 그리스도의 마음과 똑 같은 마음을 본질적으로 가지신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다.

설교

서론
오늘 본문은 고통으로 시작합니다. 그 고통은 피조물의 고통입니다. 단순히 어느 특정한 피조물의 고통이 아닙니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의 고통입니다. 22절에 피조물과 우리가 함께 고통하며 탄식합니다. 그래서 이 고통은 탄식으로 연결됩니다. 피조물과 우리역시 같은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탄식 은 우리로 끝나지 않습니다. 26절에서 결국 성령의 탄식으로까지 이어집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며 구원이 단순히 우리의 것만이 아님을 알수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큰 것인지, 사람만 거부하지, 사실 만물이 똑같이 바라고 기다립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우리의 자부심입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아무리 무시를 당해도 괜찮습니다. 그들만 모를뿐이지, 모든 만물이 우리가 가진 이 구원을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왜 오늘 본문을 통해 고통과 탄식을 말하고 있을까요. 그리고 왜 이런 탄식이 생길까요. 또한 이 고통과 탄식을 통해 어떻게 소망을 말하고 있을까요. 함께 말씀을 묵상하며, 주님이 주시는 소망을 가지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또한 우리의 힘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크고 가치있는지를 나타내는 구절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함께 묵상하며, 위로받고 새힘을 얻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본론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첫번째 이유는 우리에게 고통과 탄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22절은 만물의 고통을 말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만물의 고통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어떻게습니까. 우리는 정말로 만물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이것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환경에 관련된 다큐맨터리만 봐도 알수 있습니다. 정말 활기차게 살아가는 것같지만, 조금의 환경변화로 인해 다 죽어버립니다. 풀들은 지금은 꽃을 피우며 가을에는 열매를 맺습니다. 하지만 그 열매의 댓가로 식물이 받는 것은 무엇입니까. 겨울의 찬바람과 그 속에서 죽는 것입니다. 겨우 뿌리만 건진체로 모두 죽는 것입니다. 동물들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연을 그린 다큐맨터리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포식자부터 피식자까지 모두다 힘겹게 삶을 이어나간다는 것입니다. 모두다 굶주리고 모두다 힘겨워하는 시기를 겨우 지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며 구원이 단순히 우리의 것만이 아님을 알수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큰 것인지, 사람만 거부하지, 사실 만물이 똑같이 바라고 기다립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우리의 자부심입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아무리 무시를 당해도 괜찮습니다. 그들만 모를뿐이지, 모든 만물이 우리가 가진 이 구원을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의 힘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크고 가치있는지를 나타내는 구절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함께 묵상하며, 위로받고 새힘을 얻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만물만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우리도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23절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맺은 열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순탄치 않습니다. 그리고 이 힘듬은 우리뿐만 아니었던 것같습니다. 바울이 적고 있는 로마교회의 성도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누구도 이 세상에서 순탄하고 평안하기만한 삶을 살지는 못했습니다.
22절에서 나오는 탄식이란 단어는 신음소리를 내다란 말입니다. 고통을 참다가 나오는 신음소리입니다. 어떤 땐 원망하다란 말로 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신음소리란 말의 어근, 원래 말은 좁은 이란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성경에서 이 좁은 이란 단어는 한가지 경우에 쓰였습니다. 딱 기억나는 말씀이 없습니까. 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에서 쓰였습니다. 좁은 이란 단어를 마지막 한 음절만 바꾸면 신음소리를 내다란 단어로 바뀝니다.
이 말은 바울이 말하는 신음소리, 탄식이란 단어를 읽은 성도들은 분명,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좁은 문이란 구절을 상기할 것이란 뜻입니다. 성경에서 좁은 이란 단어가 쓰인 적은 그때밖에 없으니까요.
또한 이 고통역시 범상치 않습니다. 이 고통은 정말 극심한 고통을 말합니다. 그중, 해산의 고통을 말합니다. 여기서 쓰이는 단어 자체가 해산의 고통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저가본 10개의 성경번역본중 3개를 제외하고는 모두다 해산의 고통이나 진통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왜 고통중에 소망이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겪는 고통이 바로 해산의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때문에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은 해산의 고통입니다. 우리가 하는 탄식은 좁은 길로 가는 중에 나오는 탄식입니다. 우리의 고통과 탄식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수 있습니다. 탄식이 있기에 우리는 우리가 좁은 길에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고통이 있기에 우리에게 자식이란 말로 할수 없는 선물이 있을 것을 기대합니다. 이제 때가 다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소망이 있음을 알수 있는 첫번째 이유입니다.
고통과 탄식이 있습니까.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진통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아이가 태어날 때가 가까웠음을 알수 있습니다. 탄식이 많이 나온다면, 그만큼 우리의 길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길임을 뜻함입니다. 바로 좁은 길로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소망을 가지기 원합니다. 믿는 자의 소망은 바로 주님입니다.
우리가 소망을 가질 수 있는 두번째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이 탄식이 우리만의 탄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6절에는 우리가 아닌 성령의 탄식이 나옵니다. 우리만 탄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탄식하십니다. 우리는 솔직히 말해서 주님의 길을 간다는 것을 잊기 쉽습니다. 이 좁은 길이 영광의 길이란 사실은 잊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길이란 것은 우리에게 쉽게 다가옵니다. 왜냐면 좁은 길 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포기하고 손해 보는 그 모든 것을 통해 우리는 힘겨워하고 때론 쓰러집니다. 하지만 우리보다 더욱 탄식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신음소리이지만, 말로 표현할수 없는 신음소리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우리보다 더욱 큰 탄식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할수 없는 일을 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을 대신 기도하십니다. 대신 간구하십니다.
26절에서 간구한다는 말은 법적인 용어입니다. 탄원하다란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 성령께서 계속 항소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간청하며 항소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계속 항소하십니다. 그리고 고집스럽게 그 뜻을 지키십니다.
27절에는 성령의 생각이란 표현이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이란 단어는 고정된 사고방식을 말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쉽게 말해 쇠심줄같은 고집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편에서 탄원하는 것을 쇠심줄같은 고집으로 하신다는 뜻입니다. 결코 꺽이지 않고 우리가 구원의 여정을 다 마칠때까지 탄원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의 쇠심줄같은 고집은 누구때문에 나왔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뜻이기에 나왔습니다. 우리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을 품고 있기에, 성령께서는 그 사랑으로 우리를 위해 탄원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성령께서 그 죽음을 근거로 탄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어렵습니까. 힘듭니까. 풀리지 않는 억울함과 탄식이 있습니까. 지금 성령께서 그 보다 더 슬프고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탄식하고 계십니다.
추위속에서 갓난 아기를 지키려는 어미처럼 성령께서는 우리를 지키고 계십니다. 그 추위로 인해 어머니는 얼어 죽더라도, 갓난 아기는 살아남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보다 더한 탄식으로 우리를 지키십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성령께서 그러시도록 계속 인도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삼위의 하나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결론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가치가 있습니다. 지금 당장 보이고 가지고 있다면 그게 무슨 소망이겠습니까. 그러니 우리의 모든 삶속에서 소망을 가지기 원합니다.
고통과 탄식이 있습니까.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왜냐면 그 고통은 해산의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그 탄식은 좁은길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함께 탄식하십니다. 우리보다 더욱 힘들게 탄식하십니다. 말할수 없는 탄식으로 함께 하십니다. 자식을 보호하는 어미처럼, 우리를 지키십니다. 변하지 않는 마음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그 마음, 생각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 삼위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삶속에서 힘들고 지칠때, 하나님아버지께 나오기 원합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께 기대기 원합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묵상하기 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소망입니다.
우리속에 진정한 소망이 있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하나님앞에서 기쁨이 되는 우리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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