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6.13.수요예배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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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 views질그릇, 고난, 고통, 생명, 죽음,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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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주해
본문 주해
7 Ἔχομεν δὲ τὸν θησαυρὸν τοῦτον ἐν ὀστρακίνοις σκεύεσιν, ἵνα ἡ ὑπερβολὴ τῆς δυνάμεως ᾖ τοῦ θεοῦ καὶ μὴ ἐξ ἡμῶν·
그러나 우리가 이 보물을 질그릇에 가지고 있는데(현능직1복), 그 능력의 엄청남[엄청난 넘침]이 그 하나님께 있고(현능가3단) 우리로부터가 아님을 (알게하기, 보여주기) 위해서다[그결과~~아니다].
- 보물은 바로 그리스도예수의 복음이다.
- 그 복음은 6절의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다.
- 우리가 질그릇인 이유는 복음의 광채, 빛이 더욱 드러나기 위해서다.
- 그릇과 보물의 대비를 느끼며, 더욱 겸손하기 위해서다.
- 둘째로, 그 빛 앞에서는 금그릇이든 질그릇이든 별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태양을 담은 그릇이 무엇이든 그 빛만으로도 가치는 충분하다.
-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그 보물을 질그릇에 담을 정도로 능력이 넘치신다는 것이다.
8 ἐν παντὶ θλιβόμενοι ἀλλʼ οὐ στενοχωρούμενοι, ἀπορούμενοι ἀλλʼ οὐκ ἐξαπορούμενοι,
모든 것 속에서 우리가 내려 눌리고 있어도(현수분복남주) 으깨지지 않고 있으며(현수분복남주), 답답한 일을 당하고 있어도(현중분복주남) 낙심하지 않고 있으며(현중분복주남),
- 모든 것이 우리를 압박해도, 으깨지지 않는다.
- 이것은 바로 위에 나온 질그릇의 이유다.
- 무슨 그릇이든, 저런 엄청난 압력속에서는 으깨진다.
- 하지만 그릇이 아닌, 그 속에 있는 내용물, 그 영광스런 빛, 복음덕에 우리는 결코 으깨지거나, 변형되지 않는다.
- 이것이 은혜이며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 그릇과 내용물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이 하나로 얽혀있다. 결코 때어낼 수 없다.
- 그래서 답답한 일을 당하고 의심을 받아도 낙심하지 않는다.
- 이 말속에 바울이 당한 모든 환난이 들어있다.
9 διωκόμενοι ἀλλʼ οὐκ ἐγκαταλειπόμενοι, καταβαλλόμενοι ἀλλʼ οὐκ ἀπολλύμενοι,
박해를 받고 있어도(현수분복남주) 버려지지 않고 있으며(현수분복남주), 넘어뜨림을 당하고 있어도(현수분복주남) 멸망하지 않고 있고(현수분복주남),
- 바울은 감사하고 있다.
- 살아있음에 감사한다.
- 고난속에서 감사한다. 왜냐면 그 고난으로 넘어지지 않고 있기때문이다.
- 자신의 힘이라면 넘어지는 것이 당연하지만, 넘어지지 않음이 바로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임을 알고 감사한다.
10 πάντοτε τὴν νέκρωσιν τοῦ Ἰησοῦ ἐν τῷ σώματι περιφέροντες, ἵνα καὶ ἡ ζωὴ τοῦ Ἰησοῦ ἐν τῷ σώματι ἡμῶν φανερωθῇ.
항상 그 예수의 그 죽음을 그 몸 안에 짊어지고 있는 것은(현능분복주남), 그 결과 예수의 그 생명 또한 우리의 몸 안에서 나타나게 되었을 것이다(에오수가3단)[그 예수의 그 생명 또한 우리의 몸 안에서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다].
- 8,9,10절이 하나의 문장이다. 8,9절의 고난을 10절에서 요약했다. 그 예수의 그 죽음을 그 몸안에 짊어지고 있다라는 문장이다.
- 우리의 고난의 결과로 예수의 생명이 우리의 몸에도 드러나게 되었다.
- 우리의 힘듬, 아픔, 육신의 고통과 상처도 결국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한 부분이다.
-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아픔을 겪으신 것처럼, 우리 역시 아픔과 고통을 겪게 된다.
- 그러나 그 고통과 고난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하게 되었다.
- 좋은 것만 같이 누리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동고동락하게 되었다.
- 진정한 연합이다.
11 ἀεὶ γὰρ ἡμεῖς οἱ ζῶντες εἰς θάνατον παραδιδόμεθα διὰ Ἰησοῦν, ἵνα καὶ ἡ ζωὴ τοῦ Ἰησοῦ φανερωθῇ ἐν τῇ θνητῇ σαρκὶ ἡμῶν.
이는 살아있는(현능분복주남) 우리가 항상 예수 때문에 죽음으로 넘겨진다(현수직1복), 그 결과 그 예수의 그 생명 또한 우리의 그 죽을 몸 안에 나타나게 되었을 것이다(에오수가3단).[그 예수의 그 생명 또한 우리의 그 죽을 몸 안에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다]
- 가정법은 무엇이든지 가정법이다.
- 이 말은 목적이든 결과이든 바울은 예수의 생명이 드러나겠지 라고 가정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 100% 드러난다라고 결코 확신하지 않는다. 설득을 하는데는 그런 확신이 좋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 왜냐면 하나님의 뜻을 속단하기 싫어서다.
- 고난에 감사하지만, 그 고난으로 얻을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조차 이 나약하고 추한 육신을 통해 드러난다고 100% 확신하지 않는다. 나약하고 추하기 때문이다. 끝까지 겸손하다.
12 ὥστε ὁ θάνατος ἐν ἡμῖν ἐνεργεῖται, ἡ δὲ ζωὴ ἐν ὑμῖν.
그러므로 그 죽음이 우리 안에서 일하지만(현중직3단), 그 생명은 너희 안에서 (일한다).
- 죽음, 고난이 우리 속에서 계속 일하지만, 그 생명, 그리스도의 생명또한 우리안에서 일한다.
설교
설교
서론
오늘 본문은 고린도후서입니다. 이 본문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같이 살펴봄으로써, 함께 그리스도의 생명가운데 거할수 있는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에 드러난 바울의 말을 통해 우리는 몇가지를 알수 있습니다.
그 빛은 너무나 밝고 너무나 귀중하기에 바울은 우리를 질그릇이라고 표현합니다. 그 빛, 예수 그리스도에 비하면, 우리는 가장 낮고 천하기 때문입니다.
첫째, 감사를 알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어디에서 감사가 나올까요. 오늘 본문은 오히려 환란과 고통, 고난으로 가득한 본문입니다. 정말, 이 본문을 묵상하다보면 가슴이 아플정도로 고난이 가득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 보물을 우리같은 질그릇에 담으셨습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넘쳐남을 드러내셨습니다.
욱여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다른 사람에 의해서 넘어지기도 합니다. 인생길을 가며 쉽고 편하게 가는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 모든 고난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사하고 있습니다.
8-9절은 고난을 말합니다. 바울이 당하는 고난입니다.
이 감사는 7절부터 시작됩니다. 바로 질그릇입니다. 바울은 보배라는 표현을 씁니다. 6절에서 말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 우리는 결코 알수도 없고, 허락되지도 않았던, 그 영광의 빛이 지금 우리에게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귀중한 빛이 질그릇같이 흔해빠진 우리에게 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이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보배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높고 위대한지를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해도 상관없음은 그 크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런 흔한 질그릇같은, 누구나 만들고 삐뚤삐뚤한 그릇에 담겨 있음에 감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의 위대함과 엄청남을 알게됨에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8-9절을 통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8절 처음에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다는 말은 사방에서 우리를 압박하며 억누른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질그릇이라면, 이 압력을 버틸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버틸수 없습니다. 질그릇은 떨어뜨리기만 해도 깨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질그릇 같은 우리가, 이런 압박에도 버티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답답한 일을 당해서 억울해도 낙심되지 않습니다. 박해를 당해도 버려지지 않습니다. 거꾸려뜨려져도 멸망당하지 않습니다.
8-9절의 공통점을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문법적인 용어로 수동태로 쓰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모든 말이 수동태로 쓰입니다. 한마디로 당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하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8절에 사방에서 압박을 받고 있어도 으깨지지 않습니다. 질그릇 같은 우리가 아닌, 우리 속에 있는 보배, 주님께서 우리를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깨져야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가 깨지지 않게 하시고 있습니다. 답답한 일을 당해도 우리 마음이 낙심하지 않도록 주님께서 위로하십니다. 박해를 받아도 버려지지 않도록 주님께서 주장하십니다. 누가 우리를 넘어뜨려도, 망하지 않도록 주님께서 우리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이 모든 것을 주님이 하고 계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8-9절에서 바울은 주체가 아닙니다. 그저 당하는 자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바울이 주체가 아니기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주도적으로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에 맞는 명예와 인정을 받는 것을 즐깁니다. 하지만 바울은 당하고 있는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이 당함을 통해 하나님의 복음이, 그 보배가 빛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라면 질그릇에 가려져야 할 보물의 빛이, 그 찬란함이, 이 모든 고통을 통해 드러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래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감사란 언제 하는 것입니까. 바로 주님이 드러날 때 하는 것이 감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 흔한 일속에서 주님이 드러나시기에 범사에 감사할수 있습니다. 우리가 얻는 것으로 하는 감사는 결국 우리를 초라하게 만듭니다. 그 감사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질그릇같은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드러나는 일에 감사한다면, 오히려 보물의 찬란함때문에 우리의 초라함이 가려질 것입니다. 우리도 보물처럼 찬란하게 보일 것입니다. 마치 달이 해의 빛을 받아 그렇게 밝은 것처럼, 주님의 빛으로 우리 역시 밝게 빛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감사입니다. 바울은 이 본문을 통해 감사란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감사란 주님으로 인해 하는 것입니다.
두번째, 바울은 이 본문을 통해 연합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질그릇같은 우리가 어떻게 계속해서 보배를 담고 있을수 있습니까. 그 보배를 노리고 사방에서 공격하고 압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보배를 계속해서 담고 있습니다.
어떻게 지금까지 우리는 계속 믿고 있습니까. 이 휴일에, 황금같은 시간에 나와서 예배드릴수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그 보배와 하나되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우리가 단순이 그릇입니까. 바울은 우리가 단순한 그릇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릇이면 내용물을 비우고 바꿀수 있습니다. 사탄을 이 모든 세상일을 통해 우리의 내용물이 바뀌도록 애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 믿고 있습니다. 이시간에 모여서 우리의 거룩한 아버지앞에 예배 드리고 있습니다.
바로 그릇과 내용물이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고난을 통하여 하나가 되었습니다.
압박과 박해를 통해 하나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박해를 통해 그리스도 예수께서 겪으셨던 그 고난에 참여했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0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있다고 말하며, 그 몸에, 예수의 생명이 나타난다라고 말합니다. 10절과 11절은 우리나라 성경에서 목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라는 말입니다. 좀더 쉽게 바꾸면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다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결과로 해석해도 됩니다. 즉, 우리가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 결과로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났다입니다. 11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틀린 해석이 아닙니다. 실제 영어성경 8개중 7개가 이런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예수의 죽음과 하나되었기에 예수의 생명도 우리와 하나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연합입니다. 연합이란 모든 부분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말그대로 동고동락하는 것이 바로 연합입니다.
바울은 고난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과 하나되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생명도 바울과 하나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연합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12절에 보듯이 너희와도 연합했습니다. 이 편지의 수신자, 고린도성도들과도 연합했습니다. 왜냐면 그리스도의 생명이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됨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동고동락하는 것입니다. 기쁨도 나누고 슬픔도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안에서 나누는 것입니다.
세상 역시 이 연합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실제로 동고동락을 하지 못합니다. 동고는 되어도 동락은 되지 않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동고, 고생이라도 함께 하면 다행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중보자가 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중보자가 되신 우리 주께서, 사람과 사람사이의 중보자가 되지 못하시겠습니까.
만약, 연합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마음에 짐으로 남아있는 형제 자매가 있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다가가길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기 원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바울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2가지를 보았습니다. 하나는 감사입니다. 우리가 주도적으로 하는 것으로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얻는 것으로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당하는 것으로 감사합니다. 왜냐면 예수님께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는 연합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중보자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사이에서도 중보자가 되어 주십니다. 성령으로 하나되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이 두가지가 있습니까. 이 두가지가 있게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다는 것은 살아있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우리가 이렇게 되도록 역사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우리는 연약합니다. 죄로 더렵혀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속에 계신 성령께서는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성실하십니다. 그래서 결국 자신의 성전을 포기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따라가는 자가 되길 원합니다.
우리속에 항상 그리스도의 살아있음이 느껴지기 원합니다. 그 살아있음, 생기가 언제나 넘쳐나길 소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누어 줄수 있는 풍요로움과 여유로움을 가질수 있는 우리모두가 되길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