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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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
나는 누구인가 ?
<그림> 이 그림을 누가 그렸는지 아는가? 폴 고갱(Paul Gauguin1848~1903)이 남태평양 Tahiti에서 지내며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 제목을 아는가?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그림 제목이 무슨 종교적 질문 같지 않은가? 철학자들도 오랫동안 비슷한 질문을 해왔다. 여러분들도 한 번쯤은 비슷한 질문을 해보았을 것이다. 이 세 가지 질문 중에서 두번째 질문, "우리는 누구인가?"는 "나는 누구인가?"로 읽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아는 게 매우 중요하다.
내가 누군지를 알아야 나답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내가 누구인지를 알 때 내가 어디서 왔는지, 내가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있다. 저와 여러분들은 누구인가?
다윗이 기록한 오늘 읽은 성경에 답이 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인자가 무엇이기에..."(4절).
저와 여러분은 누구인가?
1.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5절).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5절).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기 때문에 이 세상의 어떤 것들보다 존귀한 존재다().
만약 다윗이 오늘 우리 시대에 살면서 하나님께 "인간이 무엇입니까? 나는 누구입니까"라고 질문했다면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답을 주셨을까? 이 성경 구절로 답을 대신하셨을 것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은 죄인들을 위해 약속대로 예수님을 이 세상에 구원자로 보내셨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들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온갖 수치와 고통을 당하며 돌아가셨다. 보혈을 흘려주셨다. 생명을 주셨다. 또 말씀하신 대로 사흘만에 부활하셨다. 저와 여러분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던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신 나의 구원자라고 믿는가? 죽으셨으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가?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들은 누구인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다().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어떤 목사님이 미국 여행 중에 나이아가라 폭포의 장관에 감탄했다. "와~ 우리 아버지 솜씨 대단하시다!" 이 말을 들은 옆에 있던 어떤 미국 사람이 한국말로 물었다. "혹시 목사님이세요?" 한국 미 8군에서 군목으로 섬겼기 때문에 한국말을 알아들었다. 미국 목사님이 수요일 설교를 부탁했다. 한국 목사님이 수요일 저녁에 교회에 갔다. 미국 목사님이 성도들에게 한국 목사님을 이렇게 소개했다. "이 분은 나이아가라 폭포 주인의 아들이십니다." 말이 되지 않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나이아가라 폭포 주인 정도이겠는가? 미국의 주인이시다. 뉴질랜드의 주인이시다. 온 세상의 주인이시다. 이런 분이 저와 여러분들의 아버지시다. 저와 여러분들은 이런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다.
저는 가난하게 자랐기 때문에 전도사 시절 잘 사는 성도들 가정 심방할 때 불편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편해졌다. 계속 다양한 성도들 가정을 심방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느 때부턴가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목사가 아니었다면 만나기 힘든 사람들도 가끔 만난다. 하지만 누구를 만나도 전혀 위축되지 않는다.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도 문대통령 앞에서 제가 주눅들지는 않을 것이다. 쫄지 않을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물론 대한민국 대통령이기에 존중은 할 것이다. 그런데 아직 저를 부르지 않아서 못 만나고 있다.
오래 전 수도권 대학에서 몇 학기 강의한 적이 있다. 지방 대학이니까 학생들 자존감이 낮았다. 한편으로 이해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참 안타까웠다. 그래서 매학기 첫시간에 강조한 것이 있다. 서울의 유명 대학 학생들과 비교하여 열등감을 갖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생각하라고. 그리고 열심히 공부하라고. 내가 누군지 알고 당당하라고. 쫄지 말라고. 혹 이 자리에 자신을 보며 이렇게 생각하는 성도들이 있는가? "나는 가난한데..." "나는 능력이 부족한데..." "나는 나이가 많은데..." "나는 건강하지 못한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지만 여전히 인간이기에 부족한 것이 많다. 모든 것을 다 잘 할 수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인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귀한 존재다. 예수님을 값으로 지불하고 사신 보배로운 하나님 자녀다. 우리 자신을 숫자로 평가하지 말자. 외모나 능력으로도 평가하지 말자. 눈에 보이는 것으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며 나 자신을 부정적으로 보지 말자.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나를 보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조금 낫다고 우월감에 사로잡혀 우쭐대지도 말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조금 못하다고 열등감에 사로잡혀 위축되지도 말자. 높은 자존감 가지고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자녀답게 당당하게 살자.
2. 하나님이 사랑으로 돌보시는 존재(4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4절). '사람'과 '인자'라는 단어는 인간의 연약함, 덧없음, 부서지기 쉬운 유한한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죄 용서 받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녀가 되었지만 저와 여러분들은 여전히 연약한 사람이요 부서지기 쉬운 인간이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부서지는 고난을 피할 수 없다.
제가 4월부터 안식년을 가지면서 연약한 성도들이 제일 마음에 걸렸다. 젊은 나이에 암으로 고통당하는 성도들을 두고 교회를 잠시지만 떠나 있으려니 참 마음이 아팠다. 지난 주에는 20대 미혼 청년이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날 밤 저희 부부는 잠을 설쳤다. 이렇게 중병에 걸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죄가 더 많기 때문인가? 아니다. 얼마 전에 동기 목사가 한 다리를 무릎 아래로 절단했다. 다른 동기 목사들보다 죄가 더 많기 때문인가? 아니다. 어디 질병 뿐인가? 다양한 고난들이 있다. 병든 사람들을 많이 고친 바울도 정작 바울 자신은 심각한 질병으로 고통당했을 뿐만 아니라 복음 전한 이유 때문에 두들겨 맞고 감옥에 갇혔다. 어떤 때는 죽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심하게 맞았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도 고난이 있다. 고난을 당할 때 우리는 질문한다. Why me? 그리고 질문한다. Why? 고난을 당하면 고난의 원인을 알고 싶어한다. 성경에는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고난의 원인에 대해서 일일이 말씀하시지 않는다. 물론 고난의 원인에 대해 몇 가지로 설명하기는 하지만 그런 것들로 개인의 고난을 다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고난은 신비다.
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가 누구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내게 힘든 일이 있어도 나는 여전히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고난 당하는 우리를 방관자처럼 보시지 않고 우리를 생각하신다. '생각하신다'는 히브리말은 '보신다'는 뜻이다. 그냥 보시는 것이 아니라 관심을 가지고 눈여겨보신다는 것이다. 또 보시기만 하지 않고 돌보신다고 하셨다. "그가 별들의 수효를 세시고 그것들을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 별의 수효를 세시고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값으로 사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을 예사로 보시겠는가? "여자가 자기의 젖 먹는 아이를 잊겠느냐? 자기가 낳은 아이를 불쌍히 여기지 않겠느냐? 혹시 어머니가 자기 아이를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겠다"( 쉬운성경). 저는 어머니를 일찍 잃었기 때문에 이 말씀이 참 좋았다. 사람의 사랑 중에 모성애만큼 강한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그 이상이다. 이런 하나님을 생각하며 인생의 무거운 짐이 있을 때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고 부르짖자.
아내가 30대 초반에 심장 판막이 많이 좁아져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조금만 오르막길을 걸어도 피가 심장으로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폐로 역류해서 기침을 심하게 했다. 그런 와중에 제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미국에서도 아내는 계속 힘들어했다. 어떤 날은 누워 잠을 자지 못하고 침대에 앉아서 밤을 꼬박 새우기도 했다. 수술을 받으려고 하니까 10만불이 필요했다. 그만한 돈이 없었다. 당장 죽지는 않으니까 일단 수술을 미루고 기도했다. 그때 아이들이 초등학교 3학년과 1학년이었는데 이 아이들과 함께 매일 저녁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하나님께서 어린 것들이 순진한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더 잘 들어주실 것이라 믿고 기도했다. 기도하고는 아내의 심장에 귀를 대 보았다. 하나님이 낫게 해 주셔서 불규칙하고 시끄럽던 아내 심장 소리가 정상으로 되었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낫게 해 주시지 않았다. 2년 뒤에 수술을 받았다. 2년 전과 달리 가슴을 열지 않는 새로운 수술 방법으로 수술 받았다. 이 때도 물론 돈이 없었다. 그런데 수술비는 생각지도 않은 방법으로 하나님이 해결해 주셨다. 수술 받기 전에 50%는 재수술 받는다고 들었는데 지금까지 괜찮다. 하나님은 수술 받지 않고 낫게 해 주시지는 않았으나 은혜를 베풀어주셨다. 고난 중에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저희 가족을 생각하고 돌보아주셨다. 그래서 제가 자주 쓰는 표현이 있다. "고난도 신비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신비롭다." 제가 기도할 때 자주 생각하는 성경 구절 중 하나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여러분들도 낯선 땅에 이민 와서 힘든 일 많이 겪었을 것이다. 책을 써도 몇 권 쓸 수 있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지금도 힘든 일 때문에 몸과 마음이 고통스러운 분들 있을 것이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힘든 환경과 힘든 사람이다. 환경이 힘들게 하든 사람이 힘들게 하든 힘들 때 내가 하나님께 누구인지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낙심하지 말자. 하나님 아버지의 돌보심을 믿고 믿음으로 부르짖자.
3. 하나님께 남다른 사명을 받은 존재(6절).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으니"(6절). 7,8절도 같은 뜻이다(참고. ). 하나님은 인간에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을 다스리라고 사명을 주셨다. 오늘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은 우리의 삶 전반에 관련되어 있다. 세 가지 영역에서 생각해 보겠다.
첫째, 가정에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다. 부모님들께 질문한다. 여러분들이 왜 낯선 땅에 이민왔는가? 많은 이들이 자녀 때문이라고 한다. 자녀들이 키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공부하고 일하는 모습을 보면 고생이 헛되지 않은 것 같아 부모로서 감사할 것이다. 그러나 부모에게 매우 중요한 사명이 있다. 자녀들이 하나님 경외하는 것을 배우고 하나님 말씀 순종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 부모가 힘써야 할 것들이 많지만 그 중 하나가 가정 예배다. 저의 아이들이 초등학교 1학년과 3학년 때쯤일 것이다. 가정예배를 드리는데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을 읽게 되었다. 어린 자녀들에게 거룩을 어떻게 설명할까 고민하다가 이렇게도 설명했다. 다른 사람에 대해 나쁘게 말하지 않는 것도 거룩이다. 그 다음날 저녁이었다. 아내가 부엌에서 무엇을 만드는데 제가 핀잔을 주는 말을 했다. 이 말을 들은 작은 아이가 말했다. "아빠 거룩하세요!" 큰 아이가 이어서 말했다. "아빠는 바리새인 같아요!" 아이들 말에 웃었지만 하나님이 제게 아이를 통해 말씀하신다고 생각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바리새인은 예나 지금이나 위선자의 대명사다. 부모는 가능한 한 저처럼 자녀들에게 바리새인 같다는 말을 듣지 않도록 힘쓰며 자녀들과 가정 예배를 드리자. 가정 예배를 통해 자녀들이 하나님 경외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자. 또한 부부는 서로를 하나님이 보시는 것처럼 귀하게 보면서 자녀를 하나님이 보시는 것처럼 보자. 특별히 자녀를 숫자로 평가하지 말자. 우리의 자녀들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바로 알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녀답게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의 장래에 복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의 통로로 사용하실 것이다.
둘째, 일터에서도 그리스도인이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다. 큰 아이가 직장에 다니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함께 모인 모임에 갔다. 좀 과장이겠지만 직장 안에서 별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만 거기 다 모였더라고 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않기 때문이다. 최고의 직업이 무엇인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잘 하기도 하고,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는 것인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민 1세대는 하고 싶은 일, 잘 하는 일, 재미 있는 일, 돈도 많이 벌 수 있는 일을 골라 하기 힘들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무슨 일을 하든지 내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며 일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일해야 한다. 빛의 자녀들처럼 일해야 한다. 제가 뉴질랜드에 와서 운전하며 크게 인상 받은 게 있다. 대부분의 운전자들이 누가 보든 보지 않든 도로에 표시된 속도표시를 아주 잘 지키는 것이었다. 우리의 일터와 사회에서 누가 보든 보지 않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산다면, 그 사람 말은 보증수표와 같다는 인정을 받고 산다면, 누구보다도 우선 자신이 행복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행복해질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칭찬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이다.
셋째, 교회에서도 사명이 있다. 교회가 해야할 가장 중요한 사명이 무엇일까? 영혼구원하는 일이다. 그런데 영혼 구원하는 일이 쉬운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긴 기도를 하셨다. 그 중 한 부분이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기도의 핵심 내용 중 하나는 성도들이 진리와 사랑으로 하나 되는 것이었다. 왜 하나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을까? 하나 될 때 영혼구원하는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가 뉴질랜드에 와서 교회 때문에 힘들어하는 한인 성도들을 여러 명 만났다. 물론 한우리교회 성도들은 아니다. 전에는 교회 가는 것이 기다려졌었는데 요즘은 주일이 다가오는 것이 두렵다는 성도들도 있었다. 오클랜드에 예수님은 좋은데 교회가 싫어 교회에 나오지 않는 이른바 '가나안교인'들이 많다고 들었다. 키위교회에 피신해 있는 교인들도 적지 않다고 들었다. 목사로서 참 마음이 아팠다. 만약 교회가 진리와 사랑으로 하나 되어 있다면 왜 성도들이 교회 가는 것을 힘들어하고, 또 교회를 떠나겠는가?
왜 교회가 진리와 사랑으로 하나 되지 못할까? 자신이 누구인지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성도들을 하나님이 보시는 것처럼 보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것을 아무리 많이 하고, 잘 해도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다(). 한우리 교회는 사랑과 진리로 하나 되어 날로 더욱 행복한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어서 주일이 왔으면 하고 기다리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오클랜드에 있는 가나안교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다리(bridge) 역할을 잘 감당하면 좋겠다. 지치고 힘든 영혼들, 참된 소망을 바라는 영혼들, 영적으로 목말라 하는 영혼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다리(bridge) 역할을 잘 감당하면 좋겠다.
말씀을 맺는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 때 나답게 살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녀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답게 높은 자존감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자. 나는 누구인가? 자비로운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 자녀다. 비록 고난이 있어도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부르짖자.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라는 찬양을 성도들이 잘 부른다. 이 찬양에서 '누군가'는 누구인가? 성령님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신다고 하셨다(). 또 예수님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나를 위해 기도하신다고 하셨다(). 너무 힘들어서 기도가 막히고 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이때도 기억하자. 성령님과 예수님이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신다는 것을. 나는 누구인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자녀다. 가정과 일터와 세상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자. 우리 모두 내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며 나답게 살자. 그리하여 하나님을 더욱 깊이 경험하고, 행복하게 신앙생활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