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6.29.금요기도회설교

금요기도회   •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35 views

예레미야 애가, 그 참혹한 고통중에 하나님을 노래한다. 히브리시 알파벳을 활용한 시이다.

Notes
Transcript

본문해석

22 חַֽסְדֵ֤י יְהוָה֙
כִּ֣י לֹא־תָ֔מְנוּ
כִּ֥י לֹא־כָל֖וּ
רַחֲמָֽיו׃
( WTT)
여호와의 헤세드
결코 끝나지 않는다(칼 완)
결코 멈추지 않는다(칼 완)
그의 긍휼은
- 히브리어 알파벳 헤트 절의 시작이다.
- 헤세드로 시작한다.
- 전형적인 abb’a’구조다.
- 완료형이지만, 오히려 더욱 현재성이 강조된다.
-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결코 우리는 끝나지[망하지] 않는다’로 해석이 가능하다.
- 예레미야는 그 이전까지 환난을 노래했다. 소망이 끊어지고, 모든 것이 막히고 부서졌다.
-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적이 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 하지만 이제 예레미야는 헤세드를 노래한다. 하나님이 내 적이 되었지만 그의 긍휼은 끝이 없다고 노래하고 있다.
23 חֲדָשִׁים֙ לַבְּקָרִ֔ים
רַבָּ֖ה אֱמוּנָתֶֽךָ׃
( WTT)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그의 신실하심이 크도다.
- 원어는 ‘그 아침들’이라고 되어있다.
- 복수는 긍휼을 복수로 높인 것과 같은 맥락이다. 물론 아침들을 표현하기 위함이지만, 그렇게 연결이 가능한 것으로 판단된다.
- 절망적인 순간이고, 매 아침이 싫어지지만(6,14절) 그럼에도 주의 신실하심은 너무나 크다.
חֶלְקִ֤י יְהוָה֙
אָמְרָ֣ה נַפְשִׁ֔י
עַל־כֵּ֖ן אוֹחִ֥יל לֽוֹ׃ ס
( WTT)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다.
나의 영혼이 말했다(칼 완)
그러므로 내가 그 안에서 소망할 것이다(히필 미완)
- 분깃, 몫은 땅과 관련된 표현이다.
- 이것은 먹고 살수 있는 필수적인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것이다.
- 특히, 분깃이 없는 지파는 레위인뿐이었다.
- 그들의 분깃은 바로 하나님이었다. 이것은 레위인은 정말 하나님만 의지하지 않으면 살수가 없다는 뜻이다.
- 살수 없다는 것은 물리적으로도 살수 없다는 뜻이다. 어디서 양식을 얻고 어디서 잘수 있는가.
- 땅이란 경작하여 양식을 얻음과 동시에, 사람이 그 위에서 살수 있게 만든다.
- 옷 역시 땅에서 나오는 풀이나 그 풀을 먹는 가축에서 나온다.
- 즉, 의식주가 모두 분깃에서 나온다.
- 그래서 분깃, 기업이란 말은 삶의 근본이란 뜻이 강하다.
- 소망하다는 기다리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동의어라 할 수 있다.
ט֤וֹב יְהוָה֙
לְקֹוָ֔ו
לְנֶ֖פֶשׁ תִּדְרְשֶֽׁנּוּ׃
( WTT)
여호와는 선하시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자에게(칼 분사)
그를 연구하는[찾는, 공부하는](칼 미완) 영혼[생명]에게
- 24절에 예레미야는 여호와를 소망한다고 말한다.
- 그는 주께서 주신 그 고난속에서도 소망한다.
- 그리 할 수 있는 이유가 25절이다.
- 여호와께서는 그를 기다리는[소망하는] 자에게 선하시며
- 그가 어떤 분인지 찾고 연구하고 공부하고 구하는 자에게 선하시기 때문이다.
- 예레미야는 이것을 믿고 그대로 행하고 있었다.
- 믿음이란 행함과 함께 한다.
- 이 행함이란 마음의 상태이기도 하다.
ט֤וֹב וְיָחִיל֙ וְדוּמָ֔ם
לִתְשׁוּעַ֖ת יְהוָֽה׃
( WTT)
잠잠히[말없이, 조용히] 기다림이 선하다
여호와의 구원을 [향해]
- 25절에서 여호와의 선함이 나왔다면 26절은 사람의 선함이 나온다.
- 그것은 기다림이다.
- 그런데, 말없이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리는 중에 있을 불평과 불만을 인내하며 말없이 기다림이다.
- 그 기다림의 목적지는 여호와의 구원이다.
- 왜 잠잠히 기다림이 선할까.
- 그것은 여호와께서 그를 기다리는 자에게 선하기 때문이다(24절).
ט֣וֹב לַגֶּ֔בֶר
כִּֽי־יִשָּׂ֥א עֹ֖ל
בִּנְעוּרָֽיו׃ ס
( WTT)
그 남자[장정]에게 선하다
멍에를 메는 것은(칼 미완)
그의 젊은 날에
- 테트절은 선함(토브)로 채워진다.
- 첫번째(25절)은 여호와의 선함이다.
- 두번째(26절)은 사람의 선함이다.
- 세번째(27절)은 사람에게 선한 것이다.
- 사람에게 선한 것이 고생하는 것, 멍에를 메는 것이라 한다.
- 젊을 때 고생하는 것이 선하다고 한다.
- 왜냐면 그것이 하나님안에서 하는 고생이기 때문이다.
- 이것은 예레미야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 지금 하나님으로 인해 고난이란 고난은 다 당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안에 있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을 기다리며 당하는 고난이기 때문에 그 고난조차 선한 것이다.
יֵשֵׁ֤ב בָּדָד֙ וְיִדֹּ֔ם
כִּ֥י נָטַ֖ל עָלָֽיו׃
( WTT)
그가 홀로 앉아(칼 미완) 잠잠하였다(칼 바익톨)[그를 홀로 앉아 잠잠하게 하라]
왜냐면 그가[주께서] 그의 위에 얹으셨기 때문이다(칼 완).
- 앞서 나온 선함, 잠잠히 기다리게 하라는 말이다. 즉 선하게 하라는 말이다.
- 그 멍에도 주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뜻이다.
- 앞서 말한 것처럼 주님께서 주신 고난, 주님안에서 당하는 고난이기에 그 고난은 선하다. 오히려 그 고난을 통해 주를 기다리고 공부하고 연구하고 구하는 자가 될수 있다. 이것은 주께서 선하게 역사하시는 것과 긍정적인 순환이다.
יִתֵּ֤ן בֶּֽעָפָר֙ פִּ֔יהוּ
אוּלַ֖י יֵ֥שׁ תִּקְוָֽה׃
( WTT)
그의 입에 흙먼지를 주게 하라(칼 미완)[그의 입이 땅에 닿게 하라]
어쩌면 희망이 있을 수도 있다.
- 그의 입에 흙먼지를 주라는 말은 입을 땅에 대란 말이다.
- 이것은 입이 땅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여라는 말이다. 즉, 겸손하라는 뜻이다.
- 그 겸손이 있다면, 희망이 있을 수도 있다.
- 이것은 지금의 이스라엘을 향해 하는 말이다.
- 벌써 망했고, 무거운 멍에로 고생하고 있지만, 사람의 선함, 잠잠히 기다리며, 겸손히 행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실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 이런 ‘할지 모른다’는 신약이나 구약에서 많이 쓰이는 표현으로 분명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기에 100%라고 말하지는 않는다는 겸손의 표현이다.
יִתֵּ֧ן לְמַכֵּ֛הוּ לֶ֖חִי
יִשְׂבַּ֥ע בְּחֶרְפָּֽה׃ ס
( WTT)
자신을 치는 자에게(히필 부정사) 뺨을 주어라(칼 미완)
그가 수치로 가득 차게 하라(칼 미완)
- 요드의 마지막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연상시키며 끝난다.
- 무거운 짐, 멍에, 고통과 고난속에 있다.
- 그리고 그 멍에를 조롱하며 때리는 자도 있다.
- 하지만 오히려 그에게 뺨을 대어주라고 한다.
- 그리하여, 때리는 자가, 조롱하는 자가 오히려 부끄러움에 가득차게 하라고 말씀한다.
- 예레미야는 지금 상황이 분명 무거운 멍에와 조롱과 욕으로 가득하지만, 오히려 그에 굴하지 않을 것을 말한다.
- 그것은 자기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슬픔을 당한 모든 자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 왜냐면 그 잠잠히 기다림속에서 우리의 선함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영원한 선하심으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 비록 멍에가 무거울지라도, 그 멍에의 무거움만큼 멍에를 벗었을 때의 기쁨은 클 것이다.
כִּ֣י לֹ֥א יִזְנַ֛ח לְעוֹלָ֖ם אֲדֹנָֽי׃
( WTT)
왜냐면 주께서는 영원히 버리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칼 미완)
- 왜 때리는 자에게 맞고, 멍에를 매고 노예생활을 함에도 오히려 때리는 자에게 뺨까지도 댈 수 있는가.
- 그것은 주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주께서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 주께서 잠잠히 구원을 바라는 자를 선하게 여기시며, 그에게 자신의 선함을 내보이실 것이기 때문이다.
כִּ֣י אִם־הוֹגָ֔ה
וְרִחַ֖ם כְּרֹ֥ב )חַסְדּוֹ] (חֲסָדָֽיו[׃
( WTT)
왜냐면 비록 그가 비탄하게 했을지라도(히필 완)
풍성한 그의 헤세드로 긍휼히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피엘 완)
- 긍휼히 여기다가 피엘로 쓰였다.
- 이 단어의 원뜻은 사랑하다이다.
- 그리고 명사형은 ‘자궁, 태’다.
- 즉 어머니가 사랑하듯이 사랑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갓난 아이를 돌보듯이 돌보실 것이란 뜻이다.
כִּ֣י לֹ֤א עִנָּה֙ מִלִּבּ֔וֹ וַיַּגֶּ֖ה בְנֵי־אִֽישׁ׃ ס
( WTT)
왜냐면 그는 그의 마음으로부터 사람의 자녀들에게 고난주고(피엘 완) 비탄하게 하지(피엘 바익톨) 않기 때문이다.
- 본심이 아니라는 말이 참 잘 번역되었다.
- 아버지의 마음, 어머니의 마음으로 사랑하신다.
- 선함
이 절들은 선함에 대한 것들이다. 하나님의 선함 사람의 선함 사람에게 선한 것.
하나님의 선함이 사람의 선함과 맞닿고, 결국 고난과 멍에조차 하나님안이라면 사람에게 선한 것이다.
비록 고난과 멍에로 힘들지만, 주께서 어머니의 마음으로 긍휼히 여길 것이기에 우리가 선할 수 있다.

설교

예레미야애가가 어떤 배경에서 쓰여졌다는 것은 우리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조국의 멸망과 비참함, 그것을 바라보는 예레미야의 마음, 그러나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대하는 마음이 모두 담겨 있는 것이 바로 예레미야애가일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보면 우리와는 별 상관없는 말씀인것같습니다. 이런 극단적인 상황은 겪어본 일이 없을테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 예레미야 선지자가 말하는 소망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소망이야 말로 우리도 가지고 있는 소망이며, 현실을 뛰어넘는 소망, 세상을 이기는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함께 말씀을 살펴보며, 이 소망을 함께 간직하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본론
3장은 전형적인 히브리어 알파벳 시입니다. 22개의 알파벳이 3절씩 반복됩니다. 그래서 총 66절입니다. 그중 오늘 본문은 중간부분입니다. 바로 소망의 이유입니다. 3장 18절까지 예레미야는 자신과 이스라엘이 당하고 있는 극심한 고난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주는 이는 눈에 보이는 적들이 아닌 결국 우리를 버린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치 욥처럼 예레미야는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과 적이 되어버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고난을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소망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왜 고난이 소망이 되었냐입니다. 즉, 소망의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왜 고난이 소망이 됩니까.
첫째, 하나님의 인애가 영원히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바로 하나님을 믿었기에 고난을 소망으로 삼았습니다.
22-24절은 하나의 알파벳으로 시작하는 하나의 절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거기서 하나님의 인애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애가 결코 멈추지도 않고, 그의 긍휼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인애와 긍휼은 매일 아침마다 새롭게 온다고 또한 말합니다. 즉,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매일 아침 만나를 먹은 것처럼, 하나님은 매일 아침 자신에게 인애와 긍휼으로 하루를 살아갈 힘을 충분히 주신다고 노래합니다.
그렇기에 주의 신실하심이 너무나 위대하시다라고 노래하며, 여호와께서 나의 기업이라고 노래합니다.
현재 예레미야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모든 사람으로부터 버림받았습니다. 물론 예레미야는 살았습니다. 바벨론이 침공할 때, 홀로 바벨론에게 항복하고 섬겨야 한다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바벨론도 알고 있었기에 그를 살려주고 왕의 귀빈으로서 초대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것을 거절하고 동포들과 남아 고난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남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이스라엘이 좋게 볼까요. 따르는 자도 있지만, 반대로 더욱더 극심히 미워하는 자도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 이스라엘의 멸망이 예레미야 때문이라고 비난하며 공격하는 자도 있을 것입니다. 극한 상황에서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고 타인에게 돌리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끝까지 돌보고자 했던 동포들에게 외면받고 공격당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에게 둘러쌓여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 복음을 전하며 끝까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야 함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전승에 의하면 그는 이집트에 가려는 유대인들에게 끌려가 이집트에서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이 애가 속에서 하나님의 인애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인애가 끝이 없다고 노래합니다. 매일 일어나 욕을 듣고, 위협을 당하고 끌려감에도, 아침마다, 날마다 하나님의 인애와 긍휼이 새롭다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기업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기업, 분깃이란 말은 생명을 유지할 수단을 뜻합니다. 즉, 정말 해야하는 생업의 현장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땅과 관련된 표현입니다. 지금이야 여러가지 일이 많지만, 그 당시에는 농사를 통해 얻는 작물들이 근본이었으니까요. 즉, 여호와께서 나의 기업이란 표현은 말그대로 하나님이 없으면 나는 죽는다라는 표현입니다. 정말 실질적인 고백입니다. 하루벌어먹고 사는 사람에게 일자리가 없어진다는 것인 몇달내로 굶어죽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없으면 나는 하루도 살지 못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는 지금 누구로 인해 고난당하고 있습니까. 동족들로 인해 고난당하고 있나요?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3장 18절까지를 통해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11절에는 내 몸을 찢었다고 표현합니다. 12절에는 화살의 과녁으로 삼아 허리를 맞췄다고 표현합니다. 그외 18절까지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적대하고 있다, 즉 나와 하나님이 지금 적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고난의 근본이 바로 하나님께 있음을 말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에도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왜냐면 당장은 내가 하나님과 적이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며 내게 인애와 긍휼을 베푸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찬양의 고백처럼, 하나님과 내가 적대관계일때도, 하나님의 사랑은 나를 위해 싸우셨다는 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레미야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을 버리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굳게 믿고 확신했습니다. 정말 그의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단한번도 고초가 없던 날이 없었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고난받았습니다. 동족에 의해 끌려갔습니다.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그 인애를 믿었습니다. 그 인애와 긍휼이 날마다 새롭다고 고백합니다.그 사랑으로 내가 하루를 산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소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그의 소망의 근원이었습니다.
둘째, 선함이 그의 소망의 근원이었습니다.
이것은 25절부터 27절에 나옵니다. 다른 알파벳으로 시작되는 절입니다.
25절은 하나님의 선함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함은 어떤 특정한 자를 향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일까요. 가장 먼저 하나님을 소망하며 기다리는 자입니다. 여기서 기다리다에는 소망한다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향해 소망을 품고 기다리는 자에게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향해 소망을 품고 기다리는 자가 어떤 자인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에 나오는 것이니다. 구하는 영혼입니다.
구하는 영혼은 무슨 뜻일까요. 부르짖는 것을 뜻할까요. 그런데 이 구하다라는 말은 단순히 요구하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은 찾다, 연구하다, 공부하다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즉,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계속 공부하고, 연구하며 알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영혼이란 말의 다른 뜻은 생명입니다. 즉, 하나님을 찾고 어떤분인지 공부하며 연구하는 생명에게 하나님은 선하시다라는 뜻입니다.
이말은 하나님은 결코 자신을 찾는 자를 버리지 않고 그 선함을 보여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함은 사람의 선함으로 바로 이어집니다. 26절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 선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선함과 사람의 선함이 만났습니다. 그리고 27절에서는 사람의 멍에의 선함이 만났습니다. 젊을 때, 힘이 있을 때의 멍에는 선하다고 합니다. 왜 멍에, 고난이 선합니다. 왜냐면 28절에 나오듯이 주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하신 주님께서 주신 멍에이기에 그 멍에는 결국 주님과 만나게 합니다. 주님의 선함과 우리의 선함이 만나는 것을 기대하며 주신 멍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선함을 보여주며, 우리도 선함으로 응답하기를 원하십니다.
결론
우리는 오늘의 말씀을 통해 소망의 이유를 알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가 영원하기에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고난 중에 있다 하더라도, 그 고난은 하나님의 선함과 우리의 선함을 만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로마서 8:28 NKRV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말씀처럼, 고난조차 하나님안에 있다면 선함입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주께서 고난을 받으셨습니까. 이 선함을 항상 이루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예레미야처럼 고백할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조차 이렇게 고백을 했지만, 이어지는 장에서 현재 상황을 다시 한탄합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실수합니다. 실패합니다. 낙망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의 피로 선의 만남을 이루셨습니다. 어떨 때, 우린 잠잠히 기다릴 수 없습니다. 뛰쳐나갑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빌라도 앞에서 잠잠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기다리셨습니다.
예레미야를 보며, 예수 그리스도를 보며, 하나님의 선함과 인자하심으로 영원히 둘러쌓여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