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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시원케 한 사람들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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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인물에게서 듣다 - 신약 22. 일꾼을 세우고 양육한 통 큰 목회자: 바나바

22

일꾼을 세우고 양육한 통 큰 목회자

바나바

본문 사도행전 4:34–37; 11:22–30; 13:1–14:28; 15장

이름의 뜻 위로의 아들, 권위자

• 멘토링,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교육 전략

요즘은 한 조직 안에서 지식을 이전하고, 핵심 가치나 조직 문화를 강화하며, 인재 육성 등에 활용하는 ‘멘토링mentoring’이 기업뿐만 아니라 학교와 교회에서도 대중화될 정도로 크게 각광받고 있다. 멘토링은 단체뿐만 아니라 개인의 역량도 개발할 수 있는 효율적인 교육 방식이다. 잠자고 있는 영혼을 일깨워 주고, 단순한 지식이 아닌 삶을 윤택하게 하는 지혜를 가르쳐 주고, 방황할 때 길잡이 역할을 해주는 멘토를 일찍 만났더라면 우리는 진작 세상을 새롭게 보는 경험을 했을 터이다. 플로렌스 포크는 인생 항해에서 멘토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 모두 인생의 어느 때에 이르면 멘토가 필요하다. 멘토란 우리를 안내하고 보호하며 우리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것을 체화한 사람이다. 멘토는 우리의 상상력을 고취시키고 욕망을 자극하고 우리가 원하는 사람이 되도록 기운을 북돋워 준다. 멘토는 우리가 그를 필요로 할 때 나타나서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대부나 대모와 같다고 할 수 있다.

— 플로렌스 포크Florence Falk의 《미술관에는 왜 혼자인 여자가 많을까?On My Own: The Art of Being Woman Alone》(푸른숲, 2009)에서.

멘토와 관련된 최초의 언급은 호메로스의 작품 가운데 하나인 《오디세이Odyssey》에 나온다. 소왕국 이타카 왕인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에 출전하면서 가장 절친한 친구 멘토르Mentor에게 아들 텔레마쿠스의 교육을 부탁했다. 멘토르는 그 후 10여 년 동안 왕자의 친구요 상담자요 아버지로서 텔레마쿠스가 훌륭한 리더가 될 수 있도록 지도했다. 오디세우스 왕이 전쟁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그의 아들은 놀라울 정도로 훌륭하게 성장했다. 오디세우스 왕은 자신의 아들을 그렇게 훌륭하게 교육시킨 친구에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역시 자네다워, 역시 멘토르다워!”라고 크게 칭찬해 주었다고 한다. 그 후로 훌륭하게 제자를 교육시킨 사람을 ‘멘토’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렇듯 탁월한 교육가 ‘멘토르’의 이름에서 파생된 영어 단어 ‘멘토’는 풍부한 경험과 지혜를 겸비한 신뢰할 만한 사람으로서 상대방의 잠재력을 파악하고 그가 품은 꿈과 비전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스승, 인생의 안내자 등의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쉽게 말하면 곁에서 선생님처럼 조언하고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참고로, 멘토를 통해 지도와 도움을 받는 사람을 ‘멘티mentee’, 경험과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 구성원을 일대일로 전담해 지도・조언하면서 인격과 실력과 잠재력을 개발시키는 것을 ‘멘토링’이라고 한다.

멘토는 인생의 코치와 영적인 스승으로서 늘 상대방이 균형 있게 성숙하도록 돕는 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베스트셀러 작가로 25년 이상 미국 전역에서 리더십과 자기개발을 강의해 온 존 맥스웰은, 멘토란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에게 쏟아붓고 그들과 함께 나누려는 의지와 다음 세대를 위하여 살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사람”이라고 정의한 후, 멘토링이란 “한 사람의 지혜를 그가 가진 신용, 경험, 시간과 인간관계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의도적으로 전달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역사 속에서 멘티와 멘토의 관계로 묶을 수 있는 인물 가운데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다. 이 세 사람은 철학 사상의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자신들의 지식을 공유하여 의견을 나누고 사상을 계승하면서 철학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멘토와 멘티였다. 공자와 그의 뛰어난 네 제자인 재여, 자로, 자공, 안회도 이러한 멘토링의 적합한 예일 것이다. 삼중고三重苦의 장애인이던 헬렌 켈러와 그녀를 훌륭하게 교육시킨 앤 설리번의 경우도 좋은 예다. 성서에서 이런 예를 찾는다면 모세와 여호수아, 나단과 다윗, 엘리야와 엘리사, 베드로와 마가 요한 등이 있겠다. 이러한 멘토링 교육을 통해 다음 세대를 이끌 위대한 지도자들이 양육되었다. 이제 기독교 역사에 큰 전환점을 가져온 바울에게 멘토로서 역할을 잘 감당해 준 한 인물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춰 보자!

• 바나바, 일꾼을 세우고 양육한 통 큰 목회자

초대교회에 통 큰 행보로 두고두고 회자되는 이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전한 도를 뿌리째 뽑으려고 교회를 박해한 바울이 회심하자 그를 사도들 앞으로 데리고 가서 변호해 준 인물이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바울과 더불어 예루살렘교회에 의해 첫 선교지 안디옥에 파송되어 이방 선교를 주도하게 되었다(행 15:22, 25). 이렇듯 바울이 이방 선교의 주역이 되기 전 초대교회 선교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 바나바다. 회심했지만 한때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서슬 퍼런 박해의 칼을 높이 쳐들었던 바울을 사도들이 기피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었다. 가장 기피하는 대상이던 바울을 사도들의 모임 안으로 끌어들여 장차 이방 선교의 주역으로 세워 주었으니 바나바는 바울의 든든한 후견인인 셈이다(행 9:26–27).

바나바는 구브로 섬 출신의 레위인으로 본명은 요셉이다. ‘바나바’라는 이름의 뜻대로 그는 가난한 형제들을 구제하기 위해 자기 밭을 팔아 그 값을 사도들에게 바친 동정심 많은 ‘위로의 아들’이었다(행 4:34–37). 이러한 바나바를 사도행전은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행 11:24). 바나바의 타고난 좋은 인품과 뛰어난 영성을 지켜보던 예루살렘교회는 이방인 전도에 큰 실효를 거두고 있는 안디옥교회에 그를 보내 돕게 했다. 그 결과 안디옥교회는 바나바의 사역으로 부흥하게 되었다(행 11:22–24). 그때 바나바는 다소에 있던 바울을 안디옥으로 데리고 와서 함께 그곳에서 일 년간 큰 무리를 가르쳤다(행 11:25–26). 안디옥 사역을 기점으로 바나바와 바울은 실과 바늘처럼 함께 일했다.

선교여행을 떠난 바나바와 바울이 여러 지역을 거쳐 루스드라에 당도했을 때, 바울은 나면서 앉은뱅이가 된 자를 고쳐 주었다. 이 기적 사건으로 적잖이 놀란 그곳 주민들은 바나바를 제우스로, 바울을 헤르메스▲로 불렀고,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무리와 함께 와서 그들에게 제사하려 했다(행 14:8–18). 바나바와 바울의 제지로 우발적인 이 사건은 이내 종결되었다.

초대교회는 이방인들의 구원 문제와 관련하여 유대주의자들과 이방 교회 사이에 심각한 견해 차를 보였다. 다시 말해 이방인들에게도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할례, 안식일과 정결례와 같은 율법 조항을 지키게 해야 하는지를 놓고 초대교회 안에 변론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안디옥교회는 바나바와 바울을 몇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교회에 파송했다. 이 회의에서 바나바와 바울은 이방 선교 현장에서 본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표적과 기사를 보고했다(행 15:1–4, 12). 격론의 현장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의 중재로 일종의 절충안이 도출되었다.

베드로와 야고보의 중재로 이방인들은 율법의 짐 대신 그들이 지켜야 할 네 가지 금기(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 사항만 지키는 절충안을 따라야 했다(행 15:20, 29). 이러한 절충안은 이후 본격적인 이방 선교를 위한 획기적인 발판을 제공했고, 초대교회 역사를 새롭게 써내려 가게 한 전환점이 되었다. 착하고 동정심 많은 성품과 바울을 과감히 끌어안아 세워 준 통 큰 행보로 이방 선교의 초두를 장식한 바나바는 초대교회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바나바는 현대 교회에 ‘일’ 중심의 목회보다는 ‘사람(일꾼)’을 세워 주고 양육하는 목회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우쳐 준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다.

• 아름다운 동행이 그리운 시간

전 세계 인구 70억 명 가운데 12억 명이 사회 네트워크 서비스를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 스마트폰과 같은 각종 첨단 매체까지 가세하면서 그 수는 점점 증가할 것이다. 이러한 정보 기술의 발달로 인간관계가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확장되었지만 질적인 깊이는 오히려 얕아졌다.

삶의 현장인 콘텍스트context 안에서 온몸을 통한 교감이 아니라 텍스트text를 매개로 한 문자적 소통이다 보니 감정의 전달은 쉽지 않고, 익명성에 근거한 검증되지 않은 정보가 넘쳐난다. 그나마 자신의 기분이나 감정을 그림문자로 표현하는 이모티콘emoticon을 보내는 것으로 때운다. 40자 미만의 텍스트 메시지로 무슨 진득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겠는가? 첨단 매체를 통해 이루어지는 이러한 형태의 소통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숨결과 눈길과 온기가 사라진 문자들의 향연일 뿐이다. 결국 방대한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 속에서 수많은 현대인들은 얄팍한 지식과 왜곡된 정보에 쉽게 노출되며, 행복감이나 소속감보다는 도리어 소외감만 깊어 간다. 이러한 때 정신과 영혼의 폐부로 교감할 수 있는 아름다운 동행은 점점 사라지고 있고, 더군다나 초월적 가치의 영역은 점점 설자리를 잃고 있다. 내용과 깊이를 상실한 채 빠르게 변하는 사회에 적응하느라 속도전을 펼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하나님과의 동행은 점점 낯선 이야기가 되고 있다.

초대교회는 암울한 시대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한 사도들의 활동이 두드러진 시기였다. 특별히 바나바와 바울의 활약으로 이방 선교의 교두보가 놓였다. 이렇게 되기까지 바나바의 역할은 중요했다. 회심한 바울을 예루살렘교회에 소개해 준 것도, 그의 사역을 위해 길을 터 준 것도, 그가 이방 선교를 주도한 걸출한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바나바의 견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두 사람의 아름다운 동행이 초대교회의 심장을 고동치게 했다. 멘토링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나눔과 섬김으로 한길을 가는 동행에 있다. 바울은 이러한 멘토링 교육의 수혜자로서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4:16).

목회자는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을 닮으려 하고 성도들은 목회자의 지도와 양육으로 성숙한 삶으로 나아가는, 관계의 영성과 닮음의 신앙 교육이 교회 현장에 필요하다. 이러한 닮음이 이루어지지 않고 관계가 단절될 때 교회는 냉랭하고 삭막해진다. 그런 교회에는 더 이상 생명의 소리는 들리지 않고 다투고 분쟁하는 소리만 들린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이 땅을 떠나시면서 장차 이루어질 우리와의 아름다운 동행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주님이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의 여정에 동행해 주신다는 믿음이 우리가 이 땅에서 제자로서 살아가는 비결이다. 주님과의 동행을 통해 우리의 영성은 깊어지고 우리의 인격은 다듬어진다. 주님과 함께 걷는 그 여정에 바울과 바나바처럼 동행할 수 있는 길벗이 있다면, 그리고 사람을 세우는 멘토링이 이루어진다면 다음 세대에는 여전히 희망이 있다.

오늘 본문에는 우리가 ‘바울의 그림자’라고 많이들 알고 있는 바울의 선교여정의 수행원, 또는 도우미 정도로 생각하는 ‘바나바’가 등장을 합니다. 사실을 오늘 본문이전 사도행전 4장에서 바나바가 처음으로 등장을 합니다. 이따가 다시 한 번 살펴볼테니 오늘 본문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지역은 안디옥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스토리인 스데반 집사의 순교의 일로 인해 각 지로 흩어진 예수 믿는 자들이 본문에서 보는 내용과 같이 구브로와 인디옥까지 이르러서 이전까지는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였는데 흩어짐으로 몇 사람이 헬라인 즉 이방인에게도 예수를 전파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온다는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 교회 즉 예수님의 제자 즉 사도들이 있는 그 교회에서 사도들이 별명을 붙여준 ‘위로의 아들’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파송하는 내용이 있고 그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게 머물러 있으라고 담대히 선포하는 바나바를 성경에서는 착한사람,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바나바를 소개합니다. 그 바나바로 인해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졌다고 소개합니다. 그런 바나바가 계속 소개되어지는데 사울의 소식을 듣고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로 다소에 가서 만나고 안디옥으로 사울을 데리고 옵니다.
바나바하면 떠오르는 것은 바울과 심하게 다툰후 바울과 2차선교 때 헤어지게 되었다는 것이 우리에게 강하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마가 요한을 데리고 반대편으로 행로를 옮겼다. 1차전도여행에 포기한 마가 요한으로 인해서이다. 그리고 누가와 바울이 사도행전을 함께 작성하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사도행전을 바라보는 시점은 사도바울은 큰 역사를 했고 바나바는 그렇지 못했다고 오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을 보면 사도바울과 함께한 이름이 기록된 인물이 70명정도 되는데 그리고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도 100여명 정도 될 것으로 추정됩니다. 바울을 세운 사람은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나니아가 있고 두 번째는 지금 보려고하는 바나바가 있습니다. 인물 설교 중에 중요한 것은 인물의 강점뿐만이 아니라 그 사람을 사용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레위사람은 밭을 기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주인공 바나바 요셉은 밭을 팔아 사도들에 발 앞에 내어놓습니다. 24절 앞에 ‘왜냐하면’이 빠져있다. 탄탄하게 세워져가는 안디옥교회를 뒤로하고 바나바와 사울은 성령의 인도함으로 인해서 다시금 파송받아 전도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자들을 사용하시나요? 물론 가말리엘의 수제자라고 하는 바울과 같은 엘리트들도 사용하십니다. 하지만 사도의 다수는 어부요. 엘리트 출신이 아닙니다. 오늘 함께 살펴본 바나바 또한 지극히 내새울 것이 없어서 그런 기록들이 없다고 보여집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때 하나님은 사람의 능력과 실력을 사용하시기보다 하나님의 능력과 실력을 사용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 실력과 능력이 없는. 제자들을 선택하고 그들을 훈련시켜서 성장시키고 그렇게 성장한 그들을 하용하시는걸 보면 말입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즐겨 말합니다. 제가 많이 느린 사람이라고 그래서 남들보다 항상 늦게 한다고 자랑처럼 얘기합니다. 이런 얘기가 때로는 나를 변호하는 것처럼 보이고 나를 정당화 시키는 것처럼 보여서 꼴보기 싫어 보일 때가 많은대요 그래도 저는 그렇게 합니다. 왜내하면 전 그곳에서 성장을 멈추지 않기 때문에 부끄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나를 한 번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인도해주시고 성장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 총신신대원의 시험을 준비할 때의 일입니다. 에벤에셀이라는 총신을 준비하는 스터디 모임이 있는데요. 공부모임 중에서 단연 탑으로 꼽는 모임입니다. 우리 홍전도사님은 그곳에서 강사장까지 하신 유능하신 분이시고요 ~^^ 그 곳에서 공부를 하려고 몇번 나갔는데 전 그 곳에서 공부하기를 포기했어요. 왜냐하면 너무 어린 청년들이 너무 공부를 잘해서 제가 그 진도를 쫓아가기가 힘든거예요. 그래서 실상 그 곳에 나간횟수는 몇 번 안됩니다. 그럼 제가 느려서 못하냐구요? 아뇨 전 하나님이 함께 해주셔서 집앞 도서관에서 자리를 지키는 연습을 했습니다. 아침9시~저녁10시까지 도서관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전 하나님의 은혜로 시험에 합격했고 지금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학생으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나의 느림을 자랑하는 이유는 나의 느림에도 불구하고 나를 포기하시거나 버려두지 않으시고 끝까지 성장시켜 주시는 하나님을 자랑하기 위해서 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바나바가 본인의 사역보다 적게 비춰지고 낮게 평가가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그가 사도바울과 같은 사도를 견인하는 도구로 또 정착시키는 도구로 쓰임받았음을 살펴 보았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를 돌아봄과 동시에 바나바와 많이 닮아 있는 우리 성도님들을 떠올렸습니다. 도대체 무슨 유익이 보인다고 안정적이고 세상에서 가장 좋다라고 소문난 교회를 떠나 아직 어찌될지도 모르는 이 개척교회로 오신건가요? 또는 잘 적응하고 정착했던 교회를 떠나서 이 미래를 알 수 없고 또 숨어있을 수 없어서 무슨 일들을 꼭 해야하고 생판 처음보는 사람들과 한 가족이라는 예수님의 한 몸이라는 어색함을 가져야하는 이 곳으로 오신 건가요? 무엇이 여러분을 이렇게 좋아 보이지 않는 선택을 강요하게 한건가요. 오늘 말씀에서 바나바는 예수님에 미쳐서 본인의 재산을 팔아 예루살렘 교회 사도들 앞에 함께 사용해달라고 내어놓습니다. 여러분은 왜 여러분이 힘들게 쌓아놓은 것들과 아까운 시간과 어색함 밖에 안보이는 관계를 위해 마음을 이 작아보이는 겨자씨 같은 교회에 내어놓으신 건가요? 제가 얼마 안 살았지만 어른이 되는게 가장 쉬운 일인것 같아요. 그냥 되기 싫은데 계속 나이를 먹더라구요. 어른이 되는건 너무 쉬운데 어른다워지는건 그에 반해 너무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내가 사람들 앞에서 어른행색을 낸다고 사람들이 나를 어른으로 인정해주진 않으니깐 말이죠. 학생도 그렇고 남편도, 아내도, 자녀도, 부모도, 모두 되는건 그래도 쉬운데 다워지는건 정말 어려운 일인것 같아요. 저를 보면 더 그래요. 전 전도사가 됐어요. 그런데 전도사답진 않아요. 내가 여러분들 우리 청년들 앞에서 전도사행색은 내고 있어요. 그런데 전도사답진 않아요. 늘 실수하고 또 아주 자신감 넘치도록 리더십을 발휘하지도 못하니 말이죠. 제가 저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지금 이 얘기를 하고 있는거 맞아요. 그런데 그것만 있는것은 아니고 우리 모두가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영적인 어른이요.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것은 어른들의 없어지지 않는 풍성한 사랑과 맛있고 영양많은 음식과 안전한 집이잖아요, 우리 교회에 오는 영적으로 어린 사람들에게 필요한것도 영적인 어른들의 풍성한 사랑과 아이들을 성장시킬 영양많은 음식(말씀)과 아이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집(교회)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님 한 분이 이 모든 것을 다 하는 것이 아니라 이 교회에서 어른이 되어가는 우리 성도님들의 역할이 훨씬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간에 결단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무엇이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냥 우리를 선택하시고 사랑해주시는 분인데 우리가 그런 하나님을 시원케해드리는 사람이 되길 원한다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이렇게 하나님께서 친히 사용할 사람들이 많이 필요한 개쳑교회로 와서 어른이 되었는데 우리가 모두가 특히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이 교회의 어른다워지기를 소망한다고. 하나님 앞에 간절한 마음을 담아 이 두가지 기도제목을 놓고 주여 삼창하시고 기도하시겠습니다.
실수를 용납하는 것이 마가 조카이기 때문일까요? 그럼 사도바울은 왜 용납했을까요? 무섭지 않았을까요? 의심되지 않았을까요? 어떤 학자들은 원래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는데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성경에서는 아는 관계라는 내용이 없습니다. 알았다 하더라도 믿는 사람들을 잡아서 죽이기까지 하는 우리가 잘 아는 독종으로 치면 히틀러와 같은 자기와 다르다고 잡아 족치고 죽이기까지 하는 그런 사람이 몇년만에 변했다고 하는데 사도들도 믿지 못하는 그런 인간을 ‘바나바 요셉’은 어째서 믿었을까요? 성경에서 설명하는 것은 그가 ‘위로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나바가 정말 대단하죠? 그런데 그런 바나바가 성경에 나온걸 보니깐 그냥 평신도에요. 특별히 공부를 많이한 사람도 특별히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도 특별히 대단하다고 소개하는 내용이 없어요. 그냥 주님의 복음을 믿음으로 주님 앞에 헌신하는 평신도 였다는 겁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많은 것들은 그건 사역자들이나 할 수 있지 하나님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들만 하는거지라고 하면서 외면하고 못하는걸 너무나도 당연하게 치부하면서 살아갈 때가 많은 것 같아요. 특별히 누가 아니라 제가요. 저는 그런것 같아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나바를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대단한 먼가가 없어요. 그런 평신도였던 그가 주님을 믿고 나서 하는 일들을 보세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던 사울을 찾아가서 그를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변호하고 그가 정말 예수님을 어떻게 만났는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바울을 변명이 아닌 바나바의 증언으로 변호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 생전에 제자가 아니었던 바울을 사도라는 호칭을 붙여주는 이방인들의 사도로 세워준 것이 바나바가 했던 역할이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원수라도 사랑하라고 하시면 에이 그건 사람이 할 수 있는거 아니잖아요. 그건 특별히 손양원 목사님 같은 분들이나 사역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죠. 나는 못해요.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까지도 주라고요. 에이 말도 안되요. 우리가 남을 위해 목숨까지도 내어주는 사랑을 할 수 없는 존재인가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미 그런 능력을 주셨다는걸 믿을수가 없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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