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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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꾼을 세우고 양육한 통 큰 목회자
바나바
본문 사도행전 4:34–37; 11:22–30; 13:1–14:28; 15장
이름의 뜻 위로의 아들, 권위자
• 멘토링,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교육 전략
요즘은 한 조직 안에서 지식을 이전하고, 핵심 가치나 조직 문화를 강화하며, 인재 육성 등에 활용하는 ‘멘토링mentoring’이 기업뿐만 아니라 학교와 교회에서도 대중화될 정도로 크게 각광받고 있다. 멘토링은 단체뿐만 아니라 개인의 역량도 개발할 수 있는 효율적인 교육 방식이다. 잠자고 있는 영혼을 일깨워 주고, 단순한 지식이 아닌 삶을 윤택하게 하는 지혜를 가르쳐 주고, 방황할 때 길잡이 역할을 해주는 멘토를 일찍 만났더라면 우리는 진작 세상을 새롭게 보는 경험을 했을 터이다. 플로렌스 포크는 인생 항해에서 멘토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 모두 인생의 어느 때에 이르면 멘토가 필요하다. 멘토란 우리를 안내하고 보호하며 우리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것을 체화한 사람이다. 멘토는 우리의 상상력을 고취시키고 욕망을 자극하고 우리가 원하는 사람이 되도록 기운을 북돋워 준다. 멘토는 우리가 그를 필요로 할 때 나타나서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대부나 대모와 같다고 할 수 있다.
— 플로렌스 포크Florence Falk의 《미술관에는 왜 혼자인 여자가 많을까?On My Own: The Art of Being Woman Alone》(푸른숲, 2009)에서.
멘토와 관련된 최초의 언급은 호메로스의 작품 가운데 하나인 《오디세이Odyssey》에 나온다. 소왕국 이타카 왕인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에 출전하면서 가장 절친한 친구 멘토르Mentor에게 아들 텔레마쿠스의 교육을 부탁했다. 멘토르는 그 후 10여 년 동안 왕자의 친구요 상담자요 아버지로서 텔레마쿠스가 훌륭한 리더가 될 수 있도록 지도했다. 오디세우스 왕이 전쟁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그의 아들은 놀라울 정도로 훌륭하게 성장했다. 오디세우스 왕은 자신의 아들을 그렇게 훌륭하게 교육시킨 친구에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역시 자네다워, 역시 멘토르다워!”라고 크게 칭찬해 주었다고 한다. 그 후로 훌륭하게 제자를 교육시킨 사람을 ‘멘토’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렇듯 탁월한 교육가 ‘멘토르’의 이름에서 파생된 영어 단어 ‘멘토’는 풍부한 경험과 지혜를 겸비한 신뢰할 만한 사람으로서 상대방의 잠재력을 파악하고 그가 품은 꿈과 비전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스승, 인생의 안내자 등의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쉽게 말하면 곁에서 선생님처럼 조언하고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참고로, 멘토를 통해 지도와 도움을 받는 사람을 ‘멘티mentee’, 경험과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 구성원을 일대일로 전담해 지도・조언하면서 인격과 실력과 잠재력을 개발시키는 것을 ‘멘토링’이라고 한다.
멘토는 인생의 코치와 영적인 스승으로서 늘 상대방이 균형 있게 성숙하도록 돕는 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베스트셀러 작가로 25년 이상 미국 전역에서 리더십과 자기개발을 강의해 온 존 맥스웰은, 멘토란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에게 쏟아붓고 그들과 함께 나누려는 의지와 다음 세대를 위하여 살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사람”이라고 정의한 후, 멘토링이란 “한 사람의 지혜를 그가 가진 신용, 경험, 시간과 인간관계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의도적으로 전달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역사 속에서 멘티와 멘토의 관계로 묶을 수 있는 인물 가운데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다. 이 세 사람은 철학 사상의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자신들의 지식을 공유하여 의견을 나누고 사상을 계승하면서 철학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멘토와 멘티였다. 공자와 그의 뛰어난 네 제자인 재여, 자로, 자공, 안회도 이러한 멘토링의 적합한 예일 것이다. 삼중고三重苦의 장애인이던 헬렌 켈러와 그녀를 훌륭하게 교육시킨 앤 설리번의 경우도 좋은 예다. 성서에서 이런 예를 찾는다면 모세와 여호수아, 나단과 다윗, 엘리야와 엘리사, 베드로와 마가 요한 등이 있겠다. 이러한 멘토링 교육을 통해 다음 세대를 이끌 위대한 지도자들이 양육되었다. 이제 기독교 역사에 큰 전환점을 가져온 바울에게 멘토로서 역할을 잘 감당해 준 한 인물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춰 보자!
• 바나바, 일꾼을 세우고 양육한 통 큰 목회자
초대교회에 통 큰 행보로 두고두고 회자되는 이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전한 도를 뿌리째 뽑으려고 교회를 박해한 바울이 회심하자 그를 사도들 앞으로 데리고 가서 변호해 준 인물이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바울과 더불어 예루살렘교회에 의해 첫 선교지 안디옥에 파송되어 이방 선교를 주도하게 되었다(행 15:22, 25). 이렇듯 바울이 이방 선교의 주역이 되기 전 초대교회 선교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 바나바다. 회심했지만 한때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서슬 퍼런 박해의 칼을 높이 쳐들었던 바울을 사도들이 기피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었다. 가장 기피하는 대상이던 바울을 사도들의 모임 안으로 끌어들여 장차 이방 선교의 주역으로 세워 주었으니 바나바는 바울의 든든한 후견인인 셈이다(행 9:26–27).
바나바는 구브로 섬 출신의 레위인으로 본명은 요셉이다. ‘바나바’라는 이름의 뜻대로 그는 가난한 형제들을 구제하기 위해 자기 밭을 팔아 그 값을 사도들에게 바친 동정심 많은 ‘위로의 아들’이었다(행 4:34–37). 이러한 바나바를 사도행전은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행 11:24). 바나바의 타고난 좋은 인품과 뛰어난 영성을 지켜보던 예루살렘교회는 이방인 전도에 큰 실효를 거두고 있는 안디옥교회에 그를 보내 돕게 했다. 그 결과 안디옥교회는 바나바의 사역으로 부흥하게 되었다(행 11:22–24). 그때 바나바는 다소에 있던 바울을 안디옥으로 데리고 와서 함께 그곳에서 일 년간 큰 무리를 가르쳤다(행 11:25–26). 안디옥 사역을 기점으로 바나바와 바울은 실과 바늘처럼 함께 일했다.
선교여행을 떠난 바나바와 바울이 여러 지역을 거쳐 루스드라에 당도했을 때, 바울은 나면서 앉은뱅이가 된 자를 고쳐 주었다. 이 기적 사건으로 적잖이 놀란 그곳 주민들은 바나바를 제우스로, 바울을 헤르메스▲로 불렀고,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무리와 함께 와서 그들에게 제사하려 했다(행 14:8–18). 바나바와 바울의 제지로 우발적인 이 사건은 이내 종결되었다.
초대교회는 이방인들의 구원 문제와 관련하여 유대주의자들과 이방 교회 사이에 심각한 견해 차를 보였다. 다시 말해 이방인들에게도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할례, 안식일과 정결례와 같은 율법 조항을 지키게 해야 하는지를 놓고 초대교회 안에 변론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안디옥교회는 바나바와 바울을 몇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교회에 파송했다. 이 회의에서 바나바와 바울은 이방 선교 현장에서 본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표적과 기사를 보고했다(행 15:1–4, 12). 격론의 현장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의 중재로 일종의 절충안이 도출되었다.
베드로와 야고보의 중재로 이방인들은 율법의 짐 대신 그들이 지켜야 할 네 가지 금기(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 사항만 지키는 절충안을 따라야 했다(행 15:20, 29). 이러한 절충안은 이후 본격적인 이방 선교를 위한 획기적인 발판을 제공했고, 초대교회 역사를 새롭게 써내려 가게 한 전환점이 되었다. 착하고 동정심 많은 성품과 바울을 과감히 끌어안아 세워 준 통 큰 행보로 이방 선교의 초두를 장식한 바나바는 초대교회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바나바는 현대 교회에 ‘일’ 중심의 목회보다는 ‘사람(일꾼)’을 세워 주고 양육하는 목회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우쳐 준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다.
• 아름다운 동행이 그리운 시간
전 세계 인구 70억 명 가운데 12억 명이 사회 네트워크 서비스를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 스마트폰과 같은 각종 첨단 매체까지 가세하면서 그 수는 점점 증가할 것이다. 이러한 정보 기술의 발달로 인간관계가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확장되었지만 질적인 깊이는 오히려 얕아졌다.
삶의 현장인 콘텍스트context 안에서 온몸을 통한 교감이 아니라 텍스트text를 매개로 한 문자적 소통이다 보니 감정의 전달은 쉽지 않고, 익명성에 근거한 검증되지 않은 정보가 넘쳐난다. 그나마 자신의 기분이나 감정을 그림문자로 표현하는 이모티콘emoticon을 보내는 것으로 때운다. 40자 미만의 텍스트 메시지로 무슨 진득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겠는가? 첨단 매체를 통해 이루어지는 이러한 형태의 소통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숨결과 눈길과 온기가 사라진 문자들의 향연일 뿐이다. 결국 방대한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 속에서 수많은 현대인들은 얄팍한 지식과 왜곡된 정보에 쉽게 노출되며, 행복감이나 소속감보다는 도리어 소외감만 깊어 간다. 이러한 때 정신과 영혼의 폐부로 교감할 수 있는 아름다운 동행은 점점 사라지고 있고, 더군다나 초월적 가치의 영역은 점점 설자리를 잃고 있다. 내용과 깊이를 상실한 채 빠르게 변하는 사회에 적응하느라 속도전을 펼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하나님과의 동행은 점점 낯선 이야기가 되고 있다.
초대교회는 암울한 시대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한 사도들의 활동이 두드러진 시기였다. 특별히 바나바와 바울의 활약으로 이방 선교의 교두보가 놓였다. 이렇게 되기까지 바나바의 역할은 중요했다. 회심한 바울을 예루살렘교회에 소개해 준 것도, 그의 사역을 위해 길을 터 준 것도, 그가 이방 선교를 주도한 걸출한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바나바의 견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두 사람의 아름다운 동행이 초대교회의 심장을 고동치게 했다. 멘토링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나눔과 섬김으로 한길을 가는 동행에 있다. 바울은 이러한 멘토링 교육의 수혜자로서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4:16).
목회자는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을 닮으려 하고 성도들은 목회자의 지도와 양육으로 성숙한 삶으로 나아가는, 관계의 영성과 닮음의 신앙 교육이 교회 현장에 필요하다. 이러한 닮음이 이루어지지 않고 관계가 단절될 때 교회는 냉랭하고 삭막해진다. 그런 교회에는 더 이상 생명의 소리는 들리지 않고 다투고 분쟁하는 소리만 들린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이 땅을 떠나시면서 장차 이루어질 우리와의 아름다운 동행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주님이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의 여정에 동행해 주신다는 믿음이 우리가 이 땅에서 제자로서 살아가는 비결이다. 주님과의 동행을 통해 우리의 영성은 깊어지고 우리의 인격은 다듬어진다. 주님과 함께 걷는 그 여정에 바울과 바나바처럼 동행할 수 있는 길벗이 있다면, 그리고 사람을 세우는 멘토링이 이루어진다면 다음 세대에는 여전히 희망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