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레몬서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167 viewsNotes
Transcript
종과 감옥
종과 감옥
우리가 오늘 본문을 보면서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바울사도는 바울서신에서 항상 자신을 둘로스(종), 하나님의 종으로 자신을 표현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진짜 육신으로 종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오네시모입니다. 바울사도는 로마시대의 사람입니다. 당시 로마시대는 세계 최대의 강국으로서 이웃나라들과 전쟁을 만이 하였고, 그 전쟁에서 진나라에서는 상당한 포로들이 발생했을 것입니다. 그 포로들의 삶은 짐승과 같았고, 그 사람들은 재산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마치 지금시대에 전자제품과 같이 팔수 있는 존재였기에 노예들의 삶은 너무나도 괴롭고 힘든 시간 이었을 것입니다. 노예들은 자유가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으로서의 권리가 모두 빼앗긴 존재였습니다. 언제든지 죽을 수 있었고, 언제든지 팔릴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런 존재를 바울은 로마시민권이 있었기에 철저히 알고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오네시모를 믿음의 아들로 삼았고, 믿음의 동역자가 된 바울은 그 종의 신분으로서 자유함이 없이 두려워하는 그를 향한 사랑의 마음으로 오네시모의 주인이었던 빌레몬에게 편지를 하게 됩니다. 바울사도는 편지를 할 때 자주 항상 수신자와 발신자를 표시 합니다. 발신자는 감옥에 갇혀 있던 바울사도와 디모데 이며, 수신자는 빌레몬과 자매 압비아와 함께 믿음의 병사된 아킵보와 빌레몬 교회의 성도들입니다. 그러면 바울사도가 어떤 부탁과 편지를 하게 되는지 그리고 그 편지로 오늘날 우리를 살펴보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빌레몬은 성경에서 어떤 사람이라 말하는가?
빌레몬은 성경에서 어떤 사람이라 말하는가?
because I hear of your love and of the faith that you have toward the Lord Jesus and for all the saints,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빌레몬서에서 성경은 빌레몬을 여러 말로 표현을 합니다. 그에 대해서 성경에서 말하는 표현을 한번 귀 기울여 들어 봅시다. 빌레몬은 성도를 사랑하고 예수를 사랑하는 믿음 있는 사람이라고 5절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하나님께 감사와 기도를 하며 빌레몬에 대해서 말할 때 그렇게 표현할 수 있다고 합니다. 바울사도에게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인정받은 사람이요,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표현됩니다. 얼마나 귀한 사람인지 성경은 분명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7절에서 표현하기를 빌레몬은 성도들을 보살피며 평안한 마음을 주었기에 그를 통해서 바울사도가 빌레몬의 소식으로 많은 위로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감옥에 있는 바울사도에게, 빌레몬의 소식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동역자의 소식이며, 그에게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지체였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혹시 이런 성도들을 보셨습니까? 가끔씩 교회에 이런 분들을 만날 때에 정말로 신앙생활을 할 때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감옥에 있는 바울사도에게 이렇게 위로가 되었다는 것은 온 교회들에 모범이며, 다른 교회에서도 힘이 되는 빌레몬 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신실한 빌레몬에게 바울사도는 무슨 부탁을 하게 될까요?
이렇게 신실한 빌레몬에게 바울사도는 무슨 부탁을 하게 될까요?
바울 사도는 어느 날 감옥 속에서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던 중에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날로 너무나도 신실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동역자가 되었고, 너무나도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위하여 갇힌 바울사도에게 너무나도 마음을 함께 나누며, 동역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 장면을 다함께 성경을 통해서 읽어보겠습니다. 11절부터 13절까지 읽어 봅시다. 11절에서는 나에게 유익한자. 12절에서는 나의 심복, 13절에서는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한자. 라고 바울사도는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동역자 있으십니까?
저에게는 아내가 이런 동역자입니다. 너무나도 나에게 유익하며, 나의 마음을 나누는 사람이며, 복음을 위해 달려갈 때 함께 섬겨주는 귀한 사람입니다. 교회에서도 귀한 선생님들 중에 이런 분이 계십니다. 그때 가뭄의 단비처럼, 마치 월드컵의 승리의 골을 넣기 전에 패스를 받은 사람처럼 너무나도 설레고, 뜨거운 가슴을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바울 사도에게 그 사람의 이름은 바로 오네시모였습니다. 오네시모 그 사람이 있기에, 바울 사도는 감옥에서도 복음을 전할 때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런 오네시모에게도 큰 어려움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예전에 한 사람의 종이였고, 종이 되었을 때, 자신의 주인에게서 모습에서 도망을 친 것 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바울 사도를 통해서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했고, 동역자가 되며 있었을 때, 자신의 이야기를 바울 사도에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게 필연인지, 우연인지 그 오네시모의 종이 신실한 빌레몬 이었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오네시모를 동역자와 형제로 받아달라고 빌레몬에게 편지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종을 형제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 이었습니다. 하지만, 죄인이었던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형제이기에, 그 사랑으로 종을 용서해 달라고,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보낼 테니, 예수의 사랑으로 형제로, 동역자로 맞아 달라고 부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육적인 형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오네시모와 바울이 형제가 되었고, 바울과 빌레몬이 동역자와 형제이기에, 오네시모도 빌레몬에게 형제가 되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심복”이라는 표현
“심복”이라는 표현
I am sending him back to you, sending my very heart.
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1) “심복”이라는 표현
몬 1:
오네시모를 위하여 표현할 때 심복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원어와 영어성경에서는 무슨 뜻인지 잠시 살펴보자. ESV 성경에서는 “I am sending him back to you, sending my very heart”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심복이라는 의미 되신 ESV 에서는 나의 마음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면 원어로는 무슨 뜻일까? “σπλάγχνον”로써
원형
σπλάγχνον splanchnon (스팔런크논 ) 애타는 마음, 긍휼, 창자, 심장
LSJ inward parts; sacrificial feast
DBL Greek intestines; desires; compassion; object of affection; refuse to show compassion; restrict one’s affection for
EDNT pl.: inner organs; “heart,” inner yearning, compassion
compassion ⇔ bowels(n. a deeply felt compassion; characteristic of the psychological feature understood as the bowels)이라는 뜻이다. 매우 깊은 심정을 보냈다는 말이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동정하기 위해서 빌레몬에게 선의를 베풀어 달라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진짜 오네시모를 향한 사랑과 동역자로서 느낀 애타는 깊은 마음으로서 오네시모를 바라보고 있고, 그 오네시모를 빌레몬이 사랑으로 용서하며 동역자로 받아들이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종이 아닌, 형제”
“종이 아닌, 형제”
둘로스 vs 아델포스
둘로스 vs 아델포스
no longer as a bondservant but more than a bondservant, as a beloved brother—especially to me, but how much more to you, both in the flesh and in the Lord.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16절을 영어로 살펴보면 오네시모를 이제는 종이 아닌 형제로 대해주길 바라는 간절한 바울의 요청이 있다. 여기서 종과 형제라는 단어를 살펴보자. ESV에서는 “no longer as a bondservant but more than a bondservant, as a beloved brother”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bondservant” 와 “brother”로 표현되는데, 원어적으로 살펴보면 “δοῦλος”는 slave(n. a person who is legally owned by someone else and whose entire livelihood and purpose was determined by their master)의 뜻이다. 법적으로 어떤 사람에게 소유된 사람이거나, 어떤 삶 전체가 주인의 목적에 따라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 바울은 주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바울서신에서 표현하고 있는데, 그는 사람의 노예로 살아가는 모습을 정말로 잘 알고 있던 로마시민으로 살아가는 자유인 이었다. 그런데, 오네시모는 도망친 노예이다. 그 말은 당장이라도 주인에게 잡히게 되면 죽을 수밖에 없는, 또는 엄청난 고난을 당하는 사람으로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다 죄의 노예였는데,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부여 받게 되었다. 오네시모도, 바울도 빌레몬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다. 그러기에 이제는 사람의 노예가 아닌 우리 모두 형제로서 살아가는 신분이고, 그가 진심으로 변화되어 바울의 동역자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감당하는 귀한 신분이기에, 이제는 종이 아닌 형제로 대해주기를 빌레몬에게 간절히 부탁하고 있다. 결코 이것이 쉬운 것이 아니기에, 철저히 겸손한 마음과 사랑의 마음으로 부탁하고 있다. 그러면 형제라는 단어를 원어로 살펴보자. “ἀδελφός”의 뜻은 believer ⇔ brother (n. a male [believer] understood as one’s own sibling in God’s family; sometimes used of any sibling [regardless of gender] in God’s family)이다. 이는 “믿는 자. 하나님의 가족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소유된 자”라는 뜻이다. 바울은 육의 형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아들이라는 것이고, 그렇게 대해주기를 빌레몬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강권하고 있다. 우리 모두다 주님의 소유이기에, 주님의 가족으로 하나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
.
바울 사도는 어느 날 감옥 속에서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던 중에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날로 너무나도 신실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동역자가 되었고, 너무나도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위하여 갇힌 바울사도에게 너무나도 마음을 함께 나누며, 동역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 장면을 다함께 성경을 통해서 읽어보겠습니다. 11절부터 13절까지 읽어 봅시다. 11절에서는 나에게 유익한자. 12절에서는 나의 심복, 13절에서는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한자. 라고 바울사도는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동역자 있으십니까?
본문을 통해서 바울은 빌레몬에게 크게 몇 가지를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그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을 해야 할지 살펴보자.
저에게는 아내가 이런 동역자입니다. 너무나도 나에게 유익하며, 나의 마음을 나누는 사람이며, 복음을 위해 달려갈 때 함께 섬겨주는 귀한 사람입니다. 교회에서도 귀한 선생님들 중에 이런 분이 계십니다. 그때 가뭄의 단비처럼, 마치 월드컵의 승리의 골을 넣기 전에 패스를 받은 사람처럼 너무나도 설레고, 뜨거운 가슴을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바울 사도에게 그 사람의 이름은 바로 오네시모였습니다. 오네시모 그 사람이 있기에, 바울 사도는 감옥에서도 복음을 전할 때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런 오네시모에게도 큰 어려움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예전에 한 사람의 종이였고, 종이 되었을 때, 자신의 주인에게서 모습에서 도망을 친 것 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바울 사도를 통해서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했고, 동역자가 되며 있었을 때, 자신의 이야기를 바울 사도에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게 필연인지, 우연인지 그 오네시모의 종이 신실한 빌레몬 이었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오네시모를 동역자와 형제로 받아달라고 빌레몬에게 편지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종을 형제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 이었습니다. 하지만, 죄인이었던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형제이기에, 그 사랑으로 종을 용서해 달라고,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보낼 테니, 예수의 사랑으로 형제로, 동역자로 맞아 달라고 부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육적인 형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오네시모와 바울이 형제가 되었고, 바울과 빌레몬이 동역자와 형제이기에, 오네시모도 빌레몬에게 형제가 되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칭의로 우리를 살펴보고, 형제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진짜 형제로 대하자.
칭의로 우리를 살펴보고, 형제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진짜 형제로 대하자.
우리가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오직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칭의 와 작정으로 미리아신 자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자들을 의롭게 하시고 의롭게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신다고 하셨던 것을 이루시는 과정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 은혜를 입은 자들이 어떻게 예수그리스도가 형제로 부른 자를 용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혹여 교회 안에서 아니면 교회 밖에서 믿는 자로서 형제를 용서하고, 믿음으로 하나 된 자를 형제로 부르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라고 우리가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구원의 관점에서 늘 하나님 앞에 두고, 우리가 믿음으로 다른 이를 용서하고, 보살피고, 형제로 대해야 한다. 나의 인간적인 육체의 형제가 아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존귀하게 거룩하게 섬기는 모습으로 나아가야 한다.
믿음을 삶으로 실천하자.
믿음을 삶으로 실천하자.
우리가 믿는 믿음은 진짜 행할 때 살아있는 믿음이다. 빌레몬에게도 마음으로서의 용서뿐만 아니라. 진짜 바울의 간구처럼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자유인으로 풀어주기를 원하고 있다. 우리도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본받아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아멘” 으로 순종하며 실천하는 삶을 살자. 요즘 우리 한국교회가 약해진 것에 대해서 많은 문제점이 있다고 하지만, 결정적인 문제점 중에 하나가 실천을 하지 못하는 잠든 믿음을 많이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진짜 이렇게 종을 나의 형제로 대하는 초대교회의 믿음이 있다면, 얼마나 교회가 아름답겠는가? 한국교회에서는 직분이 권리가 되고, 지위가 되고 있다. 그리고 돈과 명예를 가진 사람이 교회에서 큰 소리를 치고 있다. 하나님의 집에서 그것이 말이 안 되는 것인데, 실상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도 세상을 의지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이들이 주역이 되고 있다. 다시 돌아가야 한다. 진짜 믿음의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고,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다시 말씀으로 우리가 돌아가야 한다. 말씀을 힘입어 살아가자.
서 론
본 론
빌레몬서에서 성경은 빌레몬을 여러 말로 표현을 합니다. 그에 대해서 성경에서 말하는 표현을 한번 귀 기울여 들어 봅시다. 빌레몬은 성도를 사랑하고 예수를 사랑하는 믿음 있는 사람이라고 5절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하나님께 감사와 기도를 하며 빌레몬에 대해서 말할 때 그렇게 표현할 수 있다고 합니다. 바울사도에게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인정받은 사람이요,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표현됩니다. 얼마나 귀한 사람인지 성경은 분명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7절에서 표현하기를 빌레몬은 성도들을 보살피며 평안한 마음을 주었기에 그를 통해서 바울사도가 빌레몬의 소식으로 많은 위로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감옥에 있는 바울사도에게, 빌레몬의 소식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동역자의 소식이며, 그에게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지체였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혹시 이런 성도들을 보셨습니까? 가끔씩 교회에 이런 분들을 만날 때에 정말로 신앙생활을 할 때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감옥에 있는 바울사도에게 이렇게 위로가 되었다는 것은 온 교회들에 모범이며, 다른 교회에서도 힘이 되는 빌레몬 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어느 날 감옥 속에서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던 중에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날로 너무나도 신실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동역자가 되었고, 너무나도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위하여 갇힌 바울사도에게 너무나도 마음을 함께 나누며, 동역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 장면을 다함께 성경을 통해서 읽어보겠습니다. 11절부터 13절까지 읽어 봅시다. 11절에서는 나에게 유익한자. 12절에서는 나의 심복, 13절에서는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한자. 라고 바울사도는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동역자 있으십니까?
저에게는 아내가 이런 동역자입니다. 너무나도 나에게 유익하며, 나의 마음을 나누는 사람이며, 복음을 위해 달려갈 때 함께 섬겨주는 귀한 사람입니다. 교회에서도 귀한 선생님들 중에 이런 분이 계십니다. 그때 가뭄의 단비처럼, 마치 월드컵의 승리의 골을 넣기 전에 패스를 받은 사람처럼 너무나도 설레고, 뜨거운 가슴을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바울 사도에게 그 사람의 이름은 바로 오네시모였습니다. 오네시모 그 사람이 있기에, 바울 사도는 감옥에서도 복음을 전할 때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런 오네시모에게도 큰 어려움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예전에 한 사람의 종이였고, 종이 되었을 때, 자신의 주인에게서 모습에서 도망을 친 것 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바울 사도를 통해서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했고, 동역자가 되며 있었을 때, 자신의 이야기를 바울 사도에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게 필연인지, 우연인지 그 오네시모의 종이 신실한 빌레몬 이었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오네시모를 동역자와 형제로 받아달라고 빌레몬에게 편지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종을 형제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 이었습니다. 하지만, 죄인이었던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형제이기에, 그 사랑으로 종을 용서해 달라고,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보낼 테니, 예수의 사랑으로 형제로, 동역자로 맞아 달라고 부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육적인 형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오네시모와 바울이 형제가 되었고, 바울과 빌레몬이 동역자와 형제이기에, 오네시모도 빌레몬에게 형제가 되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 론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이십니까? 바울 사도에게 빌레몬처럼, 오네시모처럼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사람이십니까? 아니면,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살아가면서도 아직도, 내 고집과 자아를 가지고서, 내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이십니까? 아직도 죄의 종노릇하는 모습이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자, 양자된 자 바울 사도의 믿음의 형제인 빌레몬과 같은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계십니까? 우리 빌레몬서를 통해서 종을 용서할 수 있는 믿음을 우리는 가지고 있는지 돌이켜 봅시다. 실제로 살아가는 것이 진짜 믿음인데 우리는 아직도 고집과 자아로 묶여서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지 못하고 있지 않나요? 우리 결심하고 나아갑시다. 나에게 혹여 믿음생활을 하며 용서치 못한 믿음의 형제와 자매가 있는지 살펴보고, 주님의 사랑으로 그를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용서합시다. 그리고 내 마음을 주님께 두지 못하고, 말과 믿음의 행실이 다른 내 모습을 빌레몬서를 통해서 반성해 봅시다. 복음을 위해서 바울사도처럼 감옥에 갇히지도 않고, 다른 사람을 빌레몬처럼 예수의 사랑으로 용서도 하지 않고, 늘 내 마음대로 나를 섬겨달라고 하는 모습이 있었는지 살펴봅시다. 우리가 말씀을 보고 행하지 않으면, 죽은 믿음입니다. 우리도 진짜 행하는 믿음이 됩시다. 그리고 우리를 의롭다고 칭의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살펴봅시다. 그 은혜가 얼마나 큽니까? 마치 종이었던 오네시모를 빌레몬이 용서한 것 보다. 더 큰 은혜이지 않습니까? 우리를 계획하시고, 부르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고 로마서에서는 말씀하십니다.
그 큰 은혜를 다시 생각해 보고, 혹여 아직도 주님 앞에 내려놓지 못한 부분을 돌이켜 보고,
나의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나의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나의 바울 같은 동역자를 섬기며,
나의 바울 같은 동역자를 섬기며,
내가 빌레몬이 되어서 형제들을 돌보기를 힘쓰고,
내가 빌레몬이 되어서 형제들을 돌보기를 힘쓰고,
성도를 사랑으로 섬기는 자가 되기를 다시 한 번 결심합시다.
성도를 사랑으로 섬기는 자가 되기를 다시 한 번 결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