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영광을 보라 (Witness the Glory of God)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119 views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한다는 것은 우리의 죄로 물든 삶 속에도 변함없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간증한다는 것이다.

Notes
Transcript
Sermon Tone Analysis
A
D
F
J
S
Emotion
A
C
T
Language
O
C
E
A
E
Social
View more →
반갑습니다. 오늘 이곳, 신시내티 중앙장로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음에 하나님께, 그리고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기를 소망하며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즐거움

저는 미국에 온지 2년 반 조금 지났습니다. 그동안 생긴 취미가 하나 있는데, 바로 한국 예능 보기입니다. 아이들 재우고 아내와 “나 혼자 산다”를 보는게 어찌 그리 즐거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최근에 새로운 프로그램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밥 블레스 유.” 보신 분 계신가요? 최화정, 이영자, 김숙, 송은이 4명의 여자 연예인들이 나와서 밥을 먹는 프로그램입니다. 어찌 그리 맛있게 먹는지… 좋아하는 사람들과 밥을 먹는 “즐거움”이 보기 좋았습니다.
이 프로그램이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먹는 즐거움”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즐거움”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즐거움들이 있습니다. “먹는 즐거움” 말고도 “노는 즐거움,” “성취의 즐거움,” “봉사의 즐거움” 등. 사람들은 즐거움을 얻기 위해 많은 일들을 합니다.
그런데 저는 “관계의 즐거움,”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의 즐거움”이 가장 귀중한 즐거움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고, 누군가에게 사랑 받는다는 것은 다른 즐거움들보다 한 차원 높은 만족을 줍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즐겁게 살고 계십니까? 사랑 하고, 사랑 받으며 살고 계십니까?

1. 즐거움의 근거, 믿음

오늘 본문 말씀인 로마서 5장 1절과 2절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즐거움을 제시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기 때문에 누리는 즐거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이 즐거움은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그리고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즐거움입니다. 집을 사도, 여행을 가도,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경험할 수 없는, 진정한 즐거움입니다. 이는 요즘 세상이 추구하는 감각적 엑스터시와는 다른 것이고, 세상을 떠나서 경험하는 신비주의적 황홀경도 아닙니다. 봉사나 예술을 통해 느끼는 심리적, 지적 기쁨도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즐거움은 지극히 이성적이고 현실적이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존재론적인 즐거움”입니다.

*존재론적 즐거움

이 즐거움을 설명하려면 이 질문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언제 즐거움을 느낍니까?” “여러분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즐거움을 경험해 본 것이 언제였습니까?” 단순히 개그 프로그램을 봐서 느끼는 재미나 훌륭한 일을 한 후 느끼는 만족감, 원하는 물건을 샀을 때 느끼는 성취감이 아닌, 마음 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즐거움을 묻는 질문입니다. 어떠신가요?
현대 사회를 잘 살펴보면 사랑을 받기 위한 인간의 본능으로 가득합니다. 이성의 사랑을 위해 자신의 외모를 꾸미는 것을 권장합니다. 심지어 물질이나 성적 매력으로 이성을 유혹하는 것을 능력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결혼 외 성 관계는 이제 일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한다면,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위해 무엇이든 해도 된다고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SNS 팔로워를 모으기 위해 자극적인 게시물을 올리기도 합니다. 대중의 인기를 받는 스타가 되기 위해 한국에서는 지금도 수십만 명의 청소년들이 오디션을 보고 있습니다. 사랑받기 위해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치열한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어른들도 비슷합니다. 직장에서 인정받기 위해 밤낮으로 일합니다. 배우자의 사랑이 부족하다며 다른 이성을 찾기도 합니다.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사랑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 받기 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녀가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 화를 내기도 합니다. 자녀를 사랑의 대상이 아닌 자기 만족의 대상으로 바라보기도 합니다. 내가 이만큼 해 주었으니 너도 그에 합당한 반응을 보이라고 요구하기도 합니다. 솔직히 저도 그럴 때가 많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 모두는 사랑 받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본성에는 사랑에 대한 갈망이 심겨져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현대 사회의 현상들은 우리가 얼마나 사랑을 갈구하고 있는지 보여줍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세상이 점차 각박해 질수록, 인간은 더욱 사랑에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기존의 결혼 제도나 동성애 금지와 같은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사회 규범들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기존의 법과 규범 안에서는 그들의 사랑에 대한 욕구를 충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비판하기 이전에 그 안에 있는 인간의 본성, 사랑받기 원하는 마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에 목마릅니다.
그래서 인간은 사랑을 받을 때 즐거움을 느낍니다. 저도 연애할 때 즐거움을 느껴 보았습니다. 당연히 지금 아내와의 연애입니다. 한참 썸을 타다가 사랑을 확인했을 때 느꼈던 그 즐거움. 지구 상에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즐거움이었습니다. 물론 결혼 8년차인 지금도 아내의 사랑에 즐거움을 느끼지만, 정말 지금도 그렇지만, 연애 중에 느꼈던 즐거움은 특별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너무 오래 되어서 가물가물하실지라도 잘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사랑의 관계가 주는 즐거움. 오늘 바울이 말하는 즐거워한다는 표현이 이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에게 즐거움은 하나님의 화평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1절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 이는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에 있는”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던 순간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과 대화했던 인간, 배우자를 향해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창2:23)고 여겼던 ‘사랑으로 가득한 인간’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는 인간. 타인을 사랑하고, 상대방의 사랑을 받던 인간. 그 처음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십자가의 능력은 죄로 가로막혔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인간 내면에 있는 관계의 깨어짐에 대한 상처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느끼는 것.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경험하는 것. 그것이 바울이 말하고 있는 즐거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만이 우리를 진정 사랑해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사랑에 대한 욕구는 하나님만이 채워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는 것, 그것만이 진정한 즐거움을 갖는 방법입니다.
인간을 통해 받는 사랑은 인간의 사랑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인간 사이의 관계 회복은 일시적인 즐거움만 줄 뿐입니다. 여러분도 잘 알지 않습니까? 인간 사이에 영원한 사랑은 없습니다. 그리 사랑해 결혼한 부부도 원수처럼 싸우지 않습니까? 그 누구도 당신의 사랑 욕구를 다 채워줄 수 없습니다. 인간을 통해 얻는 즐거움은 일시적입니다. 여러분도 많이 경험하지 않았나요? 우리의 존재는 하나님을 통해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로마서 4장, 아브라함의 믿음

그래서 우리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만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즐거움은 어떠한 행동이나 관계, 소유물이 아닌, 믿음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로마서 4장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을 통해 이해해야 합니다. 로마서 4장 17절부터 22절까지의 말씀입니다.
17. 그가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바울에게 아브라함의 믿음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약속을 능히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었습니다. 추상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그냥 믿으라니까 믿는게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약속을 능히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9절도 이렇게 말합니다.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번제단에 올려 놓은 아브라함. 그는 정말로 칼을 들었고, 아들을 죽이려 했습니다 (창22:10). 하나님이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삭을 통해 아브라함의 자손을 세우실 것이라는 약속을 믿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며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 바울은 로마서 4장 23절부터 25절까지 말씀을 통해 우리도 이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23.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신약의 관점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복음과 영생에 대한 믿음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신 예수를 살리신 하나님. 그리고 세상 마지막 날, 의로운 백성을 모으실 하나님. 이 두 가지 진리를 믿는 것이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는 믿음인 것입니다. 비록 지금 우리의 삶이 죄와 실수로 얼룩졌다고 할지라도, 다시 사신 예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믿는 것. 그것이 우리가 가진 기독교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믿음에 우리의 공로는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은혜로 택함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믿어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셔서” 믿게 된 것입니다. 이 전제가 바로 세워지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습니다. 믿음의 주인은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서 교회로 모여서 예배하는 것도 동일합니다. 한 주 동안 잘 살아서 모인 것이 아닙니다. 맡은 직분 때문에 여기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은혜로 부름 받았습니다. 바울은 본문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2. 즐거움의 이유,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은, 원죄 이후에 하나님을 피해 숨은 아담과 하와를 부르신 것처럼 (창3:8-9), 우리를 은혜의 자리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이 은혜의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곳에서 우리의 역할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즐거움의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

우리는 종종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할지”고민합니다. 예배 시간에도 “내가 예배를 드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했노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태도를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자들”이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믿음의 사람은 큰 일을 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눈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 보는 것이 “기도”이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 “사역”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무엇을 했다고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자랑하는 것

반대로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자랑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 역사하신 하나님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은 신비한 체험이나 웅장한 종교적 감흥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모든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인간의 형상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처럼, 성령께서 우리의 삶에 개입하셔서 이루신 크고 작은 일들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은 여러분의 삶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하는 성도들이 모여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리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한 주를 열심히 살다가 주일에 모인 성도들이 “하나님이 내 삶 속에서 이렇게 일하셨다” 고백하는 것이 예배이고, 즐거움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영광은 여러분의 삶을 통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주일 오후 교제 시간에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주일 오후에 교제하는 시간이 매우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배 후에 성도들이 모여서 식사를 하면서 서로를 알아가고, 교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는 교회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에 거의 5시 반까지 대화를 했는데, 저는 엄청 놀랐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참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그 시간에 조금 더 하나님의 영광을 자랑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한 주 동안 어떤 일들을 하셨는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겸손과 사랑으로 하나님의 일들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내 자랑 말고,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사도행전 2장 46절 말씀과 함께 47절도 이루어지는 교회가 되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같이 말씀을 읽겠습니다.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성도 여러분, 많은 교회가 46절 말씀대로 모이고 떡을 뗍니다. 하지만, 46절 만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내 삶에 하나님이 이렇게 일하셨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교회가 매주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일이고, 그렇게 하나님의 일들을 알아갈 때 경험할 수 있는 진정한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자랑할 때, 삶에 찾아오는 걱정과 고민이 하나님의 섭리로 해결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자랑할 때, 영혼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자랑할 때, 하나님이 날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가식의 가면을 벗어 던지고 함께 마음을 모아 하나님의 일을 자랑해야 합니다. 사랑과 겸손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하나님의 일을 자랑하라고 이야기할 때 매우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의 약함을 통해 가장 잘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 약한 자를 들어 사용하시는 하나님, 넘어진 자를 다시 일으키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입니다. 나는 약하지만, 하나님이 나의 삶에 이런 일들을 하셨다고 고백하는 것. 내 삶에 실패가 찾아왔지만, 하나님이 새 일을 행하실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 이러한 “다시 일어서는 삶”이 우리가 살아야 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5장 3절에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3. 즐거움의 열매, 다시 일어서는 삶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죄인입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충분히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모두는, 한 명도 빠짐 없이, 연약한 질그릇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그 누구도 죽음 앞에서 담대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상대방의 연약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여기에 즐거움의 열매가 있습니다.

*약함을 자랑하는 곳, 교회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자랑하는 것은 나의 약함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다 잘 되고 있다고 합리화 할 필요가 없습니다. 현실이 힘들고 이해가 안되는데 믿음이 있는 척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솔직해져도 괜찮습니다.
잘난 사람처럼 보일 필요 없습니다. 죄가 없는 것처럼 보일 필요도 없습니다. 거룩한 척 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는데 무엇 때문에 숨깁니까? 교회 공동체마저 나를 숨겨야 하는 곳이라면, 여러분은 어디서 진짜 “나”로 존재할 수 있습니까?
교회는 약함을 자랑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 약함을 용서받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셨으니, 서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있기에, 그 누구도 우리의 약함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그곳이 교회입니다.
중요한 것은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다시 해보자고 일으켜 주는 것입니다. 분명 하나님 일하신다고 서로 격려하는 것입니다. 같이 울고, 같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그 사랑과 용납에 참된 즐거움이 있습니다.

결론: 내 아버지의 집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린 연약합니다. 우린 넘어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을 자신의 영광으로 바꾸십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본다는 것은, 사랑과 용서로 교회를 이룬다는 의미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함께 찬양하며 기도하려고 합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 찬양이 참 많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연약한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함께 찬양하면 좋겠습니다.
( 찬양: 주는 완전합니다 )
성경은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말합니다. 그 아버지가 여러분을 진정으로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 앞에 약함을 내어 놓아도 됩니다. 가식을 벗고, 고백해도 괜찮습니다. 그래도 주님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