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이용하지 말고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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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이용하지 말고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저희들은 13장에서,
북이스라엘의 여호아하스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일을 계속 행하자 이웃 나라인 아람을 들어 북이스라엘을 침범하도록 하셨지만,
고통 속에 신음하며 간구하는 백성들의 기도를 또한 들으셔서
여호아하스의 아들인 요아스를 통해서 아람왕 벤하닷을 치게 하셨고 영토를 다시 수복하게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열왕기하의 중심인물인 엘리사가 나이 들어 죽게 되는 장면을 보았는데,
그는 능력의 종답게 죽어서도 신비한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의 무덤에 던져진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살아나게 되고,
그의 예언대로 요아스는 아람을 세 번 쳐서,
다 승리했고 빼앗긴 성읍들을 다시 수복하였습니다.
이 13장의 이야기가 주로 북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루었다면,
오늘부터 살펴볼 열왕기하 14장 전반부는 남유다의 9대 왕 아마샤의 이야기를 기록하였고,
후반부는 다시 북이스라엘의 요아스왕의 뒤를 이은 13번째 왕 여로보암 2세의 통치가 개관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은 아마샤가 남유다의 왕이 되는 장면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왕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 제 이년에 남유다의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가 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북이스라엘의 12번째 왕 요아스와 남유다의 8번째 왕 요아스는 같은 이름을 가진 왕이고,
비슷한 시기에 활동을 했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같은 사람이 아닌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렇게 비슷한 시기에 같은 이름을 쓰는 왕이 통치할 때는 공통적으로 남유다와 북이스라엘간의 사이가 좋았다는 것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전에도 이런 경우가 있었죠?
남유다의 다섯 번째왕 여호람과 북이스라엘의 아홉 번째 왕 여호람이 비슷한 시기에 같은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도 또한 기억하셔서 혹시 나중에 말씀을 보면서 ‘이것이 지금 무슨 말인가?’ 헛갈리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남유다의 아마샤는 아주 젊은 20대의 나이에 왕이 되었습니다.어떻게 그가 이렇게 어린 나이에 남유다의 왕이 될 수 있었을까요? 그 답을 5절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의 아버지 요아스 왕이 정권을 노리는 심복들에 의해서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입니다. 열왕기 기자는 요아스의 죽음을 저희가 이미 보았던 열왕기하 12장 20- 21절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요아스의 신복들이 일어나 반역하여 실라로 내려가는 길 가의 밀로 궁에서 그를 죽였고 그를 쳐서 죽인 신복은 시므앗의 아들 요사갈과 소멜의 아들 여호사바드였더라 그는 다윗 성에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장사되고 그의 아들 아마샤가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21)”
아마샤는 아버지 요아스의 황당하고 허망한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지만, 그는 슬픔을 느낄 겨를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국에서 조금의 틈을 주었다가는 자신의 목숨과 나라의 안위가 위태롭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명감 때문인지, 그의 탁월함 때문인지 그는 속히 그 상황을 정리하고 나라는 잘 세워갑니다. 5절의 말씀은 그를 평가하기를 “나라가 그의 손에 굳게 서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6절은 그 혼돈의 시국을 정리하며 나라를 굳게 세워가는 그의 통치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왕을 죽인 자의 자녀들은 죽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함이라 곧 여호와께서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자녀로 말미암아 아버지를 죽이지 말 것이요 아버지로 말미암아 자녀를 죽이지 말 것이라 오직 사람마다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죽을 것이니라 하셨더라”
한국의 역사에서 많이 본 것처럼, 중앙집권 체제에서, 이렇게 왕권이 강한 나라에서 역모를 도모했다는 것은 가장 큰 죄이고 자신 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자녀와 가족, 심지어 그 가문도 참수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것은 그 죄가 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중에 혹시 모를 후환을 없애기 위함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고대근동에 있는 주변 국가들의 왕들도 권력에 도전하는 자들의 죄를 매우 엄중하게 처리했음을 많은 역사의 자료가 증언합니다. 아마샤가 대단한 점은 이러한 상황과 역사 속에서 그는 달랐다는 것입니다. 그는 6절의 말씀처럼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는데 직접 관여한 자들은 참수했지만, 그들의 자녀들과 가족들은 건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했던 이유가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기록된 내용은 신명기 24장 16절의 말씀입니다. “자식들은 그 아버지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니 각 사람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 ().그렇게 생각해 볼 때, 그가 그렇게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역모를 일으킨 자들에게 살해되는 최악의 정치적 상황을 딛고 나라를 건강하게 다시 세울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그의 냉철함이나 그의 상황파악 능력이나, 그의 정치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았던 그의 신앙과 그러한 그의 영적인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라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시사하고 도전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에 대해서 평가하기를 오늘 본문 3절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라고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정이 무너진다고 합니다. 교회가 무너진다고 합니다. 정치가, 나라가 무너진다고 합니다. 혹시 그 이유가 ‘정말 순전하고 철저하게 말씀 앞에 엎드리는 영적인 리더의 부재에서 오는 문제 아닌가?’ 한 번 생각해 볼 문제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가정에서 회사에서 교회에서 우리가 속한 모든 공동체에서 이 영적인 리더로, 영적인 아비로 부르셨음을 또한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그렇게 신실하게만 보이던 아마샤 왕도 여느 왕들과 마찬가지로 결국 절반의 성공, 미완성의 믿음, 타협하는 신앙의 한계를 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3절을 다시 보면,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는 같지 아니하였으며..”라고 평가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비슷한 평가를 여러 번 보지 않았나요? 북이스라엘의 왕들은 이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왕, 정직하지 않았던 왕들은, 악한 왕의 상징이 된 초대왕인 여로보암에 빗대어서 “여로보암의 길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다”고 말하고 있는데, 남유다의 경우는 선왕의 상징,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했던 왕, 나라를 잘 다스렸고 부 하게 만들었던 왕 다윗에 빗대어서 , “다윗 왕과 같지 아니하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어서 설명합니다. 3절 중반 이후 말씀입니다. “그의 아버지 요아스가 행한 대로 다 행하였어도 오직 산당들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그도 결국 이 산당을 없애지 못했다는 부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부분에서 제가 지난 주에 말씀 드렸던 반쪽 짜리 개혁으로 끝나버린 북이스라엘 열번째왕 예후의 모습이 겹쳐 보이실지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이 산당이 무엇이길래, 많은 왕들이 이 산당을 없애지 못해서, 이 산당에 발목 잡혀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고, 이렇게 박한 평가를 받게 하는가? 이 산당은 히브리어로 ‘바마’, ‘바모트’라는 말인데, “높은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고대의 산당은 무성한 나무가 있는 높은 언덕이나 산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고 합니다. 저희가 묵상하고 있는 열왕기서에서는 이 산당이 의미하는 것은 이방신을 섬기는 처소, 우상숭배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왜 수 많은 왕들은 그렇게 강한 개혁과 파격적인 정치는 시도하면서도 유독 이 산당 앞에서는 작아지는 것일까요?
이 산당을 설명하려면 꽤 긴 역사를 말해야 하는데, 짧게 설명드리면 이 산당이 본격적으로 말씀드린 의미로 사용된 것은 솔로몬왕 때부터입니다. 기억하시겠지만 솔로몬왕이 이방 왕비들과 전략적으로 혼인을 하면서 그들의 종교와 우상들을 함께 가져온 것 아닙니까? 그러면서 그 우상들을 위한 산당을 짓기 시작한 것이 그 시작입니다. 이 말은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 우상을 숭배하고 산당에서 이방신을 모시는 이러한 행위는 위로부터 시작된 종교문화인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이러한 문화가 정치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고위 관직의 사람들과 재력가, 힘있는 사람들이 이러한 신앙이 결탁되어 그들의 그룹을 이루고 그들 만의 문화를 만들면서 상위층의 삶과 그들의 신앙 속으로 너무 깊숙이 들어오게 되었다는 부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무지한 대중들은 그들의 직, 간접적인 강요와 정책, 그리고 눈에 보이는 우상의 유혹에 빠졌고, 힘들고 어려운 삶 속에서 자신들을 지켜줄 하나님을 찾는 그 간절함이 만나서 산당 안의 우상들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그들에게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장소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해 볼 때, 이 산당을 건드린다는 것은 아마 굉장한 부담이었고 정말 어려운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산당을 없애지 못했던 결과는 하나님 보시기에 전심으로 주님을 의지하지 못한 증거일 뿐이고, 계속해서 죄를 짓는 행위인 것입니다.
본문 7절이하는 에돔과의 전쟁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전쟁 이야기는 역대하 25장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샤 왕은 에돔과 전쟁을 치루기 위해 북이스라엘에게 군사 지원을 받습니다. 북이스라엘로부터 10만 명의 용병을 지원받는 대가로 무려 은 일백 달란트를 지불합니다. 그렇게 든든한 지원군을 받아서 흐믓해 하고 있는 아마샤 왕에게 하나님의 사람이 찾아와서 황당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지원군을 모두 돌려보내고,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입니다.” 아마샤왕은 어떤 결정을 했는지 아십니까? 놀랍게도 그는 그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래서 에돔과의 전쟁에서 그는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이 승리에 도취되어 어처구니없는 죄를 짓게 되는데, 에돔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들을 가져다가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비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 교만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군사도 빌려준 북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에게 도전장을 내밀고 전쟁을 일으킵니다.
결국 그는 벧세메스 전투에서 대패했고 포로의 신세가 됩니다(8-14절). 예루살렘은 파괴되고 성전과 곳간의 보물은 탈취당하고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가게 되는 비참한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서도 이 열왕기서에 흐르는 가장 큰 교훈, “하나님께 전심으로 의지하면 형통의 길로 가지만,그렇지 않다면 망하는 길로 간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샤 왕의 삶과 신앙의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도전을 주는 것은 왜 이겠습니까? 그는 믿음이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순종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용기가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함도 있었고, 율법의 말씀에 자신을 절제하는 순종함도 있었고, 하나님의 음성에 10만 대군을 돌려보낼 줄 아는 용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믿음, 온전한 신뢰함이 부족했다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결국 자신의 이해관계, 경험, 한계를 넘는 상황과 조건 앞에서는 하나님을 밀어내치고 적당히 타협하고 다른 것들을 붙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열왕기서의 기자를 통해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잘못을 보며 “너희들은 그렇게 살지 말아라, 너희들은 똑바로 하나님 믿으면서 살아라, 너희들은 전심으로 하나님 의지하며 살아라!”는 메시지를 주고 계신 것이 아닐까요?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아마샤왕에게는 그리고 우리에게는 말씀을 잘 알고 이용하는 방법과 지식은 있었지만, 그 말씀에 온전히 엎드러져 순종하는 일들이 부족했던 것 아닌가요? 오늘 아마샤왕의 모습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이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