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앞에서.

In front of the Fear. 두려움 앞에서.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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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결과로 주어진 두려움은 당연한 삶의 요소이다. 오히려 두려움이 없다 말하는 이는 자신이 죄인임을 부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두려움을 인정고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존재들이다.

Notes
Transcript
Sermon Tone Analysis
A
D
F
J
S
Emotion
A
C
T
Language
O
C
E
A
E
Soc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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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한인학생회 개강예배에서 말씀을 나누게 되어서 하나님께 그리고 한인학생회 임원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작년에 김성진 목사님께서 한국 가시기 전에 설교를 하셨었는데, 제가 갈 때가 되어간다고 했더니 김준영 목사님께서 저에게 전화를 주신 것 같습니다. 보내버리고 싶은 마음 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얼마 전, 새벽에 이 소리에 잠에서 깼습니다. “Somebody is killing me! Help! Somebody is killing me!” “탕, 탕, 탕, 탕!”
새벽 5시, 집 앞 주차장에서 어떤 사람이 아파트 주민에게 총을 쐈습니다. 지금도 그때 들었던 목소리가 귀에 맴돕니다.
본능적으로 잠에서 깼습니다. 무서웠습니다. 불도 켜지 못한 채 숨어서 블라인드 틈으로 밖을 봤습니다. 저 사람이 혹시나 우리 집에 들이닥치지는 않을까 지켜보며 어떻게 아이들을 지켜야 하는지, 무슨 무기를 들고 싸워야 하는지 열심히 계산했습니다. 다행히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경찰차와 앰뷸런스가 도착했고, 범인이 잡혀갔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시카고에 가야해서 짐을 쌌는데, 아내가 저에게 차에 짐을 싣고 오라며 밤에 혼자, 야밤에 혼자, 내보내더군요. 창문으로 저를 내다보고 있는 아내를 보며 다양한 감정이 올라왔습니다.

두려움. Fear.

저는 요즘 두려움이라는 주제에 대한 생각을 합니다. 공부를 마쳐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디론가 가야 하는 상황에서 불확신한 미래가 저에게 불안함을 줍니다.가진 것 다 쏟아 부으며 공부했는데, 이제 아무 것도 없이 어디로 가야할지 사실 두렵습니다. 한국에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 집은 구할 수 있을지, 한창 이쁜 두 아이 어떻게 키워야 할지, 그리고 나를 불러주는 곳이 있을지 두렵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저에게도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방인의 땅 미국에서 가진 것 다 쏟아부으며 공부하고 있기에. 이 시간이 지나면 어떤 길을 가야할지 사실 두렵습니다. 한국에 집 값이 엄청 비싼데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 한창 이쁜 두 아이 어떻게 키워야 할지, 그리고 내가 사역할 수 있는 곳이 과연 있을 것인지 두렵습니다.
지금도 조금 두렵기는 하지만,
어떤 이들은 일어나지 않은 일은 걱정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는 걱정의 70%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들이라며 걱정하지 말고 살라고 말합니다. 혹자는 믿음으로 기도하면 다 이루어진다고, 걱정은 불신앙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Don’t worry, be happy.” “믿으면 다 됩니다. 기도하세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걱정 없이 살고 계시나요?
솔직히 저는 요즘 두려움과 싸우고 있습니다. 이제 공부를 마치고 어디론가 떠나야 하기에, 두렵습니다.
“주먹을 끝까지 봐야 싸움에서 이기는거여!”
“주먹을 끝까지 봐야 싸움에서 이기는거여!”
그래서 중학교 때 어떤 남자 학생들은 자신의 ‘깡'을 증명하기 위해 주먹이 눈 앞으로 날아와도 눈을 깜빡이지 않도록 훈련 했습니다. 그러다보면 억지로 눈을 뜨고 버텨야 했습니다. 이렇게 말이죠.
억지로 눈을 부릅뜨고 눈을 깜빡이지 않았을 때, 속으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난 주먹도 두려워하지 않는 남자다!”
오늘 말씀은 이 “두려움”에 대한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깊은 신학적 성찰이나 성경 주해를 이야기하기 두려워서 요즘 고민하며 기도하고 있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중2병 환자들이 하는 행동이죠.
그런데 여러분, 많은 크리스쳔들이 이런 행동을 할때가 있습니다. 두려운데 두렵지 않은 척 하는 것이죠. 마음에 두려움이 찾아오는 상황인데 아닌척 해야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을 부릅뜨고 아닌척 합니다. 옆에서 보면 다 아는데, 억지로 눈꺼풀을 뜨고 있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눈에 위험한 것이 왔을 때, 눈을 보호하기 위해 눈꺼풀을 만드셨습니다. 눈동자를 지키는 것이 주먹을 끝까지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눈을 감아야 정상입니다. 위험한데 눈이 안감기면 병원에 가야 합니다. 두려움은 이겨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오늘 본문인 창세기 12장 10절부터 13절까지의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10.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11.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12. 애굽 사람들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13.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창세기 12장, 아브람의 두려움

오늘 본문 말씀에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로 아브람, 후에 믿음의 조상이 되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입니다.
놀라운 것은 창세기 12장 1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고, 아브람은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 함으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7절과 8절에 보면 아브람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었고, 순종했고, 말씀하신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두려움이 찾아온 것입니다. 10절부터 13절까지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10.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11.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1.
12. 애굽 사람들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13.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성경은 아브람이 살던 땅, 네게브에 기근이 들었고, 이 기근 때문에 아브람은 애굽으로 향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길에서 아브람은 두려움을 느꼈고, 엄청난 거짓말을 했습니다. 바로,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어쨌든 성경은 그가 심한 기근 때문에 애굽으로 내려갔다고 말합니다. 살기 위해 가던 길에서 그는 두려움을 마주한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움 때문에 엄청난 거짓말을 했습니다.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것입니다. 얼마나 두려웠으면 이렇게 말했을까 싶습니다.
어쨌든 성경은 아브람이 살던 땅에 심한 기근이 들었고, 그때문에 애굽으로 내려갔다고 기록합니다. 살기 위해 가던 길에서 그는 두려움을 마주한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움 때문에 엄청난 거짓말을 했습니다.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것입니다. 얼마나 두려웠으면 이렇게 말했을까 싶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때 아브람이 애굽으로 내려간 것을 ‘불순종'이라고 말합니다. 기근이 있었을 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땅인 가나안에 머물러 있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미래를 걱정하기보다 믿음으로 그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저는 반대로 생각합니다. 얼마나 기근이 심했으면 애굽으로 내려갔을까 싶습니다. 여러분, 아브람은 여행이 얼마나 힘들고 위험한 것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갈대아 우르부터 가나안까지 멀고 위험한 여행을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는 또다시 여행자(sojourner)가 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극심한 기근은 아브람에게 목숨을 건 결정을 강요했을 것입니다.
혹시 불순종이었다고 하더라도, 저는 애굽으로 내려가기로 한 아브람의 선택을 쉽게 비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우리도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이 최선이 아닐 때도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기에, 언제나 주어진 상황 속에서 한정된 지식을 가지고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이지 않습니까?

두려움과 선택

우리는 참 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하나님이 나를 어디로 부르시는지 “명확히”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원칙은 제시하지만, 점괘를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동쪽으로 가라”고 말해주면 얼마나 삶이 쉽겠습니까? 성경은 좁은 길로 가라고는 하지만, 어디가 좁은 길인지 그때 그때 알려주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의 선택이 어떤 관점에서 보면 좁은 길이고, 어떤 관점에서 보면 넓은 길입니다.
물론, 우리의 선택은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단어로 대치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결과론적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어디로 부르시는지 명확히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원칙은 제시하지만, 점괘를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동쪽으로 가면 좋은 일이 있을꺼야”라고 말해주면 얼마나 삶이 쉽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점쟁이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지만, 우리에게 선택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 앞에서 두려워합니다. 선택의 책임은 우리의 피부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손해를 보기도 합니다. 후회하기도 합니다. 그때 이런 선택을 했다면…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매일 선택하지 않으며 살 수 없습니다. 선택은 삶의 일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최선이 아닌 선택을 해야 할때도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기에, 언제나 주어진 상황 속에서 한정된 지식을 가지고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이 최선이 아닐 때도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기에, 언제나 주어진 상황 속에서 한정된 지식을 가지고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아브람은 살기 위한 선택을 했습니다. 심한 기근으로 그 땅에 머물 수 없었기에, 그는 어디로 가야할지 선택해야 했습니다. 가족들의 생명을 건 선택.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애굽에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먼 여행이었을 것입니다. 이 여행의 기간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성경은 기록하지 않지만, 아브람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죽음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라를 자신의 누이라고 속이기로 선택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브라함은 이전부터 그리고 이후에도 사라를 누이라고 속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창세기 20장에서도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사라를 누이라 속였습니다. 그리고 왜 그렇게 했냐는 아비멜렉의 질문에 창세기 20장 11절부터 13절까지에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11. 아브라함이 이르되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12. 또 그는 정말로 나의 이복 누이로서 내 아내가 되었음이니라
13. 하나님이 나를 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저는 이 말씀을 보고 놀랐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가나안으로 가라고 하셨던 그 때부터, 소명을 받고 믿음으로 순종한 그 순간부터, 사라를 아내가 아닌 누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충격적인 실체 아닙니까? 어찌 이럴 수 있었을까요? 사라가 도대체 얼마나 이뻤길래 이렇게 했을까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람을 이리도 치졸하게 만들었을까요?
창세기 23장에서 사라가 죽었을 때, 아브라함은 슬퍼하며 애통해 합니다. 그리고 굳이 은 사백 세겔을 주고 막벨라 굴을 사서 사라의 장례를 치릅니다. 이 당시에는 큰 장례를 치른 것입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며 마음이 먹먹했습니다. 남편이 보호해주지 않았던 여인. 사람들 앞에서 남편을 오라비라 불러야 했던 여인. 그리고 남편의 목숨을 위해 두 번이나 팔려 갔던 여인. 그것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아내가 처한 현실이었습니다. 아무리 성대한 장례를 치뤄준다 하더라도 이 여인의 마음에 있던 아픔은 씻겨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두려움은 한 여인의 인생을 이리도 비참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무리 성대한 장례를 치뤄준다 하더라도 이 여인의 마음에 있던 아픔은 씻겨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 여인의 인생을 이리도 비참하게 만든 두려움. 이 두려움은 지금 우리 삶에도 존재합니다. 선택의 순간마다 두려움은 우리를 공격합니다. 두려움은 우리 모두에게 찾아옵니다.
여러분, 두려움은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삶의 장애물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하도록 만드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감정: 두려움

두려움은 우리를 조급하게 만들고, 잘못된 선택을 하게 만듭니다. 가난에 대한 두려움이 불법을 선택하게 만들고, 처벌에 대한 두려움에 거짓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을 제시합니다. 어떤 이들은 두려움을 이겨야 한다고 용기를 강요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두려움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을 제시합니다. 어떤 이들은 두려움을 이겨야 한다고 용기를 강요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두려움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지금 저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하나님께 쓰임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동일하지 않습니까? 이곳, 미국 땅까지 와서 공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 위해서 무언가 꿈꾸는 것이 있어서 오지 않았습니까?
제가 어렸을 때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부를 마치는 시간이 다가올수록 듣는 말은 “학위 있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리가 별로 없다는 말입니다. 영향력있는 자리에 가서 무언가 능력을 펼칠 기회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밤을 지새며 고민하기도 하고, 이곳 저곳 알아보다 좌절하기도 합니다. 어떤 선택을 해야할지 몰라 답답한 마음이 참 힘겨웠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주먹을 끝까지 봐야 싸움에서 이기는거여!”
그래서 어떤 남자 학생들은 자신의 ‘깡'을 증명하려고 주먹이 눈 앞으로 날아와도 눈을 깜빡이지 않도록 연습 했습니다. 그러다보면 억지로 눈을 뜨고 버텨야 했습니다. 이렇게 말이죠.
저도 한 때 열심히 연습을 했었습니다. 잘 안되더군요. 그래도 열심히 연습했고, 어느 날, 억지로 눈을 부릅뜨고 깜빡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난 주먹도 두려워하지 않는 남자다!”
부끄럽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중2병 환자들이 하는 행동이죠.
그런데 크리스쳔들 중에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두려운데 두렵지 않은 척 하는 것이죠. 마음에 두려움이 찾아오는 상황인데 아닌척 해야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을 부릅뜨고 아닌척 합니다. 옆에서 보면 다 아는데, 억지로 눈꺼풀을 뜨고 있으려고 합니다. 그렇게해도 마음에 두려움은 남아있는데, 아닌척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시는데 아닌척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눈에 위험한 것이 왔을 때, 눈을 보호하기 위해 눈꺼풀을 만드셨습니다. 눈동자를 지키는 것이 주먹을 끝까지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눈을 감아야 정상입니다. 위험한데 눈이 안감기면 병원에 가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두려움은 이겨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두려움을 인정해야 합니다. 믿음이 좋은 크리스쳔도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은 거부할 수 없는 감정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성경에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라는 명령이 있잖아요!” 맞습니다.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입니다.
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세상을 두려워하라

그때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26.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27.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무서워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제자들이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아무 말도 안하고 배에 오르셨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두려움은 인간이 느끼는 자연적인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어도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믿음과 두려움은 반비례 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 두려움이 찾아온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입니다.
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아멘이라고 선포했습니다. 하지만,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있는것 아닌지 의심이 들었습니다. 미래를 불안해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새로운 생각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면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할 이유가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며 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려움 자체를 금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들이 많이 있지만, 이 말씀을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두려움을 느낄 것을 아시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까?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두려움 자체를 금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으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 속에서 뒷부분 말씀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무감정 인간이 아닌,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인간으로 살라고 명령하십니다. 두려움은 인간이 느끼는 자연적인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어도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모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26.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27.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26.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고 기록합니다. 제자들이 무서워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두려움은 인간이 느끼는 자연적인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어도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믿음과 두려움은 반비례 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 두려움이 찾아온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27.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그렇기에 믿음이 있어도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 두려움이 찾아온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두려움은 인간이 느끼는 자연적인 감정입니다. 믿음이 있어도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모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이 무서워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제자들이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아무 말도 안하고 배에 오르셨을지도 모릅니다.
10.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두려움은 인간이 느끼는 자연적인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어도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믿음과 두려움은 반비례 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 두려움이 찾아온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으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 속에서 하반절 말씀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됨이라!”
원죄를 범한 후, 인간이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수치심과 두려움이었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피해 숨었고,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겼습니다. 그리고 이후로 두려움은 줄곧 인류의 부패한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기에, 두려움을 느끼며 사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두려움은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삶의 무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삶이 아니라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을 꿈꿔야 합니다.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어쩌면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라 교만한 것일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두려워했습니다. 시편에 보면 다윗도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바울도 환난 앞에서 두려워 했습니다. 두려움은 항상 믿음의 사람들 곁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두려움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7장 5절과 6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으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 속에서 하반절 말씀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됨이라!”
5.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6.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말하는 믿음이 좋은, 또는 긍정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이어서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두려움이 많은 자이기에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위로는 내 연약함을 깨닫고 두려워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믿음이 있습니다.

두려움 속에서 자유한 삶

다시 아브람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브람은 두려움 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말했고, 권력자들에게 아내를 빼앗겼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남편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고, 비참한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아브람의 잘못된 선택으로 망가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비록 아브람이 잘못을 했지만, 하나님은 사라를 다시 아브람 곁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완전하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창세기 12장에서도, 창세기 20장에서도 하나님은 아브람의 연약함을 자신의 강함으로 바꾸셨습니다.
특히 R. C. Sproul은 창세기 12장과 출애굽 사건을 비교하면서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기근 때문에 애굽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 그 곳에서 겪은 고난의 시간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내리신 큰 재앙. 그리고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내보내는 장면은 놀라울 정도로 닮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연약함 까지도 자신의 큰 일을 보이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브람은 연약했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의 거짓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지금도 동일합니다. 우리는 두려워하며 이 땅을 살아가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완전한 뜻을 “우리를 통해” 이루고 계십니다.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우리는 정답을 찾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4지 선다형 객관식 문제에 답을 하는 것처럼, 우리 삶의 문제들에서 정답을 찾으려고도 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문제를 주지 않습니다. 선택하기 어려운 삶의 문제들이 언제나 우리를 찾아옵니다.
지금 제가 그런 상황에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이리저리 헤매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말씀을 보여 주셨습니다. 요나를 보여 주셨습니다. 마게도냐 환상 이야기를 보여 주셨습니다.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인생들에게 찾아오셔서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기에, 내가 그 분의 길 위에 있기에, 두려움 속에서도 자유할 수 있습니다. 내 삶은 나의 좋은 선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내 삶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외국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이 아님을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좋은 선택을 하고, 좋은 자리에 가고, 명성있는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의 어떠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이끄시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는 것이 내가 백점짜리 선택을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선택하는 족족 하나님 뜻에 딱딱 맞는 선택을 해야 쓰임받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는 것이 내가 백점짜리 선택을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선택하는 족족 하나님 뜻에 딱딱 맞는 선택을 해야 쓰임받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그런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 삶에는 4지 선다형 모범답안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양한 길을 열어주시고, 그 속에서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비록 우리가 최고의 선택을 하지 못했고, 모범적인 삶을 살지 못했을 지라도,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기드온이 되라

두려움 속에서 자유한 삶

그래서 저는 기드온과 같은 마음을 가지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300용사와 적을 물리친 기드온이 아닌, 타작마당에서 두려워하고 있는 기드온 말입니다.

당신의 삶에 하나님은 어떤 존재입니까?

아니, 그런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 삶에는 4지 선다형 모범답안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양한 길을 열어주시고, 그 속에서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비록 우리가 최고의 선택을 하지 못했고, 모범적인 삶을 살지 못했을 지라도,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이 하나님을 믿으시나요?
“주먹을 끝까지 봐야 싸움에서 이기는거여!”
우리는 이 질문을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무서워했기 때문에 질책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런 걸로 무서워하고 그래!”라고 혼내신 것이 아닙니다. 두려워한 것 자체를 잘못이라고 말씀하시는게 아닙니다. 그들의 믿음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애매한 관계인 것 같지만, 이는 매우 중요한 차이점입니다.

당신의 삶에 하나님은 어떤 존재입니까?

만약 제자들이 광풍에 배가 깨어지는데도 무덤덤하게
성경은 우리에게 담력 좋은 사람이 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현실과 동떨어져서 사는 사람이 되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긍정적으로 사는 사람이 되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두려움 속에서 주를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연약하지만, 하나님은 완전하시다 고백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실패할지라도, 하나님은 승리하신다 믿으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가져야 하는 믿음입니다.
마태복음 8:26,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래서 중학교 때 어떤 남자 학생들은 자신의 ‘깡'을 증명하기 위해 주먹이 눈 앞으로 날아와도 눈을 깜빡이지 않도록 훈련 했습니다. 그러다보면 억지로 눈을 뜨고 버텨야 했습니다. 이렇게 말이죠.
26.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여러분, 이 하나님을 믿으시나요?
억지로 눈을 부릅뜨고 눈을 깜빡이지 않았을 때, 속으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혹시 ‘어떻게든 되겠지' 생각하며 현실의 두려움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기도했으니까 다 잘 될꺼야' 생각하며 마음 속에 있는 불안함을 감추고 있지는 않습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다 되는거야'라고 최면을 걸고 있지는 않습니까?
마가복음 4:40,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27.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는 것이 내가 백점짜리 선택을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선택하는 족족 하나님 뜻에 딱딱 맞는 선택을 해야 쓰임받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그런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 삶에는 4지 선다형 모범답안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양한 길을 열어주시고, 그 속에서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비록 우리가 최고의 선택을 하지 못했고, 모범적인 삶을 살지 못했을 지라도,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여러분, 이 하나님을 믿으시나요?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은 어떤 존재입니까? 혹시 왜 실수했냐고 질책하는 분은 아니신가요? 아니면 최고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부담주는 존재는 아닌가요? 자신의 뜻을 찾아내지 못하면 벌주는 엄한 존재는 아닌가요?
많은 사람들이 다윗처럼, 바울처럼, 그리고 예수님처럼 살고 싶어 합니다. 믿음으로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치며, 남을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삶을 꿈꿉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과연 그런 삶일까요? 우리 모두 다윗처럼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게 살지 못하면 미운 아들, 딸이 되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다윗처럼, 바울처럼, 그리고 예수님처럼 살고 싶어 합니다. 믿음으로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치며, 남을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삶을 꿈꿉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 그런 뜨거운 심장을 가지고 사역의 길에 들어서지 않았습니까?

기드온 처럼, 도마 처럼

이제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기드온과 같이 되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300용사와 적을 물리친 기드온이 아닌, 타작마당에서 두려워하고 있는 그 기드온 말입니다. 세상이 무서워 숨었던 기드온. 하나님 말씀하셔도 믿지 못했던 기드온. 하지만, 그랬기에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했던 기드온. 우리의 삶은 다윗보다 기드온에 더 가깝지 않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의심했던 도마는 어떤가요? 어쩌면 우리의 모습은 도마와 같지는 않나요? 나를 구하려 뚫린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봐야 믿을 수 있었던 도마. 우리의 삶에 이런 의심과 두려움이 있지는 않나요?
적어도 저는 기드온 처럼, 도마 처럼 살 때가 많습니다. 찬양 인도하면서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그렇게 살 순 없을까" 참 많이 노래했는데, 정작 제 삶은 “기드온 처럼, 도마 처럼"일 때가 많습니다. 부끄러운 저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지난 주일, 저는 마태복음 28장 16, 17절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지상 대명령 바로 앞 말씀입니다.
16.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성경은 우리에게 담력 좋은 사람이 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현실과 동떨어져서 사는 사람이 되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긍정적으로 사는 사람이 되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두려움 속에서 주를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연약하지만, 하나님은 완전하시다 고백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실패할지라도, 하나님은 승리하신다 믿으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가져야 하는 믿음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문제를 주지 않습니다. 선택하기 어려운 삶의 문제들이 언제나 우리를 찾아옵니다.
지금 제가 그런 상황에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이리저리 헤매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말씀을 보여 주셨습니다. 요나를 보여 주셨습니다. 마게도냐 환상 이야기를 보여 주셨습니다.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인생들에게 찾아오셔서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기에, 내가 그 분의 길 위에 있기에, 두려움 속에서도 자유할 수 있습니다. 내 삶은 나의 좋은 선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내 삶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혹시 ‘어떻게든 되겠지' 생각하며 현실의 두려움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기도했으니까 다 잘 될꺼야' 생각하며 마음 속에 있는 불안함을 감추고 있지는 않습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다 되는거야'라고 최면을 걸고 있지는 않습니까?지금 제가 그런 상황에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이리저리 헤매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말씀을 보여 주셨습니다. 요나를 보여 주셨습니다. 마게도냐 환상 이야기를 보여 주셨습니다.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인생들에게 찾아오셔서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기에, 내가 그 분의 길 위에 있기에, 두려움 속에서도 자유할 수 있습니다. 내 삶은 나의 좋은 선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내 삶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집니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두려움을 온 몸으로 체감하며 사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 속에서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두려움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아직도 의심하는 자들도 있더라.” 예수님은 믿음 좋은 제자들에게만 지상 대명령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의심하는 자들에게도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주님이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이기에, 그들의 의심도, 두려움도, 연약함도, 능력 없음도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강함으로 바꿀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기드온 같고, 도마 같아도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자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 분이 바로 우리가 믿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사막에 길을 내시는 하나님, 어둠에 빛을 비추시는 하나님,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하나님! 그 분이 우리가 믿는 전능한 하나님 이십니다.
“난 주먹도 두려워하지 않는 남자다!”
인생의 중요한 선택 앞에서. 저는 요즘 이 하나님을 묵상합니다. 그리고 선택에서 자유하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영웅의 삶이 아닌, 하나님으로 기뻐하는 삶을 살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내가 무엇을 선택하든, 심지어 어떤 실수를 할지라도, 나를 변치 않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도 변치 않고 하나님 사랑하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무서워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제자들이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아무 말도 안하고 배에 오르셨을지도 모릅니다.
내 약함까지도 사용하시는 하나님. 비겁한 거짓말로 얼룩진 아브람에게 다시 사라를 데려오신 용서와 사랑의 하나님. 이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기에, 저는 선택 할 수 있는 용기를 얻습니다. 혹여나 내가 부족한 선택을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나의 최선의 선택이었다면, 하나님은 다시 회복시키실 줄 믿습니다. 내가 주를 위해 선택한다면, 그 길에 어려움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이루실 줄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무언가에 도전할 용기를 얻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중2병 환자들이 하는 행동이죠.
우리 이 찬양을 함께 묵상하며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연약할 지라도, 언제나 그 자리에 계신 하나님. 나의 두려움을 자신의 영광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두려움 앞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길 기도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많은 크리스쳔들이 이런 행동을 할때가 있습니다. 두려운데 두렵지 않은 척 하는 것이죠. 마음에 두려움이 찾아오는 상황인데 아닌척 해야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을 부릅뜨고 아닌척 합니다. 옆에서 보면 다 아는데, 억지로 눈꺼풀을 뜨고 있으려고 합니다.
찬양: 주님은 산 같아서
하나님은 눈에 위험한 것이 왔을 때, 눈을 보호하기 위해 눈꺼풀을 만드셨습니다. 눈동자를 지키는 것이 주먹을 끝까지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눈을 감아야 정상입니다. 위험한데 눈이 안감기면 병원에 가야 합니다. 두려움은 이겨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개가 날 가리워 내 믿음 흔들리려 할 때 나 주님께 나아가네
주님은 산 같아서 여전히 그 자리에 계셔 눈을 들면 보이리라 날 위한 십자가
주는 나의 도움이시며 주의 계획 영원하시네
주의 위엄 앞에 믿음으로 순종의 예배 드리리
주님께서 날 이끄시며 주가 항상 함께하시네
주의 사랑 안에 믿음으로 순종의 예배 드리리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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