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8.31.금요기도회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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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언약본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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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주해

וַיֹּ֤אמֶר אֱלֹהִים֙ אֶל־אַבְרָהָ֔ם 1/4
וְאַתָּ֖ה 1/8
אֶת־בְּרִיתִ֣י תִשְׁמֹ֑ר 1/2
אַתָּ֛ה וְזַרְעֲךָ֥ אַֽחֲרֶ֖יךָ 1/4
לְדֹרֹתָֽם׃1/2
( WTT)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1/4
그리고 너는1/8->강조표현
내 언약을 지킬 것이다(칼 미완)1/2 -> 내 언약이 동사 먼저 나온다. 이것은 언약을 강조한 표현
너와 네 이후 자손은1/4
대대로1/2-> 동사 생략은 일반적인 용법
- 여기서 다 단수다.
- 하나님께서는 다 따로 말씀하신다. 너도 지키고 네 이후에 올 자손도 지키라다.
- 마지막 세대를 통틀어란 표현(대대로)은 마치 영원히 와 같이 느껴진다.
- 하나님의 입장에서 영원을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대대로로 풀이한 느낌이다.
- 이 구절의 강조점은 ‘너’와 ‘네 자손’, ‘언약’이다.
- 특별히 자손 앞에 붙인 ‘이후’라는 부사에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
10 זֹ֣את בְּרִיתִ֞י אֲשֶׁ֣ר תִּשְׁמְר֗וּ בֵּינִי֙ וּבֵ֣ינֵיכֶ֔ם 1/4
וּבֵ֥ין זַרְעֲךָ֖ 1/8
אַחֲרֶ֑יךָ 1/2
הִמּ֥וֹל לָכֶ֖ם 1/4
כָּל־זָכָֽר׃1/2
( WTT)
나와 너희와 {너의 이후1/2} {너의 자손1/8}이 지킬(칼 미완) 언약은 {너희 {모든 남자(수컷)는1/2} 할례를 받는(니팔 부정사)1/4} 이것이다1/4
- 언약은 남자가 할례를 받는(수동태)것이다.
- 할례는 총 30번 쓰이는데 그중 20번이 니팔(수동)형으로 쓰인다.
- 그만큼 할례란 하나님앞에서 받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여기서 할례라는 언약의 표징을 제시한다.
- 이 언약의 표징이 나온 것은 무지개언약 이후 처음이다.
- 무지개가 하나님께서 하시는 표징이라면, 이것은 아브라함이 해야 하는 표징이다.
- 특별히 남자만 받으라고 하신다.
- 할례를 ‘하는’이 아니라 할례를 ‘받는’이다.
- 할례는 자신만 보는 것이다. 볼때마다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란 사실을 인식하게 한다.
- 이후 시내산 언약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은 행동의 할례를 명받게 된다. 이것이 십계명이다.
- 십계명은 주위사람에게 보여지는 것이다. 몸의 할례로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 언약을 받은 자란 것을 인식했다면, 행동의 할례는 주위 민족들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 는 마음에 할례를 행할 것을 명한다. 즉 몸의 할례->행동의 할례->마음의 할례로 이어진다.
- 그리고 에서 마음에 할례할 것을 말한다. 몸의 표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화된 마음 그것이 바로 할례다.
1 וּנְמַלְתֶּ֕ם 1/4
אֵ֖ת 1/8
בְּשַׂ֣ר עָרְלַתְכֶ֑ם 1/2
וְהָיָה֙ לְא֣וֹת בְּרִ֔ית 1/4
בֵּינִ֖י 1/8
וּבֵינֵיכֶֽם׃1/2
( WTT)
너희는 할례를 받아라(니팔 완)1/4
을(에)1/8
너희의 포피의 살1/2
그리고 (그것은) 언약의 징표가 될 것이다(칼 완)1/4
나와1/8
너희 사이에1/2
: 너희는 너희의 포피의 살에 할례를 받아라(완) 그리고 그것은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징표가 될 것이다(완).
- 여기서 복수는 아브라함과 그 집의 모든 자들과, 자손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보인다.
- 10절에서는 너희와 자손을 구별했다. 하지만 여기서 ‘너희’는 모두다 포함하는 것으로 보인다.
- 할례가 한번더 나온다. 할례를 어디에 하는지도 확실하게 나온다. 그리고 이 할례가 언약의 표시, 상징, 사인이 되었다고 말한다.
- 해석은 ~것이다 로 했지만 완료형이다.
- 10절에서는 ‘할례를 받는 것이 언약이다’라고 한다.
- 11절에서는 할례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한다. 즉, 포피에 할례를 받는 것이다.
- 할례라는 말이 계속 쓰인 것으로 봐서 아브라함의 때에도 할례라고 하면 무엇인지 알수 있을 정도로 보편적인 의식이었을 확률도 있다.
- 이것은 세계의 할례의 기원이 성경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시 행해지고 있고, 아브라함도 그 존재를 알고 있던 할례를 사인으로 삼으신 것이다.
12 וּבֶן־שְׁמֹנַ֣ת יָמִ֗ים יִמּ֥וֹל לָכֶ֛ם כָּל־זָכָ֖ר 1/4
לְדֹרֹתֵיכֶ֑ם 1/2
יְלִ֣יד בָּ֔יִת 1/4
וּמִקְנַת־כֶּ֙סֶף֙ מִכֹּ֣ל בֶּן־נֵכָ֔ר 1/8
אֲשֶׁ֛ר לֹ֥א מִֽזַּרְעֲךָ֖ 1/16
הֽוּא׃1/2
( WTT)
너희 모든 남자 중에서 (난지) 8일된 아들은 할례 받을 것이다(니팔 미완)1/4
너희 대대로1/2
집에서 난 자나1/4
모든 이방인으로부터 은으로 산 자든지 1/8
너희 자손이 아닐지라도1/16
그는1/2
: 너희 모든 남자 중에서 난지 8일된 아들은 너희 대대로 할례를 받을 것이다. 집에서 난 자든지 어떤 이방인으로부터 은으로 산 자든지 너희 자손이 아닌 자라도 그는 (할례를 받을 것이다)
- 다시 한번 할례의 방식과 조건을 구체화한다.
- 11절에서 할례는 포피에 행하는 것이라고 말하신다.
- 여기서는 이 할례는 난지 8일만에 행하는 것이라 다시 구체화 하신다.
- 즉, 언약의 할례는 다른 족속들과 달리 난지 8일만에 포피에 행하는 것이다.
- 왜냐면 할례는 사춘기에 성인식으로 하든지, 결혼 전 기념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 이속에서 난지 8일만에 하는 할례는 매우 특별한 것이다.
13 הִמּ֧וֹל׀ יִמּ֛וֹל יְלִ֥יד בֵּֽיתְךָ֖ 1/4
וּמִקְנַ֣ת כַּסְפֶּ֑ךָ 1/2
וְהָיְתָ֧ה בְרִיתִ֛י בִּבְשַׂרְכֶ֖ם 1/4
לִבְרִ֥ית עוֹלָֽם׃1/2
()
너의 집에서 난 아들[아이]와 반드시 할례 받을 것이다(칼 미완, 칼 부정사 강한 강조)1/4
네 돈으로 산 자는1/2
그래서 내 언약이 너희의 살 안에 있다(칼 완)1/4
영원한 언약으로1/2
: 너의 집에서 난 아이와 네 돈으로 산 자는 반드시 할례를 받을 것이다. 그래서 내 언약이 영원한 언약으로 너희의 살 안에 있을 것이다.
- 다시한번 할례를 말한다. 계속해서 할례가 빠지지 않는다.
- 집에서 난 자와 돈으로 산 자는 12절에서 했던 말이다. 여기서 ‘모든 이방인’은 빠졌지만 별 차이는 없다. 이방인에게서 산 자가 아니라 유대인에게서 샀다면 할례를 이미 받았을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에 사는 모든 남자는 그가 유대인과 관련이 있다면 모두다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언약이 영원한 언약으로 우리의 살에 있다는 표현이다.
- 살에 있다를 완료로 썼다는 것은 이것은 확정되어 바꿀수 없다는 뜻이다
- 하나님께서 할례를 강조하신다. 이것은 몸의 언약이다. 구별되었다는 사인이다.
- 우리가 계약서에 사인을 하듯이 우리의 몸에 사인을 해서 남기는 것이 할례이다. 이것은 언약서의 확정이다.
14 וְעָרֵ֣ל׀ זָכָ֗ר אֲשֶׁ֤ר לֹֽא־יִמּוֹל֙ אֶת־בְּשַׂ֣ר עָרְלָת֔וֹ 1/4
וְנִכְרְתָ֛ה הַנֶּ֥פֶשׁ הַהִ֖וא1/8
מֵעַמֶּ֑יהָ 1/2
אֶת־בְּרִיתִ֖י 1/4
הֵפַֽר׃ ס1/2
( WTT)
그러나 무할례자 그의 포피의 살을 할례 받지 않은(니팔 미완) 남자는1/4
그의 생명이 베어졌다[끊어졌다](니팔 완)1/8
그의 백성중에서1/2
내 언약을1/4
그가 깨뜨렸다(히필 완료)1/2
- 13절까지 할례가 어떤 것인지 자세히 설명한다. 할례가 포피에 하는 것이고, 그 대상은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다. 다른 민족이라도 이스라엘의 종이라면 예외가 아니다. 이스라엘과 관련이 생기면 그는 할례를 해야 한다.
- 베다, 끊다라는 말은 여기서 처음 나온다. 하지만 할례 자체가 포피를 베어내는 의식인 만큼 할례의 이미지와 할례받지 않은 자가 베어지는 것은 매우 유사한 이미지를 가진다.
- 할례, 자신의 포피가 베어지지 않은 자는 자신의 생명이 베어진다.
- 이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의 거룩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생명의 언약이다.
- 이는 먼저 하나님께서 생명을 걸고 하신 언약이며, 사람에게 주어진 것은 생명이 아닌 생명의 상징의 일부에 불과하다.
- 현재 아브라함은 후계의 문제로 고민중이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할례를 요구하신다. 이것은 그의 모든 고민을 하나님께 맡기라는 하나님의 요구가 아닐까?
- 또한 이것은 동시에 이름의 변화, 즉 정체성과 운명의 변화와 더불어 온다. 바로 온전한 하나님의 소유가 되라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왜 여자에게는 할례를 시행하지 않았는가? 그것은 남녀의 결합으로 하나의 몸, 살을 이루기 때문이 아닐까?
할례는 이스라엘과 이방을 구별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당시는 물론 그 이후에도 많은 민족들이 할례를 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오늘 보면 알다시피 언약에서 제외될 이스마엘도 일단 할례를 받는다. 할례는 스스로 기억하기 위한 사인이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기억하기 위한 표징이다. 왜냐면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보시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과 그 사람 1:1의 언약의 상징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아닌, 내가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다는 표징이다. 즉 이스라엘 한명 한명과의 언약이다. 그래서 예외는 허용되지 않는다.

설교

서론
우리는 지난 시간 아브람과 사래의 인간적인 한계를 보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세상의 방법을 따랐을 때, 어떻게 되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일하셨습니다. 하갈에게 역사하셨고, 이스마엘에게 역사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에게 축복하셨습니다. 그가 자라서 광야에 살겠지만, 그럼에도 그가 무사히 자랄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인지한 문제가 남아있습니다. 바로 아브람과 사래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인도가 무색하게도 아브람과 사래는 압제자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아내를 뺏아간 바로가 되어버린 아브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이스라엘을 고통스럽게 할 애굽이 되어버린 아브람과 사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을 통해 아브람과 사래에게 임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함께 살펴보며 우리의 부족함과 악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임하셔서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묵상하기를 원합니다.
본론
하나님께서 앞서 설명한 아브람과 사래의 그 모습을 어떻게 대응하셨습니까. 첫째,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정체성을 바꾸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임하셔서 아브람에게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름을 바꾸는 것입니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저질렀던 잘못에 대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13년간 침묵하셨습니다. 아브람을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긴 시간동안 침묵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브람에게 임하셔서 가장 먼저 하신 것이 바로 아브람의 이름을 바꾸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후 결코 아브람이란 이름을 적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아브람의 이름과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그의 정체성이 바뀌었습니다.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임하셨을 때, 아브라함이 기대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만약 내년까지 임하지 않았으면,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의 성년식을 진행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께 아뢰었을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의 관심사는 이스마엘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사라의 자식, 이삭을 말할 때, 아브라함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18절에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반응합니다. 어찌보면 너무나 황당한 반응입니다. 이 말은 마치 하나님께 명령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고 이스마엘이나 신경써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코 하나님께 할 태도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무말도 하시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죄악을 지적하지 않습니다. 그저 아니라고 하시며, 사라에게서 아들이 있을 것을 말하며, 그 이름까지 이삭, 웃음이라고 지으라고 하십니다. 즉, 이삭이란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나를 기억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개명은 아브라함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사라에게 이어집니다. 그래서 이삭이 나게 하십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아브람과 사래는 아직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을 이어나갈 자격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자격없는 자들을 바꾸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이름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리고 이름이 바뀐 자들, 그 정체성이 완전히 바뀐 자들에게서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을 이어갈 자를 나게 하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사래의 죄악을 지적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아브람과 사래는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들은 아브라함과 사라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다시 태어났습니다. 전처럼 이리저리 흔들릴 자가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똑같이 행하셨습니다. 그저 이름만 바꾸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덮으셨습니다. 우리를 자녀삼으셨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완전히 바꾸셨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우리는 죄를 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며 우리를 계속해서 인도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값주고 산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이 인식이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꾸짖고 벌주기 위해 오시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고 그리하여 그 은혜와 사랑으로 다시 살리기 위해 오십니다. 어떤 때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십니다. 현실적으로 말이 안되는 말씀을 하실 때도 있습니다. 답답한 기다림이 계속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믿고 기도할수 있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사래가 사라가 될 때까지 89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기를 원합니다. 오히려 더욱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없었지만,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믿으며 기다릴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기억하길 원하십니다. 무엇을 기억하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변화된 자란 사실을 기억하기 원하십니다. 이것은 어디에 나타납니까.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납니다. 이것이 바로 할례입니다. 오늘 본문은 9절을 제외하고 절마다 할례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10절에 할례를 받으라고 나옵니다. 11절에 포피를 베어라 말은 원문을 직해하면 포피에 할례를 받으라는 말입니다. 12절에는 할례 받을 대상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남자는 유대인이든지 종이든지 다 받으라고 말합니다. 13절은 다시한번 할례받을 대상을 말하며 할례를 받으라고 합니다. 14절에서는 할례 받지 않는 자는 백성중에서 끊어졌다. 라고 하십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께서 할례를 강조하실까요. 그것은 할례가 바로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할례는 누가 봅니까. 자기 자신이 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십니다. 남자라면 하루에도 몇 번이나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역시도 그 사람이 볼 때마다 함께 보실 것입니다. 이 사람이 나와 언약을 맺은 자임을 확인하실 것입니다. 할례는 남들과 구분되는 표시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과 그 사람만이 아는 표시입니다. 왜냐면 그당시 할례란 문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나안인들은 하지 않았지만 다른 민족들도 할례를 행했습니다. 어떤 민족은 성인식의 증거로서 할례를 행했습니다. 어떤 민족들은 결혼을 앞두고 신랑이 꼭 할례를 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게 하셨습니다. 다른 민족들이 성인식이나 결혼등 충분히 자라고 나서 받는 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그러나 할례는 다른 민족에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바로 하나님과 자신만이 아는 약속의 증거입니다. 지금이야 목욕탕에서 서로를 보지만 그 당시 다른 민족과 함께 목욕할 기회는 없었습니다. 특별히 물이 귀한 광야에서 목욕은 사치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사람 한사람과 관계를 맺기 원하십니다. 가장 먼저 약속의 증거로 나온 것이 바로 할례입니다. 그것도 영원한 언약의 증표입니다. 가장 내밀한 비밀을 공유하는 부부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각 사람과 가장 내밀한 비밀을 공유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결코 잊어버리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할례입니다. 그리고 이 할례는 점점 발전되게 됩니다. 하나님과 나만 아는 비밀의 약속이 할례입니다. 그리고 출애굽때는 모세언약을 통해 십계명으로 드러납니다. 그것은 민족 전체의 할례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구별되는 증표입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서와 신약에서는 마음의 할례로 이어집니다. 그저 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할례받아 주님의 마음으로 이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의 할례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육체의 할례는 쉽습니다. 물론 옛날에는 힘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난지 8일이라는 커서는 기억도 나지 않을 때 할례를 행합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은 마음의 할례는 대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것이 변했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할례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뜻대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며 한가지 의문점이 들수 있습니다. 왜 남자만 할례를 할까요. 할례가 하나님과 그 사람의 1:1의 관계라면, 그리고 그 할례를 통해 먼저 그 사람이 보고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할례를 보시고 그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합니다. 그렇다면 여자에게도 필요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오늘 본문은 남자에게만 한정짓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 사용된 남자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히브리어에서 말하는 사람이란 단어가 아닙니다. 동물의 수컷을 가리킬 때도 쓰이는 말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남자란 단어보다 수컷이라고 해석하는게 좀더 옳은 해석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석하면 뉘앙스가 너무 이상해지기에 남자라고 해석합니다. 왜 이렇게 남자에게만 할례를 한정짓고 있을까요. 여자는 언약의 대상이 아닐까요. 이것은 아니란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도 남자가 없으면 여자가 상속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있습니다. :24에는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룬다고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몸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바로 13절에 살이란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할례전에 남녀의 결합을 이미 전제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할례자의 관계와 가장 닮은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결혼한 남녀의 관계입니다. 서로 하나되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굳이 여자에게 할례란 짐을 지으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책임을 맡을 남자에게 할례를 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먼저 그 사람과 하나님 1:1의 관계가 되게 하셨고, 그를 통해 그 가정이 하나님과 언약과 사랑의 관계가 되게 하셨습니다. 바로 사랑으로 하나되는 관계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할례의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할례는 기억의 표입니다. 다른 말로 사인입니다. 우리가 계약서에 사인을 하듯이, 할례는 몸에 있는 사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왜 할례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왜냐면 이미 우리는 하나님과 한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하나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례입니다. 그리고 성찬입니다. 계약서의 사인정도가 아닌, 이제 계약조차 필요없는 부부관계, 부모자식관계가 되었기에 우리에게 할례는 필요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 인 것입니다.
결론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사래를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을 따라가던 두사람에게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정체성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할례란 표징을 주셔서 그들이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언제나 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보다 더한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도 누리지 못했던 그 축복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계약서를 적었다면, 우리는 부모자식관계, 부부관계가 되었습니다. 그 누구도 끊을수 없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죄를 묻고 벌을 내리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아버지의 심판은 우리의 회복을 위한 심판입니다. 썩은 부위를 도려내는 수술입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속해있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하나님께 반응하는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이 끝난 즉시 할례를 받았습니다. 모든 남자가 다 할례를 받았습니다. 절대 지체함이 없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계획이 필요하겠습니까. 할례를 받으면 적어도 일주일에서 보름은 제대로 일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도 숙련된 자가 수술할 때 일입니다. 그런 자를 수소문해서 구해야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런것도 없습니다. 그 즉시 실행에 옮겼습니다. 바로 이 아브라함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앞에 걸리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이 이날에 할례를 받은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앞에 망설이지 않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은혜앞에 망설이는 자가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럼에도 걸리는 것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기도하길 원합니다. 우리의 솔직한 심정을 아버지 하나님께 토로하길 원합니다. 믿고 싶지만, 그리고 따르고 싶지만,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걸리는 것들만 생각난다고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임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결코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아버지께서는 우리의 모든 사슬을 이미 끊으셨습니다. 그 하나님을 믿고 우리를 아버지 하나님앞에 내어드리며 기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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