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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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같이 하라
마음을 같이 하라
믿지 않는 사람들과 멍에를 같이 메지 말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살면서 여러 개의 그룹 안에 소속되어 살아갑니다. 참 많은 그룹들 속에 여러분 들어가 있죠? 단톡방 개수가..?
가족, 친척, 친한 친구들, 학교 선후배, 직장동료, 동아리모임 그리고 교회까지 우리는 다양한 그룹 안에 소속되어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런 그룹들은 또한 각각의 양식이 있어요. 에티켓이라고 할까요? 그룹마다 그룹원들에게 요구되는 자세가 다 있지요. 그런 것을 잘 준수해야 그룹원으로 잘 지낼 수가 있습니다. 가족들과 어울리는 것처럼 회사사람들과 어울릴 수는 없는 것이죠. 각각의 집단에서 요구하는 방식들이 다 다르죠.
다른 예로 5개가 더 나온다. 그것은 정의와 불의, 빛과 어둠, 그리스도와 벨리알,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라는 이 모임도 교회 안에서 지켜야 할 에티켓과 행동양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범주들을 넘어서 버리면 교회안에서의 생활은 어려워지는 겁니다.
여러분은 교회를 어떤 곳으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아마 이 질문에 대한 답이 하나로 일치하지는 않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교회가 어떤 곳인지에 대해서 교육받은 것보다는 아마 대부분이 경험적으로 체득한 것일 거 같아요. 그래서 다들 생각의 차이가 있을 것 같은데요. 여러분, 한 그룹으로서 그리고 한 공동체로서 교회에 대한 생각이 다양하다는 것은 건강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집단인가 라고 하는 공통된 가치가 우선되지 않은데 저마다의 생각이 다르다면 그것은 뭔가 수정이 필요한 것이죠. 순서가 바뀐 거예요. 공통된 가치를 먼저 세우고그 다음에 다양성을 논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통해서 공통된 가치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는 어떤 곳인지, 교회에서는 어떤 양식으로 서로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어떻게 짝하냐? 어떻게 사귀냐? 어떻게 화합하냐? 어떻게 더불어 함께 차지할 몫이 있는가? 어떻게 일치하냐?
이 접속사를 무시하면 안된다. 바로 앞 문단.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상종도 하지 말라는 의미인가? 그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
자, 오늘 말씀을 보면 1절에 여러분에게 익숙할 수 있는 것들이 나옵니다. 뭐냐면 교회에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예요. 1절에 뭐라고 되어 있나요?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어떻게 죄
빌1:
우리는 여러가지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 그리고 집단은 소속원들이 처해야 하는 양식이 있다. 가족들과 어울리는 것처럼 회사사람들과 어울릴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로 모였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떤 곳이어야 하나? 아마 이런 저런 생각들이 있을 것이다. 아마 다 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럴 수 있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그것은 한 집단으로서 체계가 잡히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는 다른 건 몰라도 성경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행해야 하는 곳이 아닌가? 그렇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서 교회는 어떤 곳이어야 하는지 생각해보자.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여기 보면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그것의 구체적인 모습, 바울이 빌립보서를 쓸 때의 상황 속에서 보자면 그것은 대적하는 자들의 공격 속에서도 교회는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이다.
죄와 죄인을 구분해야 한다. 심판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 우리가 하는 것은 죄를 멀리 하고, 죄인을 긍휼히 여기는 것.
오늘 1절에 보면 여러가지 교회 안에서 우리가 서로에게 주고 받을 수 있는 행동들이 나온다.
심판은 오직 하나님께
복음에 합당하게 산다는 것은 복음과 어울리게 사는 것. 복음과 어울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
그리스도 안에 권면
사랑의 위로
성령의 교제
긍휼과 자비
이런 것들이 나옵니다. 여러분들 교회 안에서 이런 것들을 경험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교회는 적어도 세상보다는 따뜻하고, 배려가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아마 이 생각에 많은 청년들이 동의를 할 것 같아요. 교회에는 정말 이런 것들이 필요합니다. 세상보다 격려하는 말이 넘치고, 그리고 세상보다 위로의 손길이 더 있어야 하고, 그리고 따뜻하고 좋은 관계들과 그런 마음이 교회에는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참 마음이 아픈 것은 교회라고 해서 꼭 세상보다 더 나은 공동체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예요. 교회 안에도 세상과 같이 다툼과 갈등이 있고, 개인주의가 있고 이기적인 모습들이 있다는 거죠. 부인할 수 없는 우리의 민낯입니다. 그런 면에서는 교회도 사실 세상과 다를 바가 없어 보여요.
자, 그렇다면 우리가 고민해보게 됩니다. 지금 1절에 이야기하는 이런 좋은 모습들을 우리의 특징으로 이야기 해도 되는가? “우리 교회는 이런 곳입니다. 권면이 있고, 위로가 있고, 교제가 있고, 긍휼과 자비가 있습니다.” 라고 당당하게 뭔가 세상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겠는가? 라는 거죠. 우리도 완벽하지 않은데, 그것이 우리 공동체의 특별한 모습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라는 거죠.
그런데요, 오늘 본문을 보면 가정법을 쓰고 있습니다. 1절 끝에 ‘있거든’ 이라고 말하지요? 그러니까 1절 전체가 이런 뜻입니다.
“여러분의 교회에도 이런 좋은 모습들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모습들이 있다면, 그런 모습들이 당연히 없지는 않을텐데 라고 말하는 거죠. 그러면서 2절에 이어서 뭐라고 말하냐면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교회 안에 그런 좋은 모습들이 있다면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여러분의 교회에도 교회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할 모습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좋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런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보다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습니다. 지금 이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더 본질적인 것, 교회가 정말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뭐요? 마음을 같이하는 것. 어떻게 마음을 같이 합니까?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는 거예요. 마음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교회로 모여서 아주 좋고 선한 행동들을 서로에게 합니다. 1절에 정리되어 있던 것처럼 서로를 사랑하고 잘 대해주는 모습이 우리 안에 있어요. 그런데, 그 행동들의 동기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냥 내가 잘 해주고 싶어서, 나에게 잘 해 주니까 나도 잘 해주고 싶은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교회는 그렇게 좋은 행동과 미소를 지어야 하는 곳이라고 교육을 받아서 그런 것입니까? 여러분, 회사사람들보다는 교회사람들에게 좀 더 잘 해주시나요? 그 이유가 뭐냐는 거예요?
전에 어떤 분이 그러더군요. 교회는 가면무도회장이라고. 서로 가면을 쓰고 가식적으로 서로를 대하고 만나는 거라고. 누가 그렇게 비관적으로 교회를 말하더라구요. 그런데 마음이 좀 불편했지만,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지는 이해가 되더라구요. 그래, 교회에 그런 모습이 아예 없지는 않지 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서로 관계를 맺고 교제를 할 때에, 이 공동체를 이루어 갈 때 그 동기가 무엇이냐 라는 거죠. 그것이 단순히 우리의 감정과 우리의 느낌이 주가 되어서 우리가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면, 그 관계는 겉으로는 괜찮게 보이지만, 사실 불안함 가운데 있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감정과 느낌, 우리의 경험이 우선이 되면 교회인 우리는 세상에 다른 집단들과 별반 차이 없는 모습이 될 거예요. 왜요?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것들은 이기적이고, 불안하고, 분위기와 상황에 휩쓸리는 경향이 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면 교회는 교회다움을 잃어버릴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1절에 나오는 그 모습들을 우리의 특징이라고 말하기가 부끄러워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무엇이 정말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마음을 같이 하라. 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 서로가 가지고 있는 감정과 느낌이나 경험이 주가 되는 것이라, 하나의 마음으로 서로 관계를 맺으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어떻게 하라고 되어 있나요?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여러분, 여기에 보면 몇 개의 행동지침이 나옵니다.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아라
남을 낫게 여겨라
다른 사람을 돌보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것들의 핵심은 사실 하나입니다. 그것은 겸손하라는 거예요. 여러분, 겸손이라는 것은 나는 못해요. 그렇게 의식적으로 빼는 것이 아니라 나에 대한 관심을 끄고 타인에게 관심을 돌리는 것이다. 남에게서 나은 것을 발견하는 것, 다른 사람의 장점을 발견하고, 다른 사람 안에 무엇이 빛나고 있는지를 발견하는 것, 그것이 겸손입니다. 그래서 겸손한 사람은 칭찬을 잘 하는 사람이예요.
무슨 일을 하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여기서 이 다툼은 그냥 싸우지 말고 친하게 잘 지내라는 뜻이 아니라 이기심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기심은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고, 다툼을 유발합니다. 허영도 마찬가지죠. 허영은 다른 말로 하면 자만심입니다. 이기심과 자만심은 사촌지간입니다. 여기서 겸손이 필요한 것이지요.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옆에 있는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여라.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음을 같이 하라. 그것이 교회 공동체의 본질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겸손함으로 귀결됩니다. 겸손함을 가지고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라는 거죠. 그런데 그런 가르침의 바탕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 가장 중요한 기초는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이제 5절부터 시작됩니다. 교회인 우리가 왜 마음을 같이 하는 것이 필요하고, 왜 겸손함이 그렇게도 중요한지 그 기초를 이루는 이야기가 이제 나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2:5-
어떤 마음을 품으라고 말합니까?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교회는 그 초점이 늘 예수님께 맞춰져 있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는가?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예수님이 무엇을 보였주셨는가?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것들이 교회에게는 초미의 관심사여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교회다움을 잃어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가 되시기 때문에. 교회는 그의 몸이라 골로새서에서 말했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늘 예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이 하신 것이 무엇인가? 우리 청년부를 위해서 예수님이 하신 것이 무엇인가? 우리 셀을 위해서 예수님이 하신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잊으면 안되요. 우리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머리로 두는 교회이기 떄문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그 마음으로 하나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 있었던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2:
여기 나오는 말들이 좀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본체라는 것은 하나님의 형태라는 말인데, 하나님의 모습이라는 그런 말도 됩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라는 것은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모습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모습은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도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말이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하나님은 우리의 감각과 사고로 파악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시라는 거예요.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분이세요. 그런데 아무튼 그런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 예수님도 지니고 계셨다는 겁니다. 그냥 아주 쉽게 이야기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아닙니까? 그러면 하나님과 동급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그 말입니다.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과 동급이셨다. 하나님의 모습을 가지고 계셨다. 우리 예수님이요..
그런데 어떻게 하십니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대요. 하나님과 같은 자리에 있는 것을 포기하신 거예요.
빌2:3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만약 대통령의 아들, 딸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우리 나라같은 곳에서 그 위세가 얼마나 어마어마하겠습니까? 우리는 안되봐서 잘 모르지만 상상해 볼 수는 있습니다. 나 대통령 아들이야. 나 대통령 딸이야 라고 할 때 권력이 뭔지, 정치가 뭔지 아는 사람들은 그 앞에서 얼마나 벌벌 기겠습니까?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늘 대통령의 자식들은 문제가 많았던 거 같긴 합니다. 아무튼요.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이다. 여러분, 그 위세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권세와 힘과 능력을 가지셨고, 말씀으로 세상을 만드신, 만군의 여호와이신 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런데 예수님은 그 모든 권리를 포기하셨다는 거죠. 하나님의 아들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포기하셨습니다.
본우리의 눈에 보여지고, 우리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육체의 옷을 스스로 입으시고 이 땅 가운데 오신 겁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세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가 나 자신에 대한 관심을 멈추고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교회의 머리되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하늘의 모든 천사들이 아마 그 장면을 의아하게 쳐다봤을 거예요.
그리고 7절에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권리를 포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 예수님은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형체를 가지십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던 분이 종의 모습을 스스로 선택하신 겁니다. 아들이신 분이 종의 신분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고통과 슬픔과 한계를 느끼며 살아가는 한없이 연약한 존재가 되셨습니다. 자신이 창조한 여자의 태 안에 스스로 들어가셔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처음부터 우리와 똑같이 시작하신 겁니다. 그리고 우리 예수님은 계속해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음의 자리까지 자기를 낮추십니다. 자신을 돌보지 않으십니다. 너무나도 사랑하는 그 하나님 아버지와의 단절까지 경험하십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어떻게 그 자리까지, 하나님의 아들께서 그 골고다 언덕까지 내려오실 수 있었던 것일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태를 가지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예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겸손하신 그 분, 예수님의 마음이 하늘과 땅 사이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 모두를 살리시려고 그분은 기꺼이 하늘 보좌를 박차고 일어나 우리의 죄로 인해 부대끼고 악취가 나는 천한 이 땅 가운데 그렇게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있었기에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겸손하신 마음, 그 삶이 있었기에 우리가 지금 이곳에 교회로 모여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마음은 우리의 근간을 이루는 기초이며, 이 공동체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품고 우리의 권리를 포기하면서 나를 향했던 그 시선을 다른 누군가에게 돌릴 줄 아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 모두를 위해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그것만이 우리의 동기여야 합니다.
겸손하셨던 그 분,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던 그 분은 다시 가장 높은 곳으로 올림을 받으셨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2:9
우리 예수님은 높임 받으셔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높임 받기 합당하십니다. 그래서 교회의 사명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이 세상 속에서도 예수님은 높임받으셔야 합니다. 모든 무릎이 예수의 이름앞에 엎드려져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입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교회가 존재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높이기 위해서, 높여진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서 우리가 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전할까요? 어떻게 하면 다시 높여지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사람들도 알도록 할 수 있을까요?
. 모든 무릎이 예수의 이름앞에 엎드려지는 것, 그것이 교회의 꿈이며 기도여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하나예요.
교회인 우리에게 이 마음이 있다면, 이 마음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면, 그래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처럼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낮추는 그 삶을 우리도 재현해 낼 수 있다면, 이 세상은 우리를 통하여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던 그 신비한 마음에 매료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높임을 받은 그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며 예배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 있잖아요? 그것이 뭡니까? 그리스도의 예수의 마음요.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우리의 모든 관계 속에 예수님의 마음이 스며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그것으로 하나가 되어 서로를 낫게 여기고, 남을 돌볼 줄 아는 그런 겸손한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시키는 거예요.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질 때, 예수님은 세상 가운데서 높임을 받으실 것입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던 그 신비에 세상이
것, 그것이 교회의 꿈이며 기도여야 합니다.
이제 여러분 11월 11일이 되면 총회가 열립니다. 그래서 임원들이 새로 뽑히면 그 후에 리더들도 새롭게 선발될 거예요. 그리고 내년에는 셀도 다 바뀌고, 공동체 안에 크고 작은 변화들이 좀 있을 겁니다. 그래서 이제 총회가 한달 정도 남았는데요, 우리 지금 리더들과 임원들은 이 한달동안 공동체를 위해서 기도하기로 마음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도 기도하셔야 되요.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교회로 부르신 거예요. 앞에서 활동 많이 하는 사람들만의 교회가 아닌 거예요. 우리 모두가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이 공동체를 품고, 이 교회를 품고, 그리고 그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서로 서로 깊은 교제와 관계 가운데 세워져야 하는 거예요.
겸손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곳. 그래서 한 사람이 살아나고, 한 사람이 치유되고, 한 사람이 다시 높여진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공동체. 그런 공동체를 꿈꾸며 마음을 같이 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세상으로 하여금 예수님의 마음을 보여줄 수 있는 그런 공동체가 되어서 다시 높여지신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빌2:
그런데 오늘 본문에도 이런 행동들만 교회를 특징짓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이렇게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보다 더 중요한 본질적인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빌2:
그렇게 좋고 선한 행동과 모습들 속에서 우리는 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 그냥 좋은게 좋은 것이 아니다. 1절에서 이야기한 모습 이면에는 이런 원칙이 필요하다. 같은 마음, 같은 사랑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내가 그냥 좋아서 잘 해주고, 내가 그냥 마음이 가서 좋게 대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의 감정과 우리의 느낌이 주가 되어 관계가 맺어지면, 그 관계는 겉으로만 좋은 모습이 될 수 있다. 감정을 지키기 위해, 느낌을 깨지 않기 위해, 우리는 눈치만 보거나, 아니면 그 반대일 수 있다는 것이다.
회사사람들에게 하는 것보다 교회사람들에게는 좀 더 잘 해주고 있나? 그 동기가 중요하다.
교회 생활에서 필요한 양식은 그런 것이 아니다. 회사사람들에게 하는 것보다 교회사람들에게는 좀 더 잘 해주고 있나? 그 동기가 중요하다. 그 동기가 모두 같아야 된다는 것이다. 오늘 말씀에서.
마음을 같이 하라. 마음을 같이해서 한 마음, 한 사랑을 가지고 3절과 4절같이 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마음은 구체적으로 어떤 마음인가? 교회로 모인 우리 모두가 함께 가져야 하는 이 마음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2: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다.
예수의 마음. 그것이 어떤 것인가? 교회는 늘 예수님께 시선이 집중되어 있어야 한다. 예수의 마음이 무엇인지, 그의 삶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교회의 시선은 예수님께 향해야 합니다. 교회의 가장 큰 숙제는 어떻게 하면 우리의 머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겠는가?
그렇게 나아간다면 교회는 교회다워진다.
바울이 설명하는 것을 들어보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2:6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감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예수님
나를 본 자는
교회에서의 생활 양식은 이것 하나면 충분하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즉 그리스도 예수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다면 우리 공동체는 참된 교회의 모습, 오늘 본문 여러 곳에 나오고 있는 교회의 모습들, 1절과 3절, 4절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게 빛날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란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권리를 포기하는 것. 달라고 손을 내밀기 보다는 주려고 손을 내미는 것.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라. 지금 여기서 바울이 설명하는 말을 잘 들어보라.
하나님의 본체, 즉 하나님의 모습을 지닌 분이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단다. 하나님의 모습을 지닌 자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겸손한
우리는 인정받기를 원한다. 사랑받기를 원하고 관심받기를 원한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그 당연한 것이 한 개인으로서는 당연히 그럴 수 있는 것이지만, 관계를 맺는 다수의 사람들 속에서는
또 골로새서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는 것은 그들과의 관계를 끊으라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죄인의 삶을 살아가는데 그것에 편승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