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003 수요예배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29 viewsNotes
Transcript
1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2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3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4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5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내가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맺은 열매니라
6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7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
8 또 주 안에서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에게 문안하라
9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
10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에게 문안하라
11 내 친척 헤로디온에게 문안하라 나깃수의 가족 중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하라
12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13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14 아순그리도와 블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와 및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들에게 문안하라
15 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또 네레오와 그의 자매와 올름바와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16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1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2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3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4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5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내가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맺은 열매니라
6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7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
8 또 주 안에서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에게 문안하라
9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
10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에게 문안하라
11 내 친척 헤로디온에게 문안하라 나깃수의 가족 중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하라
12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13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하늘이 열리며 -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교회
하늘이 열리며 -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교회
개천절이다. 개천절은 하늘이 열린날 이라는 뜻이다.
단군이 하늘에서 내려와 나라를 설립했다고 설명한다.
하늘에서 내려와 세운 나라가 고조선이라고 설명하듯이,
하늘이 열리며 세워진 것이 ‘교회'이다.
1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하늘이 열리면서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모습'이었다.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내려오셨다.
그리고 예수님께 임하셨다.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하늘이 열리고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스데반'은 [본다]
베드로가 본 하늘이 열리고 - 네 귀가 매어진 큰 보자기
베드로가 본 하늘이 열리고 - 네 귀가 매어진 큰 보자기
11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베드로는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 안에 온갖 부정한 것들과 정결한 동물들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하늘이 열리고 성경기자들이 본 것은
거룩한 하나님이었다.
그런데, 베드로가 본 것은
하나님이 부정하다고 말씀하셨던 부정한 짐승들과 먹을 수 있는 짐승들이 섞여있었다.
하나님은 그것들을 잡아 먹으라고 명령하신다.
베드로는 당황했다.
하나님께서 부정하다고 말씀하신 것을 먹을 수 없습니다.
내가 정하다고 말한것을 부정하다고 말하지 말라.
하나님은 왜 그런 명령을 베드로에게 제시하셨을까?
오늘 본문은 그 명령의 결과물.
오늘 본문은 그 명령의 결과물.
이 단원에서 나오는 인물들의 이름이
우리에게 흥미를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초대 교회의 상황을 이해한다면
굉장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고대 세계에는 사람의 부류에 따라 일정한 이름이 주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김',’이'씨는 왕족의 성씨였다.
지금은 그것이 전혀 의미가 없지만,
[성씨]는 귀족을 뜻하는 가문의 이름이었다.
그 외에는 정말 흔한 그냥 ‘이름'이 주어졌다.
우리 나라 성의 절반 이상은 족보 없는 성이라는 건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고대 세계에도 그랫다.
더글라스 무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사회적 신분 사다리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부유한 사람들은 자녀에게 어떤 종류의 이름을 붙여 주고, 노예나 노예 출신의 사람들은 다른 종류의 이름을 붙여주어야만 했다.
우리가 오늘 보고 있는 이 긴 인물들의 나열,
또는 집안의 나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몇가지 특징들을 발견하게 된다.
여성들
먼저는 ‘여성'들이 꽤 많이, 상당하게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대 세계에서 굉장히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여인들은 어떤 ‘증인'의 역할도 할 수 없었다. 증인의 역할을 인정받지 못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에게 각별한 주의로 인사 할 것을 요청한다.
먼저 뵈뵈다.
1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자매 뵈뵈다.
그에게 합당한 예절로 영접하고 도와줄 것을 요청한다.
그녀는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소개되는데, 더 정확한 명칭은 [집사]다.
우리가
8 이와 같이 집사들도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9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10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맡게 할 것이요
11 여자들도 이와 같이 정숙하고 모함하지 아니하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12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
집사의 직분을 준다는 것을 상기해본다면,
바울이 남성 중심 사상을 가졌다는 것이 절대적으로 틀렸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녀는 바울의 보호자로서 돕는자, 후원자였다.
또 다른 여성은 브리스가, 브리스길라 이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바울과 텐트 메이커 일을 같이 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글라우디오스 황제의 유대인 로마추방령 때 쫓겨났다가 바울을 만나
복음을 접하고 함께 사역했다.
우리가 당시에 먼저 기록하는 사람이 조금 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상기해본다면,
남자인 아굴라보다 여성인 브리스길라가 먼저 등장하는 것은 의아하다.
또 한 여성을 주목해볼 수 있는데, 유니아 이다.
7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
이 여인은 바울의 친척이다.
그런데 이 여인을 설명해주는 말이 심상치 않다.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자' 이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이 ‘사도'들에게 조차 존중히 여겨진다?
쉽지 않은 이야기이다.
2. 권력자들
이 편지에는 단순히 개인에게만 편지하는 것은 아니다.
10
10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에게 문안하라
아리스도불로는 헤롯 아그립바의 동생과 동일인물일 것으로 본다.
그 이름은 흔한 이름은 아니었다.
게다가 아리스도불로는 48년이나 49년에 사망했을 것으로 알려져있기 때문에
아리스도불로 개인에게 인사하고 있는게 아니다. 오히려 그 가문에 속해 있는 노예들일 가능성이 높다.
바울의 친척인 헤로디온은 분명 헤롯가문에서 봉사하는 자유인이었을 것이다.
헤로디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스라엘 왕족과 그 밑에 자유민들, 노예들 중에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헤로디온은 분명 헤롯가문에서 봉사하는 자유인이었을 것이다.
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나깃수는 글라우디오스 황제를 섬기던 자유인인데, 글라우디오스 사후에 네로로부터 자살을 요구받은 유명인이었다.
그 집 사람들 중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3. 노예들
드루배나, 드루보사는 아마 노예였거나 노예에서 풀려난 여자들이었을 것이다.
암블리아, 우르바노 역시 노예나 자유인이었을 것이다.
정리하면
로마 교회는 모든 사회계층과, 빈부와 이방인-유대인 모두를 아우르는
[용광로]같은 곳이었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네 면의 보자기
다시한번 사도행전으로 돌아와서
하늘이 열리며 네 귀퉁이가 묶인 보자기가 내려오는 것을 사도바울이 본다.
그리고 그 안에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들이 담겨져 있다.
구약에서 ‘네 면'에 대한 묘사는 굉장히 주의깊게 보아야 하는데,
많은 부분에서 [성전]을 보여준다.
에덴 동산은 네 강으로 둘러쌓여있다.
당연히 성소는 ‘네면' 반듯함으로 이루어져있다.
솔로몬 성전중의 지성소는 가로, 세로, 높이가 동일한 정육면체로 이루어져 있다.
9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사방으로부터 불어오는 생기는
온 우주를 감싸시는 성령님에 대한 표현으로써
우주적 성소에 대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면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를 재건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보여주신다.
네 귀퉁이가 묶인 보자기가 하늘이 열리며 내려온 것은
어쩌면 새로운 교회의 탄생을 보여주었는지 모른다.
교회는 우리의 개인적이고 사적인 취미생활로 만들어진 공동체가 아니다.
교회는 세속적인 이윤과 자기 목적을 가지고 들어오는 곳이 아니다.
교회는 단순히 개인의 위로와 안식을 얻기 위해서 오는 곳이 아니다.
교회는 [하늘이 열림]으로 내려온 곳이다.
고대에 하늘이 열린다는 것은 ‘심판'이다.
그 심판이 인간에게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 떨어졌다.
자신을 찢으셔서 아들을 보내셨고, 성령을 보내셨고,
교회를 세우셨다.
그 교회 안에 있는 인간군상이 어떤가?
오늘 우리가 길게 읽은 문안하라는 말에 뒷붙여진,
당시에 인정받지 못하고, 소외된 아웃사이더들 뿐만 아니라
사회와 경제를 움직이는 가문에 속한 영향력 있는 자유인들.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혼재되어있는,
그야말로 다양한 이야기들이 한꺼번에 담겨져 있는 곳이다.
그곳을 하나님은 ‘교회'로 부르셨고,
구별하셨고, 거룩하게 하셨다.
그런데 이 교회가 분열되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반목했다.
서로 인정하지 못했고, 사랑하지 못했다.
로마서를 쓰는 이유는, 이들이 [하나 됨], [연합함]을 경험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해서다.
그 이유가 그리스도가 [하나되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 죄인된 자들을, 용서할 수 없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납하셨기 때문에
확신을 가지고 [하나되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교회는 참 다양한 사람이 많다.
슬픔이 있는 사람. 여전히 핍박 받는 사람. 건강이 좋지 못한 사람.
가난한 사람. 억울한 사람. 힘이 없는 사람.
또 똑똑한 사람. 능력있는 사람.
부자인 사람. 능력을 과시하는 사람.
이들이 한데 모이면, 정말 하나가 될 수 있는가?
서로 사랑할 수 있는가?
사도 바울이 요구하는 것처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할 수 있는가?
우리 교회는 어떤가. 정말 서로 사랑하는가.
지역을 사랑하는가.
서로 잘 알고 나누고 겸손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간증하는가.
변화된 삶을 나누고 있는가.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문화 가족 이야기가 나왔다.
혹시 다문화 가족 아이들이 있냐고 질문하자
요즘 반에 한두명씩은 있다고 한다.
그 아이들 왕따시키는 거 죄라고 눈을 크게 뜨고 이야기하자
아이들이 당황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그냥 뭘해도 싫은 아이.
아무 잘못도 없는데 싫은 아이.
그 아이들이 원래부터 그랬을까?
십중팔구 그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왕따 당하는 아이들의 특징이 있다.
그런 행동을 한다.
주변 아이들이 싫어하는 행동을 한다.
그런데 그 행동을 하는 이유는
처음부터 그래서가 아니라 단순히 적응하지 못해서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때부터 아이들은 그 아이가 하는 모든 행동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그래서 왕따가 된다.
교회 안에는 왕따가 없을까?
교회 안에도 은밀한 왕따가 있다.
적응하지 못하는 교우들을 내버려두는 것도 은밀한 따돌림이다.
이런 교회 안 은따들이 얼마나 많은가.
교회를 하나되지 못하게 만드는 또 다른 예로 ‘꼰대'가 있다.
또 다른 예로 ‘꼰대'가 있다.
꼰대 또는 꼰데는 본래 아버지나 교사 등 나이 많은 남자를 가리켜 학생이나 청소년들이 쓰던 은어였으나,[1][2][3] 근래에는 자기의 구태의연한 사고 방식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이른바 꼰대질을 하는 직장 상사나 나이 많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의미가 변형된 속어이다
꼰대들은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믿으며,
꼰대들은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믿으며,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진심'과 신념을 담는다.
그래서 남이 생각하는 것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그래서 남이 생각하는 것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일단 무시하고 본다. 깔본다.
작가인 정문정씨는
‘꼰대는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공감능력의 문제다' 라고 지적한다.
나도 꼰대다.
어떻게 안되는 정말 위험한 꼰대다. 젊은 꼰대다.
[공감능력]에 문제가 있다.
우리 정말 잘 공감해주는가?
요즘 젊은 세대의 이야기, 아이들의 이야기, 생각들
쉽게 지적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꼰대 소리 듣게 된다.
그런데 교회가 꼰대다.
세상을 향해서 얼마나 지적질을 많이 하는지
가짜 뉴스를 퍼트리는 ‘에스더'라는 희한한 단체를 만들기도 한다.
에스더에서 나르는 이야기가 다 틀렸냐?
그렇지 않다. 진실도 있고, 경각심을 가져야 할 이야기들도 있다.
그런데 진실 속에 가짜를 희석하면 가짜다.
사람들에게 공감되지 않는 이야기를 하면 꼰대가 될 뿐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적응하시기 위해
친히 우리에게 내려오셨음을 기억하자.
다문화 가정 아이들을 사랑하지 못하는 아이들처럼,
가짜 뉴스에 현혹되어 꼰대짓을 하는 어른들처럼 하지 말고
공감하고 입맞추고 사랑하자.
교회는 부정한 동물들과 먹을 수 있는 동물들이 혼재해 있는 곳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미로슬라브 볼프라는 교수가 포용과 화해에 대한 강연을 하고 있었다.
이 교수는 크로아티아 사람이다.
당시에 크로아티아계, 보스니아계, 세르비야계 사람들이 모여 살던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는 극심한 대립을 겪고 있었다
세르비아는 크로아티아 사람들을 학살했다.
‘체트닉'이라고 불리는 악명높은 세르비아 전사들은
사람들을 강제 수용소에 몰아넣고, 여자들을 강간하고, 교회를 불태우고, 도시를 파괴했다.
미로슬라브 볼프 교수는
그리고 우리가 누구인지 잊지 않기를.
로마서가 우리에게 강조하고 싶은 이야기는
우리가 용서받은 자이기 때문에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의로운 자로 인침받았기 때문에 의롭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하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이 악을 밟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끌어안으셨듯이 우리도 원수를 끌어안아야 한다고 주장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위르겐 몰트만이라는 그의 스승이자 신학계의 거성과 같은 교수가 이렇게 질문했다.
“하지만 당신은 ‘체트닉'을 끌어 안을 수 있습니까?
그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기록한다.
나는 체트닉을 끌어안을 수 있을까?
무엇이 그러한 끌어안음을 정당화해 줄까?
나는 어디에서 그럴만한 힘을 얻을 수 있을까?
그것이 한 인간으로서, 크로아티아 인으로서 어떤 영향을 미칠까?
대답을 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았다.
“아니오, 못할 겁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로서 나는 그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긴장속에 있다.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교회는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몸을 찢으심으로 하늘에서 내려온 공동체이다.
그러나 이 안에 모인 사람들은
때로 낯설고, 어색하고, 밉고, 이해되지 않으며
정결한 사람들과 부정결한 사람들이 한데 모여있다.
이들을 사랑하고 끌어안아 용납하는 것은
절대 쉽지 않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그럴 수 있어야 한다.
루포
루포
우리가 아는 것처럼,
우리 주님이 십자가를 지셨을 때- 이미 체력적으로 힘이 다하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더이상 지실 수 없는 상태에 있었을 때-
군인들은 지나가던 한 사람을 억지로 끌어다가 십자가를 끌게 만든다.
그 사람의 이름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구레네 사람 시몬이다.
자기가 원해서 십자가를 진 것이 아니다.
로마 병사가 시켜서였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대신 지고가는 아버지 구레네 사람 시몬을 본 두 아들이 있었다.
한 아이는 알렉산더고, 다른 아이의 이름은 루포다.
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막 16.21
마가복음은 ‘로마'에 쓴 편지로 알려져 있다.
오늘 본문에 이 구레네 사람 시몬의 아들의 반가운 이름이 등장한다.
13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억지로 십자가를 진 시몬-
하지만 그것을 끝까지 지켜본 루포와 그 어머니는
교회에 특별한 인물이 되어 있었다.
우리의 십자가를 서로 져준다면,
우리의 십자가를 서로 져준다면,
그것이 설령 자의가 아니라 억지 순종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설령 자의가 아니라 억지 순종이라 할지라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끌어안을 수 없는 사람을 끌어안아준다면,
끌어안을 수 없는 사람을 끌어안아준다면,
우리 주님의 교회는
우리 주님의 교회는
특별하게 세워져가기 시작할 것이다.
특별하게 세워져가기 시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