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5.금요기도회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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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압과 암몬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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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해석

30 וַיַּעַל֩ ל֙וֹט מִצּ֜וֹעַר וַיֵּ֣שֶׁב בָּהָ֗ר וּשְׁתֵּ֤י בְנֹתָיו֙ עִמּ֔וֹ 1/4
כִּ֥י יָרֵ֖א 1/8
לָשֶׁ֣בֶת בְּצ֑וֹעַר1/2
וַיֵּ֙שֶׁב֙ בַּמְּעָרָ֔ה 1/4
ה֖וּא 1/8
וּשְׁתֵּ֥י בְנֹתָֽיו׃1/2
( WTT)
롯이 소알로부터 올라왔고(칼 바익톨) 그 산에 살았다(칼 바익톨) 그의 두 딸도 그와 함께 (였다)1/4
왜냐면 두려움1/8
소알에 사는 것이(칼 부정사)1/2
그래서 그 동굴 안에서 살았다(칼 바익톨)1/4
그와1/8
그의 두딸이1/2
: 롯은 소알에서 올라와 그 산에서 살았다. 그의 두 딸도 그와 함께 (살았다). 왜냐면 소알에 사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동굴 안에서 그와 그의 두딸이 살았다.
3 וַתֹּ֧אמֶר הַבְּכִירָ֛ה אֶל־הַצְּעִירָ֖ה 1/4
אָבִ֣ינוּ זָקֵ֑ן 1/2
וְאִ֙ישׁ אֵ֤ין בָּאָ֙רֶץ֙ לָב֣וֹא עָלֵ֔ינוּ 1/4
כְּדֶ֖רֶךְ כָּל־הָאָֽרֶץ׃1/2
( WTT)
큰 딸이 작은 딸에게 말했다(칼 바익톨)1/4
우리의 아버지는 늙었다(칼 완)1/2
그리고 그 땅에는 사람[남자]가 없다 우리위에 들어 올(칼 부정사)1/4
모든 땅의 길을 따라1/2
: 큰 딸이 작은 딸에게 말했다. “우리 아버지는 늙었고 그 땅에는 모든 땅의 길[세상 법도,풍습]을 따라 우리위에 올 남자가 없다 -> 모든 땅의 길은 풍습, 법도를 가리키지만, 길이란 물리적인 공간으로 해석도 가능할 것같다. 지금 거주하는 동굴은 사람이 살만한 곳이 못된다는 한탄이기도 하다.
32 לְכָ֙ה נַשְׁקֶ֧ה אֶת־אָבִ֛ינוּ יַ֖יִן 1/4
וְנִשְׁכְּבָ֣ה עִמּ֑וֹ1/2
וּנְחַיֶּ֥ה מֵאָבִ֖ינוּ1/4
זָֽרַע׃1/2
( WTT)
오라(칼 명령) 우리가 우리의 아버지에게 술[와인]을 마시게 하자(히필 미완)1/4
그리고 그와 함께 눕자(칼 바익톨)1/2
그래서 우리의 아버지로부터 살게 하자(피엘 미완)1/4
후손이1/2
: 오라(칼 명령) 우리가 우리의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해서 그와 함께 눕자 그래서 우리의 아버지로부터 후손을 보존하자.
- 아버지의 의향은 전혀 들어가 있지 않다. 소돔의 사건과 똑같다.
- 보존하자는 살자는 뜻이다. 과연 살아있음이란 무엇인가.
- 이런 딸의 모의는 롯이 평소에 술을 잘 마셨고 슬쩍 권하면 만취하도록 마실 사람임을 보여준다.
- 왜 하나님께서는 후손을 허락하셨을까?
3 וַתַּשְׁקֶ֧יןָ אֶת־אֲבִיהֶ֛ן יַ֖יִן 1/4
בַּלַּ֣יְלָה ה֑וּא 1/2
וַתָּבֹ֤א הַבְּכִירָה֙ וַתִּשְׁכַּ֣ב אֶת־אָבִ֔יהָ 1/4
וְלֹֽא־יָדַ֥ע בְּשִׁכְבָ֖הּ 1/8
וּבְק֗וּמָֽהּ׃1/2
( WTT)
그녀들이 그들의 아버지에게 술[와인]을 마시게 했다(히필 바익톨)1/4
그날 밤1/2
그리고 그 큰 딸이 들어왔고(칼 바익톨) 그녀의 아버지와 누웠다(칼 바익톨)1/4
그러나 그는 그녀의 눕는 것(칼 부정사)과 알지 못했다(칼 완)1/8
그녀의 일어남을(칼 부정사)1/2
: [바로] 그날 밤 그녀들이 그들의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했고 그 큰 딸이 들어와 아버지와 누웠으나 그는 그녀의 누음과 일어남을 알지 못했다.
- 무능함.
- 술에 취함
34 וַֽיְהִי֙ מִֽמָּחֳרָ֔ת 1/4
וַתֹּ֤אמֶר הַבְּכִירָה֙ אֶל־הַצְּעִירָ֔ה 1/8
הֵן־שָׁכַ֥בְתִּי אֶ֖מֶשׁ 1/16
אֶת־אָבִ֑י 1/2
נַשְׁקֶ֙נּוּ יַ֜יִן גַּם־הַלַּ֗יְלָה וּבֹ֙אִי֙ שִׁכְבִ֣י עִמּ֔וֹ 1/4
וּנְחַיֶּ֥ה מֵאָבִ֖ינוּ 1/8
זָֽרַע׃1/2
( WTT)
그 다음날이었다(칼 바익톨)1/4
그 큰 딸이 그 작은 딸을 향해 말했다(칼 바익톨)1/8
보라 어젯밤 내가 누웠다(칼 완)1/16
내 아버지와1/2
오늘밤에도 술을 마시게 하자(히필 미완) 그리고 너는 들어가(칼 명령) 그와 누워라(칼 명령)1/4
우리의 아버지로부터 보존하자(칼 미완)1/8
씨[후손]을1/2
: 그 큰 딸이 그 작은 딸을 향해 말했다. “보라, 어젯밤 내가 내 아버지와 누웠으니 오늘밤[그날밤]에도 우리가 술을 마시게 하자 그래서 너가 들어가(칼 명령) 그와 누워라(칼 명령) 우리의 아버지로부터 후손을 보존하자.
3 וַתַּשְׁקֶ֜יןָ גַּ֣ם בַּלַּ֧יְלָה הַה֛וּא אֶת־אֲבִיהֶ֖ן1/4
יָ֑יִן 1/2
וַתָּ֤קָם הַצְּעִירָה֙ וַתִּשְׁכַּ֣ב עִמּ֔וֹ1/4
וְלֹֽא־יָדַ֥ע בְּשִׁכְבָ֖הּ1/8
וּבְקֻמָֽהּ׃1/2
( WTT)
그리고 [바로] 그날밤 또한 그녀들의 아버지에게 마시게 했다(히필 바익톨)1/4
술을1/2
그리고 그 작은 딸이 일어나(칼 바익톨) 그와 함께 누웠다(칼 바익톨)1/4
그러나 그는 그녀의 누움을(칼 부정사) 알지못했다1/8
그리고 일어남을(칼 부정사)1/2
: 그리고 [바로] 그날 밤도 그녀들의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했다. 그리고 그 작은 딸이 일어나 그와 함께 누웠지만 그는 그녀의 누움과 일어남을 알지 못했다.
- 들어가다가 대신 쿰(일어나다)가 쓰였다. 연속되는 사건앞에 쓰이기도 한다. 작은 딸은 약간 끌려가는 느낌이다.
- 롯은 술에 인박혀있었다. 아마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란 충격적인 경험이 그에게 트라우마가 되지 않았을까.
- 만약 롯이 정신을 차리고 있었으면 그의 두 딸도 이러지 않았을 것이다.
36 וַֽתַּהֲרֶ֛יןָ שְׁתֵּ֥י בְנֽוֹת־ל֖וֹט1/2
מֵאֲבִיהֶֽן׃ ( WTT)1
그래서 롯의 두 딸이 임신했다(칼 바익톨)1/2
그녀들의 아버지로 인해1
: 그래서 롯의 두 딸은 그녀들의 아버지로 인해 임신했다.
- 계속해서 ‘그녀들의 아버지’란 말이 반복된다.
37 וַתֵּ֤לֶד הַבְּכִירָה֙ בֵּ֔ן 1/4
וַתִּקְרָ֥א שְׁמ֖וֹ 1/8
מוֹאָ֑ב 1/2
ה֥וּא אֲבִֽי־מוֹאָ֖ב 1/4
עַד־הַיּֽוֹם׃1/2
( WTT)
그 큰 딸이 아들을 낳았다(칼 바익톨)1/4
그리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칼 바익톨)1/8
모압이라고1/2
그는 모압의 아비(이다)1/4
오늘날까지1/2
: 그 큰 딸이 아들을 낳아서 그의 이름을 모압이라고 불렀다 그는 오늘날 모압의 조상이다.
- 모압의 뜻은 아버지로부터이다. 딸이 이름을 그렇게 짓는걸 보고 롯은 뭐라했을까. 정말로 몰랐을까.
38 וְהַצְּעִירָ֤ה גַם־הִוא֙ יָ֣לְדָה בֵּ֔ן 1/4
וַתִּקְרָ֥א שְׁמ֖וֹ1/8
בֶּן־עַמִּ֑י 1/2
ה֛וּא אֲבִ֥י בְנֵֽי־עַמּ֖וֹן 1/4
עַד־הַיּֽוֹם׃ ס1/2
( WTT)
그리고 그 작은 딸 그녀도 아들을 낳았다(칼 완)1/4
그리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칼 바익톨)1/8
벤암미라고1/2
그는 암몬의 자손의 아버지다1/4
오늘날까지1/2
: 그리고 그 작은 딸, 그녀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벤암미라고 불렀다. 그는 오늘날 암몬 자손들의 조상이다.
- 벤암미의 뜻은 나의 백성의 아들이다. 우리에게 이해되는 뜻은 ‘우리 민족의 자손’이다.
1차 작성
롯도 나이가 먹고 아브라함도 나이가 먹었다. 그에 대한 여자의 반응도 비슷하다. 사라는 자신도 나이가 먹어서 희망이 없다고 했고, 두 딸은 그러니까 우리가 아버지로부터 후손을 보자는 결론이 나온다.
이차이는 누가 말을 시작했는가 이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께서 자손을 언급하지만, 롯의 두딸은 자신의 시야에서 자손을 언급한다.
30절
롯은 뭐가 그리 두려웠을까. 하나님께서는 소알을 멸하지 않는다고 하셨고, 멸하지 않으셨다. 롯의 기억속에 그 사건이 트라우마로 남았을까?
동굴은 호렙산 이후 엘리야가 도망쳤던 곳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을 멸망에서 구한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를 믿지 못했다.
롯의 두딸에게 소돔과 고모라는 세상, 세계 그 자체 였던거같다. 왜 온땅에서 자신들과 결혼할 자가 없다고 했을까. 그들은 살아있지만 벌써 죽은 것과 같다. 생각도 그렇고 하는 행동도 그렇다. 사라의 여성의 기능이 죽었지만, 하나님께서 살리셨다. 이들의 여성의 기능은 살아있지만, 실질적으로 죽은 자였다.
그리고 노년의 롯은 너무나 비참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두 딸이 술을 권했을 때 너무나 쉽게 넘어가 만취하도록 마신다. 그에게는 희망이 없다. 24:1에 아브라함의 노년에 하나님의 복이 넘쳤던 것과는 너무나 비교된다.
롯은 죄악의 자손을 남기지만, 아브라함은 노년에 만사에 복을 받는다.
롯의 두 딸은 소돔에서 롯이 자신들을 이용했던 대로 이용한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자신을 제물로 바치려는 아버지에게 순종한다.
롯의 딸에게 온 세상은 소돔과 고모라였다. 분명 다른 곳이 있었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고, 알려하지도 않았다. 그들의 모든 시선은 소돔과 고모라를 향했다. 이것은 롯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왜 두려움에 빠졌을까.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경험했음에도 왜 소알에서 나왔을까. 이것은 그의 딸과도 관련이 있다. 무서운 심판, 그 속에서 아내를 잃은 것만이 롯의 머리속에 각인되었다. 그리고 그의 두 딸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심판만이 남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할수 있는 것은 어떻게든 후손을 만들어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원초적 욕구밖에 없었다.
롯은 동굴로 간뒤 술로 하루하루를 보낸것 같다. 보통 만취하도록 마시고 다시 다음날 또 만취하도록 마시지는 않는다. 그런데 두딸의 그런 수작에 너무 쉽게 넘어간 것을 보면, 동굴에 온 다음 평소에도 술을 자주 마셨을거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희망을 잃은 이들에게 남은 것은 원초적 욕구밖에 없다. 롯은 술로 근심을 잊는 것이고, 두 딸은 그런 아버지를 이용해 자신의 욕망, 후손을 남기려는 욕망을 채우는 것밖에 없었다.
이 에필로그의 가장 큰 목적은 이것이다. 살아남은 롯이 끝까지 하나님앞에 가지 않았을 때, 그의 두딸과 그의 후손들도 하나님앞에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라의 불임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롯의 두딸의 상황적 불임을 타파하기 위해 그들은 근친상간이란 수를 쓴다.
물론 두 딸의 행동은 어찌보면 대단하다. 아버지가 무너지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재산은 다 날아갔다. 그 상황에서 두 딸은 자신들이 배운 범위내에서 자신들이 할 수있는 최선을 다한다.
그래서 더 안타깝다. 이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었다면, 하나님의 지혜가 있었다면, 이 결말은 완전히 달랐을지도 모른다.
두 딸의 행동은 밤에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심판이 모든 사람이 볼수 있게, 아침에 행해졌다면, 이들은 어두운 동굴속에서 그것도 밤에 이루어진다.
어디서 이런 많은 술을 구했을까? 모압은 와인이 많이 나기로 유명했고, 이와 관련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은 우습게도 롯이 소알에서 나올 때, 술은 많이 챙겨왔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33절과 35절에서 다시 ‘야다’가 나온다. 이 알다는 매우 중요하다. 롯은 하나님도 모르고, 심지어 두 딸조자 모르는 자로 나온다. 그리고 알고 난 후 어떻게 했는지도 나오지 않는다. 비슷한 상황에서 노아는 자신의 아들들이 자신에게 어떻게 했는지 알았다. 그리고 그에 따른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롯은 알지 못한다.
그는 그가 초대한 손님이 누구인지도 알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심지어 집에서 키운 딸도 어떤지 모른다.
nicot상 모압이란 이름은 ‘아버지의 씨’나 ‘아버지로 말미암아’가 더욱 나은 해석이다. 대놓고 자신의 부정을 말한다.
창세기 19장은 전체가 심판으로 가득차있다. 그런데 드디어 나온 생명의 탄생이다. 하지만 그 생명도 죄악에 얼룩진 생명이다. 즉 19장은 죄악으로 가득차있다.
벤암미라는 이름도 ‘내 동족의 아들’이란 뜻이다.
왜 성경은 롯의 반응을 적고 있지 않을까? 분명 두 딸의 배가 불러오는 것을 롯은 보았을것이다. 그저 아무 생각없이 약혼한 남자의 자식이라고 생각했을까. 두 딸이 아이의 이름을 이렇게 짓는 것을 보면서도 외면하고 있었을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왜 움직이지 않았을까? 이후 아브라함은 롯을 찾아가지 않는다. 조카로 인해 소돔과 고모라를 두고 하나님과 논쟁이라 할만한 대화까지 한 아브라함이다.
롯이 찾아가지 못하는 것은 이해가 된다. 무슨 염치로 찾아가겠는가.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왜 롯에게 손을 내밀지 않는가. 아브라함이 롯에게 손을 내밀었다면, 모압과 벤암미의 운명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모압과 벤암미가 태어나기까지 10개월의 시간이 있었다. 그동안 아브라함이 찾아갔다면, 모압과 암몬은 이스라엘의 근심거리로 남았을까?
2차 작성
서론
롯의 후일담
노아나 유다의 후일담과는 롯의 후일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시간은 롯과 아브라함의 차이점
이번 시간은 롯과 아브라함의 공통점
본론
롯의 방관
알지못함
롯은 시종일관 알지못하는 자
소돔과 고모라를 찾아온 천사들을 알지못했다.
끝까지 심판의 진행을 알지 못했다 - 지체함
소돔 사람들을 알지못했다. - 인정받지 못함
두 딸들을 알지 못했다. - 죄악된 자손
딸의 계획을 알지 못했다.
딸의 상태를 알지 못했다.
롯보다 더 두려움
절망
세상이 무너짐
의지할 곳이 아무것도 없음 - 모든 것 상실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 모든 일의 근본
두려움
두려워했다. - 하나님을 알지못함과 연속됨
술취했다. - 모든 것을 잊으려 했다.
연속된 만취상태
결과 : 방관
동굴로 도망쳐 어둠속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동굴의 밤까지 술을 마셔 만취했다.
딸들의 행동을 알지 못했다.
그후의 반응이 나오지 않는다.
임신해서 아들을 낳을때까지 10개월
두 딸이 한번에 임신했을까?
물론 성경은 한번의 사실만을 다루고 있다.
한번에 했다해도 10개월
배가불러오는 동안 롯의 반응은 나오지 않는다.
노아나 유다가 며느리 다말의 부정을 봤을 때의 반응과는 전혀 다르다.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한채 살았다.
그는 살아있는 시체였다.
그의 두 딸도 살아있는 시체였다.
그의 두 딸은 살아있고 자손을 낳을수 있었지만, 삶의 가장 기본적인 목적이 사라져버렸다.
희망이 사라졌다.
사라의 태는 죽었지만, 하나님께서 살리셨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면 죽은자도 살고 함께하지 않으면 산 자도 죽는다.
2. 아브라함의 방관
소돔과 고모라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함
하나님과 대면함.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들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과 논쟁함
소돔과 고모라의 구원을 위함
거기 사는 사람때문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조카 롯을 위함이라는 것이 더욱 타당함.
하나님의 심판을 목격함.
산위에서 하나님처럼 목격함
그가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움직이셨음
하나님과 함께 일함.
하지만 조카 롯을 한번도 찾아가지 않음.
우리라면 우리의 친척이 그렇게 되었다면 찾아가지 않을까.
물론 그럴수도 있음.
사랑이 아닌 이득의 관계라면 그럴수 있다.
서로에게 이득만을 찾는 관계
롯과 아브라함은 한번 갈라선 관계.
그럼에도 지금까지 아브라함의 행동과는 상반됨
아브라함의 행동
롯을 위해 간구함(반복, 간략히 언급)
어쩌면 내할일 다했다고 생각했을수도 있다.
아브라함의 방관
소알로 도피한 롯에게 찾아가지 않음
아브라함이 있는 곳에서 소알까진 2-3일 거리
찾으려면 충분히 찾을수 있는 거리
특히 유일하게 도망친 롯의 행적은 분명 찾기 쉬웠을 것임
만약 아브라함이 그즉시 사람이라도 보내어 롯을 찾아 구제했다면, 두딸의 행동을 없었다.
즉시는 아니더라도 움직였다면, 아이를 낳기까지 10개월의 시간, 아이들이 자라기까지의 시간동안이라도 움직이고 교류를 나누었다면
그들에게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신 위대하신 하나님을 가르쳤다면
모압과 암몬이 이스라엘이 근심으로 남았을까?
아브라함의 방관은 이스라엘의 근심과 걱정, 후환으로 남았다.
우리는 방관하는가?
결론
두사람의 방관의 결과 두 민족이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두사람, 두딸, 두천사, 두민족으로 이어지는 이 2명의 의미를 기억하기 원한다. 어떤 2명인가. 하나님을 믿는 1명과 믿지 않는 1명이다. 만약 2명이 믿음으로 하나되었다면 암몬과 모압은 이스라엘의 우방이 되어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이어갔을 것이다.
설교
서론
오늘 본문은 롯의 후일담, 다른 말로 에필로그입니다. 그런데 롯의 후일담은 노아의 후일담과 유다의 일화와 매우 비슷합니다. 하지만 그 둘과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왜 이런 차이점이 나타나는 것일까요. 그에 대한 답으로 우리는 오히려 롯과 아브라함의 공통점을 보려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두 사람은 똑같은 자세를 취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며 하나님앞에서 살아갈 수있는 우리가 되길 소원합니다.
본론
두 사람의 공통점이란 바로 방관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사람은 무엇을 어떻게 방관했을가요.
먼저 롯의 방관을 살펴보겠습니다.
롯은 멸망이후 모든 것을 놓아버린 듯한 태도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의 이런 방관의 원인은 바로 알지 못함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보았듯이 롯은 시종일관 알지 못하는 자였습니다. 두 천사가 신분을 몰랐고, 의도를 몰랐습니다. 심판이 일어남을 알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두 천사가 가자고 했을 때, 갔다면, 롯은 그런 파괴의 한복판에 서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롯은 오랜 세월을 소돔에서 살았지만 소돔사람들을 알지 못했습니다. 롯이 정말로 소돔사람이 어떤지를 파악했다면 그는 자신을 소돔인이라고 여기고 소돔인처럼 살려는 무익한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난 본문에서 봤듯이 성경은 롯을 소돔에 거주하는 자라 평했지만, 소돔인들에게 롯은 그저 나그네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롯은 그의 두 딸 마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두 딸에게 그대로 당합니다. 무엇을 당합니까. 롯이 소돔에서 두딸에게 했던 행동입니다. 그는 자신의 손님으로 온 천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두 딸을 소돔인에게 마음대로 하라고 넘깁니다. 그의 행동에는 자신의 두 딸의 의견이나 생각을 존중하는 모습은 전혀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그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오늘 본문에서 두딸은 철저히 아버지를 이용합니다. 롯이 그랬듯이 거기에 롯의 의견이나 생각은 전혀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양쪽 다 서로를 성적으로 이용해서 자신의 생각을 성취하려 했습니다. 차이점이라면 롯은 그러고도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했고, 두 딸은 자신의 뜻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롯은 그의 두딸보다 더 무지한, 정말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그의 무지는 두딸의 계획을 알지 못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 이전에 두 딸이 어떤 상태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두 딸의 나이는 이제 15세 전후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나오듯이 롯은 나이가 많이든 노인입니다. 이렇게 경험이 많은 그가 두려움에 떨고 동굴로 도망쳤다면, 두 딸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두딸의 입장에서 생각해봅시다. 졸지에 살던 집과 재산들을 잃어버렸습니다. 결혼을 약속했던 정인을 잃어버렸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어버렸습니다. 그 극한의 상황에서 겨우 살아나왔습니다. 우리로 따지면 총알이 바로 앞을 스쳐지나가고 폭탄이 뒤에서 떨어지는 상황입니다. 이제 겨우 안정을 찾나 싶더니 아버지가 무섭다고 산에 있는 동굴로 끌고 갑니다.
두딸은 어떨까요. 정상적인 생각을 할 수있는 상태라 생각되십니까. 이 두 딸의 상태는 31절에 나옵니다.

온 세상의 도리를 따라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이 땅에는 없으니

두 딸의 입장에서 온 세상은 멸망했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도리는 소돔과 고모라와 함께 멸망했습니다. 그래서 절대 땅에서 우리의 배우자를 찾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절망에 찬 상태입니다.
하지만 롯은 그런 두 딸의 상태를 알지 못합니다. 엄마를 잃고, 배우자를 잃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두 딸의 상태를 알지 못합니다.
반대로 너무나 쉽게 술취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롯은 이틀 연속으로 만취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평소 술을 잘 마시지 않았다면 불가능합니다. 술을 입에 잘 대지 않은 사람이 이렇게 할까요. 그랬다면 두 딸이 이런 계획도 세우지 못했을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평소에 그랬는지, 아니면 멸망을 경험한 후 술독에 빠졌는지 몰라도, 롯은 술을 즐기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 개정) 『독주는 죽게 된 자에게, 포도주는 마음에 근심하는 자에게 줄지어다』
라는 말씀처럼 롯은 아무것도 모른채 술에 빠져있었을 거란 추측도 해볼수 있습니다.
롯은 아무것도 모른채
롯은 두려워했습니다. 무엇을 두려워했을까요. 어쩌면 멸망의 경험이 그에게 트라우마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마치 전쟁을 경험한 병사들이 정신적인 고통을 호소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의 두려움은 알지못함, 무지에서 왔습니다. 어떤 무지입니까. 바로 하나님을 알지 못함에서 왔습니다.
하나님은 롯을 어떻게 구원하셨습니까. 정말 온 정성을 기울여서 구원했습니다. 롯이 지체하자 잡아끌었습니다. 소알에 들어가기 전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란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롯의 요청에 따라 소알을 멸망에서 제외합니다. 즉, 소알은 롯에 의해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뜻을 존중한 하나님을 모릅니다. 롯은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 기준에서 두려워하고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방관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방관합니까. 딸들을 방관합니다.
이틀동안 두 딸의 행동은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임신한 다음 아이는 그냥 낳습니까. 임신기간동안 배가 불러옵니다. 여러가지 케어를 해야 합니다. 10개월이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동안 정말로 롯이 몰랐을까요? 아이를 낳는 타이밍만 봐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유다가 며느리 다말의 배가 불러오자 어떻게 했습니까. 바로 조치를 취하지 않습니까. 그에 비해 롯의 반응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특히 아이를 낳고 두딸이 지은 이름을 보십시오.
모입이란 이름의 뜻은 ‘아버지의 씨’라는 뜻입니다. 보통 ‘아버지로부터’라고 알려져있지만, 직설적으로 말하면 ‘아버지의 물’이 가장 적합한 뜻입니다.
벤암미는 ‘내 동족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여기서 동족이 누가 남았습니까. 바로 롯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롯의 두 딸은 이렇게 롯에게 자신의 아들이 누구로 말미암아 태어났는지 노골적으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롯의 반응은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저 이 두 아들이 이스라엘의 오랜 골치거리였던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란 사실만을 담담히 적고 있습니다.
롯의 모습은 방관정도가 아닙니다. 동굴에 들어가 술만 마시고 있는 그의 모습은 살아있는 게 아닙니다. 정말 살아있는 시체란 표현이 딱 맞을 것입니다.
그의 두 딸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딸은 살아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영혼은 이미 죽었습니다. 두 딸은 아직 젊고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죽었습니다. 그들은 육체는 살아있지만 그들의 영혼은 죽어버렸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이와는 완전 반대인 한 여인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늙어서 육신이 죽은 것같은 여인입니다. 바로 사라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생명을 생산할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임하셨을 때, 그 상실이 축복으로 변했습니다.
롯의 두 딸의 타의로 상실되었습니다. 자신들은 젊고 건강해도 자신들의 생각에 결혼할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두 딸은 자신이 배운 소돔의 관습대로 롯에게 행했습니다. 그들의 상실은 죽음만도 못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지 일하시지 않느지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어느쪽입니까. 말할 것도 없이 사라의 쪽입니다. 우리가 죽은 것같아도 하나님과 함께라면 우리는 살아있습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아버지께서 우리와 함께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잘 살아도,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보혈이 없다면, 우리는 롯의 두 딸과 다를바 없는 자들입니다. 롯의 두 딸은 그 급박한 중에서도 먹고살 재산을 챙겼습니다. 그토록 만취할 정도로 마실 술이 있었다는 것이 증거입니다.
하지만 그 술, 재산은 없느니만 못한 것이 되었습니다. 차라리 없었다면, 그들은 아브라함에게라도 찾아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함께 하나님을 알아가며 새로운 꿈을 꾸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가진 것이 하나님이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길 소원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롯의 잘못속에 함께 거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 모든 것을 방관한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가 보았듯이 이 모든 사건에서 엄처안 역할을 했습니다. 그가 기도했을 때,하나님께서는 그 전능한 팔을 뻗으셨습니다.
하지만 이 본문에서 그는 철저한 방관자입니다.
지금 조카 롯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처절합니다. 누구보다 도움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마치 욥과 같은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할 일은 무엇입니까. 찾아가 위로하는 것입니다. 롯의 세친구가 처음에 그러했듯이 찾아가 함께 우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미 말했듯이 모압과 벤암미가 태어날때까지는 꽤 시일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롯이 그 모든 일이 끝난 바로 다음날 소알을 떠났을까요. 최소 몇일에서 길게는 한두달이상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아브라함이 있는 마므레에서 소돔까진 이틀거리입니다. 소알까지 간다해도 3일이면 충분히 갈 것입니다. 너무나 쉽게 소알로 갔을 것입니다. 왜냐면 모든 녹지들이 다 파괴되었지만, 소알만은 무사히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찾을 의도만 있었다면, 너무 쉽게 롯을 찾아 위로할 수 있는 위치였습니다.
만약 자신이 해야할 일들이 많이 가지 못한다면 자신의 부하 몇명만 보내서 롯을 위로하고 데리고 오거나 필요한 것을 줄수도 있습니다. 어쨋든 이 모든 것을 하는데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는 그저 방관하고 있습니다. 모압과 벤암미가 태어나고서도 그가 소알쪽으로 갔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이 이야기 후에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동합니다.
그저 하나님께 기도해 롯의 생명을 구해준 것으로 자신의 할 일은 다했다는 듯이 행동합니다.
만약 그가 방관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가 롯을찾아가 얼싸앉고 며칠을함께 울었다면 어땠을까요.
모압과 암몬은 다른 식으로 태어났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역사상 두고두고 근심거리인 두나라가 아니라 영원한 우방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함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동역자가 되었을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방관으로 그 모든 가능성은 사라졌습니다. 오히려 살아있는 시체와 같은 롯과 두 딸들은 그들과 똑같은 상태의 아들들을 낳았고 모압과 암몬은 우상숭배, 그것도 인신공양을 기본으로 하는 극악한 우상을 섬겼습니다.
아브라함이 단 며칠의 시간만 내었다면, 자신의 소유중 조금만 나누었더라면, 이 두 민족의 운명은 변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혹시 우리는 여러가지 핑계를 대며, 아브라함과 같이 방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복음에 있어 방관자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미 내게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으니 이것으로 족하다고 자위하며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그 방관이 한 생명을 죽일수 있습니다. 한 생명이 아닌 한 민족을 죽음으로 몰아넣을수도 있습니다.
결론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본문은 전체적으로 둘이라는 숫자가 중요하게 나옵니다. 2명의 천사가 나왔고, 두사람이 나왔습니다. 두 딸이 나왔고 두 민족이 나왔습니다.
한사람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따르는 자였습니다. 한 사람은 함께 왔지만 믿지 않고 그저 끌려가는 자였습니다. 만약 이 두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안에 하나되었다면, 위대한 역사를 이루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가능성은 한 사람, 믿는 한 사람의 방관으로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그러지 않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우리가 믿는 복음을 전할 준비가 되길 원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넘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정되면 되었지가 아니라, 끝까지 위해 기도하며, 삶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있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그래서 함께 하나님 나라의 자녀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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