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겸손으로 하나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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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이라는 단어는 바울 시대에 사용되는 단어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바울이 사용한 이 단어는 킹 제임스 성경은 ‘lowness’ 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낮게 처하다’라는 말입니다.
이 겸손이라는 개념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 환영 받는 개념이 아닙니다. 주후 50년 경에 살았던 ‘에픽테트스’라는 사람은 ‘겸손은 추천할 수 없는 여러가지 덕목 중에 하나다.’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요즈음 세태에는 어떻습니까? 겸손, 남에게 뒤 쳐지는 것을 더더욱 내가 잘났는데 남보다 더 낮게 처하는 것은 절대 용납하지 않는 것은 오늘, 어제의 일이 아니라 죄가 이 땅에 들어 온 이래 모든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인류 최초의 죄를 지은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어했기에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막지 않으셨다면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려고 했을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인류 최초로 벌어진 살인 사건도 아벨을 죽인 가인의 교만이 저질은 사건입니다. 노아는 방주를 지으며 끊임없이 회개를 요구했지만 교만한 사람들은 죽기 직전까지도 환락 속에 있었습니다. 바벨 탑 사건은 어떻습니까? 교만하게 하나님처럼 되기 위한 사람들의 죄악은 결국은 온 지면으로 흩어져 언어가 혼잡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몇가지 예에 지나지 않지만 겸손의 반대 개념인 교만은 인류가 시작한 이래 죄악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죄악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아 교회의 일원으로 된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하게 행해야 하는 그 첫번째가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겸손을 4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려고 합니다.
18세기 스코틀렌드에서 사역하신 엔드류 머레이 목사님은 “겸손은 모든 미덕의 뿌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아이디어를 빌려 겸손은 믿음의 뿌리라고 생각합니다.
1) 겸손은 믿음의 뿌리이다.
벧전 5:5은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야고보서 4:6은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성경은 계속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등장하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이야기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바리새인은 따로 서서 기도하며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며 자신은 의로운 사람이며 불의를 모르는 사람임을 자랑하고 자신은 같이 서 있는 세리와 다른 사람이라면서 자신은 때에 따라 금식도 하고 십일조도 드린다며 자신의 경건함을 자랑합니다. 반면에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며 영적으로 파산 상태인 자신을 애통해 하며 주님의 도움을 청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18:14)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세리처럼 겸손한 자를 하나님은 구원하십니다. 이렇게 말해도 되겠지요. 겸손한 자만이 회개할 수 있습니다.
세리와 같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자신 속에 있는 쓰레기를 다 버리고 예수님으로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자신의 교만으로 가득 차 있는 곳에 예수님이 들어가실 자리는 없습니다. 바리새인과 같이 속에 들어있는 교만과 자기 의로 가득 찬 마음 속에 예수님이 들어가실 자리는 전혀 없습니다. 조금의 교만도 예수님은 용납하시지 않으십니다. 교만한 사람의 특징은 자기 중심적입니다. 자기가 왕이지요. 자기가 왕이라고 착각하며 살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은 예수님께 오기가 힘듭니다.
이렇듯 자기 자신이 처한 상황과 자기 자신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고, 자기 는 무력한 존재라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 올 수 있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구원의 경험은 자기 자신의 무력함과 가치 없음을 알게 해 주신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고 주님의 종이 됨으로 시작한 것일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부르심을 입은 백성에게 주님께서 겸손한 마음을 주시므로 영광된 구원의 길로 나아올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흔히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나도 예수님을 믿어. 그렇지만 나는 아직 담배도 피고, 술도 마시고 또 이런 저런 나쁜 짓을 너무 많이 해. 이런 거 다 정리하고 교회에 갈거야. 아직은 아니야.”
지금 이 사람이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거룩하게 된 후에 예수님을 받아 들일 것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기 힘으로 절대 거룩해 질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 들이지 않습니다. 아니 자기 스스로 거룩해 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교만한 죄악이 눈을 가려 예수님을 왕으로 받아 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겸손하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오로지 예수님만이 그 길이요 진리라는 사실을 인정하여 주님 앞에 회개한 죄인을 주님을 미쁘시게 여기시어 구원해 주십니다. 이리하여 성령님이 내주하게 된 그리스도인은 항상 주인 되신 주님께 순종하게 됩니다.
그 시작이 겸손입니다.
2) 겸손은 성령의 열매의 뿌리이다.
저는 이 공부를 하면서 겸손이 성령의 열매의 리스트에는 없는 것을 새삼스럽게 발견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기록된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저는 바울이 성령의 열매에 겸손을 포함하지 않은 것은 겸손은 모든 성령의 열매의 뿌리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머레이 목사님의 말씀과 같이 겸손은 모든 미덕의 뿌리입니다.
뿌리가 없는 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할 뿐 아니라 말라 비틀어져 죽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죽은 시체에 지나지 않습니다. 앞에서 설명 드렸지만 믿음의 뿌리가 없는 사람은 에베소서 2장의 말씀과 같이 허물과 죄로 죽은 사람입니다. 죽은 사람은 사랑 할 수도, 즐거울 수도, 화평할 수도, 오래 참을 수도, 자비로울 수도, 선을 베풀 수도…. 절제할 수도 없습니다. 전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물론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서 남을 돕고 선을 행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성령의 열매가 아니라 자기 자랑이고 교만의 열매이지 결코 성령의 열매는 아닙니다. 악으로 가득 차서 세상의 권세를 쫓던 교만으로 가득 차 있던 우리 마음을 비게 하셔서 주님의 성령으로 채워 주시고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므로 우리는 겸손히 그 말씀에 순종하므로 그분이 우리 삶에서 맺어 주시는 성령의 열매들을 맺습니다.
그 시작이 겸손입니다. 겸손은 모든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는 뿌리입니다.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일은 겸손이 그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도 일부 겸손이 아닌 모든 겸손, 때에 따라 겸손이 아닌 항상 겸손, 필요할 때 혹은 기분 날 때 겸손이 아니라 언제나 겸손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모든’ 이라는 단어로 겸손을 수식한 이유입니다.
사도행전 20장에서 사도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서 자신이 모든 겸손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다고 말했습니다. 이 바울은 이러한 자신을 본 받기를 원하며 에베소 교인들도 모든 겸손으로 부르심에 합당한 자들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3) 모든 겸손으로 행한 본을 따르자
바울은 겸손이 아니라 ‘모든 겸손’이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모두, 언제나, 항상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헬라어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불러 주신 이래 항상, 언제나, 자신의 전 모든 것을 바쳐서 오로지 예수님의 복음을 위해서 모든 겸손으로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죽을 번 하고, 춥고 헐벗었지만 교회를 위하여 부득불 자랑하는 것은 자신이 약한 것 즉 겸손을 자랑한다(고후 11:16-30)고 하며 주님을 섬겼고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일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모든 겸손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겸손의 본으로 주님과 비교될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은 모든 겸손으로 이 땅에서 사역하셨습니다. 그의 시작은 가장 비천한 장소에서 태어 나셔서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이 땅에서 사역하셨고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돌아 가셨습니다.그 본을 따라서 사도 바울도 신실하게 따랐던 사람이었고 또 많은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모든 사도들도 선지자들도 순교한 순교자들도 지금 전 세계에서 복음을 전하는 모든 신실한 성도들도 모두 주님의 겸손한 본을 따랐고 따릅니다.
이 겸손한 주님의 본은 우리 모두도 말할 나위없이 따라야 하는 본입니다.
빌립보서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가장 낮은 자리에 처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과 더불어 수고를 나누고 깊은 영적인 교제를 나눈다면 우리가 이제 너무 낮다고 해서 처하지 못할 자리는 없을 것이며 또 아무리 머리를 굽히고 허리를 굽혀도 지나친 일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종의 자리를 잡는 것이 성도들의 유일한 목적이요 기도가 되어야 한다라고 엔드류 머레이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은 구원 받은 모든 성도들에게 너무나 적절한 권면입니다.
4) 겸손의 약속과 상급
마가복음 9장 33절- 37절은 제자들이 누가 더 크냐고 다툼을 벌이는 모습을 봅니다. 예수께서 이를 보시고 열 두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35절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방금 읽은 빌립보서의 말대로 근본 본체 하나님이시나 자신을 주장하시지 않고 다 비웠습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셨는데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하나님께 겸손히 순종하셨습니다. 이는 자신을 전혀 주장하시지 않으시고 다 비우고 오로지 하나님으로 모두 채워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고 오로지 하나님이 만이 전부이라 하신 겸손의 결과 입니다. 에베소서는 그런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엡 1:21-22). 엔드류 머레이 목사님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바침으로 인하여 잃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예수님은 잃기는 커녕 온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얻었다.”
겸손하게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신 예수님은 온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 스스로 가장 낮게 처하심으로 가장 높아 지신 것과 같이 “가장 낮은 자가 가장 높아 질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약속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예수님 스스로 가장 낮게 처하심으로 본을 보이셨고,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겸손의 결과를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 주시며, 겸손에 대한 약속으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인도해 주고 계십니다.
바울이 겸손하게 주님을 섬겼던 이유는 주님 안에서 큰 소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가 이러한 모든 겸손으로 살아가는 이유를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 가노라”(빌 3:14) 그의 모든 겸손은 오로지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주님이 약속하신 상급 위한 것입니다.
우리도 이 상급을 위하여 모든 겸손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겸손하므로 우리는 온유할 수 있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용납할 수 있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킬 수 있습니다. 에베소의 편지를 다시 읽었던 에베소 성도들은 겸손의 의미를 살펴보며 첫 사랑을 잃었다고 그들을 꾸짖은 주님의 책망이 단지 첫 사랑이 아니라 주님을 믿는 모든 것을 다 잃었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바른 교리를 고수하였고 그 행위와 수고로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았지만 겸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머리로만 아는 교리의 칼을 휘둘렀습니다. 교회 밖에도 교회 안에서도 그들은 뿌리인 겸손을 잃었기에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도 잃었고, 겸손하지 않았기에 성도간의 서로 사랑 하지도 않았습니다.
바른 교리를 고수했지만 그들은 정작 진정한 진리를 잃었던 것입니다. 교리와 사랑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없는 진리는 껍데기 진리입니다. 진리와 사랑은 함께 하는 것이고 그 사랑은 겸손한 마음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 교회가 곧 장소를 결정하여 매주 모여 주님께 예배 드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가 나은 가장 뛰어난 목사라고 자타가 인정하는 존 맥아더 목사님의 가르침을 배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아무리 튼튼하고 확실한 교리로 무장했다 하더라도 오늘 말씀대로 모든 겸손으로 머리로 아는 이 교리를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성령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지 않는다면 우리도 에베소 교회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꾸지람을 듣게 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부르셔서 한 소망을 주신 하나님 안에서 항상 겸손하게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므로 모든 일에 오로지 주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구 드립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중에 아직 주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시지 않으신 분이 계신지요?
이 세상의 왕이신 주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받아 들이시기 바랍니다. 겸손이 시작입니다.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자신 속에 남아 있는 교만을 다 비우기를 애쓰시기 바랍니다. 이는 말씀으로 가득 채워서 매일 매 순간 주님의 말씀 안에서 순종의 발걸음을 겸손하게 내 디딤으로 거룩하신 주님 닮은 모습으로 자라나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모든 겸손이 우리 모두의 목표가 되어 하나되는 교회로 이 세상의 주님의 빛을 비추므로 주님의 상급을 향해 모두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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