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에 합당한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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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에 합당한 교회
안녕하세요. 오늘은 어머니 날입니다. 우리를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감사하는 날입니다. 이제 새롭게 어머니가 되신 분들도 있고, 도 어머니가 한국에 계신 분도 계십니다. 설교를 하기 전에 모든 어머니의 귀한 희생을 감사 드립니다.
우리 교회를 인도하는 캔 목사께서 오랜만에 가족들과 한국에 여행을 가서 오늘은 제가 빈자리를 메우게 되었습니다.
오늘 제가 설교하려는 주제는 “부르심에 합당한 교회” 입니다.
교회의 개척을 준비하는데 참여하고 있는 우리 모두의 바램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제게 허락된 이 귀한 시간을 우리를 구원하셔서 교회로 부르신 주님의 부름에 합당한 교회를 세우는데 필요한 덕목들을 같이 알아 보려고 합니다.
기도 : 하나님 이제 주님의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주장하여 주셔서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하도록 인도하여 주시고 이 시간을 통해서 오로지 주님만이 높임을 받고 영광 받으시옵소서.
오늘 본문은 에베소서 4:1 -3 입니다.
엡 4: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저는 오늘 이 본문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려고 합니다.
4:1을 살펴 보면서
1)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말씀 드리고
4:2-3을 보면서
2)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데 필요한 덕목에 대해서 나누려고 합니다.
먼저
1)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본문은 ‘그러므로’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라 하고 시작합니다.
첫 머리에 나오는 ‘그러므로’는 이제 바울이 에베소서의 앞선 세 장에서 설명한 교리를 바탕으로 실 생활에서 이 교리를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한 전환점을 표시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므로’는 “행하라”라는 권면과 연결이 되는 핵심 되는 단어입니다. 에베소서 4장 – 6장까지 바울은 5개의 ‘행하라’와 연결된 ‘그러므로’가 나오는데 오늘은 처음 나오는 “그러므로 …주 안에서 합당하게 행하는 것에”대해서 알아 보겠습니다.
먼저 합당하게 행해야 하는 이유는 첫번째로
이유#1) 믿는 자는 주님과 연합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미 3장 1절에서 그리스도의 일로 로마 감옥에 갇히 것을 말했습니다. 그는 4장을 시작하면서 다시 감옥에 갇힌 자신의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3:1에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이방인을 위하여 갇혔다고 했었는데, 이번에는 “주 안에서 갇혔다” 고 말 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주 안에서 갇혔다”라고 말한 것은 그가 로마 감옥에 갇힌 사실보다, 자신을 붙잡고 있는 분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런 표현을 한 것 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주님과 연합된 사람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지요.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에베소 교인들이나 주 안에서 신실한 이 편지를 읽는 모든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주님과 연합된 사람이기에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해야 한다 것을 말하기 위해서 이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존 맥아더 목사는 그의 주석에서 .
“바울은 모든 일을 그가 처한 상황을 보기 전에 위를 바라 보았다. 그의 삶은 그리스도가 동기이고,기준이며, 목표이며 비전이었다. 그의 삶 전체가 그리스도 만을 향해 있었다. 그가 생각한 것, 그가 계획한 것, 그가 말한 것, 그가 행한 것이 모두 주님과 연결된 것이었다. 그는 완전히 주 예수의 포로였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자신과 그리스도가 주인와 종의 관계로 연합 되었다고 말하며 “주 안에서 행해야 할 덕목”들을 독자들에게 권하기 시작합니다.
‘권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칼라오’의 뜻은 간곡하게 권하다. 애원하다. 촉구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주님의 사도로서 자기가 지금부터 말하는 것들을 반드시 행해야 한다고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합당하게 행해야 하는 두번째 이유는
이유#2) 은혜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의 첫 세 장에서 교회로의 부르심을 설명했습니다.
바울은 이 부르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창세 전에 우리를 예정하시고,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시고, 성령님께서 인치심으로 확실히 보증하신 삼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룬 부르심입니다.
이 부르심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부르심은 능력으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리신 그 능력으로 된 것입니다 (1:15-23).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고, 하나님을 대적하던 허물로 죽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이 부르심은 완전히 은혜로 된 것입니다. (2:1-10).
우리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원수 관계이던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들어 주셨고,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이스라엘과 화목하게 되어 주님의 교회의 지체로 주님의 몸이 되었습니다. (2:11-3:13).
이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3:14-21).
전혀 합당하지 않은 우리를 부르신 이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알아보며 모두가 각자의 마음에 부르심에 합당한 길로 더욱 더 전진해 나가기로 다짐하는 그러한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제 두번째로 2절과 3절을 살펴 보며
2.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데 필요한 덕목 들에 대해서 알아 보겠습니다.
‘합당하게’라는 단어는 ‘악시어스”라는 헬라어를 번역한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양팔 저울의 한쪽에 올려진 물건과 다른 편의 저울 받침대에 같은 양의 무게 추를 올려서 저울의 수평을 맞춘다는 의미입니다. (재차 강조해도 좋음)
바울이 말하고 자하는 것은 앞선 세 장에서 설명한 부르심을 받은 부름에 모든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 사랑 가운데서 용납함, 그리고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키며 합당하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제시한 이 다섯 개의 덕목 가운데 그 첫번째가
1. 겸손입니다.
겸손은 그리스도 인의 삶의 기초가 되는 덕목입니다.
존 맥아더 목사는 “그리스도인의 겸손은 그리스도를 첫번째 자리에 모시고, 다른 사람을 두번째로 그리고 자신을 마지막에 두는 것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사람은 겸손을 잃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겸손하는 일과 겸손을 유지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18세기 스코틀랜드에서 목회하신 엔드류 머레이 목사는 “겸손은 모든 미덕의 뿌리”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입는 사람은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만 합니다. 그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나무의 뿌리가 겸손입니다.
겸손에 대해서 네 가지로 나누어서 알아 보겠습니다.
1) 겸손한 자만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
바울이 권하는 이 덕목들은 부르심을 받은 자들, 즉 믿는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권면입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는 것은 겸손한 자세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하기에 혹시 이 자리에 계실지도 모르는 불신자를 위해서 이것을 먼저 짚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방금 말씀 드린 것과 같이 겸손은 그리스도를 첫째로 올려 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자기 삶의 맨 위에 두지 못합니다.
구원은 자신이 철저히 연약하고 무력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리스도의 도움을 청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등장하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따로 서서 기도하면서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의로운 사람이고, 불의를 모르는 사람이고, 지금 같이 서 있는 세리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말하며, 때에 따라 금식도 하고 십일조도 드리는 경건한 사람이라고 자기의 의로움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어떻게 했습니까? 누가복음 18:13 입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며 영적으로 파산한 자신의 처지를 애통해 하며 겸손하게 주님의 도움을 청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을 보신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눅 18:14)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을 믿는 것은 자신 속에 있는 교만의 쓰레기를 다 내다 버리고 예수님으로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같이 교만과 자기 의로 가득 찬 마음 속에 예수님이 들어가실 자리는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은 조금의 교만도 용납하시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교만한 사람의 특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자기가 자기 삶의 왕입니다. 자기가 왕인데 어떻게 예수님을 왕으로 모실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사람들도 열심히 교회 생활을 할 수 있고, 열심히 헌금도 할 수 있고, 열심히 성경 공부도 할 수 있고, 심지어 설교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모든 종교 활동은 자기를 드러내기 위한 거룩한 교만에 지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과 같은 자들이지요.
이들은 마지막 날 예수님으로부터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는 엄청나게 무서운 심판의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마 7:21)
만일 이 자리에 이러한 분이 계신다면 회개하시고 주님을 믿고 주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은혜의 복을 누리시게 되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는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동하는 덕목 중에서 그 첫번째 덕목인 겸손에 대해서 알아 보고 있습니다.
겸손에 대한 두번째로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2) 그리스도인은 겸손해야 한다. 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주님을 받아 들여서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은 이제 그 겸손을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자신의 왕이시며 주인이 되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모든 겸손으로 주님을 섬기고 성도들을 섬겨야 합니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겸손은 모든 미덕의 뿌리”입니다.
뿌리가 없는 나무는 열매를 열지 못합니다.
저는 요즈음 우리 집 뒤뜰에서 나무를 심고 옮기고 하는 gardening 일을 즐겨 하고 있습니다.
나무를 옮기면서 뿌리가 공기 중에 노출되면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할 나무가 열매는 커녕 비실 비실 말라서 죽어 버립니다.
우리들의 삶에 영적인 열매를 맺는 일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겸손은 성령의 열매를 열게 하는 나무의 뿌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에 따라 겸손이 아닌 항상 겸손,
필요하거나 기분 날 때 하는 겸손이 아니라 언제나 지속적으로 겸손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모든 겸손’으로 행하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언제나’, ‘어느때나’, ‘항상’ ‘지속적으로 겸손한 사람만이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겸손은 믿음의 시작이라는 것과 그리스도 인은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 보았습니다.
이제 세번째로 우리는
3) 겸손의 본이 되시는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겸손의 본으로 주님과 비교될 분은 없습니다.
빌립보서 2:5-8은 이 사실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319쪽)
빌립보서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가장 낮은 자리에 처하셨습니다. 이것은 교회에서 품어야 하는 우리 모두의 자세입니다.
18세기의 스코틀랜드의 목회자 안드류 머레이는
“만일 우리가 예수님과 더불어 수고를 나누고 깊은 영적인 교제를 나눈다면 우리가 이제 너무 낮다고 해서 처하지 못할 자리는 없을 것이다. 또 아무리 머리를 굽히고 허리를 굽혀도 지나친 일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종이 되는 것이 성도들의 유일한 목적이요 기도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미 부르심을 받아 예수님의 종이 된 우리는 이제 주님의 몸인 교회의 지체로서 서로에게 종이 되어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겸손의 본을 보이신 것과 같이 겸손하게 옆 사람을 섬겨야 합니다.
겸손은 정말 중요한 덕목입니다. 예수님은 겸손한 사람에게 상급을 약속하셨습니다.
4. 겸손의 상급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엔드류 머레이 목사님은
“예수님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바침으로 인하여 잃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예수님은 잃기는 커녕 온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얻었다.” 라고 잘 표현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셨고, 만물이 그의 발 아래 복종하고 있습니다. (엡 2:21-23)
예수님은 서로 높게 되려고 싸우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고 하신 막 9:35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겸손한 자에게 상급을 약속하셨습니다.
(잠언 18:12)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 우리 모두 겸손함으로 존귀하게 되어 부르심에 합당한 교회를 세우는데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두번째 덕목인 온유에 대해서 같이 알아 보겠습니다.
덕목 2) 온유
겸손으로 행하는 사람은 온유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온유’라고 하면 자기 주장도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자기 의견도 잘 말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모습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온유는 기백이 없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유는 “Power under control”되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한국말로 번역하자면 “힘있는 사람이 힘을 통제하고 있는 상태”라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바다의 광풍도 말씀 한 마디로 잠잠케 하시고, 물위도 걸을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자기의 능력을 나타내시지 않으시고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 그는 마치 도수장에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깍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 (사 53:7)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나약하고 힘 없게 보일런 지 모르지만 어떻게 이보다 더 강한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필요하시다면 천군 천사를 모으셔서 자기를 대적하는 모든 자들을 다 물리 칠수 있는 권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이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같이 먼지 만도 못한 인간들을 위해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온유하게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온유 하셨지만 불의를 그냥 참고 넘어 가시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2;15은 성전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드는 상인들의 좌판을 뒤 엎으시고 채찍으로 그들을 성전에서 좇아 내시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은 항상 나약하게 양보만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필요할 때 알맞는 행동을 적극적으로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통제된 온유를 닮고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 11:28에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또 마태복음 5:5에서 예수님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라고 하시며 온유한 자에게 마음의 쉼을 약속하셨고, 또 기업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부르신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기 위해서 모든 겸손과 온유로 행해야 하며 이러한 일은 우리가 살펴 보려는 세번째 덕목인 오래 참음으로 가능합니다.
덕목 3) 오래 참음
오래 참는 사람은 온유한 사람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자기가 가진 힘을 통제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의 자아를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서 control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자기에게 닥치는 불이익에 당장 반응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바로 눈에 띄는 결과가 없다고 하더라도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서 참는 사람입니다.
마치 농부가 뿌린 씨앗으로 귀한 열매를 수확하는 날을 기다리듯이 오래 참으며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야고보서 5:7-10은 말합니다. (375쪽)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10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우리가 본을 삼을 선지자의 예가 히브리서 6:13-15에 있습니다. (357쪽)
1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14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15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하나님은 말할 것도 없이 오래 참음의 본이 되십니다.
벧후 3: 8-9에서 우리는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신약 386쪽)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러한 주님의 오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입니다.
저는 믿지 않던 시절의 나를 돌아 보면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으로 받은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를 참으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믿지 않는 자들이 회개하고 돌아 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렇게 오래 참으시는 주님을 본 받아 우리는 좋은 약속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말고 성령님을 의뢰하면서 성도 간에 서로 참으며, 실수하는 교우들에게 바로바로 반응하지 않고 주님이 우리를 참으신 것과 같이 서로 오래- 참음으로 부르신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세가지 덕목 겸손, 온유, 그리고 오래 참음을 나누었습니다. 이어지는 네 번째 덕목은
덕목 4)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는 것입니다.
용납하는 것은 참는 것을 말합니다.
이 덕목은 교회에서 특히 가정에서 부부 간에 매일 훈련할 수 있는 덕목입니다.
길게 말 할 필요없이 그게 무엇인지 알고 싶은 분은 나중에 우리 집 사람에게 물어 보십시오.
왜냐하면 우리 집 사람과 살고 있는 그분은 참기 쉬운 분이 아니거든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가장 가까운 관계의 사람들 간에도 참으라고 하셨습니다. 서로 참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냥 참으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 가운데 참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요 13:34 – 35 (170쪽)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 받은 성도들은 서로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뜨거운 사랑으로 잘못하는 성도를 서로 용납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 받아 한 교회에서 연합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제리 브리지스 목사님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우리는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고자 할 것이다. 그리고 사랑은 허다한 잘못을 덮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에 대해 더 잘 참을 것이다. 그러므로 용납은 궁극적으로 우리 삶에서의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자라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 할수록 우리는 서로에 대해 더 참을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연약하여 수시로 실족하지만, 그럴 때마다 회개하고 돌아서서 우리의 주인이신 주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여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덕목은
덕목 5.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됨을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교회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하나됨의 본은 근원은 4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본문은 “성령의 하나됨을 힘써 지키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됨을 만들어라”고 하지 않고 이미 성령님이 만들어 놓으신 하나됨을 지키라고 합니다.
우리는 지키기만 하면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에는 배경도 다르고, 자라온 환경도 다른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또 모일 것입니다. 자칫하면 자기 주장을 하여 성령님께서 하나로 만들어 주신 것을 혼란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미 하나로 만들어 주셨지만 이것을 지키는 일은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닙니다. 절대 저절로 되는 일도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매일의 삶에서 성령님을 의뢰하며 힘써 지켜 나갈 때 우리 안에서 내주하시는 성령님께 하나됨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을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합당하게’라는 단어의 문자적 의미는 양손 저울의 한 쪽 무게를 다른 쪽과 평행되게 맞춘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다섯 개의 덕목을 다 행했으니 이제 저울이 완벽한 평행을 이루어야 합니다.
저울의 저쪽 편에는 예수님이 올라가 계십니다. 그런데 만일 이 덕목들을 내 힘으로 행하여 이 쪽 접시에 올렸다면 저울은 꼼짝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행하는 행위는 아무런 무게가 없습니다. 우리의 행위는 먼지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순종하며 그리스도를 의뢰하며 행할 때 무게 균형은 완벽하게 맞아 질 것입니다.
이 쪽 접시에도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올라 가셨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서 합당하게 행하는 것은 내 힘으로 내가 가진 것으로 애쓴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일하고 그리스도께서 옆에서 도와 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내가 함께 끌고 가는 것도 아닙니다.
이 일은 전적으로 그리스도께서 하셔야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구경꾼처럼 그냥 앉아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모두가 각자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행할 때 주님께서 인도해 주시고 함께 하셔서 이루어 주십니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삶에서 그렇게 행할 때 우리 모임은 “부르심에 합당한 교회”로 세워져 갈 것이고,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 모든 영광과 찬송을 받으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도 여러분, 여러분 중에 아직도 자신의 선한 행실 때문에 자기는 괜찮은 사람이니 천국에 가실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신지요?
아직도 겸손하게 예수님의 종이 되는 것이 내키지 않으시는 분이 계신지요?
그런 분이 계신다면 지금 당장 회개하시고 이미 모든 것을 다 이루시고 오래 참으시며 기다리시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나아 오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고 주님의 교회의 지체가 되신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사랑 가운데서 주님을 더욱 더 알아가고, 순종하여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
주님 우리 모두 주님의 부르심의 합당한 자가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교회가 또 여기 같이 모인 우리 모두가 겸손하게 행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을 힘써 지키는 자들이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기를 간구 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