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사랑함이 생명을 얻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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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오늘은 본문 안으로 바로 들어갑니다. (준비되셨죠?) 오늘 나오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는 대단히 신비스러운 대화입니다. 요한복음 자체가 어마어마한 깊이와 높이를 가진 <신비스러운 책>인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화는 이 책의 클라이막스요, 성경전체의 결론을 이야기로 푼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세번 부인하고 도망친 시몬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대단히 뜬금없이 질문입니다. “너 그때 왜 나를 배반하고 도망했니?’라고 책망하며 물은 것도 아니고, “얘야. 괜찮다. 우리는 다 그렇게 넘어지고 난 뒤에 다시 시작하는거야 라고 위로를 하시는 것도 아니고, “네가 나를 이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느냐?” 사랑의 문제를 들고 나오셨다. 저와 여러분이 깊이 곱씹어 봐야 합니다. 이제 이 대화는 주님과 수제자의 마지막 대화입니다. 이 수제자에게 앞으로 세워질 교회를 맡기고 떠나야 합니다. 예수님이 수제자에게 하고 싶은 말, 남기고 싶은 말이 얼마나 않을까요? 교회는 어떻게 섬겨야 하고, 설교는 어떻게 해야 하고, 네가 섬길 양떼들의 속성은 이러이러하니 그때는 이렇게 저렇게 해라 등등. 그런데, 이 대화의 화두는 다른 어떤 것도 아니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의 문제. 예수님이 인간문제를 보는 핵심입니다. 사랑!! <사람은 사랑하기에 그것을 좇아간다>. 왜 담배를 끊지 못합니까? 왜 술에 곤드레 만드레가 됩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굳이 끊을 정도로 더 사랑할 것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느날, 자기 눈을 완전히 앗아가 버릴 여자가 나타나서, “너 담배끊으면 내가 데이트해줄께!”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당장 끊지요? 어떻게 그토록 끊을 수 없었던 것을 끊겠다는 의지가 발동이 되고, 결국 끊어버릴 수 있을까요? 담배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의지를 치유하는 힘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랑!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을 우리는 은총이라 하지요. “목사님! 왜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데 잘 안되고 또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할까요?”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더 사랑스러운 일인지를 아직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문제입니다. 베드로는 첫번째 질문에는 그럭저럭 대답했습니다. 자기가 주님을 조금 밖에 사랑하지 않지만, 이 사람들보다는 낫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그랬더니, “내 어린 양을 먹이라.” 깊어요! 다른 사람보다 주님 더 사랑하면, 그때는 이제 하나님의 양떼들, 하나님의 백성들을 돌볼 수 있는데, 이때는 <어린 양> 돌보는 정도라는 것입니다. 어린 양….약해서 목자가 시키는대로 하는 양.
주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시랑하느냐?” 이제는 비교해서 물으시지 않고, 너 나 사랑해? 하고 정면으로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정곡을 제대로 찌르신거지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결국 세번 부인하고 배반했지요. 자기가 다른 제자들보다 예수님 사랑하기에 우쭐대며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 했지만, 정작 그 순간 자기 의지는 자기를 배반했지요. 왜요? 자기가 주님 사랑하는 마음이 그 순간은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는 그때 사람들의 시선과 그 두려운 눈초리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본능적으로 “이 순간 살아남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어”라는 자기생존본능이 주님 사랑하는 마음을 압도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한계를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결국 사랑의 문제. 주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기에…그는 자신의 육을 좇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걸 들고 나오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성장했습니다. 자기는 주님 배반하고 이 바닷가로 도망왔는데, 주님이 도망한 자기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물고기를 구워주시고는 그 따스한 존재감으로 자신을 품으시면서 살펴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주님의 더 큰 사랑이 그를 잡아당긴 것입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주님이 다시 명령하셨습니다. “내 양을 치라.” 내 어린 양-lamb만이 아니라 내 양- sheep을 치라! 어른 양 – 어린 양과 달리 뿔도 달려 있어 치받기도 하고, 고집도 세우고, 목자를 아프게도 합니다. 어떤 목자가 이 골치아픈 장성한 양들을 돌볼 수 있느냐?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양들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양을 맡기신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교회 안에서 리더쉽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깊이 유념해야 하는 대목입니다.
세번째 물으셨죠. 17v.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께서 세번째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영어성경 - hurt당했다. “찔렸다”라고 함. 자기가 세번 예수님 부인한 것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그래서 세번 물으신 거예요. 베드로의 상처난 부분을 만져주시려고. 우리 주님이 기가 막힌 분입니다. 9v. 예수님이 숯불을 피워놓고 베드로를 그 자리에 앉게 하셨습니다. 이 장면 어디서 본 장면 아닙니까? 그렇죠. 베드로가 사람들 쭈드려 앉아 있는 장작 숯불 앞에서 예수님 부인했거든요. 주님이 그 상황으로 데려가서 그의 아픈 기억을 치유해 주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심리학도 안배운 분이 이런 것을 ~. 세번째 물음은 앞의 두번과 다릅니다. 앞의 두번은 phileo me? 조건부 사랑입니다. 세번째 물음은 <agapao me?> 신적 사랑. 무조건적 사랑입니다. 네가 나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할 수 있느냐? 무슨 말?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음을 느끼지 못하는 순간까지도, 내가 너의 주님이기에 나를 사랑할 수 있느냐?”
여러분은 어떠세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계심을 느끼지 못하는 순간이 있지요. 반복해서 찾아오는 고난의 한복판에 사는 성도들! 납득되지 않는 사고로 고통하는 사람들…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시기는 하시는건가? 이때도, 하나님을 향한 내 마음이 변치 않고 그를 사랑할 수 있나요?
베드로가 대답…”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오매…” 정말 정직한 고백. “주님! 주님은 제 속에 무엇이 있는 줄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얼마나 볼품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줄 아시지 않습니까? 때로는, 쪼개어진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줄 아시지 않습니까? 그 뜻…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주님을 사랑하나이다!!”
예수께서 모든 대화가 끝난 후에 베드로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시면서 말씀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 여러분처럼 자기가 주인되어 살았다는 뜻. 자기애/자기연민/자기자존심 채우려고 원하는 곳 찾아 다녔다 –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 누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스스로 팔을 벌릴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팔을 벌리듯이, 자기 하나도 감당치 못하고 살았던 자가 이제는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자기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 원치 않는 곳으로 가면 불행한 것 아닌가? 자유를 박탈당했기 때문에? no. 하나님 사랑하기 때문에, 그 분이 원하시는 것 하는 것이 자기 소원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베드로….
19v.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à 스승과 제자의 마지막이 너무나 멋지다! à 여러분은 아시지요? 베드로의 마지막. 로마에 박해가 나자 성도들이 베드로를 떠밀었습니다. 큰 일을 하셔야 하니 어서 피하세요! 베드로가 쭈빗거리면서 로마를 빠져나오는 중에 주님을 만났습니다. 베드로가 물었습니다.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나는 네가 피해서 달아나는 로마에 간다. 네가 피한 십자가에 다시 못박히려고.” 베드로가 통곡하고 회개하면서 로마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아달라고 말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주님이 못박히신 그대로는 감히 감당치 못하니, 나를 거꾸로 못박아 주시요. A.D. 66년 베드로는 그렇게 최후를 맞습니다. 그러나 그는 행복했습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그 분을 위해 살았기 때문에…
여러분!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원하시는 가장 큰 소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지켜야 할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38v.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요.”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모든 강령이 여기에 다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다른 신들을 섬길 수가 없구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안식일에 예배드리지 않고 엉뚱한 곳에 가 있을 수가 없지요, 하나님 사랑하는 자는 주님이 지키라고 하신 계명을 소홀히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되면, 나머지는 서서히 다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사랑하기에, 그 분의 백성들 돌보느라 자기가 오해받고, 미움받고, 따돌림 당하는 것도 참을 수가 있습니다.
제 신앙의 여정에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한 사람을 소개하고 말씀을 마칩니다. 저는 미국에 유학하러 갈 때에 소원이 한가지 있었습니다. 기도제목이지요. “신학의 큰 스승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늘 기도했습니다. 제가 공부했던 학교에는 좋은 선생님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분들 만날 때마다 이분인가? 저분인가? 했지만, 신학이 신앙으로 승화되어 기도와 신학과 신앙이 통합된 큰 스승을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7년이 지나도 들어주시지를 않더라구요. 그러다가, 박사과정공부에, 이민목회에, 비영리단체운영하는 일로 과로가 겹쳐져 결국 몸도 마음도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소진한 것입니다. 이때, spiritual direction이라는 것을 하시는 할아버지 한 분을 만났습니다. 우리 교단에서는 영성지도, 혹은 영성상담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상담이 자기 자아를 회복시켜 주는 것이 초점이라면, 영성지도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자기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고, 그래서 영이 회복되도록 도와주면 다른 문제도 풀려가기 시작한다는 신앙적 전제를 갖고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방식입니다. 체구도 아주 왜소하고, 이력도 별로 두드러질 것이 없는 분이었습니다. 이 분 사는 작은 아파트의 작은 office에서 만나는데, 같이 있으면 참으로 좋았습니다. 부드럽고 온화한 미소에, 늘 잠잠하게 저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는 진중함에, 가끔씩 제 속을 훤히 아는듯이 툭특 던지는 질문이 저로 하여금 제 안에 오랫동안 쌓여있는 옛자아의 층들을 벗겨내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자신을 그대로 대면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마치, 두어평 남짓한 공간에서 우주를 움직이는 사람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기분 나쁜 부분이 하나 있었습니다. 만나서 대화를 하는 것을 session이라고 하는데, 처음에 세차례 정도를 만나고 나서는, 이 사람이 session이 끝나고 나서 태도가 싹 바뀌더라구요. 우리 한국 사람은 그날 대화를 하면서 가슴에 터치가 되면 뒷여운을 나누지 않습니까? “오늘 정말 고맙다. 네가 던져준 질문이 나로 하여금 이 순간 하나님의 뜻이 뭔지 좀 더 알수 있게 해주었다”..눈길도 한번 더 주고 thank you so much 하면서 손도 잡고 하는데, 이분은 세차례 그렇게 한 후에는 만남이 끝나면 빨리 나가라는 듯이 문 앞으로 가는 겁니다. 아주 불쾌했습니다. ‘저 사람 왜 저래? 아하, 뒤에 다른 손님 맞으려고 그러는구나. 그래서, 나를 서둘러 내모는구나. 좀 이상하네? Session 하는 때하고, 끝나고 난 후에 많이 다르네?” 섭섭하더라구요. // 어느날 제가 기도하는 중이었습니다. “하나님, 저는 언제나 신학에 큰 스승을 만날 수 있습니까?” 그때, 이 사람 얼굴이 난데없이 떠오른 것입니다. 넘어졌다 다시 일어나면서 아주 영적 센스가 민감하게 살아있던 때입니다.
주님이 제게 그러시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 얼굴 떠오른 그 사람이다.” 제가 대화하듯이 그랬지요. “에이 주님! 그 사람은 아니예요. 그 사람은 꾼이예요! 꾼! 앞과 뒤가 다른 사람이예요.” / 그 뒤에 제가 영성지도를 직접 배우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영성지도자는 산파일 뿐이다. 성령께서 내담자에게 역사하시는 것을 도와주는 사람이지 절대로 주도권을 휘둘러서는 안된다. 내담자와 성령 하나님 사이를 가로채어 막아서는 사람이 되면 안된다. 제가 이때 알게 된 것입니다. 이 사람이 일부러 저를 쌀쌀맞게 대했다는 것을….무슨 말이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 만나게 도와주는 사람> 사이에 분리가 안됩니다. 목회자는 하나님 사랑하라고 열심히 말씀을 전하는데, 성도들은 그 말씀에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 사랑하기보다는, 자기에게 은혜를 준 설교자와 더 가까워지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말씀전하는 사람에게 실망하면 그 설교자가 전하는 하나님도 불신합니다. 이게 분리가 안되어 성도들의 영적 성장에 지장이 많습니다.. 제가 딱 그격이었습니다. 제가 이 사람과 만나면서 너무 좋으니까 이 분이 제 안에서 커진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만났을 때는 제 영혼이 하나님께 딱 주파수를 맞추고 시작했는데, 점점 이 분이 멋져 보이면서 제 안에 계신 성령께 민감하기 보다는 이 사람의 반응을 먼저 살핀 것입니다. 이 사람이 이걸 본 것입니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종이고, 저에게 하나님이 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소개해주는 사람인데, 제 안에 하나님 대신에 자신이 차지하는 자리가 점점 커지는 것을 보니까, 저한테 쌀쌀맞다는 얘기를 들으면서까지, 제가 오직 하나님 한분에게만 집중하도록, 제 마음에서 자기 자리를 치워버린 것입니다.
제게 이 깨달음이 오면서 얼마나 가슴이 벅차고 감사하던지 모릅니다. “주님! 당신께서 지금 제 세번째 기도제목에 응답해 주시고 있군요. 저는 지혜와 식견이 뛰어난 학자를 찾고 있었는데, 주님은 저에게 지혜보다 더 소중한 신앙의 선생, 하나님을 뼈에 저리게 사랑하는 선생을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제가 한국으로 나오기 전에 미국에서의 마지막 session을 하면서 이 얘기를 꺼냈습니다. “너 session 끝나면 왜 나를 믿어내듯이 보내냐? 내가 공부를 하면서, 네가 내 안에서 하나님이 차지하실 자리를 갖는 것 같아, 자기를 치워버리려고 일부러 session이 끝나면 사적관계 안가지려고 쌀쌀맞게 대한 것 맞냐?” 물었더니, 아무 말도 안하고 웃기만 해요. 그러면서, 악수하고 나오는 저한테 그럽디다. “상학! Can I hug you!” 그리고는, 뜨겁게 포옹을 하는데, 그렇게 남자가 남자한테 그렇게 따뜻하고 뜨겁게 품어주는 순간이 없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일부러 쌀쌀맞게 굴었지만, 이제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이 차지하는 자리는 절대로 갖지 않을 것이며, 때로는 하나님 사랑하기에 사람에게 욕먹을 것도 각오하는 것….그것이 <목회>라는 것을 이 분께 제대로 배웠습니다.
(이 사람 – 사진!!) 작년에 아내가 아파서 은퇴를 하기 전까지 만났는데요, 20평 남짓한 아파트에서 모아놓은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얼마나 내적인 자유함과 평안함이 있는지 모릅니다. 제가 미국 떠날 때 이 분한테 말했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너를 떠나가지만, “하나님 사랑하는 법”을 몸으로 가르쳐 준 너와 네 안에 계신 하나님은 내가 설교하는 곳마다 전하게 될꺼야. 그것이 네 안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하나님을 신실하게 좇아간 너의 삶이 헛되지 않게 하는 길이니까.” à 제 마음의 소원이 이 분처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뼈에 저리게 사랑하는 사람!”
여러분! “아무개야! 네가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지금 물으신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나는 너를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주기까지 사랑했는데 너는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느냐?”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기도하기는, “주님! 쪼개지고 일그러진 사랑이지만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끝까지 주님 배반하지 않고, 주님이 가신 그 걸음을 따라가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성도들로 차고 넘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