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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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는 저희 가족에게 아픈 일이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저희 집에 아이들 셋을 신앙으로 이끌어주시고 신앙의 멘토 역할을 해 주셨던 목사님이 서른여덟 살의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뜨시게 되신 것입니다. 저희들도 저희 들이지만, 우리 아이들이 받았던 정신적 충격은 대단했었습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한 분이었는데 온몸의 근육이 점점 마비되어 가는 루게릭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1년 반 정도 전해 들었었습니다. 목사님은 그 와중에서도 사역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시다가 38살의 나이에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자녀 하나를 남겨 놓고 황금 같은 그 시기에 생을 마무리하고 천국에 가신 것입니다.
📷 여러분은 이렇게 자기 인생의 꿈을 채 펼쳐 보기도 전에 인생을 무리하게 되는 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대하면 무슨 생각이 떠오르십니까? 신앙의 걸음을 완주하지 못하고 강제로 삶이 박탈당해야 되는 사람들, 교회를 사랑하고 섬기고 싶어서 애절한 가슴으로 늘 교회 주변에 자기 자신을 담궜는데, 갑작스런 병으로 인해서 평생을 병원이라든지 침대에서 인생을 마무리해야 되는 사람들, 이런저런 이유들로 자기의 삶이 완주하지 못하는 것 같은 분들을 보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그들의 삶을 이해하십니까? 목회를 하면서 저는 이런 분들의 장례를 집례하게 되면, 뭐라고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급하게 쓰시려고 천국으로 먼저 데려가셨는가 봅니다.’ 라고 말은 하지만, 제 안에서 질문이 연이어 튀어나오지요. 그러면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거 같은 이 사람의 인생은 어떻게 되는가.
이런 의문을 가진 가운데 한 2년여 전에 책 한 권을 손에 넣어서 정독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보문고에서 1년 이상을 베스트셀러로 읽혀졌던 책인데, 제목이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입니다. 내 삶이 불행하다고 지금 느껴지는 사람들, 인간관계 때문에 끊임없이 스트레스를 받고 어려움을 겪는 분들에게 기독교서적은 아니지만, 정독을 권해 드리는 아주 좋은 책입니다. 책의 저자는 아들러라는 심리학자의 통찰을 가져와서 이런 말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인생을 실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선에는 항상 목적지가 있다. 그런데 만일 인생이 정상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등산이라고 한다면, 인생의 대부분을 우리는 정상이 아닌 길 위에서 보내게 된다. 즉, 산 정상에 오르는 순간부터가 진짜 인생이 시작되고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노정은 가짜인 내가 지나온 가짜 인생이 된다. 그러나, 인생은 사실 선이 아니라 점의 연속이다. 지금 오늘 여기에서 한 점 한 점 을 충실하게 찍고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그 자체로 이미 그 삶은 완결된 것이요, 완성된 것이다.’
제가 이 대목을 읽으면서 무릎을 쳤던 것이, 목회를 하면서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앞에서의 고민을 하나님이 이 책을 통해서 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것 같아도 괜찮다. 자기 자신 인생의 마지막 목적지 이루지 못했다 하더라도 괜찮다. 그것이 35살 이건 80살 이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죽는 날까지 여호와 앞에서 최선을 다해 산 그 자체로 삶은 이미 완결된 것이고 완성된 것이다. 맞는 얘기죠? 그러고 보니까 이것이 기독교의 인생관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175세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오늘 주신 본문 창세기 25장 7절을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향년이 175세라’ 그냥 슬쩍 보고 넘어갈 말씀이 아니에요. 아브라함의 향년이 히브리어 원어으로는 ‘그리고 이것들이 아브라함이 산 생명의 년들의 날들인데 그것이 175세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여태까지 아브라함의 인생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사건들이 생명의 년들의 날들이다. 한 날 한 날 겪었던 모든 일들이 모여서 그의 175년 일하는 인생을 형성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아브라함의 인생은 175m 짜리 선이 아니고 총 365일 곱하기 175년 하면 63,875 마디예요. 63,875 마디에 하루하루라는 연속이 이어져서 마침내 그것이 175년이라는 인생의 겉으로 보이기는 선이지만, 실제로는 점이요, 마디의 연속인 인생이 형성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인생을 선이 아닌 점(순간)의 연속으로 보았다는 뜻입니다. 사건의 연속이 결국은 인생을 만든다고 보는 것입니다. 성경적 인생관이었습니다. 인생을 선으로 보는 대신에 신의 한 날 한 날에 점이 쌓여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관점이 왜 중요하냐?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간관에 있어서 시간을 선으로 바라보거나 나선형의 연속으로 보는 데 그리스도인들 성경의 세계관 시간관은 점에 쌓여 있는 것, 점의 연속으로 본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
첫째 인생을 점으로 보고 살 때, <바로, 지금, 여기에서> 존재할 수가 있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인생을 선으로 보면 항상 우리는 오늘을 어제와 연결시키고 내일과 연관시켜서 보게 됩니다. 과거의 결과로 오늘의 내가 있다고 이해하게 되는 거지요. 어제 회사에서 상사에게 꾸중을 듣고 화가 나는 일로 상처를 받았어요. 선이기 때문에 그것이 해결되지 않는 한 나는 오늘 우울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도 내일의 삶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할 수 있겠죠. 부모를 잘못 만나서 내가 이렇게 잘못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때 잘못 판단한 것이 평생 한이 되어서 지금 내 삶이 일그러지고 있다, 그때 겪은 아픔으로 인해 나는 지금 행복할 수가 없어. 전부 인과론적인 시간관이고요, 오늘날 현대인들의 심리 세계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프로이드식 인간이해입니다. 네가 지금 무엇인가 어려움이 있고 잘못된 것은 항상 과거의 어딘가에 트라우마로 인해 네 삶에 꼬인 흔적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타임머신 타고 과거로 돌아가서 그때 상황을 고칠 수도 없고, 그냥 털어 버리기에는 이미 내 안의 과거는 현재의 나에게 너무나 강력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그런 인생의 곤란한 사람들이 연속이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선이 아니라 점으로 한번 보세요. 점으로 보면, 어제 일어난 일은 어제 일어난 일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오늘 새로운 점을 새롭게 찍을 수가 있습니다. 비로소 두고 온 과거에 묶이지 아니하고, 오지도 않은 내일을 놓고 미리 염려하지 않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삶을 연속적인 선으로 보면서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난 175년을 ‘하루하루 지금 여기서’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어제의 실수와 잘못이 오늘의 자기 자신을 지배하도록 놔두지를 않았습니다. 프로이드 식으로 얘기하면 이 사람은 아버지 자신이 아브라함이 잘못된 삶을 출발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굉장히 안 좋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아버지 데라가 고향 땅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하다가 중간 지점 하란 땅에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결국은 거기서 인생을 마무리해 버렸습니다. 생이 하란에서 꺾여 버린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런 아버지의 잘못된 인생 결론에 영향을 받지 아니하고 오히려 영의 아버지 하나님의 손을 붙들고 아버지가 실패했던 바로 그 가나안 땅에서 다시 일어나 약속의 땅을 향하여 전진했던 것입니다. 부모 잘못 만났다고 핑계 대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낯선 곳으로 자기를 던져 넣기가 힘드니까 두려우니까 지금 있는 이 자리에 불편하지만 계속 있으려고 하는 그런 상황 속에서 부모 핑계 대지 않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아브라함은 여러 차례를 실패합니다. 두 번이나 자기 아내 사래를 여동생이라고 속여서 자기 아내가 상처를 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의 자존심도 상했지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종 하갈과 동침을 하여서 결국은 가족 속에 엄청난 내분이 일어났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런 일들이 있고 난 뒤에 이런 년들의 날들이 있고 난 다음 날 그는 항상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상하지요. 선이라고 보면 어제 잘못은 오늘 자기에게 반드시 영향을 미치거든요. 우리가 ‘죄 짓지 말아야 된다, 죄 짓지 말아야 된다’ 하는데 왜 성도가 죄를 멀리하는 것이 중요하냐면요, 죄를 짓는 순간 그것이 하나님께 범죄가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미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제 양심 속에 성령이라는 것을 집어 넣어 주셔서 죄를 지었을 때는 반드시 자책감과 정죄감이 찾아 오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좋은 것입니다. 영적인 알람 시계예요. 그리고 이 정죄감이 나로 하여금 굉장히 내 자신을 어찌 감당 할 줄 모르게 만들어놓습니다. 그러니까 그 때부터 자신의 페이스가 흔들릴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남들은 그냥 나를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고 있는데도 나는 무엇인가를 하다가 들킨 것 같이 마음이 심히 흔들려요. 자연히 삶의 걸음에 있어서 옆으로 비켜 나가기 시작하는 것이죠. 그래서 조심해야 되요.
아브라함의 175년 안에도 이 년들의 날들마다 노래 묶여서 어두침침한 나락으로 떨어져 버릴만한 순간이 수없이 많이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이 사람은 실패한 다음에 항상 벌떡 일어나 이전보다도 더욱 쑥 자라 있습니다. 과거에서 현재를 살지 않고 어제에서 오늘을 살지 않고 어제가 오늘의 나를 지배하도록 놔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루하루를 하나님 앞에서 바로 지금 여기에서 다시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게 히브리인들의 시간관이고 그리스도인의 시간관이에요.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입니다. 과거는 과거 현재는 현재입니다. 그래서 이전 것은 어제 밤으로 지나갔고, 오늘은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선포하고 시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선포하고 시작하면 희한하게도 어제의 과거가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확인하게 되지요.
에베소서 4장 26절에 보면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이 말이 나옵니다. 유대적 시간관에서는 해가 떨어진 저녁이 하루의 시작입니다.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아라 이 말은 해 지기 전에 일어난 일 즉 어저께 일어난 일이 하루 전에 일어난 일이 오늘 너의 영혼과 생각을 지배하도록 그대로 놔두지 마라. 라고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인생을 하루를 마무리 하기 전에 반드시 기도를 통해서 그 날의 하루를 마무리하고 종지부를 찍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 기도를 함으로 시작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 앞에서 마무리하고 하나님 앞에서 새로 시작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두고 온 과거가 오늘의 새로운 출발을 가로막거나 점령하거나 집에 하지 못하도록 하는 굉장히 중요한 영적 순간인 것을 우리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이에요.
그런데 저나 여러분들은 왜 그렇게 과거에 늘 묶여서 삽니까. 상담을 하다 보면 부모를 잘못 만나서 내 인생이 펴지 못한 것 같다고, 그때 내가 잘못 판단해서, 목사님 목사님 말씀드리는데 그때 제가 내 남편 만나지 말았어야 되는데 언제 만나지 말았어야 되는데 자기 인생을 그것 때문에 구부려 졌다고 보는 거예요. 과거가 지금 내 인생의 어떤 식으로든지 안 좋은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여러분들이 대단히 모질게 느끼실 수도 있지만 그것은 핑계입니다. 지금 자신을 솔직하게 인정하고요, 저와 여러분들이 있는 그대로의 지금의 나를 받아들이고 용기 있게 수용하여서 다시 시작하려고 남은 생을 얼마든지 새롭게 출발 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화살을 불러서 지금 나의 행복하지 않은 삶을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그는 아마도 그렇게 누군가에게 화살을 돌림으로 불만족스러운 이 삶을 계속 살아가기로 작정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또 어째 오지도 않았는데 일을 놓고 그렇게 염려 들을 많이 하세요. 내가 10년동안을 외국 생활을 하다가 한국에 들어왔더니 가장 많아진 것이 두 가지가 있더라고요. 하나는 커피숍이 너무너무 많아졌구요 두번째로는 우리 국민들이 보험에 굉장히 관심을 많이 가져요. 그런데 제가 TV를 보니까 인간의 미래에 대해서 미리 준비하는 것은 좋은 태도이지만, 과도하게 내일이나 미래나 노후에 대한 불안과 염려와 걱정을 집어넣어 줘서 실제보다 더 과대포장 되어서 우리 자신을 염려 속에 집어넣은 것을 보았어요. 보험하는 분들한테는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잖아요. 마태복음 6장 34절 보면 뭐라고 했습니까?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누가 염려 한다고요?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기가 막힌 말씀이에요. 내일 일은 네가 염려할 것도 아니고 네 가족이 염려할 것도 아니고 내일 일은 누가? 내일이 염려해.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한다는 말은 내일 일은 내일이 오면 그 내일이라는 놈이 염려할 것이니까 너는 걱정 붙들어매고 오늘 지금 여기서 충실하게 나 예수와 함께 살아라. 그 말씀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기가 내 삶의 중심입니다. 오늘 지금 드리는 이 예배가 내 삶의 중심이에요. 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영적으로 진보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마음가짐이요, ‘here and Now’, 지금 여기에서 신앙입니다. 성도들이 예배에 집중하지 못하는 몇 가지 이유가 있어요. 예배에 대한 기대감이 없어질 때 예배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또 지금 드리고 있는 이 예배는 다음 주에도 드릴 수 있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이 있습니다. 잘못된 예배관이고, 잘못된 시간관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는 한 번만 있을 뿐입니다. 한번 흘러간 물은 절대로 나는 다시 만날 수가 없어요. 우리 하나님은 항상 현재의 하나님이에요.
모세가 하나님 만났을 때 ‘나를 보내는 분이 누구냐고 물으면 내가 뭐라고 대답하리이까?’ 그랬더니 하나님 뭐라고 그러십니까? 나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라. I am who I am, 하나님은 항상 현재 계시는 분이십니다. 과거의 하나님도 아니고 미래의 하나님도 아니에요. 사실은 영원한 현재이신 분이 하나님 자신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진면목은 과거에 있는 기억을 끄집어 오는 것도 아니고, 미래에 있는 것들을 소망함으로 바라보는 것도 아니고, 사실은 신앙의 진 면목은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 이게 신앙의 진면목 입니다. 내가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하나님이 가장 주목해 보시고 있는 부분이죠. 과거가 중심이 아니고 오지도 않은 미래가 중심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가 중심이구요 필요한 경우만 과거를 잠깐 방문하고 필요한 경우만 지혜를 얻기 위해서 미래를 힐끗 들여다 보고 다시 돌아와야 돼요. 여기가 삶의 중심입니다.
둘째, <바로, 지금, 여기를 살 때>, 하나님이 이 순간 내게 주시는 기쁨을 향유하며 누리며 살아갈 수가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에게 좋은 것 주시기를 원하세요. 그분은 좋으신 하나님이세요. 그렇기 때문에 성도가 늘 주님 섬기면서 얼굴이 구겨져 있고 십자가를 고행하는 마음으로 지고 가는 그런 신앙을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세요. 그분은 그 고난 가운데서도 주시는 은혜가 항상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 중에 좋은 것을 좋은 것으로 받지를 못하고 자기에게 주는 기쁨을 항상 유보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사람들이 같이 등산을 했습니다. 숨이 턱에 차오르는 마지막 고갯길, 깔딱고개라고 얘기를 하지요 깔딱 고개를 넘어서 마침내 정상에 올랐어요. 온 산에 단풍이 울긋불긋하게 들어서 ‘야, 기가 막히게 좋다.’ 고 모든사람들이 일행들이 탄성을 지르는데, 옆에서 꼭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 좋네, 그런데 이런 산은 겨울에 눈 높이 있을 때가 훨씬 좋아.’ 여러분, 이 사람 지금 뭐 하고 있는 것입니까? 지금 여기서 이 순간을 살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여기서 하나님이 주신 이 순간을 누리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내게 주시는 기쁨을 향유하지를 못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삶을 끊임없이 유보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지 마십시오. 목적을 이루기까지 인생은 그냥 거기까지 가는 단순한 과정이 아니에요. 그 과정 속에 기쁨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목적지를 생각하면서 인생을 살지를 않았습니다. 약속이 있지요. 그러나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 전까지의 삶은 덜 가치 있고 가짜 비슷한 삶이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그랬다면은 아들 이삭을 얻기까지의 그의 삶은 항상 만족스럽지를 못했을 것입니다. 그가 그 인생을 목적 지향적으로, 즉 약속이 이루어졌을 때야 비로소 삶이 완성된 것이라고만 생각했다면, 그는 그렇게 해서 자기의 인생의 결론으로 주신 그 이삭을 하나님이 내놓으라고 하셨을 때 절대로 그 아들 내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들 하나 보고 살아왔던 자기 삶의 송두리째 뺏길 것 같이 느껴졌을 것입니다. 인생 전체가 부정되는 것이지요. 이 사람 바로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바로 오늘 여기 있어 행복하게, 충만하게 살았어요. 자기 앞에 있는 사람들 사랑하고 무엇보다도 자기와 함께 동행해 주시는 하나님 사랑하고 섬기며 살았습니다. 그 생명의 년들의 날들이 쌓이고 쌓여서 몇 년이 되었다, 175년이 된 거예요. 창세기 25장 8절을 보면 기가 막히게 히브리어가 표현을 합니다. 25장 8절을 여러분 보시면 ‘그의 나이가 높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이렇게 나왔는데 히브리 원어로는 ‘아브라함이 나이 많고 만족한 좋은 노인으로 죽었다’ 이렇게 나옵니다. 아들을 얻기까지는 초조하고 불안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고 하루하루를 만족하고 기쁨에 찬 삶을 살아서 그것이 인생 전체를 구성하고 행복하게 눈을 감았다. 이런 인생 사실 수 있게 되기를 축복 드립니다.
제가 이전 교회를 6년 가까이 목회를 하고 떠나올 때 한 성도가 장문의 편지를 썼었습니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이런 글을 썼었습니다. ‘목사님은 저희와 20여년은 함께 하실 것이라 생각하고 표현하고 싶은 정도 사랑도 감사의 말들도 다 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가시게 되니 다하지 못한 그 표현들로 인해 마음이 아픕니다.’ 그 성도 에게 제가 답을 했습니다. ‘다음 목사님 오시면 좋은 마음 담아 두지 마시고 그냥 얘기하세요. 오늘의 좋은 것이 내일도 당연히 지속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성도님, 다음에는 오늘을 사세요.’ 여러분 오늘을 사시기 바랍니다. 오늘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누리세요. 그때 그 하나님이 좋으신 것을 알면서 믿음도 깊어지게 됩니다.
셋째로 바로 지금 여기에서 살 때 하나님이 내게 보여 주시는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설교자가 너무 삶을 나이브하고 낭만적으로 보는 것 아닌가, 인생에는 불확실하고 불투명하며 애매모호한 것들로 가득 차 있는데, 그 속에서 과연 기쁨으로 산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맞아요. 인생은 불확실하고 불투명합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삶에서 배울 부분이 있다고 저는 봅니다. 그분처럼 삶이 불확실하고 불투명한 것으로 가득찼던 분이 어디에 있습니까? 성도는 미래가 어떻게 된다 할지라도 우리의 결국은 천국입니다. 그것 만으로도 그리스도인은 소망으로 살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좋은 길을 닦아 주시기 위해서 가시덤불 길을 살 찢기시고 발을 찢기시면서 해쳐 나가셨잖습니까?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이 적대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자신의 미래가 되는 제자들을 보면 철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미래는요, 장미빛 미래가 아니었지요. 부활이라고 쉽게 얘기하지 마십시오. 인류의 역사상에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고 아무도 가보지 않은 그 길이 그 일이 자신에게 일어날 수 있다고 어떻게 예수님이 100% 보았을 거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그 분은 하나님이시되 인간이셨던 것입니다.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인간적으로는 그 생각만 해도 지금 찰나로 얻는 기쁨이 순식간에 날아가 버릴 것 같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지극히 고유하고 평온하며 기쁨에 넘쳤었습니다. 지금 여기서 당신에게 부어 주시는 성부 하나님의 은총으로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총만으로도 자신에게 언뜻 언뜻 보이는 불안감을 날려버리기에 충분했기 때문이에요.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늘 영안을 열 수 있게 해 달라고 여러분들을 위해서 제가 얘기하고 도전하지 않습니까? 영안이 열려야 돼요. 눈이 뜨여져야 됩니다. 지금 여기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나를 충분히 숨쉬게 하고 충분히 살아있게 하며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는데 넉넉한 은혜이다. 이게 보여야지 됩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없는 그 은혜가 믿는 사람에게는 이미 내 손에 쥐여줘 있어요. 선물은 차고 넘칩니다. 문제는 불평하느라고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 거지요. 오늘 하루를 기쁨으로 살기에 충분한 은총은 반드시 어디엔가 있습니다. 염려하느라고 그 은총이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저는 성도들의 중보를 하나님이 받으셔서 하나님이 살려 주시고 난 뒤에 9월 첫 주에 강단에 복귀했지 않습니까? 복귀는 했지만, 몸이 무겁고 힘드니까 마음도 너무 너무 무겁더라구요. 은총이 거두어진 것 같았었습니다. 살기 위해서라도 기도해야겠다 싶어서 몸이 아직 추스려지지 않는 것 같은데도 제가 끊어졌던 창세기 묵상을 다시 하기로 결심을 하였습니다. 새벽 3시 한 50분쯤에 시간을 맞춰 놓고 눈을 뜨면 커피 한잔을 딱 갈아서 먹고 전날에 준비해 놓았던 차를 끓여서 역시 전날 밤에 냉동실에서 꺼내 놨던 찰떡 두 개를 요깃거리 삼아 먹으면서 말씀을 묵상하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말씀 준비를 하기 위해서 새벽에 일어나 하나님 앞에 앉아 있는 그 시간이 얼마나 꿀 송이처럼 달고 오묘한 줄 몰라요. 이전에도 그렇게 했는데 그 9월달 그때 이후에 지금까지 그 1시간반 2시간은 제게 보석 같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9월 이후에 바로 그 시간들이 저를 살아있게 하고 숨쉬게 하고 목표에 대한 소망을 하나님 안에서 점점 다시 키워갈 수 있게 만들어 줬지요.
하루는 야곱이 밧단아람에 쫓겨서 살아가는 그 삶을 묵상하는데 7년을 외삼촌 라반에게 사기를 당하면서 섬기는데 그 7년을 며칠처럼 여겼다고 성경에 나와 있잖아요. 그러면서 앞에 이유를 말씀을 했어요. ‘야곱이 라헬를 사랑하는 고로 7년을 수일처럼 여겼더라.’ 눈에 딱 곶혔습니다. 아, 하나님이 밧단아람 세월 이기게 하시려고 야곱에게 주신 축복이 바로 라헬이었구나, 야곱의 숨구멍으로 주신 은총이 이 라헬이에요. 이 라헬을 생각하면 자신의 과거의 실수도,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불안감도 현재 그 밧단아람에서의 거친 종살이도 날려버릴 만한 충분한 은혜가 되었던 것입니다. 라헬이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선물이었던 거지요. 그러고 보니까 제 라헬이 바로 아침 묵상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하던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라헬은 지금 여러분들에게도 이미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를 안 믿는다면 모르되, 내가 예수를 믿고 성령이 내 안에 와 계시면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어떤 삶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그 은혜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그 라헬을 손에 쥐어주셨어요. 염려하기 때문에 그게 보이지 아니하고 조바심치기 때문에 그것이 나에게는 없어져 날아가 버린 것 같고, 혹은 불평하기 때문에 그 은총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 것 같지만 반드시 그 라헬 하나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때 성도는 그 라헬에 자기의 영혼의 빨대를 깊이 꽂아 놓고 하나님과 그 안에서 교제하고 사귀면 시험을 이겨 가게 되고 고난을 넘어가게 되고 내 인생 속에 있는 험난한 믿음의 시간들을 훌쩍 뛰어넘을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여러분, 바로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 감사하세요. 그리고 사랑하고 기뻐하며 사세요. 쾌락주의로 살라는 말씀이 아니에요. 내일일 걱정하면서 살지 않고, 오늘 내게 주신 작은 것 하나에도 감사할 줄 알면서 내 인생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 라헬 그것이 기도의 시간이건, 아침에 일어나서 마시는 커피 한잔의 시간이건, 아니면 짧게 묵상하는 그 말씀의 시간이건 그것을 사모하면서 살아가십시오. 그래서 오늘 하루를 최선을 다해서 내가 춤을 추고, 그렇게 사는 것이 쌓이고 쌓여서 어느 날 돌아보면 아, 내가 여기까지 왔구나 하고 스스로에게 놀라는 그 날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