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하나님 나라의 부르심 (막1:16-20)

마가복음 강해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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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한번씩 저희 두 딸들과 장래희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합니다. 첫째는 이것저것 자꾸 바뀌더니 최근에 학교에서 교생실습 나온 선생님을 보고 나선 선생님이 되고 싶어 합니다. 둘째는 경찰이 되고 싶다고 했는데 첫째가 총맞을수도 있다고 말해주자 아쉽게 포기할려고 했습니다. 제가 교통 경찰도 있다고 말해주니 그 쪽으로 생각해 보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의 꿈 이야기를 들을 때면 그들의 무한한 가능성이 부러워지곤 합니다.
저도 유치부 시절엔 경찰을 꿈궈보기고 하고, 초등학생 시절엔 선생님, 택시운전사 등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다 입시준비에 맞춰 대학에 들어가니 대학해서 또 진로를 많이 고민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서 선교에 대한 마음이 생겼고 또 사역자에 대한 마음도 주셔서 신대원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서도 정말 귀하게 쓰임받는 사역자에 대한 꿈을 가지고 사역지에 나왔지만 저의 기대와 다른 제 모습에 속상할 때가 많습니다. 이제는 나도 모르게 부족한 것이 많은데 준비할 시간은 없게만 느껴져 자꾸만 꿈을 꾸는 것이 사치스럽게 느껴집니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삶에 대한 회의감이 들때가 많습니다. 자녀도 양육해야 하고, 부모도 부양해야 하고, 생존을 위해 감당 해야할 업무와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보면 내 삶은 무엇인가 분주한데 성취감과 기쁨이 없어집니다. 우리는 모두 의미있는 존재로 살고 싶은 욕구가 있는데 그것이 채워지지 않으니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도 낮아져 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의미있는 삶으로 부르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여서 그 나라를 세워가는 자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기 위해선 지난번 나눈 것처럼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거기서 뭄추면 안됩니다. 하나님 나라을 경험한 감격에서 그치면 우리는 곧다시 신앙의 매너리즘에 빠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공동체를 통해 확장되어 가도록 하나님께서 의도하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진정으로 경험했다면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사명자의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그들은 새로운 삶을 꿈구기엔 열악한 상황 이었지만 그 부름에 응답했을 때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위대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성경의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열악하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습니다.
Ex) 모세: 40세에 민족을 돌아보려다 살인을 범하고 광야로 갔다가 80세에 다시 출애굽을 위한 지도자로 부름받음
기드온: 미디안 사람이 두려워 포도주 틀에 숨어 타작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음
예레미야: 아이라 말할 수 없다고 함
우리도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부르심을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연약하고 부족해도 하나님 나라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1. 예수님이 불러주십니다(16)

부르심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생각에 맞게 선택하시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이 그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당시 문화에서는 제자들이 따르고 싶은 훌륭한 랍비를 찾았는데 예수님은 스스로 제자들을 선택해 부르셨습니다.
()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지나가시다가: 우연히 지나가신 것이 아닙니다. "갈릴리 해변을 따라서" 걸어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해변길로 간 것은 예수님이 찾는 사람들이 그 곳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갈릴리는 초기 예수님 사역의 중심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 땅 중에서도 가장 소외되고 어려운 사람들이 있던 지역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들고 가셨고 거기서 제자들을 찾으였습니다.
예수님은 권력과 돈의 힘으로 움직일 수 있는 예루살렘성으로 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많이 아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있는 곳으로 가지 않으셨습니다. 예배의식을 잘 드릴 수 있는 성전으로 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부들이 있는 그 곳에 자신이 찾으시는 제자를 만나기 위해 가셨습니다.
보시니: 주목해서 보다. 주님이 부르실 자를 주목하셔서 보셨습니다.
19절에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실 때도 마찬가지 표현이 사용됩니다.
()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주님은 아무도 보지 않는 것 같은 우리 삶의 자리에도 찾아 오십니다. 우리 일상의 자리가 바로 주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시몬과 안드레는 그물을 던지고 있었고 야고보와 요한은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삶의 자리에서 여기저기 수없이 많이 그물을 던지지 않습니까? 무엇으로 이 그물을 채울까 고민하고 바라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 그물을 자꾸 쓸수록 깁고 보수해야 합니다. 우리 삶에도 열심히 할수록 드러나는 문제점들이 보이지 않습니까? 저도 나이가 들수록 채워지지 않는 욕구들을 더 발견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자꾸 제 문제점들이 더 보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별 볼일 없을 것 같은 그 어부들이 있는 바닷가로, 또 우리들이 있는 삶의 자리로 주님이 부르시기 위해서 찾아 오십니다.
본문이 제자들도 우리처럼 기대할만한 것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주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나라는 로마에 포로 상태이고, 유대인들이 좋은 직업을 가지고 생존하기엔 정말 열악한 상황이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타락해서 기댈 곳이 없었고, 나이는 많아서 가족을 부향해야할 책임감에 짓눌리고 있을 때 바다의 어부였습니다.
사실은 우리 스스로는 특별함이 없는 존재인 것을 깨달을 때 주님의 부르심이 들립니다. 내가 잘나면 주님의 부르심은 관심도 끌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부족하고, 내 삶은 늘 똑같은 일의 반복인데 그런 나를 택하시고 불러 주시고 인정해 주시고 새롭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주님의 특별함을 잘 알기에 의미있는 삶에 대한 동경이 일어났고 주님의 부르심에 따라나설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부름에 응답할 자들이 바로 이들이었기에 이 바닷가로 찾아 오신 것입니다.
우리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내 일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부르심을 외면합니다. 반면에 내 일 속에 찾아 오시는 주님을 만날 때 내 일상도 부르신 사명자의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엘리 대제사장은 자기 처소에서 누웠고 사무엘이 성전에서 잠들었을 때 제사장이 아니라 아이 사무엘이 주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위치, 직업, 역할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을 주님이 쓰시는 것입니다. 반면에 부르시는 음성을 무시할 때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고 의미없는 것을 추구하는 인생이 됩니다.
() “1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2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우리를 가장 잘 아시는 주님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맙시다. 내가 아니라 주님이 특별하시기 때문에 우리 인생은 특별해 질 수 있습니다. 우리처럼 연약한 사람을 찾아 오시고 주목해서 보시고 불러 주시는 주님의 음성에 반응합시다. 혹시 이미 들었는데 외면하고 포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상황이 아무리 열악하고 도저히 바뀌지 않을 것 같더라도 주님이 불러 주셨다면 잊지말고 포기하지 맙시다.
()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2.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17)

마가복음은 이들과 예수님의 만남을 짧게 소개하고 있지만 우리는 다른 복음서를 통해 베드로와 안드가게 이미 이전에 주님을 만났던 적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가 이 내용을 간략하게 쓴 것은 예수님의 왕적 권위와 제자들의 결단력있는 즉각적 순종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침례요한의 제자였다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소개받고 따랐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잡게 하신 기적 체험
주님은 전에 만나서 복음을 전했던 그들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던 그들을 왜 또 다시 찾아 오셨을까요? 제자로 부르시기 위해 다시 찾아 오신 것입니다. 복음을 깨닫고 감격한 것에서 멈추어선 안됩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의 출발입니다. “너의 죄가 용서되었다”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면 “나를 따라 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따르다" :마가복음에서 제자도를 나타내는 주요한 단어입니다.
세리 마태인 레위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2:14)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 청년에게 가진 것을 모두 팔고 '나를 따라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승천하시기 전에 베드로에게 죽음까지도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을 권위자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좋은 가르침을 주셨던 선생에서 충성의 대상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익숙했던 삶의 방식을 버리고 예수님의 방식을 따르는방향의 전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의 공동체에 속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격적인 관계 요청에 응해서 운명을 같이 하기로 하며 한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 나에게 맞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을 주십니다. 어부이기에 그 특성을 살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낚는다”라는 단어가 좋은 의미로 잘 안쓰는데 당시 유대인들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단어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부르시면 우리에게는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고 새로운 역할이 주어지게 됩니다.
“되게 하리라”: 예수님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으로 그렇게 하십니다. 부담스러워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동기화에 탁월한 분이십니다. 억지로 짐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감동을 주셔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이 예수님의 “되게 하시는” 놀라운 능력이 제자들에게 나타납니다.
()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곧바로 따랐습니다. 그물을 버려두고 아버지와 품군들을 버려두고 따라갔습니다. 예수님으 제자가되기 위해서는 이것은 직업과 가족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선 순위가 바뀐 것입니다. 우리가 우선 순위만 바로 세운다면 우리가 버린 것들은 방치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해결해 주십니다. 베드로의 장모님을 고쳐주시기고 하시고, 제자들의 삶에 굶주리지 않고 살 수 있게 간섭하셨습니다.
부자 청년처럼 버려야할 것에 집중하면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대가를 지불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지만 우리의 초점은 부르시는 주님께 맞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그분으 성품을 알고, 그분의 비전을 알고, 그분의 방식을 알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부르심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분이 주시는 더 큰 벅찬 감동의 삶, 의미르 깨닫는 삶, 쓰임받는 기쁨의 삶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꿈이 있는 자유 "갈릴리 작은 시골길"
갈릴리 작은 시골길 따라 우리에게 오신 주님 그 겸손하고 깊은 마음 사람들 알지 못했지만 그 빛이 우리 가운데 오사 우리의 어둠을 비추시며 우리가 있었던 어둠에서 우리를 구원했네 우리를 구원했네 그분 가는 곳 그 어디든지 하신 말씀 무엇이든지 그 눈길 닿는 이 누구든지 세상의 것과는 다른 다른 힘을 느낄 수 있었네 다른 기쁨 느낄 수 있었네 다른 평안 가질 수 있었네 그 분 만난 날부터 그 분 만난 날부터 가진것 아무것 없다는것 내세울 이름 하나 없는 것 지은 잘못이 많다는 것 건강치 못한 것도 아무런 문제되지 않았지 이미 우린 그분의 형제였네 우리는 그분의 친구였네 그 사랑 앞에서 그 이해 안에서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사랑 없나니 말씀하신대로 그분은 우릴 위해 죽으사 나의 모든 짐을 대신 지신 하나님 다시 사셔서 내 안에 계신 그 분은 나의 주님 이 세상 많은 이름 중 가장 귀한 이름 그 갈릴리 작은 시골길 따라 나의 이 길도 시작 되리니 내가 살아간다는 것은 그 분을 닮는 것 그 길위에 서는 것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시기 위해 너무나 평범하고 기대할 것 없는 우리 삶에 찾아 오십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 나라의 부르심에 응답할 때 바로 그 평범하고 기대할 것 없는 우리 삶에서부터 주님을 따라가는 삶이 시작됩니다. 이미 그곳에서부터 예수님 때문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따라 가는 여정은 평탄하지많은 않고 고단함이 분명히 있을 것이지만 주님으로 인한 생명의 풍성함이 나누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기쁨이 있는 길이 될 것입니다. 나를 인정해 주시고 의미있는 삶으로 부르시는 그 하나님, 그리고 반드시 그렇게 되게 하시는 주님의 설레이는 요청에 응답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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