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권위 있는 새 교훈 (막1:21-28)

마가복음 강해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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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며칠전에 우연히 인터넷에서 무너진 교권에 대한 영상을 보았습니다. 그 중에 어떤 고등학교의 학생들이 기간제 교사를 놀리며 빗자루로 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학교 교육을 통해 아이들의 인성이 바뀌는 것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가정에서도 부모의 권위가 세워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저도 자녀들을 바르게 양육하지 못하는 제모습을 발견할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힘으로, 나이로 자녀들의 의견을 무시하면서 제 주장만 말하는 때가 많습니다. 청년 사역자로서 청년들을 양육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1년 단위로 세대차이가 다르게 느껴지는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 참 쉽지 않습니다. 세상의 문화는 급변하는데 우리 아이들은 악한 영향력만 더 잘 받는 것 같습니다. 나 자신은 좋은 권위자가 아니면서도 우리 자녀들만은, 우리 다음세대들만은 좋은 권위자를 만나서 변화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 복음도 전해야 하고 선한 영향력을 미쳐야 하는데 우리의 말에 권위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해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색안경을 끼고 바라봅니다. 그리스도인을 무시하거나 불편하게 여겨 피해 버립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서 진정한 권위가 나올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가르침을 향해 사람들은 권위 있는 새 교훈이라고 말하며 놀랍니다. 그들이 지금까지 알아왔던 권위와 차원이 다른 권위를 느낀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떤 모습이 그렇게 느껴지게 했을까요? 사실 그들은 아직 온전히 예수님을 알아보진 못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구원자였기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진정한 권위는 사람에게서 나올 수 없습니다. 인간은 타락한 죄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스스로에게서 권위를 내려할수록 악한 권위가 나옵니다. 진정한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만 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권위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권위에 집중할 수 있게 도와야 합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의 3대 사역은 가르침, 복음 전파, 치유 사역이었습니다.
()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사역을 시작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부르셨고, 오늘 본문에서 가르치는 사역과 치유의 사역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진정한 권위를 가진 자임을 알려주기 원하셨고, 제자들이 그런 권위를 배울 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가버나움은 엄청난 부가 있었던 번영한 도시이자 죄와 퇴폐가 만연한 도시였습니다. 로마 군대들의 사령부가 있는 이방 문화의 영향이 깊게 밴 곳이었습니다. 우리시대 대도시처럼 이 곳이야말로 하나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에 도전이 필요한 장소였습니다. 그 가버나움의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수님이 가르쳤습니다.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선포되었을 때 모든 사람들이 충격받을 정도로 놀라움이 가득했습니다. 예수님이 오기 전에도 분명히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이 있었던 자리였지만 그곳에 예수님이 임하셔서 가르치자 권위에 대한 인정과 귀신이 떠나가는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지금 예배드리고 말씀을 배우는 이 교회에서 하나님의 권위에 놀라고 치유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는지 질문하게 됩니다. 지금의 교회도 부유함과 세상 문화에 가려져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감격도 없고 치유의 역사에 대한 갈망과 체험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도 이런 권위있는 가르침과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원한다면 다시 한번 우리 예수님을 이자리에 주인으로 초청하며 그분께 집중해야할 줄 믿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가운데 여러 기적 중 가장 먼저 이 기적을 기록하였습니다. 마가가 처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라고 선포한 이 복음을 첫 기적에서부터 드러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마가는 이 예수님의 탁월한 가르침과 치유사역을 통해 예수님의 권위를 드러내기 원했습니다.
예수님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야말로 복음입니다. 우리의 예배의 자리, 삶의 자리에도 예수님께서 임하시면 마귀의 속박에서 승리하게 되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 본문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예수님의 권위 있는 새 교훈은 세상의 권위와 무엇이 달랐는지를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자녀를 향해, 세상을 향해 진정한 영향을 미치기 원한다면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왜곡된 권위가 아닌 예수님이 가지신 이 권위를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1.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2)

()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예수님의 가르침이 권위 있었던 것은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달랐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서기관은 예수님 시대의 법률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연구하였고 율법만큼 전통관습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파벌에서 권위를 찾았습니다. 또 유명한 랍비들의 말을 인용하여 가르치면서 권위를 드러내려 했습니다. 하지만 맞는 말을 해도 사람들에게 감동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자기 자랑, 지적인 유희로만 들렸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가르침은 지적 추구나, 이론적 논쟁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일상에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있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이 있었기에 생명력이 있있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들 영혼 깊은 곳의 갈망과 문제를 터치했기 때문입니다. 진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움직입니다.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예수님은 그냥 하나님의 말씀을 설명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만나고 경험한 말씀을 나누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 “니고데모”가 영적인 이야기를 말해도 이해하지 못하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우리의 가르침에 권위가 없는 것은 내가 만나고 경험한 하나님의 나눔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여 알지못하면서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지식의 전달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전해야 합니다.
()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만큼 우리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게 됩니다. 그것은 교만하게 하는 지식이 아니라 덕을 끼치는 사랑이 될 것입니다. 그 말씀은 경건의 모양만 나오게 하지 않고 경건의 능력을 경험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식으로 연구하는 것이 아닌 깊이 교제한 흔적이 있는 살아있는 말씀으로 나눌 때 사람들은 하나님의 권위를 주목하게 될 것입니다.

2. 거룩함으로 옵니다. (24)

귀신들린 자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인 줄 알았기에 두려워하고 예수님을 방해하려 했습니다.
()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악한 영의 말은 예수님을 인정하는 말투가 아니라 예수를 조롱하며 자신을 방어하는 말투입니다. 당시 문화에서는 상대방이 자신을 밝히지 않아도 알아보는 자를 대단하게 여겼습니다. 귀신은 예수에게 집중하게 하는 것이 아나리 그를 알아보는 자신에게 집중하게 한 것입니다. 또한 “나사렛 예수여”라는 호칭에서도 대도시 가버나움 시민들을 비롯한 유대인이 경멸하던 지역이었던 나사렛 출신임을 강조했습니다.
올바른 내용일지라도 그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복종하는 것이 진정한 고백입니다. 안타깝게도 교회 안에도 신앙에 대한 적당한 지식과 고백만으로 멈추고 예수님께 자신의 삶을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귀신은 그 정도에만 머물도록 충분하다고 우리를 미혹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귀신은 예배하는 장소, 말씀을 가르치는 장소에도 침입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방해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사역도 방해하려고 합니다. 하물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속에서 사탄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방해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향한 공격이 있음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적 전쟁을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 준비는 바로 평소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오는 거룩한 삶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갈 때 우리 스스로 영적 공격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됩니다. 반면에 거룩한 삶이 무너진 체 하나님의 사람인것처럼 흉내만 내려할 때 오히려 영적 공격에 무너지고 맙니다.
귀신도 하나님의 거룩한 자를 잘 알아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귀신이 알아볼수 있는 거룩한 삶이 있습니까? “예수이름으로 물러가라”는 단순한 구호를 외치는 축사사역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에서 스게와 제사장의 일곱 아들들이 바울을 흉내내어 축사사역을 하자 귀신이 역공격을 했습니다.
() “15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16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당시에도 귀신을 축사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여러 화려한 주술활동을 동반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 한마디로 귀신을 제압했습니다.
()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리는 거룩한 삶에서 나오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진정한 권위는 요란하지 않습니다. 권위가 없는 자들이 자신이 대단한 것처럼 무엇이라도 하나 화려하게 포장하려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잘못된 영적 허세를 빼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거룩한 삶으로 인한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허세가 아닌 우리의 삶에서 느껴지는 하나님의 거룩함이 있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의 권위를 주목하게 될 것입니다.

3. 자유케 합니다. (27)

예수님의 권위는 우리를 얽매이게 하는 권위가 아닙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문제들로부터 자유케 해주시는 권위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권위에 귀신은 복종하고 떠나갑니다. 귀신에게 묶여있던 그 사람이 자유케 되었습니다.
()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귀신이 나가면서 경련과 큰소리를 지릅니다. 마귀는 끝가지 분노와 저항이 있으며 하나님의 존귀한 형상을 파괴시키려 합니다. 그러나 최후의 발악일 뿐입니다. 그 고통스러운 경련과 큰 소리의 순간은 주님의 간섭하심으로 귀신이 떠나가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사탄이 아무리 강해보여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탄의 권세는 하나님이 정하신 한계 안에서만 허용됩니다. 더러운 귀신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때 비로서 우리는 예수님의 권위를 더 깊이 인식하고 인정하게 됩니다.
()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고 힘든 반응들이 나오는 때가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있는 순간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보시고 그 묶임에서 자유케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도 보여지는 현상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우리의 자녀들을, 무엇이 이 땅의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깊은 필요를 민감하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필요를 예수님만이 해결해 줄 수 있음을 알려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모든 묶임에서 자유케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오셨기에 귀신은 밖으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도 사람들의 필요에 민감하게 바라보고 그 곳에 예수님을 초청할 때 하나님의 자유케 되는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사람들이 묶임에서 자유케 될 때 비로서 하나님의 권위를 깨닫게 되고 우리가 하나님께러부터 보냄받은 자임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결론

군대에서의 경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범, 영향력이 없는 내 모습에 좌절함
나의 연약함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크시며 영광스러운 분이심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으로도 확증해 주셨습니다.
()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우리 자신의 조금 나은 것 같은 모습으로는 세상에 영향을 미칠 수가 없습니다. 로마서 말씀에서 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의로울 것이 없는 똑같은 죄인임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 죄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도록 가리고 있음을 말씀합니다.
()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인간적인 능력은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고 영향력도 없습니다. 오직 복음의 위대함만이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자꾸 사람들의 행동을 바꾸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갈등을 겪을 뿐입니다. 오직 믿음만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이 사람들을 도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하는가에 있어야 합니다.
()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주님의 권위를 보고 그 권위 앞에 무릎을 꿇게 해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가 영향력을 회복하기 원한다면, 우리의 자녀들과 다음 세대에 영향을 미치기 원한다면 우리가 먼저 주님의 권위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우리의 교회에, 우리의 가정에 주님이 임재하신다면 하나님의 권위가 같이 임할 것입니다. 교만하게 하는 지식이 아닌,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릴 것입니다. 겉모습의 화려한 활동이 아닌,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에서 나오는 거룩함을 사모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묶임에서 자유케 되는 놀라운 역사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교육부서 여름사역과 하반기 행복축제를 앞두고 있습니다. 주님의 권위가 드러나지 않으면 형식만 가득한 행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를 위해,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합시다. 예수님의 능력의 권위를 주목하고 그 예수님의 능력을 드러낼 수 있게 해달라고 시도합시다. 우리 다음 세대를 위해 기도합시다. 그들을 묶고 있는 모든 문제에 주님이 임하셔서 결박을 풀고 자유케 하시고 살아있는 하나님을 만나 그 권위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우리 주님의 영광만 볼 수 있다면 교회는 소망이 있고, 다음 세대는 소망이 있을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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