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말씀을 바라봅시다 (슥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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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서론
세상 속에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영향력이 너무다 약해졌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갱신 운동들이 일어나고 곳곳에 많은 몸부림이 있습니다. 스가랴서도 회복과 부흥의 약속으로 우리에게 힘을 주는 약속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다시 부흥하기 위해,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원인을 잘 분석해야 우리는 바른 대처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능력없는 삶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를 말씀에 대한 경외감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성도들처럼 열심있고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많은 사람도 없는 것 같은데 정말 말씀에 대한경외심이 상실한 것이 맞을까요? 좋은 설교자들 찾아다니고 방송도 많이 듣고 훈련도 받은 사람이 많습니다. 사실 요즘은 이것도 예전보다는 열정이 떨어지긴 했습니다. 정말 문제는 말씀을 삶에 적용시키는 훈련이 부족한 것입니다. 말씀처럼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이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제가 우리 아내가 어떤 말을 할 때 모르는 척 피할 때가 있습니다. 뱃살이 나오니까 운동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내 입맛에 맞는 좋은 말씀만 골라먹고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은 모르는 체하면서 어느새 영적인 비만에 걸려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에게 정말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은 들리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하나님은 경고의 말씀으로 다가오고 계십니다. 스가랴서의 처음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8가지 환상으로 시작합니다. 8가지 환상 중 앞의 5가지 환상은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중심으로 한 회복의 약속과 격려의 메시지입니다. 남은 3가지 환상은 심판의 경고 메시지입니다. 그것은 각 개인으로부터, 이스라엘, 온 세계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로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스가랴가 본 것은 날아가는 두루마리 였습니다.
() “내가 다시 눈을 들어 본즉 날아가는 두루마리가 있더라”
“내가 다시” 라는 말은 원어상 가던 방향을 돌이켜 반대 방향으로 가는 행위가 담겨져 있습니다. 1절을 직역하면 “그리고 나는 돌이켜서 나의 눈을 들었고 나는 보았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가랴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위치에서 주어지는 환상을 보고 주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두루마리는 구약 시대에 성경을 기록한 양피지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펼쳐져서 날아가고 있는 것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날아가는 두루마리의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않는 자들에게 말씀대로 심판하실 것을 경고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전 재건과 회복의 비전을 주시지만 죄를 방관하시면서 약속을 이루어 가시지 않음을 보여 주시는 것입는다. 스가랴서에서는 회복의 비전을 주시는 것은 결국 거룩의 회복,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회복하겠다는 것도 거룩함의 회복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성취하시지만 그 약속은 순종하는 백성을 통해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의 비전을 받고 출애굽한 백성이 믿음이 없어 불평과 불순종할 때 그 1세대가 모두 죽고 2세대가 약속의 땅에 들어간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택한 제사장 나라 이스라엘이 계속되는 범죄가운데 있을 때 이방 민족에게 쫓기며 유리하는 포로가 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지만 우리가 순종의 준비가 될 때까지 빚어지는 과정이 분명히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속에 날아가는 두루마리의 환상을 통해 하나님이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말씀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죄를 향한 심판의 말씀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용서하시고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도 깊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왜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아야 하는 지,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능력이 있는 지를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1. 말씀은 살아 역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2)
1. 말씀은 살아 역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2)
()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기로 내가 대답하되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보나이다 그 길이가 이십 규빗이요 너비가 십 규빗이니이다”
두루마리가 날아간다는 것은 살아 역사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속히 이루어 질 것임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의 놀라운 능력은 무엇보다 우리 중심을 꿰뚫어 보시고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우리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능력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찾아 보기 어려운 것은 말씀대로 살지 않아 말씀의 능력을 맛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다는, 능력있다는 경외감이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들고 다니는 것이 무거운 것이 더 크게 느껴지지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겠다는 사모함은 크지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이 말씀하실 수 있도록 말씀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하나님의 일들을 발견할 수 있고 그 일에 동참하는 특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나를 변화시키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해 질 수 있습니다.
2. 말씀은 나를 비추는 거울입니다(3)
2. 말씀은 나를 비추는 거울입니다(3)
스가랴가 환상으로 본 이 두루마리의 크기는 길이가 20규빗, 너비가 10규빗입니다. 1규빗은 팔꿈치 크기로 약 45cm입니다. 즉 이 두루마리는 길이가 약 9미터, 너비가 미터 정도의 엄천난 크기입니다. 9m 되는 긴 두루마리는 흔했지만, 폭은 보통 30cm 정도인데 스가랴가 본 것은 4.5미터로 매우 드물며 비례가 맞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솔로몬 성전의 낭실의 크기와 일치합니다. 우리에게는 낯선 이 크기가 두루마리로는 어색한 이 크기이기에 그들은 바로 인식했을 것입니다. 낭실은 제사장이 율법책을 낭독하던 곳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먼저 말씀을 맡은 교회와 성도에게 주어질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를 점검하고 바로 잡아야 합니다. 율법은 축복의 말도 있지만 저주의 말도 있었습니다. 오늘 환상으로 본 두루마리에는 저주의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사랑과 위로의 말씀뿐만 아니라 우리를 바로잡아주는 하나님의 쓴 소리도 들을 수 있어 합니다.
()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하나님의 말씀이 놀라운 것은 말씀대로 살기위해 정직하게 자신을 대면할 때 나의 숨은 모든 문제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 “23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25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날아다니는 두루마리에 적힌 심판의 메시지는 3절에 나옵니다.
()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온 땅 위에 내리는 저주라 도둑질하는 자는 그 이쪽 글대로 끊어지고 맹세하는 자는 그 저쪽 글대로 끊어지리라 하니”
여기에 ‘저주’라는 말 앞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율법을 맡은 백성이면 누구나알아야 하는 ‘그 저주’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미 말씀하셨고 우리도 알고 있는데도 살아가지 않고 있는 삶에 대해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둑질은 십계명의 제 8계명에 해당되는 것이고, 헛된 맹세는 십계명의 제 3계명인 “네 하나님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두계명이 특별해서 언급된 것이 아닙니다. 율법이 두 돌판이라면 각각 그 가운데 기록된 것으로 모든 율법을 대표하는 상징성을 띈 것입니다.
포로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 재건을 하다가 살아가는 것이 힘들어서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생존에 치우치며 살게 되면서 이러한 도둑질과 거짓 맹세 같은 율법과 멀어지는 문제들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사명을 떠나서 생존에 치우치게 되면 우리의 도덕성은 무감각해지게 되어 버립니다. 말씀을 들어도 감동이 없고 자신을 돌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성령의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상태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성령을 속이려다가 엄청난 징계를 받은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비추어 우리의 죄를 깨달아 돌이키도록 사역하십니다.
()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성령님은 우리의 죄를 폭로함으로 심판 가운데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그 이유는 죄 없으신 예수그리스도를 깨닫고 그분의 의로 나아오게 돕기 위해서 입니다. 교회가 죄에 대한 깨어짐이 있어야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히 의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죄에 깨어진 세상을 그리스도에게 나아오게 안내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말씀앞에 자신을 비추며 성령님께서 깨우치시는 죄에 민감해야 합니다. 교회의 교회다움, 성도의 성도다움이 회복되기 위해선 말씀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은 자들입니다. 교회는 늘 먼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추어 바로 세워져야 합니다. 교회가 죄에 대한 깨어짐이 있어야 세상이 그리스도에게 나아오게 될 수 있습니다.
3. 말씀은 온전히 이루어집니다(4)
3. 말씀은 온전히 이루어집니다(4)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는 온전히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3절에서 ‘끊어지리라’는 단어의 원어는 '나카'인데 ‘깨끗이 쓸어버리다’, ‘흔적도 남김없이 없어질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4절에서 하나님은 친히 각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머물며 말씀으로 심판의 역사를 온전히 이루어 가실 것을 말합니다
.()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것을 보냈나니 도둑의 집에도 들어가며 내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서 그의 집에 머무르며 그 집을 나무와 돌과 아울러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머무르며'의 원어는 ‘투숙하다. 밤을 새우다.’로 목적을 이룰 때까지 체류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면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피할 곳도 숨을 곳도 없습니다. '나무와 돌과 아울러 사르리라'는 것은 건축 재료까지 모조리 불태워 버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서 썩어질 것들을 모두 끄집어 내어 태워버리실 것입니다. 오직 말씀만이 영원한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실 것입니다.
() “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하나님의 심판은 기준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약속과 심판의 약속을 같이 말씀으로 주셨습니다. 구원을 온전히 이루듯이 심판도 온전히 이루어 질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통스러운 죄의 심판의 과정을 주신 이유는 다시 '제사장 나라'로 회복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죄를 끄집어 내는 고통스러운 이유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살아가게 변화시키기 위함입니다. 이미 구원받은 우리를 말씀이 심판하시는 것은 성화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 가게 이끄실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바라볼 때 이 놀라운 성화의 사역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결론
결론
오늘날 교회가 영향력이 없는 것은 능력있는 성령의 사역에 동참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말씀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고 적용시키는 성령님을 무시하며 말씀에 대한 경외감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시 말씀을 바라볼 때 이 말씀이 나와 우리 교회의 능력이 될 줄 믿습니다. 말씀은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말씀은 나의 숨은 문제와 죄를 비추는 거울과 같습니다. 이 말씀앞에 정직하게 대면하며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을 때 우리는 점점 더 온전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더 이상 경건의 모양만 가진 자들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을 가지게 되어 세상 속에 영향력있는 성도, 교회가 될 것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