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주님이 기뻐하시는 주일을 위해(막2:23-28)

마가복음 강해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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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연말이 되면 성도들을 격려해서 함께 사역에 동참하도록 세우려는 부담감이 목회자에게는 있습니다. 한 해를 지나서 보면 섬김과 봉사에 지치신 본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사실, 주중에 세상 속에 힘겹게 살다가 주일에 또 헌신의 자리에 있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 힘듦과 지침은 단순히 사역의 양에서 기인하기 보다는 신앙의 가장 중요한 본질을 놓칠 때 더 많이 찾아옵니다. 교회에서는 헌신하는 사람을 좋아하지만, 많은 헌신으로 바쁜 것이 그 사람의 믿음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많이 바쁘게 헌신한다고 주님을 기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함께 동역하게 하기 위해선, 사역에 헌신하도록 도전하기 보다 먼저 이 신앙의 본질이 회복되기를 격려하는 것이 더 절실함을 깨달았습니다.
저에게는 정말 주님을 위한 일로 바쁜 시간이 있었습니다. 대학교 4학년 졸업생 때 바쁘게 헌신해야 좋은 그리스도인이라 생각이 저에게 있었습니다. 그 때 교회에서는 청년회 회장으로, 중고등부 교사로, 성가대로, 초등부 인형극 도우미로 섬겼습니다. 학교에서는 선교단체 리더이자 목자로 또 선교단체 연합모임에 리더로 섬겼습니다. 대학생이 되어 비로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시작을 했었고 그러다보니 교회와 선교단체의 모임이 좋았고 그것에만 열심을 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졸업후 진로에 대해 고민을 하자니 정해진 것이 없어 부담감만 있었습니다. 학과 내에선 친한 사람도 거이 없이 숨어 지내고 저랑 적성도 맞지 않는 공부로 졸업 논문을 쓰는 것도 버거웠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헌신하고 싶은 것은 분명햇는데 졸업후 어떤 진로를 통해 살아야 할지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어 답답한 마음만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섬기는 봉사들도 버겁게 느껴지고 기쁨이 사라져 갔습니다.
그 해 여름방학때 제가 양육받던 선교단체에서 2달여 동안 단기 간사로서 섬겨보지 않겠느냐는 제의가 있었습니다. 지금있는 섬김도 버거운데 또 하나를 더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지만 기도를 했을 때 주님께서 하기 원하시는 마음을 주셔서 단기간사의 섬김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2달의 단기 간사는 학생들을 모집하여서 합숙하여 훈련받는 섬김이어서 그 섬김을 위해선 다른 맡고 있는 것을 2달 동안 내려 놓아야 했습니다. 다행히 학교는 방학이었고 교회에 양해의 말씀을 구하고 그 2달을 섬겼습니다. 거기 가서도 처음에는 무엇을 해야하는 지 막 찾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선배 간사님들이 단기 간사는 일할 것 없고 옆에서 보고 배우기만 하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2달 동안 저는 아무 섬김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왜 저에게 이런 시간을 허락하셨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무엇인가 해야 제가 인정받는 다는 마음을 가졌었고,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할지만 계속 물었던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장 첫번째 우선 순위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과 만나 교제하면서 하나님 안에서 저의 가치를 발견할 때 내가 무엇을 하기 때문에 안정감을 갖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안정감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과 교제하면서 그분의 마음을 알아갈 때 무엇을 해야할지는 저절로 깨달아졌습니다. 무뎌졌던 기도의 열정이 살아나고, 메말랐던 예배의 은혜가 회복되고, 관계에 대한 스트레스가 다시 인격적인 친밀함을 경험하는 시간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 2달의 시간의 기도를 통해 저는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다시금 받고 신대워으로 진학해 목회의 길을 가는 부르심을 발견하였습니다. 진정한 안식이 진정한 헌신을 저에게 일으켰던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 보이는 예수님의 모습은 규칙에 매이지 않고 도전하고 모험하시는 분입니다. 반면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은 형식과 습관에 매인 종교활동가의 모습입니다. 저는 복음서를 읽으면 읽을수록 지금 성도들의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았는가? 바리새인을 닮았는가?” 질문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그리스도를 닮아야 하는데 자꾸 바리새인의 모습이 더 중첩되어 나타납니다.
“내 기준으로 사람들을 평가하구, 구분짓고, 정죄하는 모습...”.
예수님을 닮은 매력적인 그리스도인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선 갈등과 싸움이 필요합니다. 그 싸움은 보이지 않는 존재인 마귀를 아는 영적 싸움이며, 나 자신을 그 유혹에 굴복하지 않기 위한 싸움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분법적인 삭고로 세상과 교회를 분리시키고 사람들과의 싸움에 더 신경쓰는 것 같습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신앙의 기준으로 경계선을 만들고, 세상을 정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세상은 우리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한 세상입니다.
진정한 경건은 종교적 열심이 아닙니다. 세상에 물들지 않으면서도 세상 속에서 살아가며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오늘 본문은 안식일에 관하여 예수님과 바리새인이 충돌한 사건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현재의 토요일) 지켰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여 주일을 지킵니다. 하나님이 안식일을 통해 주신 의미들을 우리는 주일을 통해 계승해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주일 성수는 세상과 떨어져 우리만의 공간 속에서 마음의 평안을 찾고 기독교 문화를 즐기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 성수는 일주일의 가장 귀한 시간을 떼어 가장 귀한 주님과 교제를 누리는 시간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주일에 너무 바쁜 사람이 되어 안식일의 풍성한 의미를 잊어 버리게 되었습니다. 주일은 너무 바빠서 안식을 놓치는 시간이 되어선 안됩니다. 그렇다고 안식이 아무것도 안하고 쉰다고 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유대교 신학자 아브라함 헤셀 [안식] 통찰력을 주는 좋은 글
- 안식일은 문명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문명을 뛰어넘는 기술을 배우는 날이다
- 안식일은 시간속의 성소다.
- 안식일은 사람과 사람사이, 사람과 자연사이, 사람의 내면에 평화를 이루는 날. 긴장으로부터 탈출하는 날이다.
-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회복하는 날, 본연의 자신이 되는 복에 참여하는 날이다.
마르바 던[안식]
-안식의 의미를 그침, 쉼, 받아들임, 향연 등 4가지로 요약한다.
-안식은 그침이다: 일뿐 아니라 모든 생산과 성취를 그치는 것이다. 그 그침 속에서 성공 지향의 삶 속에서 놓쳤던 진정한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다. 욕심과 근심의 그침을 통해서 인간은 참다운 자기를 발견하게 된다.
-안식은 쉼이다: 말씀으로 인한 영적 쉼이 바로 안식이다. 이 쉼을 통해서 육체적·정서적으로 지치고 상한 몸과 마음을 회복시킬 수 있다.
-안식은 받아들임이다: 자기의 뜻과 야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요구와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안식이다. 자기를 버리고 공동체의 가치를 수용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소명과 뜻을 받아들이는 자만이 진정한 안식을 취할 수 있다.
-안식은 또한 향연이다: 즐거움이며 축제. ‘축제가 있는 안식’을 누려야 한다. 초대교회는 음식을 중심으로 모이는 축제의 교회였다고 부언한다.
오늘 본문에서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주일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주일이 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같이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사람의 필요에 민감해야 합니다(25a)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에서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을 향해 바리새인의 시각과 예수님의 시각은 달랐습니다. 밀밭에서 이삭을 잘라 먹은 것 자체는 율법에 허락된 합법적 일입니다. 다만 바리새인들이 볼 때 안식일에 이것은 일을 한 것이기에 옳지 않게 보였습니다.
()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이 생존의 필요를 위해서 한 것이기에 허락될 수 있는 것으로 보시고 다윗의 일을 예로 드십니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제자들은 단순한 수익과 욕망을 위한 일이 아니라 기본적인 필요를 위해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자의 필요를 귀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만드신 이유도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고 인간을 위해 만드신 것입니다.
()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인본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빼고 사람을 소중히 여기자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높아지실 때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는 것이 우리에게 같이 보입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위해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을 위해 안식일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사람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이 사람을 귀하게 여기시니 우리도 사람의 필요가 중요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중심으로 주일을 보낸다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한 사람을 보지 못할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우리는 연약한 자의 필요에 민감할 때 주님이 기뻐하는 주일이 될 수 있습니다.
()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우리에게 소자는 어떤 사람들일까요? 새가족, 슬픔과 고통가운데 한 주를 보낸 자, 다음세대, 어르신… 성도님들에겐 주일에 이런 분들의 필요가 보이십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전해진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주일이 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25b)

예수님은 본문 25절 하반절에 바리새인들에게 다윗의 이야기를 “읽지 못하였느냐?”고 반문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여기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성경을 많이 읽고 잘 알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그들이 내용을 읽어보았느냐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했느냐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모습은 지식적인 성경읽기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성경에 대해서 많이 배우고 설교도 많이 들었지만 왜 우리의 삶에 예수님과 같이 파격적인 적용이 없습니까? 묵상의 부족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없는 성경 연구는 소용이 없습니다. 지식만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행동들이 미련하게만 보입니다. 그러나 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행동속에 담긴 하나님의 일하심에 감동하고 그 하나님의 역사에 같이 들어갈 도전을 합니다.
26절은 예수님이 구약의 삼상21장 내용을 인용한 것입니다.
()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그런데 삼상 21장을 보면 실제로 그때의 대제사장은 아비아달이 아닌 그의 아버지인 아히멜렉이었습니다. 아비아달은 아히멜렉 바로 다음에 대제사장이었지만 아히멜렉보다 더 유명했던 자이기에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같이 정보력이 발달한 시대에 이렇게 인용하면 문제이지만 유대인 랍비들은 종종 이렇게 성경을 인용해서 설교했고 구약에서도 그런 예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인용하신 이 구절에도 예수님이 어떤 태도로 말씀을 대하셨는지 알 수있습니다. 문자 그대로의 정확한 지식보다 그 말씀에 담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진심을 읽는 것이 훨씬 중요했습니다. 오늘날 똑똑한 그리스도인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내고 과감히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은 찾기가 너무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은 아버지에게로부터 들은 것을 말하고 행한다고 늘 말씀하시지만 자신들의 가치관 속에 갇힌 사람들은 오히려 그 틀로서 예수님의 말을 무시하고 심지어 죽이려 했습니다.
() “37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아도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하면 우리는 주님을 죽이는 자리에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으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겸손히 주님앞에 나아가 묵상하며 구할 때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감동을 죽이지 않는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주님이 기뻐하시는 주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3.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28)

주님은 결론적으로 28절에 말씀하십니다.
()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예수님이 다윗의 예를 이야기로 한 것은 필요에 대한 민감함도 있지만 자신의 영적 권위에 대해 강조하고자 한 의도가 크십니다. 유대인들이 인정했던 왕 다윗의 일행이 한 것도 받아들여졋다면, 만왕의 왕이신 주님의 제자가 한 것은 더욱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하지 않는 안식일은 사람들에게 부담만 지우는 짐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하는 안식일은 주님이 역사하시는 창조적인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그래서 안식일은 단순히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라는 가장 귀한 창조적인 시간을 통해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 빚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식일의 주인되신 주님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주님의 보호 아래 있습니다. 우리가 안식일의 주인되신 주님과 함께 있을 때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 주님의 역사에 함께 동참하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면 모든 것이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경험하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한 예배의 본질입니다. 성전이 있기도 전부터 예배는 있었습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곳을 하나님의 집이라 부로 단을 세웠습니다. 장소가 핵심이 아니라 만남이 핵심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이 성전에만 있다고 예배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주일에 모든 시간 모든 장소가 주님과 함께 있다면, 주님을 만난 감격으로 넘쳐난다면 우리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주일로 올려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

주님이 기뻐하시는 주일을 위해선 사람의 필요에 민감해야 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주일을 위해선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주일을 위해선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저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것을 마땅히 경험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다만 우리의 세상이 너무나 성과와 성취를 강조하는 문화에 있기 때문에 우리도 모르게 그것이 젖어 들어오는 것을 우리가 놓칠 때가 많습니다. 때로 우리가 민감하게 돌아보지 못하면 우리도 분주함 속에서 주일의 참 의미를 놓치고 또 다시 삶의 자리에 돌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주일에 진정한 예배자가 되지 못했다면 일상에서 예배자의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또 세상 속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가는 사명은 소홀히 하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다시 우리의 주일을 소중히 회복합시다. 우리의 주일에 하나님의 주님되심이 완전히 회복된다면 우리는 진정한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가운데 있다면 그 때 우리는 비로서 진정한 우리의 사명을 발견하고 사명을 위해 목숨거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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