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제자로서의 삶으로
Notes
Transcript
‘다시’ 제자로서의 삶으로
(디모데후서 1장 3~12절)
텍스타가 이렇게 떠서 어떻게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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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4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5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6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7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8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9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10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11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12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
서론
윤태호라는 만화 작가가 있습니다. 만화 ‘미생’으로 유명한데요. 이분이 얼마 전 TV에서 ‘일상의 무너짐’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일상의 무너짐이란, 우리에게 작고도 소중한 일상적인 일들이 바쁜 삶에 치여,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본적인 일상이 무너지면, 생활의 중심도 덩달아 흔들리게 된다는 이야기였는데, 참으로 공감 가는 이야기였습니다. 이러한 일상의 무너짐은 우리 성도들에게도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삶이 치열하고 바쁘다보니 우리의 중심이었던 신앙의 열정도 점차 식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교역자들을 대상으로 :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성도들에게 다시 열정을 되살릴 수 있을까요? 오늘 이 점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순교 전 마지막즈음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서신서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디모데는 바울의 가장 아끼는 제자로서, 바울이 자신의 ‘아들’이라고 까지 불렀던 제자였습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에서 자신의 마지막이 가까웠음을 기록하고 있는데요, 이것을 보면, 가장 탁월했던 사도인 바울이, 그의 가장 아끼는 제자에게 보내는 마치 유언과도 같은 메시지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바울은 이 디모데후서에서 어떤 이야기를 할까요?
오늘 본문은 디모데후서 1장으로 디모데후서의 시작 부분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다시’ 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본문 6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런말을 합니다.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 일 듯하게 하기 위하여’
여기 ‘다시’라는 단어에서 우리는 바울이 무엇인가 디모데를 새롭게 북돋으려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디모데가 섬기던 교회는 에베소교회였습니다. 모든 교회가 그렇듯 이 교회에도 문제가 있었는데, 에베소교회의 문제는 ‘거짓교사’들의 문제였습니다. 거짓교사들이 교회 내에서 진리와 다른 이야기들을 하며 성도들을 혼란스럽게 했던 것입니다. 디모데는 에베소교회의 지도자였지만 나이도 어렸고 바울과는 다르게 성격도 내성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어려움이 있었고 낙심가운데 아마 처음의 열정을 조금은 잃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디모데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것입니다.
본론
열정을 되살리기 위하여 먼저 해야 할 것 : 생각하기
3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4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5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6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이제 바울이 택한 방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신앙의 열정을 되살리기 위하여 시작해야 하는 첫 번째의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생각하기입니다. 바울은 1장 6절에서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라고 말합니다. 생각, 무엇을 생각해보라는 것일까요? 앞서 1장 3절부터 5절까지를 살펴보면 이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고 있는 세 가지의 생각을 기록하며 자연스럽게 디모데에게 이것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3절에서는 조상적부터 하나님을 섬겨오던 디모데의 집안을 생각한다고 합니다. 또 4절에서는 디모데가 바울과 함께하며 흘렸던 눈물을 떠올린다고 하구요. 5절에서는 디모데의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가졌던 것을 생각한다고 합니다. 즉, ‘디모데야, 내가 지금 네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 그런데 너를 생각해보니 그동안 너에게 이러한 것들이 있더라...’ 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바울이 한 생각인데, 자연스럽게 디모데도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됩니다. 바울도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6절에 ‘이것들을 너로 생각하게 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바울이 디모데를 일으키기 위해 했던 첫 번째는 바로 이것입니다. 신앙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행하시고, 우리는 어떻게 반응했는지 떠올리며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참 단순하고 진부해보이는 방법이지만, 우리는 쉽게 이 방법을 택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현재에 몰입하거나, 바로 앞에 있을 미래를 걱정하는데 오히려 많은 시간을 쏟고 있지는 않나요? 현재의 문제로 인해서 낙망하고, 앞에 다가오는 문제로 인해서 염려할 때 우리는 지금까지의 인도하심을 한번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행하신 일과,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들을 묵상해보면, 앞으로의 일도 어떻게 우리가 대처해야 하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을 갖는 첫 번째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함께하셨던 일들을 생각할 때, 열정에 회복이 일어납니다. “그랬었지, 그렇게 해결해주셨지. 앞으로도 그러시겠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나는 주님의 것이지” 이것이 열정회복의 첫 번째 단계입니다.
우리가 예배에서 왜 회복을 경험할까요? 바쁜 삶에서 탈출하듯 나와 하나님을 바라보며 찬양하고 기도할 때 자연스럽게 우리의 생각과 뜻이 하나님께 맞춰지기 때문입니다. ‘그래, 하나님이 계시지. 다시 힘을 내야지’하는 일이 우리 안에서 일어납니다. 구원의 길이 하나이듯, 회복의 방법도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없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가득해야 합니다. 시간을 내어 하나님을 생각해보세요. 우리의 삶과, 성경에 기록되어진 하나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신 것을 바로 알자 : 성령을 따르는 삶
7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둘째로 우리에게 주신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7절에 그것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주신 것이 두려움이 아닌 능력, 사랑, 절제의 마음이라고 알려줍니다. 여기서 ‘마음’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이 단어는 헬라어로는 ‘프뉴마(πνεῦμα)’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프뉴마라는 단어는 ‘영’이나 ‘성령’의 뜻으로 해석됩니다. 이것을 적용하면 ‘두려워 하는 영’과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서 ‘성령’으로 단어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느껴지는 것은 참 다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부어주셨다. 그 능력을 따라 살아가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따를 때, 성령으로 충만할 때 비로소 제자로서의 삶을 선택할 수 있게 됩니다. 상황이나 환경이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이 바뀌어야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임하실 때, 우리가 마음과 뜻을 정할 때 모든 것이 바뀌게 됩니다.
복음과 함께 받는 고난 : 제자의 확신
“9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10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11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12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8절에서 바울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합니다. 당시 디모데는 바울선생님이 복음을 전하다 받는 고난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한 제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난이 주는 고통을 잘 알기에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러한 고난을 부끄러움 없이 기꺼이 받으라고 합니다. 바울은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바울은 고난에 대하여 세 가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1)그는 고난이 왜 오는 것인지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9-11절을 보시면,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도와 교사로 세우신 것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소명이며, 그 뜻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은혜요, 복음의 완성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2)또 그는 그러한 고난을 직접 받았습니다. 12절에 내가 이로 말미암아 고난을 받았으며 부끄럽지 않다고 합니다. 그 당시 남자들에게는 육체적인 상처가 많았는데, 특이하게도 부끄러운 상처와 자랑스러운 상처가 구분되어져 있었습니다. 바로 자신의 육체의 앞에 있는 상처, 즉 전쟁에서 얻은 상처는 자랑스러운 상처였습니다. 하지만 등에 난 상처는 죄인으로서 채찍을 맞은 것이었기에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는 상처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것에 대해 부끄럽지 않다고 합니다. 그의 고난은 복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3)끝으로 바울은 고난 뒤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았습니다(12절). 그는 12절에서 말합니다. “나는 고난을 받았지만, 부끄럽지 않다. 나는 내가 누구를 믿는지 확실히 안다. 그가 나를 끝까지 지키실 것도 내가 알고 있다.” 바울에게는 이러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내 삶의 끝에 계신분이 예수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자신의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확신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제자의 삶에는 이러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내 길에 빛, 그 끝, 종착지에서 비추고 계시는 진리의 빛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이용규 선교사님의 책 ‘기대’에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어려움의 순간에, 우리가 진짜 의지했던 게 드러난다.’ 고난은 우리가 하나님의 제자인지 아닌지 알려주는 시금석의 역할을 합니다. 우리에게 오는 많은 고난가운데에서 하나님을 바라고, 그 가운데 오는 평안과 은혜를 깨닫는 자가 또 다른 사람을 제자로 삼을 수 있습니다.
결론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일상이 흔들림으로 인해 신앙의 열정을 잃었을 때,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복음이 믿어지게 해주신 그 은혜, 그리고 우리가 흘렸던 눈물들, 그리고 천국 소망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일어납시다. 더 이상 세상의 눌림에 두려워 말고 하나님만 의지합시다. 끝으로 우리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난가운데서 오는 승리의 경험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 승리를 통하여 예수의 제자가 되고, 또 제자를 삼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