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9.수요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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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 views라헬의 죽음과 르우벤의 간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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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주해
본문주해
16 וַיִּסְעוּ֙ מִבֵּ֣ית אֵ֔ל 1/4
וַֽיְהִי־ע֥וֹד כִּבְרַת־הָאָ֖רֶץ1/8
לָב֣וֹא אֶפְרָ֑תָה 1/2
וַתֵּ֥לֶד רָחֵ֖ל 1/4
וַתְּקַ֥שׁ בְּלִדְתָּֽהּ׃1/2
( WTT)
그들이 벧엘에서 떠났다(칼 바익톨)1/4
그리고 약간 떨어진 곳에 있을 때였다(칼 바익톨)1/8
에브랏(‘보’동사 생략)1/2
그 때 라헬이 낳았다(칼 바익톨)1/4
그녀의 해산이 힘들었다(피엘 바익톨)1/2
: 그리고 그들이 벧엘에서 떠나 에브랏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 때였다(보동사) 라헬이 해산했는데 난산이었다.
17 וַיְהִ֥י בְהַקְשֹׁתָ֖הּ1/4
בְּלִדְתָּ֑הּ 1/2
וַתֹּ֙אמֶר לָ֤הּ הַמְיַלֶּ֙דֶת֙ אַל־תִּ֣ירְאִ֔י1/4
כִּֽי־גַם־זֶ֥ה לָ֖ךְ 1/8
בֵּֽן׃1/2
( WTT)
그녀가 매우 고통스러워할(히필 부정사) 때였다(칼 바익톨)1/4
해산중(칼 부정사)1/2
그녀에게 그 산파가(피엘분사) 말했다(칼 바익톨) “두려워하지 마세요(칼 미완)1/4
당신에게 또1/8
아들이에요1/2
: 그녀가 해산 중 가장 고통스러워할 때 그녀에게 그 산파가 말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당신에게 또 아들이에요.”
- 번역은 이렇지만 매우 급박하게 말한다.
- 특히 당신에게 또 아들은 ‘키 감 쩨 라크 벤’로 간단하고 급박하게 외친다.
- 어떻게든 라헬에게 힘을 주려는 외침이다.
- 그런데 ‘두려워하지 마세요’는 보통 하나님께서 하는 말씀이다.
18 וַיְהִ֞י בְּצֵ֤את נַפְשָׁהּ֙ כִּ֣י מֵ֔תָה 1/4
וַתִּקְרָ֥א שְׁמ֖וֹ 1/8
בֶּן־אוֹנִ֑י 1/2
וְאָבִ֖יו 1/4
קָֽרָא־ל֥וֹ בִנְיָמִֽין׃1/2
( WTT)
그녀가 죽어(칼 완) 그녀의 영혼이 떠나려(칼 부정사) 할 때였다(칼 바익톨)1/4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칼 바익톨)
베노니라고1/2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고1/2
: 그녀가 죽어 그녀의 영혼이 떠나려 할 때 그녀가 그의 이름을 베노니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고 불렀다.
- 라헬의 슬픔
- 슬픔(애곡)의 아들
- 그러나 야곱은 그를 베냐민이라 부른다.
19 וַתָּ֖מָת 1/4
רָחֵ֑ל 1/2
וַתִּקָּבֵר֙ בְּדֶ֣רֶךְ אֶפְרָ֔תָה 1/4
הִ֖וא 1/8
בֵּ֥ית לָֽחֶם׃1/2
( WTT)
죽었다(칼 바익톨)1/4
라헬이1/2
그리고 에브랏 길중에 뭍혔다(니팔 바익톨)1/4
거기는1/8
베들레헴이다1/2
: 그리고 라헬이 죽어 에브랏 길중에 묻혔다. 거기는 베들레헴이다.
- 여정중에 죽었다.
- 아브라함과 사라의 무덤, 다른 말로 가족묘에 묻히지 못했다. 심지어 이삭보다 먼저 죽는다.
- 다른 말인데 왜 리브가의 죽음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걸까? 심지어 유모 드보라의 죽음은 나오는데 말이다.
20 וַיַּצֵּ֧ב יַעֲקֹ֛ב מַצֵּבָ֖ה 1/4
עַל־קְבֻרָתָ֑הּ 1/2
הִ֛וא מַצֶּ֥בֶת קְבֻֽרַת־רָחֵ֖ל 1/4
עַד־הַיּֽוֹם׃1/2
( WTT)
야곱이 기둥[기념비]을 세웠다(칼 바익톨)1/4
그녀의 묘지위에1/2
라헬의 무덤 기둥이1/4
오늘까지1/2
: 야곱이 기둥을 그녀의 무덤 위에 세웠는데 오늘까지 라헬이 무덤기둥이 (있다)
- 그래도 야곱은 언제든지 찾아올수 있게 표시를 해놓았고 그 표시는 매우 오래간 것으로 보인다.
- 야곱은 왜 요셉처럼 끝까지 라헬을 이장하지 않았을까.
- 라헬의 죽음에서 ‘두려워하지 말라’나 ‘기둥’은 마치 하나님과의 언약을 상기시킨다.
21 וַיִּסַּ֖ע 1/4
יִשְׂרָאֵ֑ל 1/2
וַיֵּ֣ט אָֽהֳלֹ֔ה 1/4
מֵהָ֖לְאָה 1/8
לְמִגְדַּל־עֵֽדֶר׃1/2
( WTT)
그리고 떠났다(칼 바익톨)1/4
이스라엘이1/2
그리고 텐트를 펼쳤다(칼 바익톨)1/4
너머1/8
에델망대1/2
: 그 후 이스라엘이 떠나[출발해] 에델망대 너머에 텐트를 쳤다.
- 꼭 지리적 조사가 필요한 본문이다.
וַיְהִ֗י בִּשְׁכֹּ֤ן יִשְׂרָאֵל֙ בָּאָ֣רֶץ הַהִ֔וא 1/4
וַיֵּ֣לֶךְ רְאוּבֵ֔ן 1/8
וַיִּשְׁכַּ֕ב֙ 1/16
אֶת־בִּלְהָ֖ה֙ 1/32
פִּילֶ֣גֶשׁ אָבִ֑֔יו1/2
וַיִּשְׁמַ֖ע 1/4
יִשְׂרָאֵֽ֑ל פ1/2
פוַיִּֽהְי֥וּ בְנֵֽי־יַעֲקֹ֖ב1/4
שְׁנֵ֥ים עָשָֽׂר׃[1]1/2
( WTT)
그리고 이스라엘이 그 땅에 살고 있을 때였다(칼 바익톨)1/4
그때 르우벤이 갔다(칼 바익톨)1/8
그리고 그가 누웠다(칼 바익톨)1/16
빌하와 함께1/32
그의 아버지의 첩1/2
그리고 들었다(칼 바익톨)1/4
이스라엘이1/2
야곱의 아들들이 있었다(칼 바익톨)1/4
12명의1/2
: 그리고 이스라엘이 그 땅에 살고 있을 때, 르우벤이 가서 빌하, 그의 아버지의 첩과 함께 누웠고 이스라엘은 (이 사실을) 들었다.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다.
- 또다시 슬픈 일이 일어난다.
- 말로 표현할수 없을 정도로 통탄해야 하는 일이다.
- 벤 오니, 애곡, 통탄 같은 일이다.
- 그런데 이 내용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다’가 같은 문장으로 묶여있다.
- 심지어 액샌트도 따로인데 같은 문장이다. 왤까?
1차 작성
야곱의 목적지는 어디였을까? 벧엘을 떠난 것은 이해가 된다. 그곳은 사람이 살기에 적절한 땅은 아니었으니까. 물론 근처 루스라는 성이 있기는 하지만 야곱이 제사드린 곳은 아무것도 없는 황야였을 것이다. 또한 이 당시 야곱은 네게브쪽과 블레셋쪽에 기반이 있었지, 이쪽에는 전혀 기반이 없었다.
라헬은 여정중에 베냐민을 낳는다. 여러모로 좋지 않은 상황속에서 아이를 출산한다.
출산은 난산이었고, 아이가 나왔을 때, 유모는 아들이라고 외친다. 라헬의 상태를 알고 힘내서 살아보라고 한 것같다. 그 때, 두려워하지 마라고 외친게 흥미롭다.
그러나 라헬은 죽고 마지막 유언으로 베노니, 슬픔의 아들이란 이름을 남긴다.
곧바로 아버지(이름이 나오지 않는다)가 베냐민, 오른손의 아들로 바꾼다.
이때부터 야곱의 인생은 슬픔이 가득하다.
라헬이 죽고, 믿음으로 베냐민이라 칭한다.
하지만 가족묘실에 라헬을 들이지 못하다. 그것때문인지, 이스라엘이라 칭하지 않고 야곱이라 칭한다.
이후 장자인 르우벤이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는 일이 벌어진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분노와 통곡이다.
드디어 마므레에 이르러 아버지 이삭을 만난다. 그런데 이삭과 10년 이상 같이 사는데, 이삭의 죽음이 바로 기록되고 있다. 시간순으로 볼 때, 이삭의 죽음보다 요셉이 팔리는 것이 먼저다(요셉이 17살 때, 야곱은 108세, 이삭은 168세).
즉, 하나님과의 언약 이후 그에게 나타난 좋은 일은 죽었다고 생각했던 요셉이 돌아온 일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야곱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것일까?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는 고난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생육하며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약속이후 임신하지 못하던 라헬이 임신했다. 비록 그녀는 죽었지만 그녀이 아들이 한명더 태어났다. 이것은 라헬이 에서 요셉을 낳으며 더 하시기를 원한다는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뜻이다.
22절에 나오는 르우벤과 빌하의 동침은 단순한 윤리적 문제가 아니다. 압살롬이 다윗을 쫓아내고 아버지의 첩들과 동침한 것처럼, 계승의 목적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특히 창세기를 읽은 1차 독자들은 초기 이스라엘이므로(출애굽세대) 당연히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솔로몬이 아도니야의 요구, 아버지의 첩을 달라는 요구를 듣고 그를 죽인 것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자신의 계승권을 공고히 한 것이다. 마치 야곱이 에서에게서 장자의 명분을 뺏은 것처럼, 르우벤은 야곱의 아내를 빼앗았다.
2차 작성
서론
야곱은 디나 사건후 벧엘에서 하나님께 다시 제사, 다시 언약을 받음
그러나 그 이후 벌어진 사건들은 야곱에게 불행이었다.
그럼에도 그속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다. 그 은혜를 나누는 시간이 되길.
본론
1. 야곱의 불행
언약을 받았지만 불행
첫번째 불행
라헬의 죽음
사랑하는 라헬의 갑작스런 죽음.
임신하고 이동하는 도중에 아이를 낳는 라헬.
난산으로 인해 죽음.
베노니 -> 슬픔의 아들
이 이름의 뜻은 여러가지가 있음.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것은 슬픔, 애곡의 아들
다른 것으로 불행의 아들
죄악의 아들
-> 라헬이 아버지 라반을 속임(드라빔을 감춤)
: 이전에 야곱은 드라빔을 감춘자는 누구든지 죽을 것이라 맹세함.
즉, 라헬이 자신의 죄악을 기억하고 죄악의 결과로 죽는다고 생각했다는 견해.
두번째 불행.
르우벤의 불륜.
르우벤과 빌하의 불륜.
아버지의 마음에 못을 박는 행위
+ 그저 치정관계만이 아님.
성경에서 계승자, 아들이 아버지의 첩이나 아내를 빼앗거나 탐내는 경우는 바로 계승과 연관되어 있음.
압살롬이 쿠데타 후 다윗의 첩들과 동침.
아도니야가 밧세바를 통해 솔로몬에게 다윗의 첩을 달라고 요청했다가 사형당함.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과 아브넬의 갈등의 원인
아버지가 살아있는데도 권위를 무시한채 첩과 동침하여 후계권을 주장하는 르우벤
세번째 불행?
아버지의 죽음.
성경은 마치 야곱이 마므레에 도착하고 얼마있지 않아 야곱이 죽은 것처럼 말하고 있음.
하지만 야곱은 이삭과 최소 12년 이상을 같이 산 것으로 추정됨.
왜냐면 요셉이 17세에 애굽으로 팔려가는데, 그 때 야곱의 나이가 108세, 그러면 이삭의 나이는 168세임.
요셉이 팔려가고도 이삭이 죽을 때까지는 12년이라는 시간이 남아있음.
네번째 불행
요셉의 실종
가장 사랑하는 아들의 실종.
이후 본문에서 야곱은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않음. 한 것이라고는 애굽으로 가서 바로에게 서고, 죽을 때 축복한 것뿐. 오늘 본문에서 이삭이 아무런 역할없이 죽은 것과 같음.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후 그의 삶은 베노니라는 이름처럼 슬픔과 불행으로 가득차있는 것처럼 보임.
2. 야곱의 대처
첫번째
라헬의 죽음
정말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
하지만 의연하게 대처함
베노니-> 베냐민
(내)슬픔, 불행, 죄악의 아들
->(내)오른손의 아들: 힘 행운 선함
슬픔과 불행이지만, 분명 언약이후, 가나안에서 태어난 최초의 아들.
언약을 믿고 슬픔이지만 하나님의 번성의 언약아래 있을 것을 믿음
두번째
르우벤의 간음
대처하지 않음. 분명 빌하의 아들, 단과 납달리는 분노했을 것임. 하지만 야곱은 반응하지 않음.
아들이 어떻게 하든지 분명 하나님의 언약의 자기에게 있음을 확신함.
아버지 이삭이 그랬듯이 결국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갈 자가 자신의 계승자가 될 것을 알았기에 그렇게 한 것이 아닐까?
세번째 불행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는 논할 필요가 없음.
왜냐면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받았고, 아버지가 살던 가나안에 사는 자는 아버지 곁에 있던 에서가 아닌 야곱 자신이기 때문.
개인적으로는 슬픈 사건이지만, 이미 하나님의 언약이 이어지고 있었기에 이삭은 그 역할을 다했다 볼수 있음. 이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공통적인 부분. 언약과 함께하심이 후손들에게 나타난 이후 그들의 삶은 조명되지 않음.
네번째 불행
요셉의 실종.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야곱 자신과는 전혀 인연이 없었던 애굽으로 가는 계기가 됨.
아브라함 - 사래의 사건을 통해 접근 금지.
이삭 - 하나님께서 막으심.
야곱 - 실종을 통해 오히려 애굽에서 더욱 잘 살 여건을 마련해주는 계기.
이렇듯, 야곱은 언약이후 오히려 더욱 불행한 삶을 보냄.
하지만 그는 그 모든 상황에 믿음으로 대처했다.
언약은 우리의 인생의 행복을 위해 주시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언약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길을 우리에게 주신다.
야곱의 경우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가 너무나 무겁게 느껴질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 그 모든 것을 감당할 능력을 능히 주실 것이다.
결론
야곱은 언약이후 오히려 불행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 불행을 담담히 이겨냈다.
마치 아브라함같다. 바로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십자가의 능력으로 달려가는 우리가 되길.
그래서 베노니를 베냐민이라 부리는 우리가 되길.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의 믿음과 삶을 보고 기뻐하며 임재하는 우리의 삶이 되길.
설교
설교
서론
야곱은 세겜에서 디나사건이 있은 후, 벧엘로 올라갑니다.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다시 야곱과 언약을 하십니다. 다시한번 야곱의 이름이 바뀌었음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형 에서가 아닌, 바로 야곱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계승됨을 확실하게 하셨습니다. 축복과 번성의 언약입니다. 하지만 그 이후 야곱의 삶은 축복과 번성이 아니었습니다. 이시간 본문을 살펴보며, 언약이후 야곱에게 있었던 일들과 그런 일들 속에 나타나는 야곱의 모습을 보며 은혜를 나누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본론
언약이후 야곱에게는 불행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첫 번째 불행은 라헬의 죽음입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알다시피 라헬은 야곱이 사랑한 아내입니다. 다른 아내들이 많지만 정말로 사랑한 아내는 라헬뿐입니다. 야곱이 요셉과 베냐민을 아낀 것도 자신이 사랑한 아내, 정말 아내로 맞이하고 싶은 여인에게서 나은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라헬은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족장시대 다른 여인들이 다들 100세 이상 장수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라헬은 단명했습니다. 그것도 아이를 낳다가 죽었습니다. 또한 다른 모든 아이들은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머물 때 낳은 아이들입니다. 하지만 베냐민은 가나안에서 나은 처음이자 마지막 아들입니다. 어찌보면 언약이후 가나안땅에서 라헬이 임신하고 아이를 낳게 된 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분명 그렇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아이가 가지기 힘든 라헬인데, 하나님과의 언약이후 아이가 들어섰으니 얼마나 기쁘고 감사하겠습니까.
하지만 그 축복의 임신은 반대로 불행과 슬픔이 되어 버렸습니다. 또한 라헬은 여정중에 죽었기 때문인지 확실한 이유는 알려지 있지 않지만 창세기 족장과 그의 부인들 중에 유일하게 막벨라굴에도 묻히지 못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라헬은 죽기 직전 자신이 낳은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고 짓고 죽습니다.
베노니라는 이름의 뜻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중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뜻은 ‘내 슬픔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하지만 다른 뜻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불행의 아들이라고 해석이 가능합니다.
또한 죄악의 아들이라고도 봅니다. 특별히 죄악의 아들이라는 해석은 라헬이 라반의 드라빔을 숨긴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야곱은 쫓아온 라반에게 드라빔을 숨긴 자는 그가 누구든지 죽을 것이라 했고, 라헬은 죽기 직전 자신의 죄악을 생각하며 이런 이름을 지었다는 주장입니다.
그 이름의 뜻이 무엇이든지, 좋은 이름은 아닙니다. 슬픔, 죄악, 불행이란 이름을 가진 아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있은 후 낳은 아들입니다. 이삭과 같은 위치인데, 이삭은 웃음, 기쁨이란 뜻이라면 베노니는 완전히 반대의 뜻을 지닙니다.
두 번째 불행은 장자 르우벤의 불륜입니다.
르우벤과 빌하가 불륜을 저지릅니다. 이것은 아버지 이스라엘의 마음에 못을 박는 행동입니다. 특별히 이 부분을 적을 때, 성경은 이스라엘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대부분 야곱이라 썼던 것을 기억하면 주지할만한 부분입니다. 왜 성경은 이 부분을 이스라엘이라고 적고 있을까요.
그것은 르우벤의 행동은 단순한 성적인 타락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아버지의 첩을 취하는 사례는 몇 번 나옵니다. 그리고 모든 경우, 그것은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그 권위와 자리를 계승하는 증표로 나옵니다. 가장 유명한 사건은 압살롬이 다윗을 쫓아낸 후, 다윗의 후궁들을 모두 취한 사건입니다. 그 일로 압살롬은 자신이 다윗의 왕권을 이었음을 공표했습니다. 그전에 사울의 아들이 이스보셋과 그의 세력의 중심이었던 아브넬의 갈등의 원인도 바로 사울의 첩을 아브넬이 취했기 때문에 나타났습니다. 또한 솔로몬 때, 아도니야가 밧세바를 통해 다윗이 말년에 들인 첩을 취하려 하다가 사형당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와같이 아버지의 아내, 첩을 취하는 행동은 그 자체로 자신이 아버지의 자리를 계승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행동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사건이 일어나는 부분, 21-22절에서 야곱이란 이름이 아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적고 있습니다. 르우벤의 행동이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이스라엘에게 정말 정당한 행동이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큰 불행입니다. 아버지 야곱이 그렇게 고난받으며 긴긴 세월동안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온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제 야곱은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의탁하며 하나님의 언약, 약속을 믿고 나아가는데, 장자인 르우벤은 그 이전의 야곱보다 더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쌍둥이형인 에서에게서 장자의 명분을 뺏었지만, 르우벤은 살아있는 아버지에게서 그 모든 것을 뺏어오는 행동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불행은 본문 이후에 일어난 요셉의 실종입니다.
아시다시피 요셉은 야곱이 가장 사랑한 아들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요셉이 가족을 애굽으로 부르며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할 때, 야곱은 극렬하게 반대합니다. 라헬의 아들은 요셉과 베냐민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랑한 요셉이 실종되었습니다. 야곱은 몰랐겠지만, 그 형제들에 의해서 죽을뻔하고 결국 노예로 팔렸습니다. 그 때 야곱의 충격은 엄청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위로할 자도 없었을 것입니다. 함께 슬픔을 나눌 라헬은 죽었습니다. 레아가 아무리 위로한다 해도 레아에게 요셉은 자신의 아들이 아닌 조카에 가까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언약이후 야곱의 생애는 평안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벧엘로 왔고, 언약을 받았지만, 오히려 슬픔과 불행이 지배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이 모든 것에 의연하게 대처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아버지 이삭의 죽음 이후에도 야곱은 그 자리를 지킵니다.
라헬의 죽음에 의연하게 대처합니다. 그 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라헬의 무덤을 만듭니다. 베노니를 베냐민이라고 부릅니다.
슬픔, 불행, 죄악의 아들이 아니라 내 오른 손의 아들이라 말합니다. 오른 손은 좋음, 행복, 능력의 상징입니다. 비록 어머니의 죽음으로 낳은 아들이지만, 가나안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아들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낳은 아들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베냐민이라 부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오른손이 함께 할 것을 믿었습니다.
이런 믿음이 우리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 이 새로운 한해에도 많은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중에는 정말 기쁘고 행복한 일도 있겠지만, 슬프고 괴로운 나날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변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 변하지 않으심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 고난이 닥쳐올 때 그 고난을 능히 이길 하나님을 의지하기 원합니다. 베노니가 찾아올 때, 야곱처럼 베냐민이라 부를 수 있는 믿음과 확신이 우리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두 번째인 르우벤의 불륜에 대처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서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에서와 야곱 둘중에 하나님의 언약을 이은 것은 야곱 자신이 된 것은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서가 아님을 야곱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가족으로부터 쫓겨나 벧엘에서 돌 베개를 베고 잘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함께 있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르우벤의 행동에 분명 분노했고 슬퍼했겠지만, 심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야곱은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알았습니다. 그렇기에 잠잠했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을 믿고 야곱처럼 잠잠하길 원합니다. 때로는 억울할 때도 있고, 원통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12장 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
이 말씀을 붙들고 야곱처럼 잠잠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오히려 이런 일을 들고 하나님께 나아와 엎드릴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의 역사하심을 경험하고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갈수 있기를 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요셉의 실종은 요셉의 귀환정도 아닌 금의환향으로 변했습니다. 그래서 족장중 유일하게 애굽과는 전혀 인연이 없었던 야곱이 말년을 애굽에서 편히 살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래의 사건으로 애굽에서 쫓겨났습니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가는 것을 막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애굽에 들어가 거기서 여생을 편안히 보냈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어 역사하십니다. 그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인내와 기도입니다. 이런 고난들이 닥칠 때, 인내와 기도로서 이 모든 일을 감당해 나갈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결론
하나님과의 언약 이후 찾아온 모든 불행에 야곱은 믿음으로 대처했습니다. 그 이전에 외삼촌 라반이 자신에게 억울한 일을 할 때 야곱의 행동과는 전혀 다릅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경험하고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을 아는 믿음이 있기를 원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알기에 원수갚음을 하나님께 맡기고 잠잠히 기도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마지막으로 큰 불행과 슬픔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해서 요셉의 귀환처럼 더욱 큰 기쁨을 맛보길 원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며, 십자가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는 우리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