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8.금요기도회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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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과 형제들, 불편한 동거, 꿈.

Notes
Transcript

본문해석

וַיֵּ֣שֶׁב יַעֲקֹ֔ב 1/4
בְּאֶ֖רֶץ 1/8
מְגוּרֵ֣י אָבִ֑יו 1/2
בְּאֶ֖רֶץ 1/4
כְּנָֽעַן׃1/2
( WTT)
야곱은 살았다(칼 바익톨)1/4
땅에서1/8
그의 아버지가 살던1/2
땅에1/2
가나안1/2
: 야곱은 그의 아버지가 살던 땅, 가나안 땅에 살았다.
- 야곱이 이삭의 뒤를 이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 에서는 에돔으로 떠났다.
אֵ֣לֶּה׀ תֹּלְד֣וֹת יַעֲקֹ֗ב יוֹסֵ֞ף בֶּן־שְׁבַֽע־עֶשְׂרֵ֤ה שָׁנָה֙ הָיָ֙ה רֹעֶ֤ה אֶת־אֶחָיו֙ בַּצֹּ֔אן 1/4
וְה֣וּא נַ֗עַר אֶת־בְּנֵ֥י בִלְהָ֛ה וְאֶת־בְּנֵ֥י זִלְפָּ֖ה 1/8
נְשֵׁ֣י אָבִ֑יו 1/2
וַיָּבֵ֥א יוֹסֵ֛ף אֶת־דִּבָּתָ֥ם רָעָ֖ה 1/4
אֶל־אֲבִיהֶֽם׃1/2
( WTT)
야곱의 계보는 이렇다. 요셉은 17세 였으며(칼 완) 그의 형들과 함께 양떼를 치고있었다(칼 분사)1/4
또한 그는 빌하의 아들들과 실바의 아들들과 함께 하는 소년이었다1/8
그의 아버지의 아내1/2
요셉은 그들의 악한 행동에 대한 것을 가지고 왔다(칼 바익톨)1/4
그들의 아버지에게1/2
: 야곱의 계보는 이렇다. 요셉은 17세였으며 그의 형들과 함께 양떼를 쳤고 그의 아버지의 아내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함께 하는 소년이었다. 요셉은 그들의 잘못된 행동을 그들의 아버지에게 보고했다.
- 첫번째 황제에서는 ‘그의 아버지’이지만 두번째 황제는 ‘그들의 아버지’이다.
- 그리고 요셉과 실바와 빌하, 첩들의 아들을 완전히 구분하고 있다.
- 레아의 아들들,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스불론, 잇사갈.
- 실바 : 갓, 아셀; 빌하 : 단, 납달리
- 다른 아들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알길이 없다.
- 스불론과 잇사갈은 레아가 나중에 나은 아들이다.
וְיִשְׂרָאֵ֗ל אָהַ֤ב אֶת־יוֹסֵף֙ מִכָּל־בָּנָ֔יו 1/4
כִּֽי־בֶן־זְקֻנִ֥ים ה֖וּא 1/8
ל֑וֹ 1/2
וְעָ֥שָׂה ל֖וֹ 1/4
כְּתֹ֥נֶת פַּסִּֽים׃1/2
( WTT)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의 모든 아들중에서 요셉을 사랑했다(칼 완)1/4
왜냐면 그가 늙었을 때1/8
그에게1/2
그리고 그가 그를 위해 만들었다(칼 완)1/4
다채로운 색상의 옷을1/2
: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의 모든 아들들중에서 요셉을 사랑했는데 그가 늙어서 얻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그를 위해 화려한 옷을 만들었다.
- 늙어서 ‘그에게’와 ‘그를 위해’는 같은 단어
- 야곱이 아닌 이스라엘이라 이름한 것은 무슨 뜻일까.
- 요셉을 사랑했기에 화려한 색상의 옷을 만들어준다.
וַיִּרְא֣וּ אֶחָ֗יו כִּֽי־אֹת֞וֹ אָהַ֤ב אֲבִיהֶם֙ מִכָּל־אֶחָ֔יו 1/4
וַֽיִּשְׂנְא֖וּ 1/8
אֹת֑וֹ 1/2
וְלֹ֥א יָכְל֖וּ 1/4
דַּבְּר֥וֹ לְשָׁלֹֽם׃1/2
( WTT)
그들의 아버지가 그의 모든 형제중에서 그를 더 사랑하는 것(칼 완)을 그의 형제들이 보았다(칼 바익톨)1/4
그래서 그들이 미워했다(칼 바익톨)1/8
그를1/2
그래서 그들이 할 수 없었다(칼 완)1/4
그에게 평안히(샬롬) 말하는 것조차(피엘 부정사)1/2
: 그들의 아버지가 그의 모든 형제 중에서 그를 더 사랑하는 것을 그의 형제들이 알았기에 그들이 그를 미워했고 그들은 그에게 평안히(샬롬) 말하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 간단한 인사 나누는 것도 꺼려지는 사이, 말그대로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었다.
- 분명히 이런 분위기를 요셉은 당연히 느꼈을 것이고, 야곱은 눈치챘을 것이다.
וַיַּחֲלֹ֤ם יוֹסֵף֙ חֲל֔וֹם 1/4
וַיַּגֵּ֖ד 1/8
לְאֶחָ֑יו 1/2
וַיּוֹסִ֥פוּ ע֖וֹד 1/4
שְׂנֹ֥א אֹתֽוֹ׃1/2
( WTT)
그리고 요셉이 꿈을 꿨다(칼 바익톨)1/4
그리고 그가 말했다[알려줬다](히필 바익톨)1/8
그의 형제들에게1/2
그리고 그들이 더욱 더했다(히필 바익톨)1/4
그를 미워하는 것이(칼 부정사)1/2
: 그리고 요셉이 꿈을 꿨고 그가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그래서 그들이 그를 미워함이 더욱 더해졌다.
- 요셉과 더하다는 같은 말이다.
- 즉, 요셉의 이름과, 더함이라는 표현을 통해, 축복과 샬롬이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미움과 다툼이 더해지고 있는 상황을 말하고 있다.
- 요셉이란 이름 뜻대로 가고 있는데 상황은 심각해지고 있다.
- 요셉이란 이름이 축복의 더함이 아니라, 죄의 더함이 되고 있다.
1차 작성
2절에서 왜 굳이 계보라고 들어갈까. 계보는 하나님의 구원의 이어짐이다. 이는 요셉과 형들의 갈등과 죄악중에도 하나님의 구원이 이어짐을 뜻한다. 오히려 그것조차 사용하시어 구원을 이어가셨다.
5절과 8절에 더욱 미워하다는 미워함이 더하다는 뜻이다.
야샤브 동사가 쓰이며, 이것은 요셉의 이름이다.
야곱은 이삭이 떠돌아다니던 땅에서 정착한다. 이제 야곱은 이곳에 정착해서 여생을 보낼 생각인 것같다. 야곱의 나이도 108세이며 그가 147세에 죽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정착할만한 나이였다.
2절에서 에트를 -을로 해석하면 요셉이 자기 형제들을 양치기했다, 다른 말로 다스렸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형제들이 요셉을 그렇게 싫어했던 이유를 알 수있다.
2절에서 이 이중적인 의미는 둘다 사실로 보인다. 요셉은 양치기장을 맡았고, 자기 형들을 감독하며 양치기를 인솔한 것으로 보인다.
3절에서 채색옷을 짓는다는 건 엄청난 수고가 들어간다. nicot에서는 야곱이 직접 옷을 만들었을 가능성을 말한다. 또한 이것은 요셉이 가장 화려하고 좋은 옷을 입었다는 것이며, 이는 2절에서 요셉이 관리자, 통치자 역할을 한 것과 연결된다.
형들로써는 당연히 싫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4절에 베냐민이 있는데도 요셉을 가장 사랑한 것으로 추측컨데, 요셉이 라헬을 가장 많이 닮지 않았을까? 요셉이 유혹을 물리칠 때도 요셉의 용모가 탁월하다가 나온다. 그리고 라헬의 용모가 탁월했다.
4절에서 히브리어는 ‘그’가 누구인지 모호하게 말하고 있다. 요셉일수도 있고 야곱일수도 있다. 이것은 혜택을 받는 요셉을 싫어한 것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그런 혜택을 준 아버지 야곱을 싫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특히 편안히 말할 수 없다는 말은 보통 꺼려지고 싫어지지만, 좀더 위에 있거나 말하기 힘든 직위에 있는 자들에게 쓰여진다. 이는 아버지 야곱과의 관계일수도 있다는 뜻이다.
에서 디나의 말을 하며 야곱에게 형들은 매우 강하게, 아버지에게 했다고는 믿을수 없을만큼 적대적으로 말한다. 이것은 이런 관계를 반영할수도 있다.
웃기는 것은 2절에서 요셉이(실제 관리감독을 했든, 감시자역할을 했든지) 아버지 야곱의 명으로 형들의 잘못을 보고 하고 3절에서 마치 그 댓가로 멋진 옷을 받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특히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은 더욱 큰 모멸감을 느꼈을것같다.
37장에서 나오는 야곱의 자녀들의 상태는 완전 최악이다.
형제들은 정말 자식이라 할수 없는 모습을 보인다. 34:31 에서 잘 나온다.
사랑받는 요셉은 고자질쟁이에, 형들 입장에서는 허풍선이에 불과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상황에서 구원의 계보를 이어가신다.
스턴버그 : 하나님께서 미래를 이끌 자이자 이집트에서 하나님의 대변인으로 선정된 자의 첫인상은 최악이다. 그는 개차반같고 고자질쟁이에 허풍선이다.
형들뿐 아니라 요셉도 마찬가지다. 사람이라면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모를리없다.
분명 의도적으로 꿈을 이야기했을 것이다. 나이가 17세 18세인데 그정도도 모르면 더 이상하다.
2차 작성
서론
야곱에서 요셉
언약은 나오지 않음.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이어짐
본론
야곱집안의 이미지
야곱은 언약을 받음.
이삭의 뒤를 이어 가나안에 정착
우리에게 요셉은 많은 부분에서 긍정
이는 가나안, 속의 땅을 떠난 에서와 비교됨.
하나님의 언약을 이을자로 합당한 행동
하지만 말씀에서 매우 좋지 않은 이미지로 시작함.
야곱도 요셉도 형제들도 매우 좋지 않은 이미지.
야곱.
하지만 좋은 말로 연약.
라헬의 아들 요셉을 편애함.
2절의 다른 해석
요셉은 자신의 형들과 함께 양치는 일을 함
히브리어 본문은 모호하게 표현.
다른 의미 : 요셉은 자신의 형들을 양침(다스림)
-> 형들의 잘못을 고발함.
-> 형들 위에서 형들을 관리 감독함.
3절
야곱이 요셉에게 채색옷을 줌.
편애이상
2절과 연계해서 보면 형들을 관리감독한 상으로 채색옷을 받은듯한 인상을 줌.
=> 갈등 조장.
언약의 아버지로서의 역할이 아님.
라헬의 죽음이 그의 판단력에 많은영향을 준듯함.
(2절에 관리받는 아들 목록로 레아의 아들은 빠져있음)
요셉
자신의 어림을 앎에도 형들을 감시하는 일을 계속함.
자신과 아버지를 불편해하고 싫어하는 형들에게 굳이 꿈이야기를 함.
-> 누가들어도 화가날만한 이야기.
-> 의도적으로 이야기했을 가능성이 큼.
5절에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8절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 미워함이 더했다.
더하다(요셉)
요셉은 축복이 더하는 것이 아니라, 죄악을 더하고 있다.
본문에서 요셉의 이미지는 고자질쟁이에 허풍선이
형제들
본문전의 내용과 상황을 보면 추측가능
르우벤 : 아버지의 침상을 범함.
디나의 일 : 언약의 증거 할례를 이용해 학살을 자행.
아버지에게 폭언 -
창세기 34:31 NKRV
그들이 이르되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 같이 대우함이 옳으니이까
야곱의 집안의 모습은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나을 정도로 엉망인 상태 .
이후에도 어리석인 모습이 나옴
요셉의 형들은 세겜으로 양치러감.
야곱은 요셉 홀로 형들을 감시하러 세겜으로 보냄.
세겜은 디나사건이 있었던 곳. 결코 좋은 곳이 아님. 하지만 학살을 벌인 그곳에서 형들을 양을 치고 다시 자기 동생을 노예로 팜.
야곱은 아무생각없는 모습으로 요셉을 보내는듯 묘사됨.
2. 하나님의 구원.
본문의 시작 : 2절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갑자기 나온 족보
하지만 일반적인 패턴과는 전혀 다름
족보라는 말이 나오면 이름과 후손들이 이어져야 하지만, 반대로 야곱 집안의 죄악된 모습이 이어지고 있음.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악조차 사용하시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심을 나타냄.
요셉이 양치는 형들을 찾아 세겜에 왔다가 찾지 못하고 있을 때 한사람 등장.
그는 요셉의 방향을 인도.
결과적으로 요셉을 노예로 인도.
이런 모든 일들은 죄악의 연쇄가 되어서 야곱집안을 불행으로 몰아넣는 것처럼 보임.
하지만 2절 시작은 ‘족보’라고 말하고 있음.
족보, 계보는 구원의 이어짐을 의미하는 단어.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그 아들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가장 좋은 길로 그들을 인도.
지금, 형들의 조그마한 잘못도 고자질하는 요셉은 이집티로 찾아온 형들을 용서하는 대범함을 가지게 됨.
형들은 가나안에서의척박한 생활을 뒤로하고 이집트에서의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게 됨.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결론 및 적용
우리는 불완전함.
때론 죄악으로 가득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있음.
어떤 때는 그 기간이 길기도 함.
희망이 보이지 않을수도 있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결국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심.
그럼에도 더욱 좋은 길은 우리가 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
더욱 좋은 것을 주실 하나님을 소망하는 것.
끝까지 하나님을 붙잡는 것.
그리고 우리의 이런 악한 모습을 돌아보며 회개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것.
주님을 끝가지 소망하기.
다시일어서기.
설교
서론
야곱이후 하나님의 언약은 한동안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야곱까지는 한 사람에게만 이어져오던 언약이 이제 한 집안 전체에게로 확대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언약은 더욱 지경을 넓혔는데, 그 언약의 대상인 야곱의 가문은 죄악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역사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죄악중에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눌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본론
언약을 받은 야곱 집안의 상태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야곱입니다.
야곱은 언약의 대상자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 언약에 맞게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면 그는 아버지 이삭과 함께 가나안에 정착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에서가 약속의 땅을 떠나 에돔에서 정착한 것과는 대비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이은 자답게 사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야곱은 매우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는 요셉을 편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편애는 너무 심해서 모든 형제들이 다 알아차릴 정도였습니다.
2절에서 요셉이 형들과 함께 양치고 있었다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다른 식으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요셉이 형들을 양치고 있었다’입니다. 양치다라는 말이 사람에게 쓰일 때는 다스리다라는 뜻입니다. 물론 이렇게 형들을 다스리고 있었다라고 해석한 성경은 없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어는 이렇게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 다음에 나오는 2절을 볼 때,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형들을 다스리는 요셉은 주로 형들을 관리 감독하는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 야곱에게 보고하는 일을 했다는 뜻입니다.
정말 어린 17세의 요셉에게 관리, 감독당하고 있는 형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당연히 싫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형들은 요셉이 불편하고 싫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4절에 나오는 그는 요셉이지만, 야곱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야곱의 이런 행동은 형제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무슨 이유를 붙여도 변명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그런 요셉에게 잘했다는 듯이 채색옷을 지어줍니다. 2절 후에 나오는 3절의 채색옷 사건을 보며, 형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마치, 형들 관리 감독을 잘해서 받는 상처럼 느껴지지 않을까요. 나중에 야곱은 이렇게 형들에게 미움을 받는 요셉을 세겜으로 혼자 보냅니다. 지금 야곱이 있는 곳에서 세겜까지 거리는 약 80km 정도 됩니다. 며칠은 걸어야 하는 거리입니다. 거기다 미움당하는 요셉이 형들에게 무슨 짓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그에 대한 고려도 하지 않습니다. 야곱은 정말로 언약을 받은 자가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추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가 형들을 감독하는 일을 맡겼다면, 17살의 어리디 어린 동생이 정말그 일을 할까요. 보통 같으면 형들과 연합해서 형들의 말을 들으며, 사이좋게 지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런 모습은 전혀 없이 형들의 모든 잘못들을 아버지에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셉이 변명할 수 없는 것은 자신의 꿈을 형들에게 이야기하는 부분입니다.
그 꿈은 누가봐도 형들이 자신에게 절할 것이다. 즉, 요셉 자신이 형들보다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걸 굳이 형들에게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말해봐야 분란만 일어날 것이 뻔한데 말입니다.
물론 이렇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정말 싫어하는 사람에게 가서 조롱할 때 이런 식으로 하죠. 나중에 내가 네 윗사람이 될테니 지금부터 잘해라라고 도발할 때 합니다. 요셉의 의도가 어떤 것이든, 그는 최소한 정말로 어리석은 자고, 만약 도발할 의도로 꿈이야기를 형들에게 했다면, 그는 최소한의 예의도 모르는 자입니다. 그래서 스턴버그라는 신학자는 ‘하나님께서 미래를 이끌 자이자, 이집트에서 하나님의 대변인이 될 자의 첫 인상은 정말 좋지 않다. 그는 철부지(버르장머리없는 놈), 고자질쟁이, 허풍선이다.’ 라고 평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요셉은 정말 좋은 이미지이지만, 본문에서 요셉은 최악의 이미지로 나오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형제들은 어떻습니까. 볼 것도 없이 최악입니다.
르우벤은 빌하와 간통했습니다. 나머지 형제들은 디나 사건때, 언약의 증표인 할례를 이용해서 사람들을 학살합니다. 그 때 34장 31절에는 야곱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이르되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 같이 대우함이 옳으니이까
이게 사실이라도 아버지에게 할 말은 결단코 아닙니다. 형제들은 언약의 중요성도 모르고 아버지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조차 없습니다.
결국 형제들은 왠지 몰라도 다시 세겜으로 양을 치러 갔고, 자신들을 찾아온 요셉을 죽이려고 하다가, 겨우 참고 형제를 노예로 팔아넘기는 짓을 하게 됩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언약은 이제 개인이 아닌 한 가문으로 확대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언약의 가문은 믿지 않는 가문만 못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가문을 그대로 두지 않습니다. 사실 2절에 본문 내용을 시작할 때, 특이한 말이 나옵니다.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라는 말입니다. 보통 이렇게 족보가 이렇다라는 말이 나오면 이름이 쭉 나열됩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가족관계정도는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런 것이 전혀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족보가 이렇다라고 말은 하는데, 그런 계보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번역들은 이것을 족보라고 하지 않고 그냥 가족에 대한 이야기정도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틀린 번역은 아닙니다. 하지만 족보, 계보라고 할 때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계보는 이어짐을 말합니다. 그래서 족보라는 단어가 나오고 나면 누가 누구를 낳고 낳고 낳고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족보, 계보가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되면, 하나님의 구원이 지금 이 가문이나 사람을 통해 흘러내려오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악한 이야기의 시작에 야곱의 족보가 이렇다는 말씀을 한 것은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이어가고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그 가족의 모든 잘못을 알고도 그 가문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성취하신다는 뜻입니다. 비록 그들 모두가 다 악해 누구하나 선하다고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이 이후 바로 요셉의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고,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가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야곱과 그 아들로만 끝나지 않고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유다가 잘못된 행동을 하고 다말역시 창녀행세를 했지만, 그 모든 것조차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시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드러내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심은 실제로 이루어 졌습니다. 요셉을 통해 가장 어려운 흉년에 이스라엘은 애굽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정말 좋은 대우를 받으며 살게 됩니다. 환경만 바뀝니까. 아닙니다. 사람도 완전히 바뀝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셉은 앞서 표현했듯이, 철부지, 고자질쟁이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 고자질쟁이가 형들을 용서했습니다. 형들의 조그만 잘못도 아버지에게 일러바치던 철부지가, 자신을 죽이려하고 노예로 팔아넘긴 형들, 애굽에서 그 모든 세월을 겪게 만든 원인인 형들을 용서합니다. 오히려 그들을 위로하며,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약함과 악함을 알고서도 그 크신 뜻을 이루어가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세겜에서 형들을 찾지 못하고 있던 야곱에게 한 사람을 통해 형들을 만나게 합니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요셉은 다시 집에 돌아왔을테고 애굽에 노예로 팔릴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역사하심을 통해 그들을 선으로 형통함으로 이끄셨습니다. 그래서 최후에는 모두 함께 기뻐하고 함께 웃는 자로 세우셨습니다.
적용 및 결론
오늘 우리는 야곱집안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정말 이스라엘이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악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셨습니다. 우리 삶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인정하지 않아도 우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습니다. 때론 우리역시 야곱같고 요셉같고 형들같을수 있습니다. 서로 미워하고 시기합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그 골이 너무 깊어서 결코 메울수 없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사람은 할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우리가 그 죄악을 풀수 없기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십자가에 쏟으신 피로 그 골을 메워주셨습니다.
삶이 힘들고 지칠수록, 우리는 더욱 죄악된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더 화를 내고 더욱 상처를 주고 서로 더욱 지쳐 갑니다. 하지만 그 때, 하나님께서는 더욱 크게 역사하십니다.
()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오늘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역사하십니다. 우리의 신실하신 하늘 아버지를 끝까지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은혜의 아버지처럼,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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