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가복음 8: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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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은 악한 동기로 예수님을 대했다. 그들은 정죄받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4천여 명의 가난한 자들은 불쌍히 여기셨다.
바리새인은 악한 동기로 예수님을 대했다. 그들은 정죄받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4천여 명의 가난한 자들은 불쌍히 여기셨다.
제 목: 연약한 믿음은 용서하시지만, 완고한 불신은 거절하십니다
본 문:
성경에서 하나님 앞에 선 자들이 공통적으로 보인 태도가 있습니다. 주님 앞에 자신의 더러움과 죄악 됨에 몸서리를 치며, 두려움에 떨었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러했고, 이사야가 그러했습니다. 그 완고했던 야곱이 자신의 어찌할 수 없는 존재를 놓고 하나님과 씨름할 때 하나님도 그의 완고함을 꺾지 못하실 그때, 주님은 그의 허벅지 관절을 치심으로 그를 꺾어 놓으십니다. 무엇입니까? 그 마음이 주님 앞에 굴복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담은 죄를 저지른 이후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자신의 더러움으로 인해 부끄러움과 함께 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욥은 어떠합니까? 엄위하신 주님의 나타내심 앞에 그를 조용히 고개를 떨구고 그 앞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주님 앞에 설 대 모든 할 말을 읽고, 그 거룩함 앞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이전부터 수도원에서 드려지는 한 기도 전통 안에는 다음과 같은 기도가 있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옵소서”라고 반복해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를 주 예수 기도라고 합니다.
이 기도는 자신의 죄인 됨을 토로하며, 하나님이신 예수 앞에, 왕이신 예수 앞에, 다스리시는 자이신 예수 앞에, 자비와 긍휼을 구하며 엎드리는 기도인 것입니다.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은 마음이 강퍅할 때 이 기도를 드림으로 자신에게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임하기를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어찌하지 못하시는 자들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은 죄가 없다하며,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죄악 됨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철저한 자기 확신 속에서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곤 그 마음 안에는 철저한 자기 의와 탐욕이 가득합니다. 하나님은 없고 자신이 만들어낸 우상만이 존재합니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이 그 앞에 나타나도 그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자들에 대해 진노를 내리실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역시 이런 두 부류의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한 부류는 하나님의 말씀에, 진리에, 현실의 문제 앞에 목 말라 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가까운 곳에서부터 저 먼 곳에서까지 오직 참된 진리의 말씀을 듣고자 온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참으로 비참했습니다. 당시 유대지역은 로마에 과도한 세금을 요구하였습니다. 때문에 지배층들은 백성들에게 그 세금을 내기 위해 고혈을 짜내야 했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유리걸식하며, 세금을 내지 못해 도적이 되거나 광야로 숨어들었습니다. 하루 한끼를 먹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며칠에 한 끼를 먹는 것도 감사하다고 여길 이들이 태반이었습니다. 하지만 지배층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배 속을 채우며, 권력을 유지하기에 바빴습니다. 심지어 처음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지키고,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했던 바리새파 역시 그들의 종교적 특권으로 백성들을 속여, 종교장사를 하고, 잘못된 가르침으로 외식하며, 형식주의에 빠져 그렇잖아도 고통 받고 있는 백성들에게 더욱 무거운 종교적 짐을 짊어지게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이 익히 들었던 두 렙돈의 헌금을 드렸던 과부이야기 역시 바로 이런 바리새파의 탐욕을 질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셨습니다. 율법학자들은 긴 옷을 입고 걸어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합니다.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합니다. 잔치에서도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과부의 집을 삼키며,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길게 기도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예수님을 비판하십니다. 그 비판의 말씀 바로 뒤에 이어 여러 명의 부자들이 많은 돈을 헌금합니다. 그러자 가난한 과부가 와서 렙돈 동전 두 개를 넣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44절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정으로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더 많이 헌금을 하였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넉넉한 중에서 헌금을 하였지만, 과부는 가지고 있던 모든 것, 즉 생활에 필요한 돈 전부를 바쳤다” 그후 뒤이어 예수님은 그 아름다운 종교권력의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입니까? 이 과부는 자신의 먹을 것도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과부는 그야말로 아무런 경제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남편이 없는 여인은 먹고 살 수조차 없는 곧 죽을 운명에 처한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고아와 과부는 그야말로 그 사회의 가장 비참한 계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자신의 모든 것을 그 곧 무너질 성전에 바치게 한 자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거들먹거리며 높임 받기를 즐겨하였던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종교권력자들이었습니다.
원문의 의미를 좀 더 살린 다른 영역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 모두는 그들의 풍족한 중에서 헌신하였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녀의 가난한 중에서 그녀가 살아야만 하는 모든 것,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모두 넣었다.”
이를 200주년 카톨릭 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사실 모두 풍족한 가운데서 얼마씩을 넣었지만, 이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서 가진 것을 모두, 곧 그의 생활비를 몽땅 던져 넣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 과부는 다른 부자보다 더 많이 헌금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게 그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과부가 자기 먹을 것도 없는 와중에 그 성전에 헌금을 드리게 만든, 당장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이를 그 과부를 만든, 종교권력자들을 향하여 분노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마땅히 그 웅장한 성전은 무너져야 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는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헌금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연보이자 사회적 안전망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종교권력자들은 당장 돈을 내면 굶어 죽어야 하는 과부의 돈까지 빼앗아 종교장사를 하고, 자신들의 잇속을 채웠던 이들을 비판한 것, 아니 그들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던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헌금을 드리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적 최하층의 굶어죽을 수 밖에 없는 이들에게까지 종교의 이름으로 착취하여 성전을 웅장하게 지었던 정치, 종교 권력자들을 향한 화살입니다. 그들은 가난한 자에 대한 연보대신 정치적 권력을 위해 성전을 웅장하게 지었습니다. 그 돈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로마에 세금을 내야 하는데만도 백성의 고혈을 짜는데, 그 가난한 유대 식민지에서 그야말로 그 당시 로마제국에서도 그 규모가 엄청난 것으로 유명했던 헤롯 성전을 어떻게 지었습니까. 바로 그 고혈을 빨아 지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수한 신앙을 가졌던 수많은 이들은 굶어죽어야 했습니다. 그야말로 자기 목숨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런 처지를 만든 율법학자와 바리새파와 같은 종교권력자들을 향한 칼날 같은 진노의 말씀이셨던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이렇게 길게 언급한 것은 오늘 본문에서 바로 예수님께 반대하여 하늘의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파의 악랄함을 폭로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들먹기리지만 정작 하나님은 없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 앞에 서지만 그들은 그 예수님을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는 더 많은 표적을 구합니다. 결국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비판하십니다. 12절입니다.
“예수께서 마음 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깊이 탄식하십니다. 이 탄식은 예수님의 분노입니다. 그토록 수많은 기적과 표적을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이 세대’는 바로 그 바리새파와 같은 패악한 무리들입니다. 그들은 앞서 말씀드린 그 종교권력자들이자 정치권력자들입니다. 그들은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을 통해, 힘으로, 사상으로, 교리로, 백성들을 옴짝달싹 할 수 없도록 옳아메고는 그들을 착취합니다. 그러면서 관심도 없는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하늘의 표적을 또 구합니다. 그들이 받을 응답은 ‘이를 울며 슬피 우는’ 지옥의 불구덩이에 던져질 심판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랐던 4천 명의 무리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그들이 왜 그 먼 거리를 좇아 왔겠습니까? 그들에겐 소망이 없었습니다. 가족들은 굶어 죽습니다. 땅은 다 빼앗깁니다. 세금은 너무도 과중하여 그를 내지 못해 도망가야 합니다. 갈 곳도 의지할 곳도 마음 둘 곳도 없는 이들입니다. 희망을 잃은 그 사람들은 오직 메시아, 하나님의 다시 오심만을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때문에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수많은 메시아라고 자칭하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왜 그들이 혹세무민하였습니까. 사회적으로 희망이 없는 이들이 그 메시아만을 바랐기 때문입니다. 현실의 모든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들은 마지막 심판과 구원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랐던 그 4천 명으로부터 그 절망과 탄식을 보아야 합니다. 그 고통 속에서 예수님을 그들을 향해 아파하십니다. 눈물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2절입니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그들이 그러면 사흘 동안 먹을 걸 싸와서 다녀야 하는데 그들이 먹을 것이 있었겠습니까? 당장 사회적 착취 속에서 며칠씩을 굶어야 하는 것이 일상인, 현실에서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그들이 먹을 걸 싸들고 다닐 수 있었겠습니까? ‘불쌍히 여기노라’
이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탕자인 아들을 불쌍히 여긴 그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문둥병 환자의 고통을 불쌍히 여긴,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걸식하며 전국을 떠돌아 다녀야 하는 유랑민들을 향한, 아들을 잃고 통곡을 하는 그 과부를 향한, 도적에게 약탈을 당하고 죽어야만 하는 이를 살린 선한 사마리아인의 마음. 그 마음이 바로 이 예수님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사흘을 굶은 이들이 집으로 향한다면 그들이 살겠습니까? 그 당시 사회가 어디서 빌어먹으면 빌어먹을 수 있는 사회라고 생각하시면 잘못생각하시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사회적 착취와 약탈로 비참 그 자체가 바로 그 유대사회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일용할 양식을 주십니다. 그들의 탐욕을 채워주십니까. 아닙니다. 그들의 일용할 양식을 주십니다. 그들의 종교적 탐욕을 채워주십니까. 아닙니다. 그들에게 작은 믿음의 씨앗을 허락하십니다. 그들을 정죄하십니까. 아닙니다. 그들을 향해 위로의 손길을 펴십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 앞서 그렇게 많은 기적들을 보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제자들조차 광야라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을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라며 예수님을 향한 믿음 없음을 드러낼 그때에도 예수님은 7개의 떡과 두 마리의 작은 생선을 떼어 그들을 먹이십니다. 그들을 위로하시고 그들의 배를 채우시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우리는 하나님께 마땅히 구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를 구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탐욕을 위한 것은 구하지 마십시오. 바리새파와 그 율법학자들과 정치권력자들과 같이 정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땅에 앉게 하십니다. 그 땅은 누가 만드신 땅입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땅입니다. 그 땅에 앉은 그 아픈 이들을 예수님이 지금 배부르게 하십니다. 풍성하게 채우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와 같습니다. 가난한 자들이, 슬퍼하는 자들이 배부르는 곳입니다. 그 잔치에 초대 받은 이들이 들어와 잔치에 참여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배부르다고, 지위가 높다고 거들먹거리는 자들은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고 밖에서 이를 갈며 슬피 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 내일 본문에는 바로 바로새인과 헤롯 왕에 대한 경고를 기록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안타까움으로 그 제자들이 깨닫지 못함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이것은 안타까움의 아버지의 음성입니다. 아파하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슬퍼하는 아버지의 눈물입니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그러나 바리새인과 헤롯 왕은 누룩입니다. 그들이 가진 위선과 종교권력을 통한 착취, 헤롯왕의 정치적 탐욕은 하나님의 나라를 더럽히는 누룩입니다. 악의 세력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들을 비판하시는 것입니다. 아니 성경에 나온대로 ‘독사의 새끼들’이라며 욕에 욕을 더하신 것입니다. 성전의 장사판을 둘러 엎고 거룩한 분노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무엇을 구해야 합니까.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마땅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를 싸매어 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배를 불려주실 것입니다. 천국의 잔치에 참여하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완고함으로, 자신의 의를 드러내며, 완고함으로 오히려 주님을 시험하려 할 때, 우리는 이를 갈며 슬피 울 것입니다. 그 천국의 잔치에 참여하기는커녕 정죄받음으로 심판 받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는 주님께 우리를 불쌍히 여겨 달라는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할 것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그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런 패악한 우리를 속전하심으로 풀어내어주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불쌍히 여겨야 할 자를 마땅히 불쌍히, 긍휼히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배를 채우고, 그 생명을 살려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신 그 이웃이 누구입니까?
그 이웃에게 마땅히 우리의 작은 것을 내어 드려야 할 것입니다. 바벨탑을 높이 쌓으려고 하는 모든 시도를 내려 놓고, 낮고 낮은 곳에서, 우리의 작은 섬김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갑시다. 그것이 바로 우리 같은 믿음 없는, 패악한 자들을 은혜로 구원하여 주신 주님이 사랑하시는 그 사랑에 우리가 마땅히 갚아야 할 은혜일 것입니다. 오늘 어떤 이웃을 허락하여 주십니까?
-37절입니다.
“너는 이 세 사람들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라고 생각하느냐? 율법학자가 대답했습니다.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준 사람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똑같이 하여라”
가서 이같이 행합시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