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창조주의 의도를 따라,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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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군대 때 있던 일입니다. 개신교와 카톨릭에서 공동으로 번역한 성서를 읽을 때였습니다. 구약은 도무지 모르겠고, 그나마 이해하겠는 것이 신약인데 특히 사복음서를 보면 참 좋긴 한데 도무지 뭐가 좋은지는 잘 모르고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참 기억이 남는 것이 사복음서에서 네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쪽 뺨도 돌려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참 이런 말씀을 지키라고 요구하시는 예수님이 대단하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안 되었습니다. 그게 안 되더란 말입니다. 저는 도무지 오른쪽 뺨을 맞고 왼쪽 뺨을 돌려댈 수 있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곤 자학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전 무척이나 두려웠습니다. 저로서는 도무지 예수님의 말씀을 따를 수 없는데. 난 멸망으로 떨어지는구나. 난 절대 구원을 못 받겠구나. 그래서 전 군대 때 정말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아니 두려워 벌벌 떨었습니다. 그때 절 지배했던 것은 구원 받지 못한다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지금은 그 감정이 많이 잊혀졌지만 30대 초반까지만 해도 그때 20대 초반의 감정이 제겐 깊이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지 모릅니다. 정말이지 제가 완전하게 자유하게 되어 하늘을 날아 다니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그렇게 하셨는데 내가 할 일도 죽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말입니다. ‘내가 할 일은 어떻게 죽는 거구나’ 였습니다. 오른뺨을 맞는데 왼뺨도 돌려대면 죽습니다. 얼른 그 자리를 피하던지. 얼른 한 대라도 힘을 내서 때려야 덜 맞습니다. 맞습니다.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도 돌려대면 우리의 미래는 딱 정해져 있습니다. ‘죽는다’입니다. 세상을 그렇게 살면 죽습니다. 그렇게 주님이 그렇게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그게 우리의 고민의 시작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혼에 관하여 가르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고 뒤이어 어린아이의 믿음을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참 당황스럽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죽으러 가시는 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미 앞서 두 번이나 자신이 죽으실 것과 부활 하실 것을 예고하신 바 있습니다. 이렇게 두 번이나 자신의 고난 받으실 것을 말씀하신 이후에도 제자들은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건지를 놓고 싸웁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섬김에 대해 말씀하시고, 천국복음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물 한 잔을 주더라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리곤 작은 믿는 자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는 것의 큰 죄를 말씀하시며 죄의 유혹을 이길 것을 가르치십니다. 그리곤 요단 강 건너편 유대 지경으로 들어가십니다.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덫에 걸려 넘어뜨리려고 시험하는 바리새인들의 이혼에 관한 질문에 대해 10:9절에서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고 가르치십니다. 이어 15절을 통해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 나오는 이야기가 부자 청년입니다. 부자청년은 계명을 다 지켰으나 자신의 보화를 내려 놓지 못 해 근심하며 예수님을 따르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23절에서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그 청년을 떠나 보낸 후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자신이 죽으심과 부활하실 것을 알리십니다. 그러나 또다시 제자들은 예수님의 좌편과 우편에 누가 앉을지를 놓고 다툽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신이 섬길려고 온 것이고 대속물로 주려고 온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후에 여리고 주변에서 한 맹인, 곧 시각장애인을 치유하십니다. 그는 부자청년과 달리 곧 예수님을 따릅니다. 이런 문맥 속에서 우리는 처음 예수님이 1장14-15절을 통해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는 말씀을 기억하게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마가복음16:19-20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고 기록하며 마가복음이 맺어집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오늘 이혼에 관한 이야기와 어린아이의 믿음에 관한 이야기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복음에 관하여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으러, 고난 받으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높은 자리를 두고 싸웁니다. 부자청년은 자신의 재물을 내려 놓지 못 해 따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시력을 읽었다 눈을 뜬 가난한 자는 예수님을 스스럼없이 따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통해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라고 하는 믿음을 칭찬하시며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정작 그 길을 진정으로 따르는 자들은 제자들도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도 아니었습니다 부자청년도 아니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자만이 그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고, 눈이 멀었던 자가 그 길을 따라갑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위해 다 버렸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10장29-30절의 내용입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이 세대’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함께 받고, 오는 세대에 있어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제가 ‘오는 세대’라고 번역한 단어는 저희가 보는 개역개정 성경에서 ‘내세’라고 번역돼 있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굳이 ‘내세’ 대신 ‘오는 세대’라고 한 것은 내세는 미래적인 의미만을 말하는 것이지만 원문은 ‘오는 세대’ 즉 지금 오고 있고, 앞으로 완전하게 올 세대라는 진행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우리는 지금 여기서 백 배의 복을 받고, 지금 오고 있고, 앞으로 완전하게 올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고 있고, 완전하게 누리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늘 이혼에 관하여, 그리고 어린아이의 믿음에 관하여 가르치시는 천국 복음인 것입니다. 이혼과 어린아이의 믿음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임한 우리의 천국과 앞으로 완전하게 이루어질 천국에서 일어나는, 일어날 일을 설명하고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혼증서를 써서 이혼을 하는 것을 모세가 허락했다고 말하는 바리새인의 질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그리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 하여 이혼에 대해 불가함을 가르치십니다. 심지어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가는 것이나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 가는 것도 간음이라고 하시며 당시의 문화적 상황에서 과격한 가르침을 베푸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당시 여자들이 남자들로부터 쉽게 이혼을 당하는 배경이 있습니다. 1세기 무렵 예루살렘을 비롯한 유대 사회에서는 몸을 파는 여인들이 급증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여자들이 쉽게 이혼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비교적 온건하게 적용했던 유대 바리새파의 한 지파인 힐렐 학파에 따르면 여자가 밥을 하다 태워먹거나 불을 자꾸 꺼뜨리면 남자는 이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여자는 당시 시대에서 남자에 종속된 존재로서 큰 약자였습니다. 그나마 모세가 말한 이혼증서는 간음한 이외에 이혼을 할 경우 이혼증서를 써 준다는 것은 여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이혼증서에는 이 여자가 간음한 것이 아니라는 내용이 기록되고, 그 이혼이 정당하기에 이혼 당한 여자는 자신이 가져갔던 결혼지참금을 돌려 받고,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최소한의 여성 안전장치가 바로 이 이혼증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회적 강자였던 남성들의 횡포에 대해 그 마음대로 이혼을 할 수 없다는 것과 그들이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이들로서 절대 이혼할 수 없다고 하여 여성들의 생활을 보존토록 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표피적인 것이고 그 이면에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것이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우리는 법으로 금지해 놓은 것만을 하지 못한다고 하면 참으로 끔찍한 세상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법으로 누구를 때리면 징역 1년이라고 합시다. 그래서 때리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때리지 않는 대신 옆에서 계속 욕설을 베풀면서 비난을 한다고 합시다. 당장 법에 저촉돼 감옥에는 가지 않겠지만 그런 행동들은 그 둘의 관계를 깨뜨리는 행동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법은 최소한의 기준으로서 그 둘의 관계를 회복시키는데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법은 최소한 서로 죽이지 못하게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때문에 법이 지배하는 사회는 참으로 삭막한 사회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우리에게 도래한 죄악된 세상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맨 처음 한 것이 관계가 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였지만 이젠 서로에겐 책임을 전가하는 관계의 깨어짐을 경험합니다. 이런 죄과는 가인과 아벨의 살인으로 더욱 극명해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깨짐은 부부의 깨어짐으로, 형제의 깨어짐으로, 사람과 사람의 깨어짐으로, 그렇게 이 세상에는 폭력과 살인과 죽음이 우리를 지배했습니다. 그래서 이 죄가 가득한 악한 세상이기에 모세는 그런 악한 인간을 알기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최소한의 안전장치만을 기록하였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 천국은 어떠합니까? 아담과 하와는 한 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한 몸으로 새롭게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러하니 그들은 원래 에덴 동산에서는 절대 헤어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여 완전하게 하나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하니 그 관계가 완전하게 회복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곳이 바로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를 위해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죽으시기 위해 그 길을 걸어가고 계신 것입니다. 이어 예수님은 어린아이가 오는 것을 가로막는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여기서 꾸짖으셨다는 단어는 ‘매우 노하셨다’ 또는 ‘심히 분노하셨다’ 정도가 적당한 정도의 어감의 단어입니다. 그처럼 예수님은 어린아이가 다가오는 것을 막는 제자들의 행동에 대해 분노하십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 본문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한 본문에서 ‘받들지 않는 자’는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당할 것 같습니다. 즉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을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천국은 어떤 나라입니까? 어린아이와 같이 믿음으로 받아 들이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 나라에 들어가지만 자신이 가진 것이 너무 많아 그를 믿을 수 없는 자는 도무지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 바로 천국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부자청년이 근심하며 돌아갑니다. 내려 놓을 게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없는 시각장애인은 치유함을 받곤 바로 그 길로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재물이 많은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고 말씀하십니다. 내려 놓을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 어떤 곳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 나라는 관계가 회복되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믿음으로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자신이 가진 것을 내려 놓아야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그냥 ‘그래야 믿어요’라고 한 마디 툭 던지면 되는 것이 아니라 믿는다는 것은 ‘자신이 가진 것을 내려 놓는다’는 것을 실행하는 믿음의 고백이 있는 자들이 들어가는 나라인 것입니다.
그러하니 예수님이 세례 요한을 두고 말씀하십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 세례 요한이 가장 크다. 그러나 그런 세례 요한도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다. 참으로 엄청난 말입니다. 세례 요한이 누구입니까? 그런데 그런 세례 요한이 가장 작은 자라니요.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라니요. 천국이라니요. 천국이 만만한 곳이 아님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생명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는 것이며 아들을 믿는 자는 생명, 곧 영생을 소유하였고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믿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영생은 사랑과 기쁨 안에서 그 모습을 나타낸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에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요일3:14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이혼의 고통을 겪는 분들을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오늘 이혼을 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이혼의 고통을 겪은 분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사랑이 우리 안에 가득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이 말씀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바라시는, 그리고 우리가 누리고, 누려야 할 천국의 기쁨이 어떤 곳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관계가 회복된 나라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믿음으로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렇기에 그곳에는 탐욕과 자기 목적과 자아가 발 붙일 곳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지금도 우리는 여기서 천국을 경험하면서도, 또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갈 곳이 어디입니까? 구원을 완전하게 얻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이 선한 싸움을 싸워 이깁시다. 그 척도는 내 마음에 어린아이와 같은 깨끗한 마음이 있는가, 사랑이 가득한가, 아니면 다른 것들이 나를 채우고 있는가로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의 더러운 마음을 주님 앞에 내려 놓읍시다. 주님은 선하시어, 그 피로 우리를 씻기셨습니다. 오늘 하루도, 선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세상에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답게 살아갑시다. 세상이 그를 보고, 하나님께 돌아올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