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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언어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당하지
말은 공중에 흩어져 사라지는 연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 앞에 올라가는 향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을 따라 행하십니다. 하나님은 말을 따라 역사하십니다.
말은 그 사람의 인생을 결정할 정도로 영향력이 큽니다. 습관적으로 실패의 말을 하는 사람은 불행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긍정적인 사람은 겅강한 삶을 살아 갑니다. 우리가 인생의 방향을 바꾸고 싶다면 우리의 말을 바꾸어야 합니다.
기도의 언어가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마을 따라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며 전능자이기시 때문에 모든 것을 원하는대로 행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말 속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말을 따라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
기도 응답은 기도자의 믿음대로 됩니다. 사람의 말 속에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모르기 때문에 말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전지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언어가 중요한 것은 그 일에 대한 믿음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소원의 언어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마태복음 7장 7절에서 8절의 말씀을 보면

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틴테일 주석>
마태복음 9) 하나님께 대한 제자들의 태도(7:7–11)

9) 하나님께 대한 제자들의 태도(7:7–11)

〈7–8〉 이 단락에 등장하는 세 개의 균형잡힌 문장들은 지속적인 기도에 대한 강한 권고로서 작용한다. ‘구하라’, ‘찾으라’는 기도를 위한 비유이지 각각이 분리되어서 다른 권고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두드리는 것’은 랍비들의 언급에서 기도를 위한 비유로서 기능하고 있다). 7절에 등장하는 세 개의 명령법은 모두 현재시제로 되어있는데, 이것은 지속적인 끊임없는 기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응답을 받게 되는 기도는 다름 아닌 바로 이러한 기도이다(참조, 눅 11:5–8, 18:1–8의 비유).

예레미아스가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이것은 ‘거지의 지혜’(beggar’s wisdom)이다. 비록 거지가 가혹하게 거절당했다 할지라도 지속적인 청원이 몰인정한 사람들로부터 끝내는 자비를 얻어내고야 만다는 사실을 그가 알고 있다면, 당신의 지속적인 기도가 하늘 아버지로부터 마침내 응답을 얻어낼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얼마나 더 확신을 가지지 않을 수 있을까.

이것은 기도의 기본을 구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출발은 간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먼저 ‘구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기도 한다는 것은 구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구할 것이 있다는 것은 소원이 있다는 것이고 하나님은 소원을 두고 행하십니다. 그리고 소원을 이루길 원하십니다.
소원을 소유한 사람만이 소원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소원을 점검하지 않으면 소원이 있는 것을 모릅니다. 현실에 안주하기 때문에 소원을 알아내지 못합니다. 소원을 가졌지만 흐르는 세월 속에서 소원 성취의 소망을 상실해 버립니다.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소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소원이 없는 사람에게는 성취도 응답도 없습니다. 구한 것이 없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셔도 그것이 기도의 응답인지 모릅니다.
믿음의 언어로 기도해 야 합니다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로마서 주석: 신성한 결혼 1. 메시아 왕과 언약의 목적 (롬 10:1–21)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바울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방식을 설명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아무런 수고를 요구하시지 않는다는 단순성에 많은 이들이 충격을 받는다. 이런 사람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위대한 희생이나 율법을 향한 충성을 요구하신다고 추측한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유일한 것은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그에게 순종하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물론 바울이 죄의 심각성을 간과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미 앞부분에서 죄의 참혹한 결과를 서술했고, 인간의 죄악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심각하고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자세히 설명했다. 더불어 바울은 하나님이 그의 아들의 죽음을 통해 피할 길을 예비하셨다고 강조했다.

NIV 영어성경 번역자들은 헬라어 “디카이오쉬넨”(δικαιοσύνην)을 “justified”(의롭게 되다)로 번역하였다. 사실 “에이스”(εἰς)라는 전치사가 동사나 명사 앞에 오면, “you believed into righteousness” 혹은 “you believe, resulting in righteousness”의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마음으로 믿는 이들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게 된다는 말이다. “justified”(의롭게 되다)와 “righteousness”(의)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전자가 사건이라면, 후자는 신분이라는 점에 있다. 의는 의롭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엄격히 말하자면, 이 두 단어는 완전히 동일어는 아니다. 선지자들이 사용했던 칭의와 의에 관한 언어를 빌리자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의로 행하사, 압제자로부터 그들을 구원하셨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은 의롭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잃어버렸던 관계를 회복하였다.

10절의 고백은 회심하는 각 개인의 고백이다. 이 책에서 개인적으로 로마서 6:1–4과 다른 서신서 본문에 내포된 집단적 세례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믿음을 고백하는 각 개인에게 세례를 주는 초대 교회의 관례를 부인하진 않는다(고전 1:14, 17). 이는 사도행전(행 2:38, 41, 46–47; 13:24; 19:5)에서도 입증된다. 신약의 저자들은 세례를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믿음의 자연스러운 표현이라고 여겼다. 사실 세례는 자연스러운 표현이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가 마지막으로 명령한 부분이기도 했다(마 28:19).

원문 중심의 이야기 로마서 2장. 유대인과 이방인의 믿음(10장)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10:9–10).

먼저 9절을 보면, 바울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말합니다. 신명기에서 모세는 말씀이 우리와 가까운곳, 즉 우리의 입과 마음에 있다고 말합니다(신 30:14). 하지만 바울은 모세가 기록한 말씀을 바로 자신이 전하는 믿음의 말씀, 즉 복음이라는 의미로 바꾸어 인용합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과 입에 있다’는 말을 ‘구원의 길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다’는 의미로 바꾸어 말합니다. 이렇게 바울은 복음을 들었을 때 마음으로 믿고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면 구원해 주시겠다고 약속한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구약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이고, 그분이 나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Lord)라는 말은 헬라어로 ‘퀴리오스’(κύριος) 인데, ‘주인’(lord, master)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주’라는 말을 44번이나 사용하는데, 그 중에 33번은 예수님을, 8번은 하나님을, 3번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동시에 ‘주’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주가 되시고 내 삶의 주인이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예수님이 교회와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시라는 고백입니다.

하지만 바울 당시의 세상 사람들은 로마 황제를 ‘주’라고 불렀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세상의 주권자는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 당시의 신자들은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라는 진지한 신앙고백을 했고,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온갖 핍박과 조롱을 받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원형 경기장 안에서 짐승의 밥이 되기도 했고, 나무에 매달려서 화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북한 지하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이나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에서 핍박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이와 같은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명을 내건 결단과 진지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입으로 시인하는데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박용규, 69–105)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10:10)라고 말합니다. 특별히 여기서 말하는 ‘마음’은 헬라어로 ‘칼디아’(καρδία)입니다. 이 단어는 인간의 지식과 의지와 감정을 포함한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 즉 인격의 중심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마음은 성령님이 일하시는 신비한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믿는다’라는 말은 정말 진지하게, 그리고 전 인격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믿음의 열쇠는 마음에 있고,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전 인격을 동반한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이렇게 온전한 마음으로,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요, 내 삶의 주인이요,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시인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구원을 받습니다.

또 ‘시인하며’(호몰로게오, ομολογεω)라는 단어는 ‘공적으로 고백한다’는 뜻입니다(10:10). 즉 예수님만이 나의 유일한 구세주이시며 나의 유일한 신앙의 대상이 되신다는 사실을 공적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 앞에서 공적으로 고백한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고, 세상 사람들 앞에서 공적으로 선포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 10:32–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세상 속에서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고 고백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을 증거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는 “예수님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 너무 값싸게 느껴집니다. “예수님 믿으면 천국간다”는 말을 너무나 가볍고 쉽게 생각합니다. “예수님 믿어서 손해 볼 것은 없으니 한번 믿어나 보자”라며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물론 그렇게 교회를 다니다가 정말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성령으로 거듭나서 신앙생활을 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처음부터 잘못된 마음가짐으로 오랫동안 교회 생활을 하면서 종교 생활에만 익숙해진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다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교회에서 직분을 받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면, 자신이 정말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착각 속에서 살아가기 쉽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적한 유대인들의 모습이 이와 같았습니다. 그들은 종교 생활을 잘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실 것이고 틀림없이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내가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지 못했고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이러한 종교적 확신 속에 살아가면서 구원받지 못한 상태로 있게 된 근본적인 이유를 9–10장에서 설명합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볼 때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지만, 또 다른 면에서 볼 때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9장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말한 후에, 10장에서 인간의 순종과 책임을 강조합니다. 이 점은 ‘모든 사람’(12절에 두 번 반복), ‘누구든지’(11절과 13절)라는 단어 사용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이런 측면에서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순종과 인간의 책임을 지나치게 약화시키는 복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와 반대로 인간의 순종과 책임을 지나치게 강조해서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는 선택과 예정을 지나치게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만약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을 생각지 않으면, 너무 쉽게 ‘내가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갈 수 있다’라는 착각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이것 또한 구원의 문제를 굉장히 오해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요 1:12–13)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동시에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성령으로 거듭남; cf. 요 3:5). 따라서 이 본문 역시 인간의 책임(to receive, to believe)과 하나님의 주권(born of God)이 서로 균형을 이룹니다(Köstenberger, 38). 마찬가지로 9장과 10장도 이러한 균형을 잘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인간의 책임 둘 모두를 기억해야 합니다.

계시의존사색 I 2. 누구에게 기도할까?

2. 누구에게 기도할까?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해야 된다(5절 하반). 여기 “모든 사람”이란 말(πᾶσι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시지 아니하시고 누구에게든지 은혜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은 역시 중요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기도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시되,

(1) 단순한 마음으로(ἁπλῶς) 주심. 곧 너그럽게 주심을 의미한다. 기도자가 진정으로 기도할 때에 하나님은 그의 과거를 묻지 아니하시고 거저 은혜를 주신다는 뜻이다. 그는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어 주신다(마 5:45).

(2) 꾸짖지 아니하심. 사람들은 누구에게 무엇을 은혜롭게 준 다음에도 그가 그것을 잘 사용하지 못한 경우에는 그 준 것을 후회하고 관계를 끊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정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자에게 언제든지 주신다. 그 받은 자가 후에 잘못하였을지라도 그가 회개하고 다시 구할 때에는 하나님은 계속하여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이는 마치 회개하는 자의 죄를 용서하시되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심과 같다(마 18:22).

이렇게 그는 은혜로우셔서 기도자에게 은혜를 계속하여 주신다. 그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신다(마 12:20). 하나님의 이와 같은 기도 응답은 17절에도 나타났으니 곧,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고 한다. 야고보는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에 대하여 강조한다. 그는 행동주의 혹은 율법주의를 강조하는 듯하나,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는 윤리 실행을 강조하면서도 은혜 안에서 그리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복음주의적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많은 기독자들이 하나님의 이처럼 관대하심을 깨닫지 못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마 25:24–27을 보아서 알 수 있다. 곧, 한 달란트 받았던 자가 그 주인에게 와서 “당신은 굳은 사람이다”고 한 것과 마찬가지이다(24절). 그는 어찌하여 그 주인의 관대함을 깨닫지 못하였던가? 그 원인은, 그가 그의 받은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고 일하지 않은 게으른 종이 된 사실에 있다(25–26).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주신 무진장한 은혜를 깨닫지 못한다. 부지런히 말씀대로 살며 순종하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을 깨닫게 된다. 불량자는 아버지의 선한 지도를 순종하기 싫어하므로 그 아버지의 모든 지도를 역스럽게 여긴다.

3. 기도의 방법

우리는 믿음으로 기대해야 된다(6–8). 하나님과 인류의 관계는 먼저 아니 언제나 믿음에 의하여 정상화(定常化)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창조자이시고 고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선한 행위는 신앙에서 나오게 마련이다. 우리는 가지요 하나님은 뿌리니, 가지는 뿌리에 의뢰해서만 열매를 맺는 법이다(요 15:4). 아담 하와의 실패도 불신앙에서 난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도리어 마귀의 말을 믿었다. 하나님은 말씀의 제도에 의하여 우리를 지도하신다. 그가 이스라엘은 소망의 믿음으로(역시 말씀에 의하여) 지도하시고(가나한 땅 약속을 바라보게 하심), 신약 시대의 백성은 예언 성취로 하신다(역시 말씀에 의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달을 때에 우리의 믿음이 자라난다. 롬 10:17에 말하기를,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신다. 엡 2:8; 살후 3:2 참조.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우리가 알 때에 그것도 믿음이다. 사람들이 야고보를 가리켜 행위를 주장하는 자요 믿음을 주장하지 않는 자라고 하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야고보가 이 부분 말씀에서 얼마나 믿음을 강조하는가?

II. 4:1–3의 해석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여기서도 야고보는 은혜를 주장한다. 진정으로 하나님께 구하기만 하면 거저 받는다는 것이 은혜의 원리에 속한다(6절). 그리고 기도하는 마음 자체가 신앙에 속한다. 신앙은 거룩한 것이어서(유 1:20), 쾌락주의를 배격한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2절 하반). 여기서는 야고보가 신자들의 기도하지 않는 생활을 꾸짖는다. 그들은 왜 기도에 나태하였던가? 그것은 그들의 이 세상 사랑하는 쾌락(ἡδονή) 때문이었다. 그들이 이 세상을 사랑하여 서로 싸우다시피 불붙는 욕심을 가졌던 것이다(3:14–16). 언제나 사람이 탐심에 불타면 기도할 시간을 내지 않고 덤빈다. 우리가 무엇에 너무 마음을 뜨겁게 가지면 그것이 우리에게 해를 끼친다. 그 이유는 탐심으로 뜨거워지면 그것을 취하려고 하나님을 제외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소원 앞에서도 마음에 침착성을 지니고 기도 시간을 내야 한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3절). 여기 “정욕”이란 말도 쾌락(ἡδονή)을 의미한다. 야고보가 여기 말한 “정욕”이란 말은 이 세상을 즐기는 심리와 행동이다. 이것이 신자의 기도 생활을 방해할 뿐 아니라(1–2), 이것 때문에 기도 응답도 받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이것이 하나님과 반대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밝히기 위하여 야고보는 4:4–9에 몇 가지 대조적인 표현들을 사용한다. 곧, ① 세상과 하나님(4절), ② 교만과 겸손(6절), ③ 마귀와 하나님(7–8상반), ④ 웃음과 애통(8하반-9) 등이다.

쾌락주의는 이 세상주의이고, 교만이고, 마귀적이고, 웃음(이 세상 쾌락주의) 이다. 쾌락주의는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보다 더하니 이는 교만이요 마귀적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주의의 실현을 위한 기도는 응답될 수 없다.

III. 5:13–18의 해석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찌니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찌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찌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18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여기서는 야고보의 하나님 중심주의가 현저히 나타나고 있다. 사람들이 야고보서를 읽을 때에 그것이 행위 중심으로만 이끄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듯하다. 그래서 그것은 믿음을 주장하는 바울의 신학과 배치되는 듯하다. 그러나 이 책을 깊이 살펴보면 그런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하나님 중심주의에서 가르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인생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께만 있다고 한다. 그것이 결국 믿음 중심의 교훈이다. 여기 13절 말씀을 보면, 사람이 고난을 하나님에게서 그 의의(意義)를 찾도록 한 것이다. 고난당하는 자가 기도해야 된다는 것이 곧바로 하나님에게서 그 해결을 받으라는 의미이고, 즐거워하는 자는 찬송하라는 것도 역시 그 당한 일을 하나님께 관계시키는 행동을 말함이다. 찬송하라는 것은 곧 감사하라는 말씀과 같다

이렇게 야고보는 신앙생활의 양전(兩全)을 강조한다. 바울은 역시 신앙생활의 양전을 힘썼다. 그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서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그와 같은 생활이다(빌 4:12–13). 신자는 일방적으로 치우치면 안 되고 언제나 양전을 힘써야 한다. 만일 신자가 평안하고 즐거운 가운데서만 신앙생활을 할 줄 알고 괴로운 중에는 못한다면 그는 병적이다.

(1)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14절)

여기 이른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라는 말씀은 우리의 주목을 끈다. 이것은 교회의 대표자들을 청하라는 말씀이니, 그 병자를 위한 기도가 교회적 권위로 실행되어야 할 것을 여기 알려주고 있다. 그들이 교회의 장로들이니만큼 신앙의 모본이 될 만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야고보가 이 점에 있어서도 신앙 본위로 문제 해결을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

“기름을 바르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어떤 학자들은 그때에 기름을 약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여기서도 그것을 병자의 몸에 바르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① 이 부분 말씀에 있어서 병자를 위하여 기도함으로 기적적으로 그 병이 낫도록 한 것이니만큼 그 해석은 정당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여기 “기름”은 은혜의 상징이라고 생각함이 옳다(Calvin). 그 뿐 아니라

② 여기 “주의 이름”이란 말은 기름 바르는 행동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니만큼 그 행사는 단순히 일반 은총에 속하는 의학적 치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 “주의 이름”이란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리키는 것이니만큼 이 행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비유한다고 함이 옳은 해석이다.

③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에게서 받은 권능에 의하여 병자들을 고침에 있어서 역시 그 병자에게 기름을 바르는 일도 있었다(막 6:3). 그러나 이 행사가 단지 상징적 의미를 가진 것이니만큼 제자들이 그것을 실시하지 않은 때가 더 많았다.

④ 그뿐 아니라 기름을 가지고 무슨 병이나 고칠 수 있다고 우리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만큼 일반적 병자들을 취급하는 우리 본문에 있어서 “기름”이란 말은 약품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은 명백하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생각할 중요한 일들이 있다.

ⓐ 이 부분 말씀에 있어서 병자를 위하여 기도함으로 기적적으로, 병들었을 때에 그들은 병원 치료를 무시할 것은 아니지만, 그것보다 먼저 주님의 치료하여 주시는 은혜를 구해야 된다. 그러나 기독 신자들도 이 일에 있어서 도리어 기도보다 병원을 먼저 생각하는 일이 많다. 이런 과오는 옛날 이스라엘의 아사 왕이 범한 죄과이다(대하 16:12).

ⓑ 기독 신자가 무슨 병이든지 고침받기 위하여 기도하며 힘써야 될까? 어떤 고통은 우리의 이익을 위하여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기도 하다. 질병이라고 하여 언제든지 우리에게 해로운 것은 아니다. 바울은 자기에게 찌르는 가시 같은 고통이 있었으므로 그것을 없애주시기를 하나님께 세 번이나 간구한 바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고쳐주시지 않으시고(고후 12:7–8) 도리어 그것을 족하게 여기라고 하셨다. 우리는 질병에 걸렸을 때 그 병고가 하나님의 선물인지 여부를 먼저 알아보고 그 후에 그 질병을 취급해야 될까? 우리는 질병의 이유를 알기 어려운 것인 만큼 우선 그 질병을 고침 받기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정당하다. 바울도 그렇게 하지 않았던가?

ⓒ 그리고 또 한 가지 생각할 것은, 사도 이후 시대 곧 교회 시대에도 기도로 병 고침 받는 일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사도적 기적의 독특한 성격을 언제나 명심하지만 현대에도 자연법 이상으로 특수한 섭리가 있음을 우리는 믿는다. 루터 선생의 친구 마이코니우스(Myconius)가 폐병으로 죽게 되었을 때에 그는 루터에게 편지로 이 사실을 알렸다. 루터는 그 편지를 받은 즉시 꿇어 앉아 기도하기를 “주여!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형제 마이코니우스를 데려가시면 안 됩니다. 마이코니우스가 없이는 주님의 일이 잘 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가 그렇게 기도한 후 일어나서 마이코니우스에게 편지하기를, “형제여! 그대의 병은 걱정할 일이 아니요, 당신은 죽지 않을 것이요. 당신이 죽었다는 소식이 내게 오도록 주님께서 하시지 않을 것이요.”라고 하였다. 이 편지가 마이코니우스에게 전해졌을 때에 그가 이 편지를 읽는 순간 그의 병이 고쳐졌다.

(2)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15–16)

여기 이른바 “믿음의 기도”란 것은 어떤 것인가? 이 믿음은 물론 “하나님의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는”(히 11:6) 믿음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이 점에 있어서 언제나 명심해야 될 사실이 있다. 그것은,

① 그 믿음이 다만 관념론적(觀念論的)인 신념은 아니라는 것이다. 관념론적인 신념은 이교(異敎)에서도 말한다.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이란 것은 윤리적(倫理的) 행위로 그 완전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약 2:22에 말하기를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가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고 한다. 야고보의 이 말은 참된 믿음이 보통으로 행위로 나타난다는 의미이고 어떤 율법주의적인 행동을 믿음이라고 함은 아니다. 사실상 믿음과 행동의 구분은 논리적으로는 가능하나 실질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비유를 들면 나무와 그 뿌리의 관련성이 서로 나뉘지 못함과 마찬가지이다. 나무를 끊으면 뿌리도 죽을 수밖에 없다.

② 야고보는 믿음을 논함에 있어서 회개 문제도 겸병하여 말한다(16절). 회개는 믿음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만큼 병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자리에 그 기도자들의 회개는 필수적인 것이라고, 야고보는 여기서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와 동반한 믿음을 산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믿음의 소유자를 의인이라는 의미로도 야고보는 말한다(16절 하반).

(3)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15절 중반)

여기 “주”란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야고보서는 행위를 강조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하여는 중점을 두지 않은 듯이 잘못 생각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신자들이 기도를 통한 은혜를 받는 데 있어서 그 은혜의 통로(通路)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점을 야고보는 원칙적으로 말한다. 기도로 말미암아 받는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좌우된다는 사상이 1:7에도 있다. 거기 말하기를,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지 말라”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신자가 구원의 은혜를 위시하여 무슨 은혜든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받게 된다는 것이 야고보의 사상이다.

(4) “엘리야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17–18)

여기서는 구약 시대의 엘리야의 기도에 대하여 말하면서 기독 신자들의 기도를 장려한다. 여기 나오는 중요한 말씀은,

①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 여기 “성정이 같다”고 함(ὁμοπαθής)은 엘리야도 연약한 인간이고 신자들도 연약한 인간인 점에 있어서 동일하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엘리야나 우리나 그 인간성에 있어서는 꼭 같은 죄인이라는 사실이 여기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기도 응답을 받는 자라고 해서 그가 어떠한 초인간적(超人間的)인 특수 인격이 아니라는 사실이 알려진다. 도리어 이 말씀은 기도의 특권이 우리의 연약성 때문이라는 진리를 나타내고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상을 성경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시 65:2에 말하기를,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오리이다.”하였고, 시 69:33에는 말하기를, “여호와는 궁핍한 자를 들으시며 자기를 인하여 수금된 자를 멸시치 아니하시나니”라고 하였다.

② 엘리야의 기도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 그가 비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 결과로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고난을 받았고 또 그가 비오기를 위하여 기도한 때에 역시 이스라엘 전국이 그 혜택을 입었다.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명심해야 된다. 곧, 비록 연약한 기독 신자라 할지라도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그의 속하여 있는 교회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현대 신자들의 기도는 너무나 개인주의적이어서 다른 사람을 진정한 의미에서 위하는 열렬한 기도를 하지 못한다. 이것이야말로 기도 생활에 있어서는 너무도 좁아져서 질식 상태에 빠진 비참한 처지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신자들이 신앙이 부족하고 기도가 부족한 이 시대에 어찌 좋은 일이 있을 것을 기대하랴?

③ 엘리야의 기도는 어디까지나 은혜로 되었고 믿음으로 되었다는 것. 그의 기도는 자율주의 조작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비오지 않기를 기도한 배후에는 하나님의 지시가 있었다. 왕상 17:1을 보면 그가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을 것을 예언하였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그가 자기 마음대로 그런 무서운 기도를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이스라엘의 죄악을 염려하였고, 또 그것에 대한 징벌이 내릴 것을 간구한 것이다. 그 때에 그가 하나님 편에 서서 이스라엘의 죄악을 공격하는 것은 극도로 위험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종의 신분을 어디까지나 파수하려고 그런 위험한 기도도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죄악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분명히 아는 그는 그 죄악 문제가 해결될 때에 비로소 땅에 비가 내릴 것도 하나님의 지시에 의하여 그는 알게 되었다(왕상 18:1). 그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 때문에 비가 오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렇게 담대히 기도하였다(왕상 18:41–45). 엘리야의 기도야말로 요일 5:14–15의 말씀대로 된 것이다. 거기 말하기를,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이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을 줄을 또한 아느니라”고 하였다.

우리 기독자들도 엘리야와 같이 기도의 사명을 실행해야 된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고, 야고보는 말한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바로 보고 그 문제의 해결을 초점으로 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나 우리 기독자들은 교회의 죄악을 문제시하여 그것을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해결을 받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야 된다. 옛날의 이스라엘은 오늘날의 교회에 해당될지언정 육체적 국가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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