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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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입 질문
도입 질문
선교의 계절 여름이 다가 오고 있습니다.
선교의 계절 여름이 다가 오고 있습니다.
금식릴레이가 끝나고 부활절이 끝나면 벌써 2-3달 후에는
해외 선교와 국내선교를 떠날 예정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삶은 우리에게
부탁하신 하나님의 지상 명령입니다.
그런데 , 어느순간부터 복음을 전하지 않는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고,
그저 내 스펙과 내 진로, 진학, 직장을 잘 챙기면서 예배에 빠지지 않고,
맡겨진 사역을 하는것이 청년으로서 이상적인 목표가 되어 갑니다.
우리의 최종 목표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것,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며, 주님이 전하라고 말씀하신 복음을 전하는것이
우리의 인생의 목표입니다.
자신이 상상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연구하고, 준비하고,
그것을 꿈꾸며 실행시키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100퍼센트 전기로만 움직이는 차를 만드는 목표로 테슬라 자동차를 만들었고,
지금은 GM과 포드에 이어서 시가총액이 그 절반 가까이 커쳤습니다.
화성에가는 유인우주선을 만들기 위해서 스페이스 엑스라는 회사를 만들어서
반복해서 재사용가능한 로켓을 만들었고, 실제로 성공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꿈꾸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그것에 꿈을 두고,
그것을 실행하는데 기술과 노력과 힘과 모든 자본을 더했더니,
시류의 흐름을 잘 만나서, 최고의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떠한 꿈과 목표가 있으 신가요?
오늘 여러분을 살펴보시며,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대략 이렀습니다.
포도원 농부가 품꾼을 얻어서 포도원에 일을 시키는 장면입니다.
오늘날로 오전 9시, 12시, 오후 3시 , 오후 5시에도 나가는 포도원 주인입니다.
그리고 동일한 임금을 주고 , 누군가 불만을 품자. 내가 너와 약속한 것이 이것이 아니냐고? 내것을 주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된다고 말을 합니다.
배경 설명
그는 12살에
배경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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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는 그와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지 만 여전히 "우리를 위해 무엇이있을 것입니까?"라고 궁금해한다는 것을 예수님 께 상기시킴으로써 부유 한 젊은 통치자의 불신앙에 반응했을 때 예수님은 베드로 보너스를 약속하셨습니다. "나를 따라온 너희는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 할 것이다. 그리고 집이나 형제 나 자매, 아버지 나 어머니, 자녀, 들판을 나에게 남겨둔 사람은 모두 백 배를 받고 영생을 얻습니다. "(마태 복음 19 : 28-29) 마지막 연구에서 그 단어들에 대해 논평 할 때, 나는 하나님이 사람의 빚진자가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채무자는이 구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부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빚지고 있다는 의무를 의미합니다. 사실 베드로는 베드로가 "우리에게 무엇이있을 것입니까?"라고 물었을 때의 의미였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빚이 없으며, 우리가받은 것은 무엇이든지간에 그가 은혜 롭기 때문에받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이 개념을 이해하도록하기 위해 예수님은 포도원에있는 일꾼들의 비유를 들려 주셨습니다. 이 비유는 마태 복음에서만 발생합니다. 여기서 마태 복음 19:30의 원리를 설명하는 역할을합니다 ( "처음에는 많은 사람이 마지막 이요, 마지막 사람이 먼저 나옵니다"). 이 아이디어는 이야기가 끝나면 반복됩니다.
본문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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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는
1. 천국은 우리의 생각과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2. 우리가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가 아닌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가 되었다.
3. 하나님께서 먼저 나를 찾으셨다. 잃어버린 나를 찾으시고, 나를 사용하셨다.
우리모두 사랑의 자녀로 주님이 삼아주셨다.
그렇다면이 비유를 어떻게 이해해야합니까? 적어도 그것은 구원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에 관해 가르치기위한 이야기입니다. 베드로는 자신과 제자들이 제자 양육을 위해 얻을 수있는 것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봉사에 대한 보상을 받으 셨지만 봉사 또는 영원한 생명을위한 보상으로서 하느님으로부터받은 모든 것은 그 자체로서 오직 하느님의 은혜로부터 흘러 나오는 선물 이었음을 가르치고있었습니다. Sola gratia!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빚이 없으며 복음을 듣고 반응 할 기회조차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지어 교회에가는 사람들조차도 우리 시대에는 너무 적은 은혜를 떠올리는 이유입니다. John Newton의 "Amazing Grace"는 가장 인기있는 찬송가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J. I. Packer는 하나님을 아는 일에서 "놀라운 은혜"는 많은 사람들에게 지루한 은혜가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죄인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지루합니다. 적어도 큰 죄인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빚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루합니다. 우리는 친절하고 관대하며 용서하고 있습니다. 왜 하느님이되어서는 안됩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은 하나님은 인간과 같지 않고 우리의 생각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왕국에있는 모든 것은 은혜에 기반을두고 있습니다. 이것이 "마지막이 첫째가되고 처음이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마태의 즉각적인 맥락에서 우리가 비유에서 더 많이보아야한다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방인들이 복음을 믿고 기독교를 받아들이 기 시작했을 때 유태인들이 겪었던 문제를 다루는 비유의 특정 계급 중 하나임을 알아 차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 문제는 예수님이 방탕 한 자의 비유에서 형제의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 비유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초대되었지만 오지 않기로 한 연회 ()와 바리새인과 세금 징수 원의 비유 (누가 복음 18 : 9-14)에 관한 비유가 있습니다 .1
구약 전서 역사의 초기에 그리스도 앞에서 천 년 동안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아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특별한 방법으로 다루기 시작하셨습니다. 주 예수님이 결국 오게 될 사람들을 창조하고, 구속하고, 가르치고 제자 삼기 시작했을 때, 거의 이따금 씩 이방인에게 등을 돌린 것과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우리가 그랬듯이 유산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이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 (종종 은혜를 입었던 은혜) 때문 이었음을 기억하는 대신에, 유대인들은 그들의 위치의 이점이 정말로 그들 자신에게 크게 기인 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수세기 동안 신실한 수고로 하나님의 위치를 얻었다 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준비에 기뻤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셨을 때, 수세기에 걸친 열심히 일한 사람들이 얻은 모든 유익은 이제 그럴 자격이없는 이방인에게 자유롭게 주어졌습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의 사고 방식에 사악했던 아버지의 재산이나 세금 징수 원을 낭비 한 탕자와 같았습니다. 더욱이, 많은 이방인들이 회심하여 시간이 지남에 따라 소중한 유대인의 전통이 폐기 될 것처럼 보였습니다.
제가 말씀 드렸듯이, 여러 가지 비유가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형제의 이야기와 포도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비유는 비슷합니다. 신실한 사람들 각자 (열심히 일하는 사람 (한 사람의 아들과 다른 사람의 하루 시작일에 고용 된 노동자))는 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아버지 나 주인의 관용을 후회합니다. 그 아들은 밖에 나가서 들어가기를 거부했습니다 (). 노동자들은 토지 소유자에 대해 불평했다 (). 근본 문제는 친절하게 대우를받은 사람들의 부러움이었습니다.
연회 비유에서 진단은 다소 다릅니다. 결국 추방자들은 주인의 연회를 즐기기 위해 입장하지만, 초대받은 사람들은 주인의 초대를 거절했기 때문에 거기에 없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이야기에서 독선적 인 바리새인의 뿌리 문제는 자존심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 - 강도, 악행 자, 간통 자 또는이 세무서와 같지 않다"고 고마워했습니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가 얻은 모든 것을 십일조로 바란다. "(). 그는 자신이 아니었던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이것들은 이방인의 축복에 대한 유대인의 반응에서 분명했던 동일한 문제를 분석하는 다른 방법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유일하게 유대인 문제는 아닙니다. 하나님을 수년 동안 충실하게 섬겼으므로 그분에게 무언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문제가됩니다. 우리는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받을 자격이 없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할 경우, 우리는 완전히 잃을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나는 르우벤 토레이 (Reuben Torrey)가 한 이야기를 기억하며 호주 멜버른에서 열린 모임에서 성장했다. 그는 진정한기도의 힘을 강조하면서기도에 관해 가르치고 있었고 언젠가는 정오 모임이 시작되기 바로 전에 그의 손에 메모를 남겼습니다. 그것은 읽었다 :
토레이 씨,
나는 큰 혼란에 빠져있다. 저는 오랫동안 하나님의 뜻에 따라 확신하는 어떤 것을 위해기도했지만, 저는 그것을 얻지 못했습니다. 나는 30 년 동안 장로교의 일원이었고, 그 모든 시간 동안 일관되게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25 년 동안 주일 학교의 감독이었으며 20 년 동안 교회의 연장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기도에 응답하지 않으 십니다. 이유를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그 이야기는 주로기도로해야하지만, 그 원리는 다른 분야에도 적용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할 수있는 것과 우리가 그에게서 기대할 수있는 어떤 것에도 적용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빚이나 의무면에서 우리의 봉사에 대해 생각하지 말아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대신, 우리는 임금에만 봉사하는 고용주의 정신보다는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봉사하는 아들의 정신으로 봉사해야합니다.
사물 이상
비유의 또 다른 교훈은 하나님 께서 사물보다 사람을 돌 보시는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하루 종일 수고한 사람들과 같은 시간에 단 한 시간 만 노력한 사람들에게 포도주 주인이 왜 그렇게 주었습니까? 그가 데니우스를 필요로한다는 것을 알았 기 때문이 아닌가?
우리가 이야기를주의 깊게 읽을 때, 아침에 고용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비난의 말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주인이 와서 물었을 때, "왜 너는 하루 종일 아무 것도하지 않고 여기 서 있느냐?"라고 대답하면서 "아무도 우리를 고용하지 않았으므로"(6-7 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일하게 기꺼이하고 일하기를 열망했으며 의심의 여지없이 일을 필요로했으나 고용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주인은 단지 몇 시간 만에 나올 수있는 것을 위해 고용 한 것이 아니라 일을 필요로했기 때문에 같은 이유로 그에게 완전한 데나리온을 지불했습니다. 주인은 그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었고, 그들을 돕기 위해 충분한 방법을 사용하고있었습니다.
이것이 누가 복음 15 장의 비유에서 더 오래된 아들과 얼마나 다른가! 그의 아버지는 그의 남동생의 귀환을 기뻐하면서 화가났다. 그는 너무 기뻐 했어야했지만 대신에 그의 형제가 자신의 기업을 어떻게 낭비했는지 생각하고있었습니다 (누가 복음 15 : 29-30). 형이 집에 돌아와 아들이 길을 잃었다면 형은 행복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랬던 것처럼, 그 반대는 사실이었고 그는 불쾌했습니다. 하나님은 정반대입니다. 그는 우리가 그를 위해 무엇을 위해 우리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럼 우리는 누구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분을 우리를 위해 할 수있는 것 때문에 오히려 봉사하기 때문입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평가에서 하나님과 같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든 존재로서의 가치관과 생산 도구로서의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한 가치를 평가합니다. 아니면 우리는 불행한 노동자 나 탁월한 형을 좋아합니까?
형을 말하면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아들 등 잃어버린 무언가의 비유가 들어있는 누가의 이야기에 그의 이야기가 나타남을 기억할 수 없습니다. 각각의 경우에 개체는 잃어버린 상태에도 불구하고 소유자의 마음 속에 가치가있었습니다. 우리는 한 마리의 양을 가볍게 잃어 버릴 수있는 양의 소유자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결국, 아흔 아홉 개가 남았을 때 한 양이란 무엇입니까? 손실은 1 %에 불과합니다. 사업가가 사업을하고 싶다면 사업가가 일정 비율의 손실을 예상해야합니다. "그 여자는"잃어버린 동전 하나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열 중 하나이며, 나는 여전히 아홉 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행복 할 것이다. "아버지는"음, 내 아들은 사라졌어. "라고 결정했을 것입니다. 슬프지만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나는 아직도 내가 가진 아들에 집중할 것이다. "그것은 소유자 나 아버지가 한 것이 아니다. 아버지는 방탕 한 아들을 갈구하고 처음 두 비유에서 소유자는 잃어버린 물건을 되 찾을 때까지 열심히 수색했습니다.
그들의 행동에 대한 설명은 무엇입니까? 그 물건은 잃어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주인에게 가치가 있었고, 주인은 그것을 다시 복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포도원에있는 일꾼들의 비유를 포함하여이 모든 비유에서 하나님은 잃어버린 것을 소중히 여기시고 찾으 십니다. 일꾼들의 이야기에서, 일찍부터 하루 내내 그리고 끝날 때까지 그들을 고용하기 위해 나가는 것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발견 된 우리는 잃어버린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그 같은 사랑을 가져야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잃어버린 경우에도 잃어버린 상태에서도 하나님 께 소중하다는 것을 그들에게 말해서는 안됩니까? 잃어버린 자라면, 당신은 당신 자신의 시야에서 완전히 쓸모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이 만든 파멸 만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이 하나님의 소중한 존재임을 알아야합니다. 그가 너를 만들 수있는 것.
적용
적용
첫째: 나는 그리스도 앞에서 어떠한 모습인가?
품꾼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나아가며,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아들인가?
둘째 : 나는 나의 유익을 위해서 사는가?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가는가?
셋째 :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아들, 잃어버린 동전의 비유들 처럼,
주님의 마음을 나는 가지고 있는가? 한명이라도 잃어버린 영혼을 돌아오도록
마음을 품고, 삶을 그분을 위하여 준비하고 살아가는가?
So the last will be first, and the first last.”
마태복음 20: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자신이 상상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연구하고, 준비하고,
그것을 꿈꾸며 실행시키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100퍼센트 전기로만 움직이는 차를 만드는 목표로 테슬라 자동차를 만들었고,
지금은 GM과 포드에 이어서 시가총액이 그 절반 가까이 커쳤습니다.
화성에가는 유인우주선을 만들기 위해서 스페이스 엑스라는 회사를 만들어서
반복해서 재사용가능한 로켓을 만들었고, 실제로 성공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꿈꾸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그것에 꿈을 두고,
그것을 실행하는데 기술과 노력과 힘과 모든 자본을 더했더니,
시류의 흐름을 잘 만나서, 최고의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 나중된자 복음에 전혀 관계없던 우리들에게도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떠한 꿈과 목표가 있으 신가요?
자녀가 되는 동일한 은혜를 부어 주셨는데,
그 은혜를 잊어버리시고 잊지는 않으셨습니까?
오늘 여러분을 살펴보시며,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우리 다시 그은혜를 바라봅시다.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매일의 목표를 세웁시다.
나는 오늘 하루도 주님과 동행하는 자녀답게 살겠다.
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