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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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 views구원의 창시자, 고난의 당위,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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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해석
본문해석
8절하반
ἀφῆκεν
히에미는 지우다라는 느낌보다 떨쳐버리다라는 느낌이다
ἀνυπότακτον 밑에놓여지지 않는다.
모ㅗ든 것을 밑에 두었으니 밑에 놓여있지 않도록 허락한 게 없다.
그에게 모든 것들을 아래에 위치시키셨을 때 어떤 것들도 그분이 허락하지 않았다. 어떤 것도 밑에 두어지지 않는 상태로 있는 것을.
οὔπω 아직
우리가 아직 모든 것들이 그분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고있지 못하다.
: 많은 크리스챤들이 고난받고 있다.
9-> 시편8편을 해석
우리는 봅니다. 예수님을 , 잠깐(어느정도) 죽음의 고난때문에 천사들에 비해 하찮게 되신, 그런데 그분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다,
예수님이 하찮게 되신 목적 : 하나님의 은혜로 모두를 위해(모두, 그 너머로) 죽음을 맛보기 위해
맛보다 : 모든 죽음을 당하는 것이 아님.
*동사가 취하는 격은 격의 의미와 관련있다.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따라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 길은 하찮게 되는 일도 있고 죽음도 있다. 그다음에 영광과 존귀가 있다.
*이후 에서가 나오는 것은 그가 그길에서 벗어났다는 거다. 그게 망령되이 행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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Ἔπρεπεν 적당하다.
그것이 그에게 적당하다. 무엇이? τελειῶσαι하는 것이.
고난들을 통해서 온전케, 마무리, 종결케, 완성하시는 것이 합당하다.
많은 아들들을 영광으로
그들의 구원의
ἀρχηγὸν 시작하시는 분-> 구원은 예수님을 위해서 시작되었다.
그들의 구원의 선구자를 고난을 통해 온전케 하시는 것이 그분에게는 합당하다.
διʼ ὃν τὰ πάντα 그분때문에 만물이 존재하고
καὶ διʼ οὗ τὰ πάντα 그분을 통해서 만물이 이루어진
그분이 많은 아들들을 영광으로 인도하는 분을, 그들의 구원의 시발자, 창시자, 선구자를 고난을 통해서 온전케하시는 것이 그분에게는 합당하다.
하나님께서 합당하게 여기신다. 아들이라고 무조건 상속자가 아니라, 상속받게 될 그 기업이 구속과정을 통하기에 그것을 시작하는 분이 앞서 그길을 가야 한다.
11
그러니까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거룩하게 되는 이들이 모두가 하나에서 나왔다.
-그 하나는 성부 하나님이다.
그러한 이유로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형제라고 그들을 부르시는 것을 . 12 말하시기를
시편 22편이 후반이 되면 고난당한 자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선포하는 장면으로 바뀐다. 그 본문을 인용했다.
*예수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는 장차 하나님이 회복시키셔서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대하는 것이 시편 22편이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다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회복이 있게 된 상태다.
내가 나의 형제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선포하겠습니다.
교회[무리, 하나님의백성]가운데서 제가 당신을 찬송하겠습니다.
시22에서 노래하는 자는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그리스도다.
13 이사야8장
또다시
내가 그분을 의지해서 설득하겠습니다.[그분을 의지해 확신있게 하겠습니다]
또다시
보십쇼 접니다. 그리고 자녀들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을 저에게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시22를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성육신 후 구원받을 백성들을 형제라고 부르실 작정이었다.
요한복음에 이제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 로마서에서 맏아들을 되게 하셨다. 여기서 많은 아들들을 인도하신 분이다라고 하신다.
왜? 출처가 같다. 마귀에서 난 것이 아니라 성부에게서 났다. 형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주님이 세우려하는 공동체는 가족공동체다. 건물공동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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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자신도 공유한다[함께 가지고 있다] 그들의[자녀들] 것들을, 유사하게 ,
이 공유는 예수님의 보좌의 영광을 공유하는 것에도 연결된다.
코이노니아의 기본개념은 속되게 되는 것이다. 망가지는 것이다.
고상하게 말하면 공유, 나누는 것이다.
주님께서 공유하셨다는 것은 망가지셨다는 뜻이다.
혈육을 공유하셔서 그분자신이 그들과 같아지셨다.
우리는 하이라키가 기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올라가려한다. 그러나 주님안에서 우리는 동등하다. 사회는 우리가 올라가는 것이 좋은 것이라 한다.
죽음을 통해서 무효화하셨다.
혈육을 입은 자의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이다. 그것을 해결하셨다.
바로 죽음을 통해 무효화시키셨다.
15
이들을 해방하셨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형태 ->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형태
종이 되어있는 모든 자들, 죽음에 대한 두려움때문에 항상,
살아있는 동안 항상 죽음이 두려워 종이 되어있다ㅏ.
두려움이 변하여 담대함으로. 부활.
교횔를 섬기고 부흥이 되어도 두려움이 있다. 부흥끝에는 고난이 있다.
그러나 주님은 담대함을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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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천사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주신다.
천사들은 혈육이 아니다. 바로 혈육있는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바울사도가 가장 중시한 시민권은 하늘나라 시민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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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때문에 형제들과 모든면에서 같게되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래서 자비하고 충성스런 대제사장이 되셨다. 하나님을 향한것들에 대해서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기까지 그것을 위해서 .
자비와 충성은 양립이 힘들다.
바나바와 바울의 싸움. 바울이 볼때 마가에겐 근신이, 바나바에게는 기회.
바나바는 자비, 바울은 충성.
그 바울이 가이사의 2년 감옥을 지나며 바뀐다.
그후 그는 로마에 들어갈 준비가 된다.
긍휼과 충성은 양극의 극단이다. 이것이 만나야 속량, 화목이 이루어진다. 발전과 양선(토닥더림, 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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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자신이 시험을 받아 그래서 고통을 하셨다. 고통을 하셔서 도와주실수 있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우리가 환난을 격는 겄을 통해서 환란당한 자들을 도우실수 있게 하셨다.
설교
성가대쪽 좌석에서 기도
서론
종치기
지난 시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큰 구원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할 것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붙잡는 것입니다. 그냥 붙잡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것만 집중하고, 몰두하는 것입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그리스도를 복음을 붙잡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는 온전함이 필요함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온전함을 위해 우리는 빗겨가는 것들, 이정도는 하는 것들을 배격해야 함도 살펴보았습니다.
다함께 묵상기도 드림으로 주일저녁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붙잡아야 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입니까. 그분의 부활은 어떤 의미를 지닙니까. 본문을 살펴보며 나누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찬송가 331장 찬양드리겠습니다.
본론
황승대 시무집사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거룩한 뜻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창시자로 세우셨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히브리서 2장 14절에서 18절입니다. 신약 354페이지입니다.교독하겠습니다.
(히 2: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왜 구원의 주가 아니라 창시자라고 할까요. 우리가 부를 때도 구원의 선구자가 아니라 구주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그 목적이자 결과가 11절에 나옵니다.
(히 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1절을 쉽게 설명하면, 구원 하시는 분과 구원 받는 이들은 다 한근원,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명령하신 성부 하나님께서 있으시기 때문에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가족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먼저는 성부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가 죄악가운데 죽어가는 것을 원치 않으셔서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뿐인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어 구원을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히 2:16)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히 2: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그 구원의 시작이 바로 성육신입니다. 왜냐면 14절에 나온 바와 같이 혈과 육을 지니셨기 때문입니다. 14절의 중심이 바로 지니심입니다. 이 단어는 공유하다라는 말입니다. 공유한다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지닌다 라는 말은 망가지셨다는 말과 다를게 없습니다.
(히 2: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잠시동안이지만 하찮게 되셨습니다. 고난당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당하셨습니다. 아무 힘이 없는 사람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처럼 당하셨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죄에 의해 이용당하는 죄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호산나찬양대 찬양하겠습니다.-> 없음 부활절칸타타 절대!! 하면안됨!!!!
그리고 죽음을 통해 죽음의 세력, 마귀를 멸하셨습니다.
설교
이 모든 것은 우리를 살리시고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시기 위해서라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입니다.
서론
우리의 가장 큰 두려움은 무엇입니까. 바로 죽음입니다. 우리는 한 평생 온갖종류의 두려움과 함께 살아갑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두려워하고 압박받고, 스트레스속에서 살아갑니다. 모든 것이 순탄하게 되고 있을 때도, 이 모든 것이 사라질까봐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이 순탄함을 유지하기 위해 두려움속에서 발버둥을 칩니다. 그러다가 결국 죽음앞에 굴복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주께서 부활하심을 나타내실 필요가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앞에서 보이실 필요가 있습니까. 우리의 구원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인성이 필요하다면, 이미 그 모든 것은 이루신 것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신 후, 돌아가셨습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큰 구원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할 것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붙잡는 것입니다. 그냥 붙잡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것만 집중하고, 몰두하는 것입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그리스도를 복음을 붙잡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는 온전함이 필요함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온전함을 위해 우리는 빗겨가는 것들, 이정도는 하는 것들을 배격해야 함도 살펴보았습니다.
왜 부활하셨습니까. 그리고 왜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를 믿다가 실족한 많은 제자들에게 보이셨습니까. 도마에게는 와서 내 손의 못자국을 만져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붙잡아야 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입니까. 그분의 부활은 어떤 의미를 지닙니까. 본문을 살펴보며 나누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바로 우리에게 세상이 줄수 없는 그 평안, 세상이 줄수 없는 진정한 화목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죽음이라는 두려움속에 매여있고, 성공적인 삶에 있을 때는 실패의 두려움, 불안, 실패와 고난속에서는 더욱 큰 두려움속에 쌓여있는 우리는 풀어주기 위해서입니다.
본론
봐라! 내가 부활했다! 그러니 이제 너희는 두려워하지 마라! 고난도 고통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부활한 것처럼 너희도 부활할 것이다! 영원한 천국의 소망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거룩한 뜻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창시자로 세우셨습니다.
이 확신과 담대함을 위해 우리의 구주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왜 구원의 주가 아니라 창시자라고 할까요. 우리가 부를 때도 구원의 선구자가 아니라 구주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그 목적이자 결과가 11절에 나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쳐하고 힘들어합니다. 분명 주님께서는 부활하셔서 그 기쁨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하지만 삶에서 맞는 많은 고난 속에서 그 기쁨은 점점 사라져갑니다. 그리고 어느새 우리는 주님을 믿음에도 똑같이 앞으로 올 고난을 두려워합니다. 조금만 상황이 변해도 내일이 불안하고 걱정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변하지 않는다고 하시는데, 변하지 않는 것은 우리같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옷입어도 두려워합니다.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이, 그리스도라는 갑옷이, 성령이라는 방패가 세상의 화살들을 막아주지 못할 거 같습니다. 그리고 막으면 실제로 휘청이고 넘어질거 같습니다.
11절을 쉽게 설명하면, 구원 하시는 분과 구원 받는 이들은 다 한근원,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명령하신 성부 하나님께서 있으시기 때문에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주께서는 자비로운 대제사장이십니다. 몸으로 직접 우리의 모든 것을 겪어보셨기 때문에 우리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계십니다. 그 자비로 우리가 투정부리고, 제풀에 넘어지며,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있어도, 우리를 위로합니다. 넘어져 아파하는 우리에게 다가와 그 모든 상처들을 싸매어주십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가족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먼저는 성부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가 죄악가운데 죽어가는 것을 원치 않으셔서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뿐인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어 구원을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이미 치료받아서 나을 것이 확실한 상처를 두고 걱정하는 우리를 다시 감싸안아주십니다.
그 구원의 시작이 바로 성육신입니다. 왜냐면 14절에 나온 바와 같이 혈과 육을 지니셨기 때문입니다. 14절의 중심이 바로 지니심입니다. 이 단어는 공유하다라는 말입니다. 공유한다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지닌다 라는 말은 망가지셨다는 말과 다를게 없습니다.
동시에 그분께서는 신실한, 충성스런 대제사장이십니다. 우리를 걱정하시지만, 우리가 하나님아버지 앞에 서야할 자임을 잊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권면하십니다. 다시 일어나 나아가라고 하십니다. 맞서 싸워보라고 하십니다. 강하고 담대하라고 큰소리로 우리를 경계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아버지 앞에서 칭찬받도록,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잘했다. 아들아 딸아 라고 그 누구도 아닌, 이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 위에 계신 성부 하나님께 칭찬받도록 우리를 권면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잠시동안이지만 하찮게 되셨습니다. 고난당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당하셨습니다. 아무 힘이 없는 사람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처럼 당하셨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죄에 의해 이용당하는 죄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죽음을 통해 죽음의 세력, 마귀를 멸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직분을 이야기할 때, 왕, 선지자, 제사장이라 말합니다. 왕은 누구에게 필요합니까. 어떻게 할지 몰라 두려워하는 백성들에게 필요합니다. 두려워하는 백성들을 이끌어 나아가게 합니다. 선지자는 왕의 명령에도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어하는 백성들에게 필요합니다. 제사장은 그럼에도 변하지 않고 죄를 짓고 있는 백성들에게 필요합니다.
우리의 구주께서는 바로 우리를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부활로 우리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담대함을 주셨습니다. 이제 내가 죽어도 다시 살겠구나. 예수를 믿으니 영원히 죽지 않겠구나라는 담대함을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를 살리시고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시기 위해서라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두려움은 무엇입니까. 바로 죽음입니다. 우리는 한 평생 온갖종류의 두려움과 함께 살아갑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두려워하고 압박받고, 스트레스속에서 살아갑니다. 모든 것이 순탄하게 되고 있을 때도, 이 모든 것이 사라질까봐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이 순탄함을 유지하기 위해 두려움속에서 발버둥을 칩니다. 그러다가 결국 죽음앞에 굴복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결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주께서 부활하심을 나타내실 필요가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앞에서 보이실 필요가 있습니까. 우리의 구원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인성이 필요하다면, 이미 그 모든 것은 이루신 것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신 후, 돌아가셨습니다.
부활을 통해 이 모든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실족해 있는 제자들을 사도로 세우시고, 교회를 일으시켰습니다. 300년이라는 박해의 기간동안 언제나 하늘을 소망하며 살도록 하셨습니다. 가장 크고 깊은 어둠과 환난의 순간에 가장 영광스런 부흥을 맞이하도록 하셨습니다.
왜 부활하셨습니까. 그리고 왜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를 믿다가 실족한 많은 제자들에게 보이셨습니까. 도마에게는 와서 내 손의 못자국을 만져보라고 하셨습니까.
그러니 그분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향한 그 영원한 사랑을 잊지 않기 원합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도전하시는 힘든 일들, 그리스도인으로서 살면서 부딪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과정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서며,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함께 흰옷을 입고 기쁨의 찬양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바로 우리에게 세상이 줄수 없는 그 평안, 세상이 줄수 없는 진정한 화목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죽음이라는 두려움속에 매여있고, 성공적인 삶에 있을 때는 실패의 두려움, 불안, 실패와 고난속에서는 더욱 큰 두려움속에 쌓여있는 우리는 풀어주기 위해서입니다.
봐라! 내가 부활했다! 그러니 이제 너희는 두려워하지 마라! 고난도 고통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부활한 것처럼 너희도 부활할 것이다! 영원한 천국의 소망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이 확신과 담대함을 위해 우리의 구주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쳐하고 힘들어합니다. 분명 주님께서는 부활하셔서 그 기쁨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하지만 삶에서 맞는 많은 고난 속에서 그 기쁨은 점점 사라져갑니다. 그리고 어느새 우리는 주님을 믿음에도 똑같이 앞으로 올 고난을 두려워합니다. 조금만 상황이 변해도 내일이 불안하고 걱정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변하지 않는다고 하시는데, 변하지 않는 것은 우리같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옷입어도 두려워합니다.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이, 그리스도라는 갑옷이, 성령이라는 방패가 세상의 화살들을 막아주지 못할 거 같습니다. 그리고 막으면 실제로 휘청이고 넘어질거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주께서는 자비로운 대제사장이십니다. 몸으로 직접 우리의 모든 것을 겪어보셨기 때문에 우리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계십니다. 그 자비로 우리가 투정부리고, 제풀에 넘어지며,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있어도, 우리를 위로합니다. 넘어져 아파하는 우리에게 다가와 그 모든 상처들을 싸매어주십니다.
이미 치료받아서 나을 것이 확실한 상처를 두고 걱정하는 우리를 다시 감싸안아주십니다.
동시에 그분께서는 신실한, 충성스런 대제사장이십니다. 우리를 걱정하시지만, 우리가 하나님아버지 앞에 서야할 자임을 잊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권면하십니다. 다시 일어나 나아가라고 하십니다. 맞서 싸워보라고 하십니다. 강하고 담대하라고 큰소리로 우리를 경계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아버지 앞에서 칭찬받도록,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잘했다. 아들아 딸아 라고 그 누구도 아닌, 이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 위에 계신 성부 하나님께 칭찬받도록 우리를 권면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직분을 이야기할 때, 왕, 선지자, 제사장이라 말합니다. 왕은 누구에게 필요합니까. 어떻게 할지 몰라 두려워하는 백성들에게 필요합니다. 두려워하는 백성들을 이끌어 나아가게 합니다. 선지자는 왕의 명령에도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어하는 백성들에게 필요합니다. 제사장은 그럼에도 변하지 않고 죄를 짓고 있는 백성들에게 필요합니다.
우리의 구주께서는 바로 우리를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부활로 우리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담대함을 주셨습니다. 이제 내가 죽어도 다시 살겠구나. 예수를 믿으니 영원히 죽지 않겠구나라는 담대함을 주셨습니다.
결론
부활을 통해 이 모든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실족해 있는 제자들을 사도로 세우시고, 교회를 일으시켰습니다. 300년이라는 박해의 기간동안 언제나 하늘을 소망하며 살도록 하셨습니다. 가장 크고 깊은 어둠과 환난의 순간에 가장 영광스런 부흥을 맞이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니 그분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향한 그 영원한 사랑을 잊지 않기 원합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도전하시는 힘든 일들, 그리스도인으로서 살면서 부딪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과정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서며,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함께 흰옷을 입고 기쁨의 찬양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찬송가 303장 다함께 찬양 드리겠습니다.
이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이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