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분의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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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와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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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해석

Ὅθεν, ἀδελφοὶ ἅγιοι, κλήσεως ἐπουρανίου μέτοχοι(공유하다), κατανοήσατε(깨달았다면, 깨달은바를 따라 행해야 한다. 신뢰는 살아보며 결정된다. 그러니 누스 지성을 따라 생각해봐라 누구를?) τὸν ἀπόστολον(준비되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 καὶ ἀρχιερέα(히에로스는 거룩함. 대속, 죽음을 통한 거룩) τῆς ὁμολογίας(같은 말 - 우리의 고백의 사도와 대제사장:우리가 고백하는 것을 보내주신분, 가능케 하신분) ἡμῶν Ἰησοῦν,
그러므로, 거룩한 형제들아, 하늘의 부르심을 함께 나눈[참가한], 우리의 고백의 그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에오능명2복)
: 그러기때문에(그분이 하찮게 되셨고, 온땅의 주이심을 아직 세상이 몰라 박해받고 있지만, 그 구원은 너무나 놀라운 것이다. 그것때문에), 거룩한(예수님이 하나님과 화목되도록 해주셨기 때문에 거룩해졌다) 형제들아, 하늘위의 부르심을 공유하고 있는 자들이여,
예수님은 부르심을 받은 선지자이면서, 이 일을 이루어가는 제사장이시다. 선지자는 선포하며, 제사장은 실행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제물이 되셨다. 왜냐면 일반 제사장의 제사와 제물로는 완전한 대속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성으로 따져봐야 하는 대상은 누구인가. 우리의 신앙고백을 있도록 하신 예수님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바로 충성하신 분이시다. 누구에게? 자신을 보내신분에게. 모세처럼.
2 πιστὸν ὄντα τῷ ποιήσαντι αὐτὸν ὡς καὶ Μωϋσῆς ἐν [ὅλῳ] τῷ οἴκῳ αὐτοῦ.
그는 자신을 세우신(에오능분단여남) 분에게 신실하기를 마치 모세가 그분의 집에 신실한 것과 같았다.
모세가 그분의 집 전체에서 충성한 것처럼 그분도 충성하셨다.
3 πλείονος γὰρ οὗτος δόξης παρὰ Μωϋσῆν ἠξίωται(가치가 있다, 그럴만하다), καθ᾽ ὅσον πλείονα τιμὴν ἔχει τοῦ οἴκου ὁ κατασκευάσας αὐτόν·
왜냐면 집을 지은 사람이(에오능분단주남) 그 집보다 큰 영예(존귀, 가치)를 가지듯이, 그분은 모세보다 더 큰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시다(완수직3단).
예수을 바라보아야 한다라 하며 예수님과 모세를 비교한다.
히브리서는 거리가 중요하다. 유대회당에 있으면모세와 가깝고, 박해받는곳에 있으면 예수와 가깝다. οὗτος라고 쓰인 것은 설교자가 자신의 위치를 예수님쪽이라고 설정하는 것이다.
집을 지어서 팔았다는 것이 아니라, 땅주인이 자기힘으로 집을 지었다는 것이다.
집을 지은 자가 집보다 훨씬 귀하다. 정말 그런가?
4 πᾶς γὰρ οἶκος κατασκευάζεται ὑπό τινος, ὁ δὲ πάντα κατασκευάσας θεός.
왜냐면 모든 집은 누군가에 의해서 세워지고(현수직3단),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셨기(에오능분단남주) 때문이다.(모든 것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집에 불이 났다면, 집을 구해야 하는가 애를 구해야하는가. 이 상식이 무너질 때가 있다.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이 계시다.
5 καὶ Μωϋσῆς μὲν πιστὸς ἐν ὅλῳ τῷ οἴκῳ αὐτοῦ(그분의 전체 집에서) ὡς θεράπων(종, 고치는 자) εἰς μαρτύριον τῶν λαληθησομένων(미래분사 ,
또한 모세는 분명히 그분의 집 전체에 말씀될 것(미수분복소중)의 증언을 위해 종(수선공, 고치는 자)으로써 신실하였지만,
모세는 어긋난 이스라엘백성들을 고치는 자였다.
종이라면 그 뉘앙스를 살리지 못한다.
6 Χριστὸς δὲ ὡς υἱὸς ἐπὶ τὸν οἶκον αὐτοῦ· οὗ οἶκός ἐσμεν ἡμεῖς, ἐάν[περ] τὴν παρρησίαν καὶ τὸ καύχημα τῆς ἐλπίδος κατάσχωμεν.
그리스도는(대조) 그분의 그 집 위에 있는 아들로서 (신실하였다). 우리는 그분의 집이다, 만약 우리가 그 소망에 대한 담대함[확신]과 자랑[긍지]을 (절대로포기하지 않고)굳게 잡고 있다면(에오능가1복)
충성에는 행동이 들어간다. 마음을 표현하는 것만이 아니다.
충성(믿음)은 개념상 움직임이 들어가있다.
사랑역시 행동과 정신 다 들어가있다.
예수님의 목숨을 버리는 사랑은 행동이다.
성령의 열매라고 나온 것들은 다 움직임이 들어가 있다.
집이야기를 계속했는데, 결국 우리가 집이다라고 한다.
권력자들은 백성을 착취해 집을 짓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희생해서 집, 우리를 지으셨다.
사도행전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소망이다. 그 소망은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이다. 바울이 4번 자시을 변호할 때 중심이 된다.
바울이 증거로 제시하는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다.
설교
서론
우리는 지난시간 2장의 나머지부분을 보며 그리스도 예수의 대제사장직에 대해 짧게 나누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자비롭고, 충성된 대제사장직을 하신 것은 바로 화목을 이루기 위해입니다. 그 화목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예수님께서 이루신 화목이 진정 우리의 것임을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자비와 충성은 공존하기 힘든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도 누가를 두고 다투었습니다. 바울은 충성의 입장에서 누가를 지적하였고, 바나바는 자비의 입장에서 누가를 감쌌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비롭고 충성된 대제사장으로서 이 둘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그리하여 진정한 화목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시간은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화목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구주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가져야 할지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본론
오늘 본문 1절은 우리를 향해 하늘의 부르심을 함께 받은 거룩한 형제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정체성이라는 뜻입니다. 함께 받았다는 말은 앞서 2:14에서 나온 말입니다. 공유하다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혈과 육을 공유하시고 그를 통해 우리 죄를 지시고 고난 받고 죽으셨습니다. 그때 말했습니다. 공유란 서로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우리의 죄를 공유했습니다. 연약함을 공유했습니다. 이 세상의 질병, 아픔, 상처, 죄악으로 더럽혀진 것들을 공유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그 모든 것을 받으시고 우리에게 십자가에서의 죄사함과, 부활의 자유함을 공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과 사람앞에서 자비롭고 충성된 대제사장으로서 진정한 화목을 이루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룩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공유하신 십자가 죽음을 통한 죄사함, 부활을 통한 생명을 우리는 단 한명도 빠짐없이 전부 가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하늘을 부르심을 공유한 거룩한 형제입니다. 그리스도예수께서 그분의 보혈로 우리를 씻으시고 다시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히브리서는 깊이 생각하라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너희가 가진 지성으로 이 모든 것을 깨닫고, 실천하라는 말입니다. 그냥 생각만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 자체에 움직임이 담겨 있습니다. 깊이 생각하여 깨닫고 그분을 향해 나아가라는 뜻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이제 예수님을 향해, 하나님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결코 갈 수 없었던 그 길이 드디어 열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코 갈수 없었던 하나님께로 향하는 이 길을 걸어갈 때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 첫 번째가 충성입니다.
2절에서 신실하다라는 말은 충성스럽다. 믿을만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가 명사형으로 쓰이면 믿음이 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예수로 말미암은 하늘의 부르심을 공유하는 거룩한 가족이냐? 그렇다면, 자비롭고 충성스러운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처럼 먼저 충성스러워라는 뜻입니다.
믿음은 행동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단어 자체에 그런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방금 깊이 생각하라에 방향성이 들어간 것처럼, 믿음, 충성에는 움직임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 믿음뿐만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는 모두다 움직임이 들어가 있습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움직이고 표현되지 않는 사랑이 사랑입니까. 요즘은 그래서 꼭 사랑한다는 말을 하라고 강조하지 않습니까. 심지어 절제조차 움직임입니다. 왜냐면 절제는 죄악과 욕심으로 흐르는 내 마음과 행동을 막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악의 공격에 믿음의 방패를 들어올리는 행동이 바로 절제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어주신 길, 십자가의 길로 가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믿음, 충성입니다.
이 충성을 설명하기 위해 히브리서는 모세와 집을 이야기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온집을 충성스럽게 섬겼음을 먼저 말합니다. 왜 모세를 통해 충성을 이야기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누구에게 가까우냐를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충성이든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이든 거기에는 움직임이 들어가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어느쪽으로 움직여서 누구에게 가까우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있는 위치가 어디냐는 것을 말합니다.
모세에게 가까운 자는 시내산 율법에 서있습니다. 즉, 아직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속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당연히 그리스도 예수와는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 가까운 자들, 예수님의 곁에 있는 자들은 모세와 멀리 떨어집니다. 지금까지 세상이 주입해오던 가치들은 이제 멀리 떨어져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앞에서 충성스럽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이 제시하는 가치들, 돈이든지, 권력이든지, 그 무엇이든지 그것에서 떨어져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우리가 그 모든 것에서 완전히 단절할 수는 없습니다. 먹지 않고 자지 않고, 사람들과 함께 일하지 않으며 살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 누구에게 가깝느냐는 것입니다. 때로, 하나님께 가깝다는 것은 세상에서의 고난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를 읽고 있던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가까이 하고 믿는다는 것은 박해받고 순교당하는 자리로 스스로 걸어들어간다는 것을 뜻했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본문은 모세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훨씬,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라고 단정짓고 있습니다. 왜냐면 이 세상의 집은 낡아지고 부서질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가장 좋은 집이라 할지라도 50년 100년후에는 낡아서 사람이 살지 못할 흉가가 될 것입니다. 오히려 돈을 들여서 철거해야 할 애물단지가 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집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한 집은 영원히 변하지 않고, 영원히 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끝까지 충성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게 바로 소망입니다.
왜 우리가 믿음을 지키고 있습니까. 왜 이 늦은 시간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이 자리에 함께 모였습니까.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내가 세상에서 풍파를 맞으며 힘들어하지만, 내게는 영원한 집이 있다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맞아주시고 환영하실 나라, 영원히 함께 기뻐할 그 땅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땅을 소망하며 살아왔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을 소망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족장들은 약속의 땅을 소망하며, 그곳에서 한평생 나그네로 지냈습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을 소망하며 출애굽했습니다. 그들이 약속의 땅을 사람을 삼키는 땅이라 매도했을 때, 그들이 소망을 버렸을 때, 그들은 믿음을 버렸고,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후 7절부터 광야에서 소망을 버리고 믿음을 버리고 하나님을 버리고 완고해지고 굳어져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향한 소망,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이 길의 끝에 있는 하나님 나라를 향해 소망하십니까. 오늘도 내 한 걸음이 내 한 시간이 그저 의미없이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하나님 나라를 향한 시간이 될것이라는 소망이 있습니까. 나는 죄악으로 시간을 보내고, 욕망을 따라 걷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으로 이루어주실 것이라는 소망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14절에 이른 것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을 향한 소망을 버렸습니다. 그로인해 불순종하였습니다. 결국 믿음을 버리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믿음의 소망을 굳게 잡으시기 바랍니다. 결코 놓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 모습은 이 소망과 전혀 상관 없고, 내 행동은 내가 믿는 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지는 것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소망을 굳게 잡으십시오. 믿음안에 머무릅시다. 세상을 등지고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그래서 세상과 멀어지고 그리스도와 가까워집시다. 왜냐면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약속의 땅으로 우리를 이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오늘 본문은 이 모든 것의 결론으로 우리를 그분, 하나님의 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조차 하나님의 집에 종에 불과했습니다. 정확히 말하지면, 이 종이라는 말은 고치는 자라는 뜻입니다. 즉, 집을 고치는 자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피와 살로 새로운 집을 지으셨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살과 피로 지어진 집입니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사는 곳이라는 뜻이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분명 흔들리고 죄를 짓지만 그럴 때, 하나님을 소망하며, 하나님 나라 그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세상의 고난에지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의 기쁨되는 우리 모두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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