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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ghteouness and Gosp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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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유명한 소설가 마크 트웨인의 작품 “왕자와 거지”(에드워드와 톰 캔디)에 대해서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생김새가 똑같은 왕자와 거지가 서로 신분이 바뀌어서 겪게되는 해프닝을 그렸습니다. 비록 거지의 옷을 입었지만 왕자는 그 말과 행동에서 신분이 드러납니다. 거지는 왕자의 옷을 입고 화려한 궁궐에 살지만 거지의 습성을 고치기 어렵습니다. 자신의 신분은 옷이 바뀌고 환경이 바뀐다고 해서 쉽게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비슷한 부분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는 죄인이지만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의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죄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신분에 걸맞은 삶을 살아가지 못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이 맞딱뜨리고 있는 어려움입니다. 바울은 신분에 대해 혼란을 느낄 법한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이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바울이 고린도에 머물고 있을 때 기록한 성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시기 상으로는 제 3차 전도여행이 끝날 무렵입니다.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성경을 기록한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바울은 그 이유를 “어떤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어서 성도들을 견고하게 세우기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령한 은사”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령한 은사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아는 것이 어쩌면 로마서 전체 내용을 이해하는 아주 중요한 관문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신령한 은사”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이미 언급한 내용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절에서 바울은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신령한 것은 신령한 은사라고 말해도 큰 무리가 없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신령한 것을 한 성령에서 나오는 각종 은사와 직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로마서에서 기록한 신령한 은사도 고린도전서에서 언급한 각종 은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로마서의 내용을 보면 고린도전서에서 기록한 은사들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는 것이 로마서를 기록한 목적이라면 바울은 당연히 그 내용에 대해서 기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생각하는 영적인 은사에 대한 기록은 로마서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우리는 로마서에서 말하는 신령한 은사와 고린도전서에서 말하는 신령한 은사가 다른 종류라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에서 말하는 신령한 은사는 바로 “복음”입니다. 특별히 이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4, 9절). 사도 바울은 1장에서도 여러번 로마에 가고자 하는 소망을 밝혔는데(10, 11, 13, 15절) 그 직접적인 이유를 15절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함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로마서를 기록한 목적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기 위함이고, 바울이 로마에 가서 전할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기 때문에 이 신령한 은사는 바로 “복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전하고자 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어떤 복음일까요? 그 내용을 16-17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글성경에는 빠져있지만 16절 앞에는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16 For I am not ashamed of the gospel, for it is the power of God for salvation to everyone who believes, to the Jew first and also to the Greek.
15절에서 바울이 로마에 가고자 하는 강력한 소망을 말했는데 16절이 그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복음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비슷한 이야기를 이미 고린도전서에서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려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더 큰 이적을 바랐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복음이 바로 능력이요 지혜임을 선언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고전 1:25).
그렇습니다. 복음에는 구원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바울은 로마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자신의 열망을 전혀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바울은 당당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처럼 복음에 구원의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한대로,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주어지는 구원의 능력이 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구원의 능력이 있어서 그 능력이 인종과 신분 그리고 성별에 상관없이 모두 하나가 될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같은 의미에서 바울은 오늘 본문(롬 1:16)에서 복음을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믿음은 분명 4절에서 말하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마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맛보고 그 구원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믿음에 대한 강조는 마치 구원의 유일한 조건이 믿음일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합니다. 바울은 성경 여러 곳에서 구원에 있어서 행위가 아닌 믿음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이신칭의’라고 부르죠. 하지만 믿음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까 마치 구원의 유일한 조건이 믿음이라고 오해하게 됩니다. 엄밀하게 따져서 구원에 조건이 있나요? 아닙니다.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구원의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과 의지 만이 인간 구원의 유일한 조건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전문적인 용어로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믿음은 구원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요?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믿음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방편(mean)이라고 말했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인데, 그 선물을 받기 위해 믿음이라는 수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칼빈의 설명대로 일종의 그릇과 같습니다. 또 다르게 표현하면 믿음은 구원이 주어지는 통로와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은 믿음이라는 그릇에 담겨져서 또는 믿음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이 믿음을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믿음 자체가 구원의 조건은 될 수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을 통해서 주어지는 선물인 이 복음을 먼저 유대인들에게 전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2절의 표현대로 하나님께서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일입니다(참조. 요 4:22). 분명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했고 또 그렇게 하기를 힘썼습니다. 그러한 열망을 로마서 9:3과 10:1에 잘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복음은 자연스럽게 이방인에게로 향합니다(행 13:46).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헬라인들은 좁은 의미에서 그리스인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비유대인들, 즉 모든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비록 복음이 먼저 유대인들에게 전혀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을 한번 더 설명합니다. 17절 앞에도 16절과 마찬가지로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17 For in it the righteousness of God is revealed from faith for faith, as it is written, “The righteous shall live by faith.” 17절은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17절).
오늘날 많은 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령의 은사가 무엇인지 궁금해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은사를 받았는지 아닌지 궁금해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은사를 못 받았으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바울의 표현처럼 신령한 것에 대해 우리가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 보다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의’에 관한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의 내용을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구약성경에서 신약성경에 이르기까지 ‘의’는 하나님의 속성으로써, 구원 받은 성도들의 신분으로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활동으로써 늘 언급되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이 공의로운 분일 뿐만 아니라 의인을 사랑하는 분입니다. 악한 시대를 살았던 노아지만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의로움을 보셨습니다(창 6:9). 하나님은 언제나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면서 성도들이 의를 실천할 것을 원하셨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물 같이,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기를 염원했습니다(암 5:24). 그뿐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할 것을 요구했습니다(마 6:33). 하나님의 의를 가장 먼저 구하는 것, 그것이 성도의 마땅한 간구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의’에 대해서 많은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의는 믿음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납니다. 여기에서 ‘나타나다’는 뜻은 감추어진 것이 드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흔히 의인이라고 하면 그사람의 의로운 행동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사회에서도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용기있게 돕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의인은 순서가 다릅니다. 먼저 성경에서 의인이 된다는 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의지가 완전히 배제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오직 믿음으로만 의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17절에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의 의미입니다. 감추어져 있던 하나님의 의가 복음 안에서 나타나는데 그 의를 획득하기 위해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 안에서 나타난 의를 획득하는 방법은 오직 믿음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를 얻을 수 있다는 근거로 바울은 하박국 2:4말씀을 인용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박국에서 이 말씀이 기록될 때는 이스라엘이 죄를 지어 하나님께로부터 징벌을 받는 상황이었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께서 어떤 징계를 내리실지 그 내용을 들었는데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께서 악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기 위해 더 악한 갈대아인(바벨론)을 사용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리라는 소망이 주어집니다. 따라서 의인은 이 소망과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징계와 멸망의 상황에서 하나님이 회복시키리라는 믿음이 아니고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이었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우리는 우리의 노력으로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복음 안에서,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의를 발견할 수 있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의 자녀와 의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의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죄인이고 여전히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제 의인의 신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재판장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근거로 죄인인 우리에게 무죄를 선고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예수님 덕분에 의인의 신분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의인에 신분에 맞게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 삶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이며, 믿음의 결과로 의의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경기가 어렵고 먹고 살기 어려운 이 시대에, 불법을 행하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려운 이 시대에 우리는 과연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응당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에 맞게, 의인의 신분에 맞게 살아가는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자녀라는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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