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의 소망

히브리서강해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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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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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해석

7 γῆ γὰρ ἡ πιοῦσα τὸν ἐπʼ αὐτῆς ἐρχόμενον πολλάκις ὑετὸν καὶ τίκτουσα βοτάνην εὔθετον ἐκείνοις διʼ οὓς καὶ γεωργεῖται, μεταλαμβάνει εὐλογίας ἀπὸ τοῦ θεοῦ·
그것이 비를 마신다. 그런데 그 비는 그땅위에 여러번 내리는 비다. 그리고 야채를 낸다. 그 야채는 좋은 야채다. 저들(농부)에게 낸다. 그래서 그런 땅이 하나님께 축복을받는다
땅은 농부들때문에 경작된다.
땅마다 경작되는 이유가 있다.
8 ἐκφέρουσα δὲ ἀκάνθας καὶ τριβόλους, ἀδόκιμος καὶ κατάρας ἐγγύς, ἧς τὸ τέλος εἰς καῦσιν.
만약 가시와 엉겅퀴를 산출하면 받아들일수 없는 상태이며 저주에 가깝다. 그래서 그것의 끝은 불사름이다.
9 Πεπείσμεθα δὲ περὶ ὑμῶν, ἀγαπητοί, τὰ κρείσσονα καὶ ἐχόμενα σωτηρίας, εἰ καὶ οὕτως λαλοῦμεν.
εἰ καὶ : 양보절, 비록 ~하지만
εἰ καὶ : 양보절, 비록
비록 우리가 이렇게 말을 하지만 사랑하는자들아, 우리가 구원에 있어서 더 좋은 것들(구원에 가까이 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구원에 있다는거 안다. 그러니 끝까지 가자.
10 οὐ γὰρ ἄδικος ὁ θεὸς ἐπιλαθέσθαι τοῦ ἔργου ὑμῶν καὶ τῆς ἀγάπης ἧς ἐνεδείξασθε εἰς τὸ ὄνομα αὐτοῦ, διακονήσαντες τοῖς ἁγίοις καὶ διακονοῦντες.
하나님께서는 옳지않은 분이 아니시다. 그래서 여러분이 한 일을 잊어버리는 분이 아니다. 또한 사랑도 잊어버리는 분이 아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여러분이 그분의 이름이 알려지기까지 여러분이 드러냈다. 그래서 성도들을 섬겼고, 지금도 섬긴다.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고, 그 수고가 헛되지 않다.
11 ἐπιθυμοῦμεν δὲ ἕκαστον ὑμῶν τὴν αὐτὴν ἐνδείκνυσθαι σπουδὴν πρὸς τὴν πληροφορίαν τῆς ἐλπίδος ἄχρι τέλους, 12 ἵνα μὴ νωθροὶ γένησθε, μιμηταὶ δὲ τῶν διὰ πίστεως καὶ μακροθυμίας κληρονομούντων τὰς ἐπαγγελίας.
우리가 여러분 각자가 동일한 열심을 보이기를 원한다. 어디까지? 그 소망이 열매를 맺을때까지, 중단하지 않고 끝까지, 변함없이, 계속. 12 여러분이 게으르지 않도록, 믿음과 오래참음(식지 않는 열정)을 통해 약속들을 기업을 받은 자들을 닮기를 원한다.
13 Τῷ γὰρ Ἀβραὰμ ἐπαγγειλάμενος ὁ θεός, ἐπεὶ κατʼ οὐδενὸς εἶχεν μείζονος ὀμόσαι, ὤμοσεν καθʼ ἑαυτοῦ 14 λέγων·
Εἰ μὴν εὐλογῶν εὐλογήσω σε καὶ πληθύνων πληθυνῶ σε·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실 때, 더큰 누군가에 대해서 맹세할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을 가리켜 맹세하며 하시는 말씀이
반드시 너에게 복을 주고 반드시 너를 늘려주겠다.
믿음과 인내로 약속을 받은 자들.
11장의 믿음의 조상들.
15 καὶ οὕτως μακροθυμήσας ἐπέτυχεν τῆς ἐπαγγελίας.
이렇게(믿음과 인내로,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약속을 받았다.
하나님이 복을 주겠다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다.
이 복을 받기까지 고생했지만, 아브라함은 이삭과 그 이후 에서와 야곱까지 보았다.
16 ἄνθρωποι γὰρ κατὰ τοῦ μείζονος ὀμνύουσιν, καὶ πάσης αὐτοῖς ἀντιλογίας πέρας εἰς βεβαίωσιν ὁ ὅρκος·
사람들이 더 큰 분을 걸고서 맹세를 한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모든 반대하는 말의 끝으로서 확고하게 되는 것이 맹세다.
어떤 반대도 소용없게 하는 것이 맹세다.
17 ἐν ᾧ περισσότερον βουλόμενος ὁ θεὸς ἐπιδεῖξαι τοῖς κληρονόμοις τῆς ἐπαγγελίας τὸ ἀμετάθετον τῆς βουλῆς αὐτοῦ ἐμεσίτευσεν(주동사) ὅρκῳ, 18 ἵνα διὰ δύο πραγμάτων ἀμεταθέτων, ἐν οἷς ἀδύνατον ψεύσασθαι [τὸν] θεόν, ἰσχυρὰν παράκλησιν ἔχωμεν οἱ καταφυγόντες κρατῆσαι τῆς προκειμένης ἐλπίδος·
맹세로 하나님께서 약속의 상속자들에게 그분의 뜻[경륜]의 변하지않음을 보여주시기를 원하신다 그것에 대하여 더욱 확실하게 보여주시기를 원하셔서 그래서 맹세로 보증하셨다.
18 그 결과 두개의 변할수 없는 행동을 통해서 그것안에서 하나님께서 거짓말할수 없다. 앞에 놓인 소망을 붙들러 피하는 자
두개의 변할 수 없는 행동 : 약속, 맹세
하나님께서 약속을 하시고 그다음에 맹세도 하셨다.
이로말미암아 우리는 확신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이 확신속에서 우리는 큰 위로를 받는다.
앞에 놓인 소망을 붙들러 피하는 자 : 담대함과 소망을 가지는 자를 말한다. 이 성도들은 은혜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한 자들이다. 목솜을 유지하려고 예수를 버리는 자가 아니라 소망을 가지고 죽음을 향해, 경기장으로 가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이 위로를 가진다. 왜?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보증하셨기 때문이다. 약속과 맹세로.
예루살렘성전이 아니라 하늘성전, 예루살렘 제사장이 아니라 하늘의 대제사장, 예루살렘의 수많은 제물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단 한분의 ㅈ제물.
이 세상의 모든 것과 비교가 안되는 것을 주셨다.
그것이 약속과 맹세다.
그래서 우리는 영문밖으로 나갈 때 웃으며 확신하며 소망을 가지고 나갈 수 있다.
19 ἣν ὡς ἄγκυραν ἔχομεν τῆς ψυχῆς ἀσφαλῆ τε καὶ βεβαίαν καὶ εἰσερχομένην εἰς τὸ ἐσώτερον τοῦ καταπετάσματος, 20 ὅπου πρόδρομος ὑπὲρ ἡμῶν εἰσῆλθεν Ἰησοῦς, κατὰ τὴν τάξιν Μελχισέδεκ ἀρχιερεὺς γενόμενος εἰς τὸν αἰῶνα.
그 소망을 영혼의 닻처럼 흔들리지 않고 확실하고(방향을 잡고 계속 가는 것) 그 소망은 그 휘장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특성을 가진다.
이전에 닻은 돌맹이었다. 배가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시키는 돌덩이다.
내 영혼이 흔들릴수 있다. 그 영혼이 흔들리지 않도록 붙드는 것이 닻이다.
견고하다는 방향을 잡고 똑바로 계속 가는것을 뜻한다.
하나님을 소망으로 삼고 가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흔들리지 않게 하신다.
돌맹이.
예루살렘 닻박물관.
휘장은 날다에서 나왔다. 그래서 펄럭거리는 것이라는 뜻이다.
4장에서 은혜의 보좌와 펄럭거리는 것 그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이 같은 뜻이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못갈수 있다. 하지만 휘장의 깊은 안쪽, 은혜의 보좌로 갈수 있다.
20 먼저 달려가시는 분인 예수님께서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어 들어가셨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제사의 순서는 속죄제물드림->대제사장이 그 제물을 가지고 지성소로 들어감-> 나와서 백성들을 축복함
승천은 속죄제물, 자신의 피를 가지고 하늘 보좌 휘장너머로 들어가신 것이다.
그런데, 나오심, 재림이 아직 안왔다.
이것은 아직 예배가 안끝났다, 제사가 안끝났다는 뜻이다.
예수님이후 2000년이 넘는 시간동안, 그 예배는 드려지고 있는 중이다.
예루살렘 성전의 예배와 지금 우리의 예배는 차원이 다르다. 이 예배는 그분이 나와야 끝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거기, 하늘보좌에 있기에 우리도 들어가 예배를 드린다.
왕같은 제사장.
주님을 만나는 것.
왕같은 제사장부분은 다음 설교때.
설교
서론
히브리서 6장 1절에서 8절까지를 보면 뜨끔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고도 우리는 하나님께 가는 삶을 살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지 않은 거 같아서입니다. 물론 그 당시 사람들처럼 고난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버린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위로만을 바라고 올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일으켜 주셨다는 사실을 알아도 하나님과 함께 살고 걷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는 우리를 협박하기 위해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본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본론
본문을 통해 우리는 3가지를 들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소망을 가져라입니다.
왜 히브리서는 6장 1절에서 8절까지 협박아닌 협박을 하고 있을까요. 바로 소망을 위해서입니다. 이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가 있기 때문에 성립됩니다. 결국 8절까지 말하는 떠나간 자들,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자들은 소망이 없었기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소망을 가질수 있습니다. 그 답은 이미 말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도 적혀 있습니다. 18절에 나오는 두가지 변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참고로 말하지만 하나님은 거짓말 할 수없음은 여기서 말하는 두가지는 아닙니다. 변할 수 없는 사실이긴 하지만 히브리서가 지금 이 본문에서 말하는 두가지는 아닙니다. 그냥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다보니 그렇게 보이는 것뿐입니다.
우리의 소망의 원천, 변할 수 없는 두가지 사실은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그 이후 우리를 위해 다시한번 맹세하신 것. 이 두가지 변할수 없는 사실이 우리의 소망의 원천이 됩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 하나만 믿고 자신의 고향과 혈육을 떠나서 약속의 땅으로 향한 것과 같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합니다.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점점 나아지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저가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느낍니다. 10년전 20년전의 나와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단순히 몸이 자란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자라며,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어떻게 이루시는지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가지고 알고 있는 것들이 하나님없이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것들이라는 사실을 몸과 마음으로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신 약속들이 우리의 소망이 됩니다. 동시에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아브라함이 경험했던 약속의 성취와 성경속에 적혀있는 수많은 약속과 성취들을 보며, 성경이 그저 적혀있는 글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이고, 우리에게 주실 성취임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소망을 믿음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현실과 말씀이 괴리가 느껴지십니까. 믿음이 흔들리고 말씀이 나와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느껴지십니까. 소망을 가지십시오. 전에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가장 잘 이해하시고, 우리의 가장 깊은 곳까지 공감하시는 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믿고, 믿음으로 소망을 가지고, 소망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흔들릴수 있다는데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의 환경이 흔들리면, 우리는 자연히 같이 흔들립니다. 아무리 배가 튼튼하고 크다하더라도, 태풍이 치게되면 그 배는 흔들립니다. 어쩌면 뒤집어지고 가라앉을 수도 있습니다.
둘째, 흔들릴 때, 소망이 우리의 영혼의 닻임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닻을 떠올리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십니까. 지금 말하는 것은 닻입니다. 돛이 아닙니다. 돛은 배가 바람을 받아서 갈수있게 만드는 겁니다. 반대로 닻은 배가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닻을 생각하면, 어디에 고정할 수 있게 생긴 쇳덩어리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당시 닻은 그런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쇠도 아닙니다. 그당시에는 그냥 돌덩이에 밧줄을 묶어서 닻으로 썼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가면 닻박물관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박물관 안에 들어가면 그냥 조그만 방에 돌덩어리, 작은 것은 돌맹이같은 것에서부터 큰 돌덩이까지 쭉 있다고 합니다. 거기다 줄을 묶어서 닻으로 썼습니다.
영혼의 닻, 소망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에게 닻을 만들라면 만들 수 있겠습니까. 쇳덩어리로 되어 있고, 고정시킬 수 있게 모양이 된 그 닻을 우리가 만들 수 있습니까.
하지만 닻은 그런 것만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 소망은 거창해보이는 것이고, 내가 이런 상황에서 무슨 닻을, 소망을 가지라고 하는 거야고 항의할 수 이도 있습니다.
하지만 소망은 그저 돌멩이와 같습니다. 적당한 크기의 돌멩이, 밧줄을 묶기에 좋은 돌멩이 하나 골라서 묶어놓고, 물속으로 던지면 그것이 닻입니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이 보면, 왜 배에 돌덩이가 하나 있는지 의아해할 것이 바로 그 당시의 닻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우리의 소망을 듣고, 소망대로 사는 우리를 보며 비웃을수도 있습니다. 그딴 돌멩이로 뭘하겠냐고 조롱할 수 있습니다. 어떨 때, 우리 스스로도 우리가 왜 무겁게 이런 돌멩이를 돌덩어리를 가지고 다녀야 하는거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냥 없애버리고 세상이 제시하는 길로 가면 안전하지 않나라고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닻이 없다면, 우리는 결국 방황하며, 헤메대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소망을 붙드십시오. 소망은 우리의 영혼의 닻입니다. 그 닻은 겉보기에는 돌덩이에 불과합니다. 배에 왜 있어야 하는지 모를 것입니다. 항해중에는 무게만 차지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영혼의 닻,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폭풍우같은 시련속에서 넘어지지 않고 이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를 믿고 그 믿음의 소망, 우리의 영혼의 닻이 되는 소망을 끝까지 붙드시기 바랍니다.
셋째 약속의 소망속에서의 삶 – 영원한 예배
마지막으로 우리가 소망을 끝까지 붙든다면, 또한 붙들기를 원한다면, 예배의 삶을 사십시오.
19절에서 말씀은 우리에게 이 소망을 가지고 휘장안에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이어지는 20절에서는 그 휘장 안쪽은 예수님께서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우리 먼저 들어가신 곳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예배에 대해 우리에게 말씀해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속죄제, 특히 대속죄일 때 제사는 간단하게 3가지 순서를 가집니다. 먼저 백성들이 제물을 대제사장에게 드립니다. 그러면 대제사장이 그 제물을 받아서 지성소로 들어갑니다. 마지막으로 대제사장은 다시 백성에게로 나와서 백성들을 축복합니다.
이것이 특별히 대속죄일 때 드려지는 제사의 모습입니다. 왜 이걸 말하냐면 바로 예수님께서 드린 제사가 이 속죄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자신을 우리를 대신해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리고 승천을 통해 하나님께서 계신 하늘 보좌로 그 제물을 가지고 들어가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이 남았습니까. 다시 나오셔서, 우리를 위해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게 언제입니까. 재림입니다. 새하늘과 새땅, 성도의 부활, 그 모든 것은 바로 예배의 완성을 말합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재림하십니까. 믿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려고 합니까. 어차피 그들은 죽은 후 백보좌의 심판을 받을 자들입니다. 그들이 원하든지 원치않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자신의 죄를 깨닫고, 영원한 형벌로 들어갈 자들입니다.
우리를 위해서입니까. 네, 맞습니다. 우리의 고난과 이 세상에서 당한 모든 환난과 핍박의 보응을 눈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반쪽입니다.
그 나머지 반을 지금 말합니다. 예배의 완성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드렸던 제사때, 대제사장이 나와 백성에게 축복을 선포하는 것. 그것으로 제사가 끝나는 것처럼, 예배의 완성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재림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릴 완전한 예배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 말은 예수님의 성육신 이후, 하늘에서 드려지는 예배뿐 아니라 이땅에서 드리는 예배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20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예배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모든 믿는 자들이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드리는 그날까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예배드리는 그 때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하나님께 드릴 예배를 완성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소망을 붙잡았다면, 우리의 산 소망되신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예배의 자리를 기대하며 나아와야 합니다. 우리의 입술에서 찬양이 끊이질 않아야 합니다. 단순히 끊이지 않는 것을 넘어 우리의 입술에서 나오는 모든 소리가 찬양이 되어야 하며, 기도가 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뜻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면 아직, 영원하신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예배의 자리중에 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습니까. 그리고 그 믿음을 소망으로 부여잡고 나아갑니까. 그렇다면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십시오. 그리고 내가 있는 그 자리가 예배의 자리가 되도록 기도와 간구로, 또한 기쁨과 감사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갑시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결론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온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말씀이 우리를 찌르는 것같고, 아플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우리가 소망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소망을 가집시다. 그 소망은 돌멩이처럼 볼품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 돌멩이 같은 소망이 우리의 영혼을 지탱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끝까지 믿음과 소망의 경주를 인내로 감당합시다. 그리고 우리가 그 소망을 가졌다면, 예배합시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믿는 자들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되는 그날을 위해 지금도 하늘보좌, 은혜의 보좌, 휘장너머에 계십니다. 그러니 소망을 붙잡고 믿음의 경주를 하며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되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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